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창 너머로 따뜻하게 내리쬐는 어느 평일의 오후, 사카자키 유우야는 침대에 누워 두꺼운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빅토르 위고의『레 미제라블』전 9권 중 5번째 권, 프랑스어로 된 원서. 끝부분쯤에 책갈피가 꽂혀 있었다. 그는 책갈피가 꽂힌 페이지를 펴고, 눈에 들어온 문장을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마치 프랑스어 시간에 선생님께 교과서를 읽도록 지목받은 학생처럼.

 "자베르는 오로지 아래에서밖에 미지의 것을 보지 않았다. 불규율, 예기치 않은 것, 혼돈의 무질서한 틈새, 언제 굴러 떨어질지 모르는 심연(Javert n'avait jamais vu de l'inconnu qu'en bas. L'irrégulier, l'inattendu, l'ouverture désordonnée du chaos, le glissement possible dans un précipice)..."

 유우야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이쪽에 책갈피를 꽂았을 이의 마음이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갔다. 그는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이제 자베르는 아찔해서 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여태껏 듣도 보도 못한 일의 출현에 갑자기 당황함을 느꼈다. 어찌된 일인가! 송두리째 무너져서 탈선되다니! 무엇을 믿어야 하나! 확신하고 있던 것이 무너져 버리다니!(Maintenant Javert se renversait en arrière, et il était brusquement effaré par cette apparition inouïe: un gouffre en haut. Quoi donc! on était démantelé de fond en comble! on était déconcerté, absolument! À quoi se fier! Ce dont on était convaincu s'effondrait!)"

 몇 줄을 읽어내리다가 말고 책을 덮고 내려놓았다. 이 뒤에 무슨 내용이 뒤따를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설마 이상한 영향이라도 받는 건 아니겠지. 그는 괜스레 걱정하며, 얼마 안 있어 돌아올 동생을 기다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카자키 유우야는 무료해 견딜 수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전적으로 시로가네 사쿠야, 그의 사랑스러운 동생 때문에.
 며칠 전 세인트 피죠네이션 학원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하고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 즈음, 유우야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화면에 뜨는 이름을 보고 그는 적잖이 놀랐다.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그는 평소처럼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사쿠야, 웬일이야?"
 "그 기분 나쁘게 해맑은 목소리 어떻게 좀 안 되겠어?"

 전화를 받자마자 이 모양으로 대답하는 동생의 말을 들으며 그는 소리내지 않고 웃었다. 어쩔 수 없어, 네가 그렇게 날 대할수록 안심이 되는걸. ─이라고 대답하면 십중팔구 더 질색팔색할 게 뻔하니 잠자코 얘기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래, 무슨 일로 친히 전화까지 건 건데?"
 "지금 당장 내 저택으로 와."
 "지, 지금?"
 "어차피 휴양 중이라 할 일도 없잖아."
 "그러니까 무슨 일-"
 "오면 설명할 테니까. 끊어."

 동생은 정말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유우야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통화 종료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뭐, 딱히 거부할 이유는 없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부상이 완전히 낫지 않아 비둘기파 요원 활동을 쉬고 있는 상황이었다. 설령 복귀하려 해도 오네가 막을 것이다. 후유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절대 받아 주지도, 임무를 맡기지도 않았다고 엄포를 놓았으니까.
 외출 준비를 하며 코트를 입다가 그는 윽, 짧은 신음을 흘렸다. 상처 부위가 욱신거렸다. 가슴을 붙잡고 얼마간 서 있자 아픔이 겨우 가셨다. 씁쓸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너에게만큼은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은데.'

 사쿠야의 집으로 향하면서 그는 몇 번이고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따라붙는 무리는 없어 보였다. 그는 위압적인 규모의 르 벨(Le Bel)가의 저택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시죠?"
 "사카자키 유우야라고 합니다."

 문이 열렸다. 그를 맞이한 것은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 한 명이었다. 피부 역시 어두운 빛이라 전신이 어둠에 싸인 듯했으나, 마찬가지로 까만 두 눈동자만큼은 예리하게 번득였다.

