낭만실조
06

w. hiver






成年




많이 피곤하고 지친 날은 마치 방어기제인 듯 그 날의 꿈을 꾸곤 한다. 비에 젖었던 건지 야오왕으로 젖었던 건지 모르던 여름 즈음. 내가 기억하는 가장 강렬한 첫사랑에 대한 기억. 앞머리가 젖어 한껏 귀여워져서는 까만 눈으로 나를 올려보던 야오왕. 좋아한다고 고백 했어야 했는데. 후회와 간절함이 진해서일까 꿈인데도 야오왕은 매번 선명하다. 그 얼굴을 꿈에서나마 보면 방전되어 있던 몸이 조금 나아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꿈을 꿨는데도 소용없다. 보고 싶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야오왕이 필요해. ‘양예밍 늦었다.’ 마른세수를 하며 몸을 일으켰다. 힘든 금요일이 될 것 같은 예감.






경기 중엔 잘 모르는 소음들이 훈련 중엔 유난히 귀를 괴롭힌다. 얼음이 스케이트에 갈리는 소리, 심지어는 기어 안에서 들리는 내 숨소리도 거슬리는 날이 있다. 오늘 같은 날. 사방에서 떠들어대는 걸 들어야 하니 이어플러그를 낄 수도 없다. 오늘따라 스케이트도 불편하고, 선발전 없이 오디션처럼 평가하는 시스템도 짜증을 한 몫 더한다. ‘캡틴, 오늘 컨디션이 영 별로네요.’ 이것들도 돌아가면서 열 받게 한다.




“징그럽게 캡틴 같은 소리 하네.”

“오늘 표정 살벌하신데요.”

“니가 피딩(feeding;득점할 수 있는 팀 동료에게 패스하는 것)을 엉망으로 해서 그렇잖아.”

“에이, 주장이 자꾸 헛스윙을 하더만.”

“죽을래?”




몸이 무겁고 뜨거운 숨이 계속 나와서 코와 입 주변이 불쾌하다. 코치에게 계속 지명되는 것에 지쳐서 그대로 링크바닥에 누워버렸다. 휘슬을 불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지만 나를 따라 하나 둘씩 누워버리는 바람에 훈련은 결국 중단됐다. 누운 채 스틱으로 얼음 바닥을 두드리며 ‘아, 오늘 힘들어서 더 못 하겠습니다-’ 선창했더니 줄줄이 복창.

숙소로 돌아가서 쉬고 싶은 생각뿐이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고. 시합은 다가오는데. 그 시합으로 많은 게 결정 될 텐데. 머리까지 아파오는 걸 보니 매일 얼음판에서 운동하는 놈이 감기라도 걸린 건가. 큰일이네, 야오왕 전화 오면 뭐라고 말하지. 목소리만 들어도 알 텐데.




“이것들이 빠져가지고.”

“아, 코치님. 금요일인데 좀 쉬시죠.”

“주장이라는 게 이 모양인데, 어?”

“코치님, 밉다.”




아무래도 오늘은 맥주를 한 잔 해야 할 거 같으니 똥을 꼬드겨야겠다. 저 놈 방에는 맥주 있겠지. 답답한 바이저를 올리고 입김을 불고 있는데 코치가 본인 이마를 때리며 다급하게 다시 얘기한다. 하여튼 저 양반 기억력은 알아줘야 해. 저번엔 경기 일정을 까먹어서 난리더니, 이번엔 또 무슨 얘길 뒤늦게 하는 건지.




“아, 우리 팀닥터 새로 왔는데. 내가 또 깜박했네.”

“코치님, 점심은 뭐 드셨는지 기억나시고요?”

“시끄러, 새끼들아. 가서 인사 한 번씩 해라.”

“우리 팀닥터 바뀌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소란스럽기 시작하자 코치가 또 휘슬을 불고는 ‘이렇게 자발적으로 팀닥터 하러 오시는 선생님이 없어요, 이것들아!’ 아, 코치 시끄러워. 머리 아파 죽겠다. 뭔가 혼자 장황하게 얘기하는데 하다하다 얼음판에서 잠이 다 온다. 설교 같은 일장연설이 끝나고, 한 게임을 더 뛰고 나서야 끝난 훈련. 코치 때문에 몸이 완전히 녹초다. 오늘 같은 컨디션의 지속이라면 당장 운동 접고 막일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양캡틴!”

“똥. 너 제발 그 캡틴 소리 좀....”

“야, 너 아까 팀닥터 얘기 들었지.”

“어쩌라고. 어디 갔다 오냐, 맥주-”

“좀 이상하지 않디?”

