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재밌었어, 에스텔. 조심해서 들어가."


"선배도요…! 그리고, 그, 리고…저도…재밌었어요."


 그 말에 선배는 씁쓸한 미소를 짓다, 나중에 보자고 말하며 천천히 등을 돌렸다. 아, 목소리 너무 좋아! 그리고 저 손! 손목! 등! 아주 좋아! …그러고 보니 선배는 항상 내일 보자, 월요일에 보자, 그런 인사를 했는데? 나중에 보자고? 뭐야, 또 보는 건가! 어머나! 근데 뭘로! 아까 그 표정은 무슨 의미지?


"어이구, 표정 봐라."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그래, 나는 사랑을 하는 대학생. 그리고….


"그래 아주 좋을 때다! 요정이라고 모를 줄 아니!"


 …0.75년차 마법소녀다.


***


"에스텔아, 큰일났어!"


 아, 다행이다. 할 건 다 했으니까. 나는 적당히 작별 인사를 타이핑한 후 게임 종료 버튼을 누르며 메모장 화면을 띄웠다.


[왜요? 뭐 나왔나]


"그래! 그렇게 태평하게 말하지 말고…. 이번엔 지금껏 느꼈던 거랑은 차원이 다르단 말야!"


[오, 피가 끓는데]


"내가 못 살아 …. 방심하면 정말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아무튼, 얼른 끄고 가자. 응?"


[아이참 이거 다 기술 연구하려고 하는 건데]

[인터넷 사용 기록만 좀 지우고요]

[계정 털리면 어떡해]


"게임 스킬로 무슨 기술을…무기도 다르잖아! 그리고 요즘엔 끄면 알아서 지워주지 않니? 하…. 네가 일이라도 잘 해서 다행이지…."


[^^*]


 한숨을 쉬는 요정님을 뒤로하고 인터넷 사용 기록이 지워진 것을 확인한 나는 사용 종료 버튼을 누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소는 그리 멀지 않았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뒷산이었으니까. 풀숲에서 변신한 나는 마력의 근원지를 찾아 날아갔다.


"저기다! 할 수 있지?"


"…네."


 이번에는…평소보다 강하댔지. 나는 조금 긴장하며 일렁이는 공간의 틈에 발을 디뎠다. 하급 마물 하나 없이 고요한 공간이 오히려 섬뜩하다.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운 채 한참을 걸었을까, 저 멀리서부터 강한 마력이 느껴졌다. 그렇게 그 근원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가자, 그 곳에는 악마를 연상케 하는 뿔과 날개, 꼬리가 달리긴 했지만…선배와 똑 닮은 '누군가'가 서 있었다.


"이런 데서 다 만나네. …정말 너였구나."


 분명 내가 아는…그리고 조금 기쁜 것도 같은 얼굴, 미소, 목소리와 말투다. 하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것은 이질감뿐이었다. 그래. 일반인인 선배가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집에 가는 길에 당한 게 아닐까. 그 왜, 만화 같은 데 보면 본인이 아는 사람을 카피해서, 동요하게 만드는 적도 있는걸. …내 약점을 알고 있는 거잖아. 위험하다. 안 통할 것 같긴 하지만, 적당히 위협하고 도발해서 먼저 나오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조용히 활을 소환했다.


"호전적이네. 평소랑 달리."


"…어줍잖게 따라하지 말고 얌전히 선배한테서 나가!"


"아…하하하…. 나가라고? 곤란한 요청사항인데. 보통 집주인한테 나가라는 말은 안 하잖아?"


 그렇게 말하는 그는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집주인이라는 말이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그래, 자기야 기껏 얻은 몸이니까 나갈 생각은 없겠지. 하지만…난 걱정된다고…. 앞으로 내가 아는 선배를 못 본다고 생각하면…. 선배의 모습을 한 무언가를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하면…난….


"지금 내가 네가 아는 '그'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 말하며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 질문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는 지금껏 마주한 그것과 달리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깃든 듯했다.