 "도련님께 말씀은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으리으리한 응접실을 지나 복도를 걷는 동안 유우야는, 여기는 '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성'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주거를 위한 공간이되 실제 용도가 오로지 '주거'라고만은 할 수 없는. 이 건물 자체가 르 벨 가문의 위상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고 있기에. 바로 그 점에서, 그는 위화감을 느꼈다. 한 발짝 앞서 걷는 사내에게 물었다.

 "다른 분들은... 안 계신가요?"
 "다른 분이라 하심은?"
 "이 정도 규모의 저택이라면 사용인들도 꽤 많으실 텐데요."
 "그 점은 도련님께서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러니까, 내게는 아무것도 묻지 마.
 사내의 등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마 다음에 이어질 질문을 막기 위함이리라.

 '그런데 왜 당신 혼자 여기 계신 거죠?'

 굳이 비밀 요원이 가진 촉이 아니더라도, 그에게서는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사쿠야의 신뢰를 한몸에 받는 사용인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수상쩍어 보였다. 그러나 모두를 집에서 내쫓고 그 한 명만 둔 건 다름아닌 사쿠야니, 나름대로 뜻이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유우야는 묵묵히 그를 따랐다.
 사내는 하얗고 깨끗한 원목으로 된 문 앞에 멈춰섰다. 유우야도 따라 멈춰섰다. 사내가 똑똑, 두 번 노크를 하자, 안에서 사쿠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사내는 문을 열었으나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잠시 주춤한 채 그를 돌아보던 유우야는, 곧 어정쩡하게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소파 팔걸이에 팔을 걸친 채 앉아 있는 사쿠야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표정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 해?"
 "아, Salut, 사쿠야. 오랜만이네."
 "됐고, 앉아."

 기껏 웃으며 인사를 건넸더니 무시하며 명령조로 사쿠야를 보면서도 유우야는 피식 미소짓기만 했다. 그가 사쿠야와 마주보고 앉자, 사쿠야는 문 밖에 있던 사내에게 턱짓을 하며 말했다.

 "가 봐."
 "알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그는 조용히 문을 닫고 멀어져 갔다. 유우야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 사쿠야가 입을 뗐다.

 "사카자키."
 "응."
 "오늘부터 내 저택에서 지내도록 해. 이의는 인정하지 않겠어."
 "뭐?"

 유우야는 실로 오랜만에 당황했다. 예상의 범위를 한참 넘어갔다. 아니,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동생이 웬걸 집으로 초대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사유일 거라 생각은 했지만, 함께 생활하며 동고동락하자고?

 "오해하지 마. 너와 친목을 도모할 생각 따위 없으니까."
 "하하, 그래. 이유는 뭔데? 그 정돈 물어도 되겠지."

 사쿠야는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 입술을 우물거리는 폼이 대답하기를 망설이는 것 같았다. 얼른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뭘지 대충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유우야는 여유롭게 동생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이번 사태로 인해 네가 비둘기파 요원인 게 알려졌어. 게다가 부상을... 당했지."

 그의 어조가 점점 힘을 잃었다. 겨우 자신을 똑바로 향하던 시선 역시 다시 아래를 향했다. 유우야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동생을 안심시키듯 나직히 말했다.

 "별 거 아냐. 오네씨가 치료해 주셨고-"
 "후유증은 남았잖아. 가끔 상처 부위를 부여잡는 걸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웬일이야. 꽤 자세히 봐 주고 있잖아. 유우야가 더욱 깊게 미소를 짓는 모습을 흘긋 본 사쿠야는 벌개진 얼굴로 발끈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네가 매파의 표적이 되기가 너무 쉬워졌다는 거다!"
 "사쿠야, 나 지금 좀 감동하-"
 "착각하지 마! 비둘기파의 전력의 손실로 인해 매파의 움직임이 자유로워지는 걸 막기 위해서다!"