“뭐가.”

“벌써 시끌시끌하던데,”

“…….”

“학교 다닐 때 별명이 괴물이었대.”

“…….”




왜 하필.




“우림아,”

“우리랑 동갑인데 닥터인 거 이상하지 않냐.”

“나 잠깐-”

“알아주는 수재라는데, 뭔 팀닥터를 하러 와? 아무리 프로팀이지만.”

“...아.”

“안 그래? 별 희한한 인간들 다 있다.”




패드도 빼지 않고 전속력으로 뛰었다. 그 듣기 싫었던 별명이, 듣게 하고 싶지 않았던 별명이 웬일로 고맙다. 사무실 앞에 도착해서도 우뚝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아니면 어떡하나. 몇 년이 지났는데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떡하지. 내가 알던 그 시절의 야오왕이 아니면. 무슨 말로 인사를 건넬까. ‘아씨.’ 머리를 마구 비비며 고민해봤지만 내 머리는 결정적인 순간엔 기능을 하지 못한다. 이렇게 답이 없을 수가. 더 참을 수 없어서 애타는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맞다.




“어? 왜 이제 와?”




전화로만 간간히 들을 수 있었던 목소리.

그리움이 질서 없이 덕지덕지 묻어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뿌옇던 형체. 아니, 그렇다고 믿고 가슴 속에 숨겨뒀던 야오왕. 깨끗하게 다듬어져 내 앞에 있다. 어쩌면 내가 따로 기억할 필요도 없이 아예 박혀있었는지도 모른다.


팀져지와 까만 데님. 야오왕만 비추는 조명이 있는 것처럼 눈이 부셨다. 주변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프던 머리도 조용하다. 아니, 깨끗하게 나은 것 같다. 정말, 야오왕인 거지.




“밍밍.”

“뭐야.”

“이제 그만 기다릴 때도 되지 않았어?”




언제 이렇게 커 버렸지. 너도, 나도, 언제 이렇게.




“지난 경기도 봤지만,”

“왕아.”

“지 몸 함부로 쓰는 건 여전하더라.”

“너-”




‘그래서. 아주 고차원적으로 보호하러 왔지.’ 안고 있는 걸 믿을 수가 없는데, 주위 공기가 점점 청량해지는 걸 보니 야오왕이 맞긴 맞다.




“오늘은 몸살인가.”

“아니야,”

“왜, 나 때문에 상사병이라도 걸렸냐.”

“…….”

“똥우림은 어디 갔어. 아까 보고 갔는데.”




‘밥이나 먹을까?’ 져지를 벗고 자켓을 찾아 입으며 내게 잠깐 시선을 준다. 가만히 있기엔 내 본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사무실 문을 닫고 뛰듯이 다가가 귓가를 잡고 입을 맞췄다.

아, 혹시라도 감기면... 안 되는데.




“양예밍.”

“응.”

“왜 이제 해.”

“응.”

“왜 이제서야 하냐고.”

“…….”




십년지기의 재회 치곤 아주 이상한. 논리 있게 설명할 수 없는 이 상황에 왕이의 대사까지 더해지니 지금 내가 무슨 환상 속에 있는 건가 고찰하게 된다. 한동안 보지 않았던 얼굴이 맞나. 너무나 그대로인 야오왕, 내가 아끼는 맑은 눈이 그대로다. 그리고, 마음을 오랫동안 헤집었던 목소리.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리워하는 크기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떨어져 있는 동안 지독하게 고민했다. 야오왕을 떠올릴 때마다 먹먹해지는 이유, 지난날 그렇게 가슴이 간지러웠던 이유, 손을 잡으며 느꼈던 떨림 등. 그리고 한동안 고민해야 하는 것이 생겼다. 어째서 우린 오랜만의 재회에 마주보고 입을 맞추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지.




“이제 다 끝났어?”

“응.”

“안 기다려도 되냐.”

“아, 전공의 하려면 남긴 했는데.”

“왕아,”

“응.”

“너, 내 옆에 오려고 그렇게 공부했어?”

“몇 번을 설명했는데. 이제 알았냐?”




미치겠다. 미쳐버릴 것 같다.

야오왕이 보고 싶을 때마다 매번 느끼던 허기는 명백한 실조였다. 내 옆에 야오왕이 없어서 생기는 허기(虛飢),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는.




“야오왕.”

“왜.”

“우리 연애하자.”




눈만 감으면 아른거리던 고운 입꼬리. 예쁘게 올라간다.




“그래.”




지금 이 포만감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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