"만약 지금 네가 마주하고 있는 내가 진짜라면? 지금껏 네가 알던 '그'는 정교한 위장술로 이뤄진 것이었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에스텔?"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아요? 설마 정말로 …."


"후후, 그래. 나는 꽤 오랫동안 널 지켜봐 왔어. 작년 봄부터. 네가 마법소녀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유감이지만…이렇게 되었으니."


 작년 봄이라면, 처음 만날 무렵이지. 증거들이 하나씩 쌓여가니 더는 부정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러면 내가 이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주시하고 있었다는 건가. 하긴, 정말로 선배가 인간이 아닌 무언가였다면 처음부터 내게서 뭔가 느끼고 접근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심코 주먹을 꾹 쥐었다.


"너와 맞설 수 있게 되어 영광이야, 에스텔."


 왠지 그 말이 비수처럼 꽂히는 듯해, 나는 일부러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정말 이라 선배가 맞다면…. 사실 절 싫어한 거예요? 맞설 수 있게 되어 영광이라니…. 싫어하면서, 지금껏 그런 말을 하고, 옆에 있고, 시간을 보내고…. 그래, 솔직히 저야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라 하고 있었으니 속으로 웃겼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이 참에 제대로 정리해요. 선배는, 절…."


"아니. 네가 말한 그런 건, 네가 생각하는 대로 누군가를 좋아할 때 하는 일들이잖아? 나는, 널 아주…좋아하는걸…."


 문득 오한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어느새 그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뭐, 뭐야…."


"놀랐어? 이런 표정도 볼 수 있다니. 역시 직접 오길 잘했네."


 아냐, 침착해. 내 눈 앞에 있는 이가 진짜 내가 알던 이라 선배라도…지금은 적이야. 황급히 이성을 부여잡고 몸을 피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자리에 흩어지는 나비 무리를 보며 그는 엷게 웃는 듯했다.


"나비…? 그래, 닮았구나."


 그 말에 의아함을 느끼며 그 자리를 바라보자, 순간 나를 향해 무언가 날아와 나는 다시 한 번 몸을 피했다. 조금 냉정함을 되찾고 앞을 보자, 은빛의 반짝이는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온다. 이건…사슬? 왜 하필? 당혹스러움에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다 그와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그는 그런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늘 그렇듯이.


"아, 놀랐어? 나비를 잡으려면 거미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이내 그는 평온하게 등 뒤에 마법진을 소환해 다시 한 번 사슬을 뿜어냈다.


"절, 절 왜 잡아요?!"


"후후, 왜냐고? 궁금하면 잡혀 볼래?"


"그렇게 말한다고 잡히는 멍청이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런 위험한 발언 해맑게 말하지 말라고요!"


"하긴, 아무리 호기심 많은 너라지만, 그만큼 조심성도 많으니까. 그래도 갑자기 이렇게 경계당하니까 조금 슬프네. 오늘 낮까지는 좋았잖아, 우리."


 갑자기 그는 공격을 멈추더니, 바닥에 마법진을 소환했다. 이번에는 또 뭘 어쩔 생각일까. 바닥에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를 주시하며 나는 자세를 잡았다.


"마물에서 나오는 마력을 모아야만 네가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거지? 자, 상대하기 어렵진 않을 거야. 이제 곧 밤이니 오늘은 이쯤하고…나중에 보자, 에스텔."


"그 시스템까지 어떻게…! 아, 갔…아니, 우선은 이 친구들부터 손봐줘야겠네."


 그림자를 연상케 하는 검은 연기는 서서히 뭉쳐 동물의 형상으로 변했다. 문득 눈 있는 자리에 위치한 형형한 푸른빛을 띈 발광체와 마주쳐 나는 순간 몸을 움츠렸다. 뭐지? 개…라기엔 크기도 하고, 좀 위엄이 없을 테니, 아무래도 늑대인가. 나는 침착하게 검은 연기들을 조준하고, 쐈다. 하나씩 그림자를 없앨 때마다 펜던트에 마력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들을 다 쓰러뜨리니 늘 그렇듯 다시 펜던트의 빛이 돌아온다. 나는 여전히 남아있는 의문들을 뒤로하고 결계를 빠져나왔다.