 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을 보며 유우야는 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그런 걸로 해 두자. 역시나 사쿠야는 주먹을 꽉 쥐며 약이 잔뜩 오른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가 웃겨!"
 "미안, 미안. 그런 뜻이 아니야. 고마워서야."
 "..."
 "비둘기파의 미래를 걱정해 줘서 고마워, 사쿠야."
 "...당연한 처사다. 진정한 평화 구현을 위해서."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작게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유우야는 생각했다.
 내 걱정을 정말 많이 했겠지. 눈길도 주지 않던 네가, 나를 유심히 관찰하게 됐어. 최대한 티를 내려 하지 않는 후유증을 알 정도니까. 지금까지는 매파의 추적을 잘 피해 왔지만, 이번에 꽤 큰 위험에 노출되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어. 그러니까 자기 생각에 '제일 안전한 곳'에 두기로 한 거야. 다른 사용인을 모두 내보낸 것도 그래서겠지.
 아, 그러고보니 물어볼 게 있었어.

 "아까 저 신사분 말인데."
 "아, 알버트 말인가?"
 "집사는 그 분 한 명뿐이야? 네 신임을 전적으로 받을 만큼 유능한 거야?"
 "안심해라. 그의 실력은 내가 보증하지. 유사시에 나도, 너도 확실히 지킬 수 있어."
 "네 말만 들으면 꼭-"
 "뭐, 그건 필요할 때가 되면 얘기하도록 하지. 어쨌든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라."

 얼른 대화를 끝내려는 듯 못을 박는 동생을 보고 유우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그 자의 정체가 뭐길래, 자신의 말에 대해 되묻지도 않은 거지. 덕분에 그는 생각했던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잃어버렸다.
 '네 말만 들으면 꼭, 집사라기보다는 경호원 같은데. 절대 평범하지 않은.'
 사내의 정체는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은 사쿠야가 저렇게 말을 하니 아무 말 없이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일종의 신변 보호 프로그램(말이 좋아서 신변 보호지 바꿔 말하면 감금이나 다름없다)이 시행되었다. 거기까진 좋다. 유우야 역시 그의 제안에는 깊이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평생 느껴 본 적 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지속적인 따분함.
 그는 어렸을 때부터 '따분함'과 상관 없는 삶을 살아 왔다. 비밀 요원이 되기 전에도 항상 위태위태한 외줄 타기를 했기에, 아무 할 일도 걱정도 없이 무료함을 느낀다는 사치스러운 일은 없다시피 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이 드넓은 르 벨가의 저택에 갇혀, 제대로 이야기할 상대도 없이(사쿠야는 거의 항상 나가서 일처리를 하느라 바빴다) 혼자 지내야 하다니. 그는 갑작스레 맞닥뜨린 이 낯선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심심하거든 적당히 집 안을 돌아다녀라, 너무 들쑤시고 다니지는 말고.

 사쿠야의 말을 떠올리며 그는 픽 웃었다. 영 까다로운 주문을 한단 말야. 아예 방 밖으로 나가지 말라면 모를까, 눈에 들어온 것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지 않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때로는 의도하지 않아도 '읽히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유능한 스파이 요원으로서는 더욱더.
 어쨌건 그의 허락도 얻은 바 있었으니 유우야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먼지 하나 없이 반질반질 빛나는 대리석 바닥을 보며 그는, 역시 이곳을 주거공간이라 하기에는 어색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첫날 느꼈던 위화감을 또 한 번 느꼈다. 이곳에 온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아무리 드나드는 이가 없다 한들, 이토록 불순물 한 점 묻지 않을 리가 없다.

 '역시 그 집사의 솜씨인가? 고작 혼자서 이 넓은 집을 이렇게 깨끗하게 관리한다고? 쓸고 닦는 소리는 커녕 인기척 자체를 느낀 적이 없었는데.'

 혼자 생각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유우야는 괜히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응접실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제야 그는 처음으로 이 호화로운 공간을 꾸미는 오브제들을 찬찬히 뜯어볼 수 있었다. 바로크 양식의 데코레이션이 돋보이는 앤티크 가구, 금방이라도 넘어져 깨질 것 같은 꽃병, 고급스러운 액자에 표구된 정물화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 가구며 소품들을 고른 건 누구일까. 사쿠야의 결정은 어느 정도 반영되었을까. 만약 반영이 되었다면, 이 디자인을 고른 이유는 무엇일까. 르 벨 가문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뿐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취향도 영향을 끼쳤을까. 모든 명분과 당위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사쿠야가 보고 '좋다'고 느끼기도 했을까. 질문을 사쿠야에게 던진들, 자신의 진의를 그가 깨달을지는 의문이었다.
 응접실에 다다르자마자 유우야는 헛웃음을 지었다. 잘 보이는 곳에 떡하니 걸린 커다란 초상화를 보고. 5인 가족이 그려져 있었다. 병에 걸려 기력이 쇠하기 전의 르 벨 당주. 목에 잔뜩 힘을 주고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있다. 옆에 서 있는 안색이 파리한 아름다운 여인은, 저 탐욕스러운 치에게 빼앗긴 자신의 어머니이다. 반사적으로 주먹쥔 손을 오래지 않아 유우야는 다시 조용히 폈다. 분노를 느끼기에는 너무 오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둘의 주위를 둘러싼 다섯 명의 아들 중, 긴장한 채 허리를 곧게 펴고 카메라를 노려보는 사쿠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다섯 중 가장 눈에 띄게 총기 넘쳐 보이는 소년의 얼굴을 보며 유우야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르 벨이 사람 보는 눈은 있어. 적자들보다 네가 유능하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겠지.'
 "10대 초반의 나이에 벌써 당주의 얼굴을 하고 계시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

 유우야는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았다. 검은 정장을 빼입은 남자가 한 발짝 뒤에 서 있었다. 유우야가 놀란 이유는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 며칠 쉬었다고 벌써 감이 무뎌졌나? 그의 동요의 이유를 읽었는지, 남자가 조용히 달래듯 말했다.

 "놀라시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기척을 내지 않는 게 습관이 돼 놔서 말입니다."
 "아, 아뇨. ...프로 급이시네요."
 "과찬이십니다."

 고개를 가볍게 숙이는 남자를 보고도 유우야는 잠시 경계의 기색을 숨길 수 없었지만, 곧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미소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사쿠야가 전적으로 믿고 모든 일을 맡긴 자이다. 척 져서 좋을 것 하나 없다.

 "저야말로 실례했습니다. 알버트...씨였던가요?"
 "예, 사카자키 님."
 "유우야라고 불러 주세요."

 생긋 웃는 유우야와는 달리 알버트의 얼굴은 무표정한 채였다. 호의를 무시해서는 아닌 것 같았다. 이런 감정 표현 자체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다는 쪽이 가까울 것이다. 애초에 자신의 모습을 전면적으로 드러낼 일이 없다시피 하거나. 유우야는 그의 정체를 감지해 내려는 촉을 잠시 눌러 꺼뜨리고, 순수한 첫인사로서 악수를 청하기로 했다. 유우야의 맨손과 알버트의 장갑 낀 손이 잠시 서로를 약하게 쥐었다가 멀어져 갔다. 그때 알버트가 예상 밖의 말을 던졌다.

 "사쿠야 님께서 사카자키 님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네?"
 "노심초사하셨죠. 부상을 입으셨으니 위험한 상황에 처하실 수 있다고 말입니다."
 "..."
 "그렇게 누군가를 걱정하시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보고서라도 브리핑하듯 건조한 어조로 말하는 그의 앞에서 유우야의 두 눈동자가 연신 흔들렸다. 그 사쿠야가, 정말로 자신을 그토록 걱정했다니. 그리고 그 모습을 남 앞에 여과 없이 드러냈다니. 자존심 빼면 시체인 데다가 항상 자신을 눈엣가시 취급했던 사쿠야가.

 "사쿠야 님이 표현하지 않으셨어도 사카자키 님께서는 충분히 아시는 것 같았지만, 이번 결정이 충동적으로 내려진 게 아니라는 점은 전해 드리고자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야 갑작스러운 생활에 충분히 납득을 하실 테니까요."

 그가 말을 마치고 나서도 유우야는 멍하니 서 있을 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선뜻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 감정 없어 보이는 수상쩍은 집사가 굳이 자신에게 이야기해 준 것도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무표정하게 그를 지켜보던 알버트가 다시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주제 넘은 참견은 이쯤 하겠습니다. 그럼-"
 "잠깐만요."
 "말씀하시죠."