***


"에스텔, 안녕."


"아, 선배…."


 어제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햇빛 아래 마주한 선배는 내가 알던 그대로였다. 하지만 어젯밤 그 모습이 그 위에 겹쳐지는 듯해 평온하게 그를 마주할 수가 없었다. 시험은 좀 남았지만, 그래, 머리라도 식힐 겸 공부나 할까! 무대 공간의 이해, 아주 훌륭한 주제지. 그리 생각하며 간단히 눈인사만 하고 자리를 빠져나가려 했지만,


"혹시 내가 어제 뭔가 실수했어…?"


 그 목소리에 결국 발목을 붙잡히고 만다. 그 목소리랑 얼굴로 불쌍한 분위기 연출하지 말라고….


"아, 아뇨! 그게 아니라…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 신경 쓰여? 어제 일."


 혹시 어제 일이 꿈이었나 진지하게 재고하게 만든 풀죽은 얼굴이 무색하게, 어느새 한 뼘 거리로 바짝 다가와 그리 말하는 선배는 어제 그 곳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위험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뭐, 뭐가요."


"갑자기 대놓고 피하는 걸 보면 기억이 안 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 말을 끝으로 선배는 그저 내 눈만 빤히 들여다 볼 뿐이었다. 이렇게 보면 좀…견딜 수가 없어지는데! 그렇게 말없이 한참 시선만을 맞대고 있을 무렵이었을까. 선배는 평소처럼 부드러운 표정과, 어제처럼 어딘가 들짐승같은 눈빛을 동시에 얼굴에 띄운 채 입을 열었다.


"난 네가, 마법소녀를 그만두면 좋겠어."


"왜, 왜요…? 적에게 자진 리타이어 권장이라니 손 안대고 코 푸는 격 아닌가요!"


"어떻게 해야 네가 그렇게 해 줄까. …아, 벌써 시간이…. 나는 다음 수업에 가 봐야겠네. 너도 다음 수업 있는 걸로 아는데 잘 들어가고. 그럼 나중에 봐, 에스텔."


"나중? 오늘 또 사고 치려는 거예요?"


 조금 날선 목소리로 묻자…글쎄, 라는 음성만이 바람에 흩어지며 선배는 유유히 내게서 멀어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자 요정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아직도 쟤 좋아하니?"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꼭 그런 걸 물어봐야 돼.


[한순간에 놓을 수 있을 정도의 마음이었으면 애초에 어제 같은 일로 동요하지도 않았고 저 선배 눈빛 하나 말 한디에 일희일비하지도 않았겠죠]


그렇게 적은 메모장 화면을 내밀자 요정님은 한숨을 폭 쉬었다.


"시간이 필요하다, 뭐 그런 거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하필 저런…."


 나는 멋쩍게 웃다 어깨를 으쓱하며 다음 강의실로 향했다.


 그 후로는 이상할 정도로 평범한 날들이 이어졌다. 평소처럼 강의를 듣고, 친구들과 대화하고, 일도 나가고. 요정님이 종종 컨디션에 대해 묻거나 실제로 검사를 진행하기도 했지만 별 이상도 없었고, 마물이 나타나는 빈도는 줄어서 이 정도면 마법소녀 일은 잘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선배의 접근만 뺀다면. 벤치에서 한숨 돌리고 있을 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그는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어쩌면 내 마력을 감지할 수 있다거나 그런 걸까. 분명 지금도 선배를 좋아하긴 하지만, 어째 저 쪽이 이렇게 나올수록 마음이 더 술렁거린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가기 전 들르는 공원 분수대 앞에 앉아있는 선배는 나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내 등장에 몸을 일으켰다.


"가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선배가 거기 있으니까 좀 놀라서요."