 유우야는 얼른 그를 멈춰세웠다. 저쪽에서 기왕 말을 걸어 준 김에 대화를 더 이어 가고 싶었다. 어떤 인물인지 좀 더 잘 파악해야겠다 싶었으니. 고개를 든 알버트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유우야는 막상 불러 놓고 뒤늦게 고민에 빠졌다. 무슨 구실을 붙여서 이 자가 더 오랫동안 입을 열게 만들까. 이내 그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사쿠야 얘기를 좀 더 해 주시겠어요?"
 "얘기라 하심은?"
 "그냥... 평소에 어떤 생활을 하는지, 보통은 어떤 얘기를 하는지요."
 "광범위하군요."
 "부탁드려요. 사쿠야는 제게 자기 얘기를 거의 하지 않거든요."

 거절하기 힘든 분위기를 만들고자 간절한 말투로 재차 청하면서, 유우야는 새삼 자신의 말을 자신이 듣고 쓸쓸한 기분에 빠졌다. 물론 사쿠야가 자신을 상대도 않는 일 자체에는 익숙해진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그림이 좀 그렇잖은가. 친동생의 일상을 알려달라고 집사에게 간청하는 형이라니.
 입을 다문  알버트를 보며 유우야의 머릿속에 오만 가지 시나리오가 스쳤다. 자신을 수상하다 생각하는 이쪽의 저의가 들켰을까. 거절할 말을 찾는 중일까. 사실 "고용주에 대해 섣불리 말하는 것은 집사의 도리에서 어긋납니다." 비슷한 말로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침묵을 지키는 알버트를 유우야는 긴장한 채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앉으시죠. 차라도 한 잔 하면서 말씀드릴까요."
 "아, 가... 감사합니다."

 유우야가 얼떨떨하게 대답하자 그는 등을 돌려 부엌으로 걸어나갔다. 그저 걷고 있을 뿐이었는데도 그 뒷모습에서는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사쿠야와 단둘이 있게 되면 저 자의 정체를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가죽 소파에 조심스레 앉았다. 자연스레 다시 아까 그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유우야는 씁쓸한 표정으로 어린 사쿠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떨궜다.
 잠시 후 알버트는 애프터눈 티 세트를 내 왔다. 유우야 앞에 찻잔을 놓고 티팟을 기울여 홍차를 따르는 그의 손놀림은 흠잡을 데 없었다. 3단 트레이에 정갈히 담긴 쿠키와 스콘에서는 갓 데운 향긋한 냄새가 났다. 눈앞의 남자가 풍기는 이미지에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납득이 갔다. 사용인의 업무를 몇 인분이고 완벽하게 해내지 않았다면 애초에 사쿠야가 그 혼자만을 자신의 곁에 두지는 않았으리라.
 둘의 대화는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알버트가 이야기하는 사쿠야는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완벽히 준비된 차기 당주였다. 인물됨에 대한 그 개인의 평가며 추측은 배제되어 있었다. 하기사, 집사라는 자가 모시는 이의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는 하다. 그래도 눈앞의 사내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늘어놓는 기계적인 이야기는 갈증만을 일으켰다. 결국 유우야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알버트 씨."
 "예, 사카자키 님."
 "당신이 보기에, '개인'으로서의 사쿠야는 어떤 아이인가요? '차기 당주'로서의 사쿠야 말고요."
 "자칫 집사로서의 제 본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질문이군요."
 "부탁드려요. 사쿠야에겐 비밀로 할 테니까요."

 일부러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여전히 그는 일관되게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당최 속을 읽을 수가 없다. 사쿠야에 대해 물음으로써 그가 사쿠야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믿을 만한 이인지를 캐 볼까 했는데, 이대로라면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포기해야 하나. 대화가 끊겨도 받아들여야겠다고 마음을 정리하려던 차에, 알버트가 다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모든 일에 완벽을 추구하시고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 애쓰시는 분입니다만...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이시죠. 음악을 들으실 때, 피아노를 연주하실 때면 두 눈이 총기있게 빛나고요."
 "...그래요."

 유우야는 음악 시간에 사쿠야가 유독 열띤 눈빛으로 수업에 임한다는 히요코의 말을 떠올렸다. 같은 학년이 아니라 직접 볼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때 들려온 알버트의 말에 그는 회상을 멈추었다.

 "마음 여린 데도 있으시고요. 그 일이 있고 나서... 많이 힘들어하셨습니다."
 "..."
 "티내지 않으려 애쓰셨지만, 충격을 크게 받으셨다는 걸 다들 느낄 수 있었지요. 보기 드물게 자책도 하셨고요. 주로 사카자키 님에 관해서 말입니다."

 '자책'. '사카자키 님에 관해'. 그의 말이 뼈아팠다. 당장이라도 동생을 붙들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야, 네가 잘못한 건 없어. 진짜 죄인들을 두고 네가 죄책감 따위를 느끼지 않아도 돼.
 한편으로는 의외라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로 자신이 요구한 대로 사쿠야의 인간적인 면모에 관해, 특히 약한 모습을 보였던 이야기들까지 술술 풀어내다니. 그의 마음속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알버트는 덧붙였다.

 "사실 사카자키 님께서 알아 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이런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네?"
 "사쿠야 님의 고뇌를 덜어 주실 수 있는 건 아마 사카자키 님뿐일 테니까요."

 아까와 똑같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알버트를 유우야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이런 말을 할 캐릭터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정말 사쿠야를 염려하는 걸까. 그런 인간적인 마음을 가지고 사쿠야 곁에 있는 거라고 믿어도 괜찮은 걸까.

 "사쿠야 님의 정신건강을 염려하는 것은 집사로서 당연한 책무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하마터면, 혹시 제 마음을 읽고 계신 건 아닙니까, 라 물을 뻔했다. 그의 의중을 파악한다는 게 오히려 자신만 읽히고 있는 꼴인 것 같았다. 유우야는 식어 가는 홍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빈 찻잔을 내려놓자 알버트가 자연스럽게 티팟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한 잔 더 드시겠습니까?"
 "아...니오,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짧은 티타임이 끝났다. 다시 자신의 방에 돌아가자마자 유우야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알버트의 시야에서 벗어나 한꺼번에 긴장이 풀린 탓이다. 머리맡 협탁 위에 올려놓은 『레 미제라블』을 집어들고 아무렇게나 펼쳐 보며 그는 생각했다.

 '오늘은 이야기를 해 봐야지. 평소보다 더 길게.'

 책갈피가 꽂힌 페이지가 펼쳐지기 전, 그는 다시 책을 덮고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또각, 또각.
 부츠 굽이 복도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유우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쿠야가 오고 있다. 세 걸음 후 방문 앞에 설 것이다. 두 걸음. 한 걸음. 잠시 멈춰 서 있다가,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노크할 것이다. 그를 맞이할 만반의 채비를 하고서 유우야는 방문 앞에 섰다.
 똑똑.

 "사쿠야!"
 "뭐, 뭐야. 왜 코앞에 서 있어."
 "반가우니까 그렇지. 오늘은 별로 안 늦었네."

 문을 열자마자 바로 앞에 서서 자신을 반기는 유우야를 보고 사쿠야는 흠칫 뒤로 물러섰다. 퍼스널 스페이스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오늘은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았다. 괜히 이렇게 평소보다 불쑥 가까이 다가올 리가 없다. 아니나다를까 곧 옷소매를 약하게 잡아끌며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 아닌가.

 "들어와."
 "내, 내가 왜."
 "얘기할 거  있지 않아?"
 "상태 체크하러 온 거다. 이, 일종의 점호라고 할 수 있지."
 "난 있는데, 얘기할 거."