 어깨를 으쓱하며 내게 다가오던 선배는 살풋 웃으며 내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나 좋아하던 거 아니었어?"


"뭐래! 아니, 그렇긴 한데! 아니, 나야말로 뭐래! 선배는 그런 말 하면서 부끄럽지도 않아요? 그리고 그렇게 잘난 척하는 타입 완전 싫거든요!"


"부끄러울 게 뭐가 있어. 나는 너를 좋아하고, 너도 나를 좋아하는데 그러면 아무 문제 없는 거 아닌가? …그 사이에 방해하는 것들은 다 치워버려야겠지만."


 그 말과 함께 풍경이 바뀐다. 상하좌우를 구분할 수 없는 검푸른 공간 속에서, 그와 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자, 여유롭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자, 싸울 준비 해야지. 준비가 다 될 때까지는 기다릴 테니까, 얼른."


 어이가 없어 그를 멍하니 바라보자, 그는 재촉하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 …무슨 생각이에요?"


"그냥 너랑 이렇게 시간 보내는 게 좋아서. 단 둘이잖아."


"하아…. 선배가 일반인의 감성이 아니라는 건 알겠어요. 일반인 아니긴 하지만."


 지금 안 하면 또 재촉당하겠지. 보는 눈이 있다는 게 좀 뻘쭘하긴 하지만 나는 변신을 위해 펜던트에 살짝 입을 맞췄다. 늘 그렇듯, 강한 빛이 공간을 꽉 채우고, 옷이 변하고, 혈관을 타고 이질적인 무언가가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이게 마력인가 추측은 하지만, 여전히 익숙하지는 않은 그 감각. 살짝 숨을 고르고 눈앞의 적을 바라보자, 그는 만족스러운 듯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자, 그럼 시작할까."


 그리 말하며 선배는 곧바로 바닥에서 검은 연기들을 끌어냈다. 그 연기들은 이내 늑대의 형상으로 변했다. …이 정도야 괜찮아. 하나씩 조준하고, 화살을 쏜다. 그렇게 어느 정도 연기들을 처리하자 갑자기 멀리서 사슬들이 날아왔다. 겨우 피하고 숨을 돌리자 투정부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한테도 신경써주면 좋겠는데, 에스텔."


"서ㅓ섯ㅅ서ㅓㄴ배 저번부터 신경쓰였는데 설마 그런 취향이에요?!"


"그런 취향이라니? 난…네가 취향인데."


"우와, 말이 안! 통하네!"


 저런 말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야! 발치에 꽂히는 검은 창들도 저 말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쏟아지는 공격들을 피할 무렵이었을까.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잘 생각해 보면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나를 정조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 내가 멈추면 같이 가만히 있을까.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자, 선배는 예상대로 그저 내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길 뿐이었다.


"왜 날 공격하지 않는 거야? 어쨌든, 지금의 난 네 적인데." 


"그러는 선배도 다 빗맞추고 있으면서."


"후후, 역시. 같은 마음이구나. 역시 우리는 적으로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굳이 그런 낯간지러운 대사를 굳이 해야겠어요?"


"하지만 넌 이런 걸 좋아하지 않았어?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이고, 동지인 줄 알았던 이가 사실은 적이었다는 스토리. 치밀하게 짜인 복선이 진행에 따라 서서히 풀려 관객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게 좋아요, 라고 저번 교양 발표 시간에 그런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저에 대해 잘 아시는 건 칭찬할 만하네요. 하지만 선배는 저랑 동지가 되길 원하나요? 그렇다면 그걸 위해서 어떻게 할 건데요? 어찌됐든 제 임무는 선배를 비롯한, 이쪽에 넘어와 활동하는 마계의 존재들을 처치하고 돌려보내는 건데요. 선배의 무얼 믿고."


"그 요정이 그렇게 말했어? 아, 하하…재밌네."


"너는 뭐가 그렇게 재밌지?"