 말을 더듬으며 둘러대는 자신을 아랑곳않고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유우야를 보고, 사쿠야는 이상하게도 평소처럼 행동하지 못했다. 착각하지 말라고 쏘아붙인다든가, 저쪽의 사정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 쌩 뒤돌아 나간다든가, 그런 지극히 당연한 행동들이 지금은 당연하지 않게 느껴졌다. 결국 그는 어정쩡하게 이끌리는 대로 방 안에 들어왔다. 유우야가 의자를 권했지만 그는 앉지 않고 버텼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하여튼 고집 한 번 세다니까. 음... 뭐부터 말할까."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유우야의 두 눈이 쓸쓸한 빛을 띠는 것을 사쿠야는 보고 말았다. 난감했다. 이래서야 냉담한 태도를 유지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유우야를 피하듯 고개를 돌린 순간, 사쿠야는 가슴이 철렁했다.
 협탁에 놓인 『레 미제라블』5권, 자신이 꽂아 둔 책갈피. 위치가 변하지 않은 걸로 봐서는 이미 그 페이지를 읽었을 것이다. 그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유우야가 운을 뗐다.

 "자베르 경감 말이야.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
 "장발장은 그런 결과를 바라며 그를 살려 보냈던 게 아닐 텐데."

 빙빙 돌려 말하지 마. 비유 말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하지 그래. ─라고 평소의 사쿠야라면 차갑게 잘라 말했겠지만, 지금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유우야는 그의 안색을 살피고는 담담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베르의 부고를 들은 장발장은 정말 슬프고 씁쓸했겠지. 그에겐 더 이상 자베르가 자신을 끝없이 쫓아다니며 위기에 빠뜨렸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변화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냥, 오랜만에 읽으니까 새삼 안타까워져서."
 "그것뿐이야?"

 이번에는 유우야가 답하지 않았다. 언제나 서글서글하게 웃는 두 눈이 지금은 서글프게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 사쿠야는 그 시선을 피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유우야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아무리 날 차갑게 대하고 외면하건, 난 상처받지 않았어."
 "!"
 "그냥 네가... 르 벨 가에서 무사히 자라나는 것만으로 됐어. 널 살리는 게 내 목적이었으니까. 네가 그런 삶을 살게 된 게 네게 행복인지 불행인지는 차치하고, 나는 목적을 달성했어."

 사쿠야는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꽉 주먹쥐었다. 더는 듣기 괴로웠다. 그는 터져 나오는 대로, 날선 목소리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얄팍한 위로는 그만 둬. 내가 저지른 과오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사쿠야..."
 "난 아무것도 몰랐어. 알려고 하지도 않았지. 존중할 가치가 없는 자를 필요 이상으로 고평가했고. 그 결과가 이거야!"
 "넌 모를 수밖에 없었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잖아."
 "모른다는 건 그 자체로 죄야."

 점점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유우야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어떻게 말해야 이 친구가 잠자코 수긍할까. 아직도 주먹을 꼭 쥔 사쿠야를 올려다보며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내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
 "..."
 "정 미안하거든, 정 마음에 걸리거든 앞으로 네 행복을 위해 살아 줘. 이번 일로 너를 감싸고 있던 껍질이 산산조각이 났지만, 그건 기회일지도 몰라."

 '너를 감싸고 있던 껍질'이란 말을 듣는 순간 사쿠야의 어깨가 움찔, 크게 떨렸다. 견고한 기반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발 밑의 구조물이 사실은 사상누각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 그의 걸음걸이는 항상 불안정했다. 두 발은 모래에 푹푹 빠지고 몸은 똑바로 가눠지지 않았다.

 "사실 내내 마음에 걸렸어. 르 벨의 운명을 짊어진다는 게 네게 고통을 안겨 주지 않을까."
 "..."
 "네 삶은 네 거야. 아무에게도 좌지우지되지 마."

 사쿠야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당황했다. 아니야, 안 돼. 여기서 눈물이라도 보여 버리면. 정말 원하지 않는 그림이 나와 버려. 그는 입술을 꽉 깨물며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우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쿠야가 미처 뒷걸음질치기 전, 유우야는 바로 앞에 다가와 약하게 힘 준 팔로 그를 안았다.

 "괜찮아. 다 괜찮아. 내 동생. 다시 시작하면 돼. 우리가, 같이."

 사쿠야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대로 그는 유우야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하토풀 썰/연성/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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