 펜던트에서 소리가 났다. 여지껏 잠자코 있던 요정님이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목소리가 어지간히 화가 난 것 같은데. …변신 풀리니까 뛰쳐나가지만 않으셨으면 좋겠다. 여기서 변신이 풀리면…나 아직 유서 안 적었는데.


"아, 화났나. 재미있지. 이 쪽 사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에게 접근해 소설 쓰는 게. 그래서 나도…지금 상당히 화가 나 있는데."


 선배는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 있었지만…거기에는 엄청난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에스텔은 누구도 반박할 여지가 없는 인재다. 개인적으로는 너희 입장도 일부는 이해한다만…그래도 우리 또한 물러날 순 없어. 폐하의 뜻을 위해서라면."


 요정님이 단호히 뜻을 전하자, 그게 도리어 선배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선배는 얼굴을 구겼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날 것만 같았다. 그, 그러고 보니…선배, 화나면 엄청 무섭다는 소문이 있었지…. 저렇게 화난 건 처음 보는데….


"애초에 그 아이를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나오진 않았습니다. …그렇게까지 그 같잖은 소망이 소중합니까?"


"…나는 내 주군을 위해서 일할 뿐이야."


"네 주군의 심정이야 이해한다만…어차피 불가능할 일이란 걸 슬슬 깨달을 때도 됐는데. 아무 준비도 없이 추진한다고 다 이뤄지는 건 아니라고 당신 주군에게 전하시지 그래요? 그렇게 선왕의 그림자를 좇고 싶으면, 완벽하게 하는 게 낫지 않나? 이런 일처리를 본다면 그 선왕께서도 어지간히 실망할 것 같습니다만."


 둘이 예전부터 내가 모르는 사정으로 사이가 영 별로인 것 같은데. 나는 이곳에서 벗어나면 개인면담 일정이나 잡아야겠다 생각하며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 …에스텔, 슬슬 피곤하지? 그럼 나는 가 볼게. 내일 보자."


 이내 선배는 가벼운 바람을 일으키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결계 또한 풍경에 녹아들듯 모습을 감췄다. 나는 괜히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요정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요정님은 선배랑 아는 사이에요?"


"악연이지. 더군다나 쟤는 그나마 온건파긴 하지만…수틀리면 제일 곤란하단 말이야. 방금도 좀 위험했어…."


"그럼 급진파나 강경파도 있겠네요? "


"너 참 궁금한 게 많구나. 맞아. 그 녀석들까지 올라오면 여러모로 골치아프게 될 거야. 그러니 미리 막아주면 좋겠어, 네가."


"그 전에, 궁금한 게 있어요. …요정님의 주군의 소원은 대체 뭐예요?"


"그래, 폐하의 소원 말이지…. 인간 또한 마력을 받아들여, 마족들과 활발히 왕래하길 바라고 계셔. 폐하께서 존경하시던 선왕께서도 같은 걸 목표로 하셨기 때문에 그 의지를 잇고 싶어하시거든. 저 쪽 입장은 그런 건 불가능하니 지금껏 그러했듯 인간은 인간대로, 마족은 마족대로 선을 그어둔 채로 있기를 바라는 거고. 아무래도 그런 일이 흔하진 않잖아."


 물어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음, 우선 생각을 좀 정리하고,


"그리고 폐하가 널 보고 싶어 하셔. 네가 그 첫 발자국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언제쯤이 괜찮니? 요즘 학교 일로 바쁜 것 같던데."


"음…다다음 주 이후요? 그 때 방학식이니까."


 …나중에 물어볼까.


***


 그 후로 한동안 내가 처리해야 할 일들은 생기지 않았다. 생긴다 하더라도, 내 공부 시간을 뺏을 순 없다는 이유로 선배가 이미 다 처리해둔 뒤였다. …고맙긴 하지만, 역시 애초에 그럴 일이 안 생기게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무난하게 시험이 모두 끝나고, 이제는 일과가 된 이라 선배와의 만남 시간. 다만 오늘은 상태가 좀 안 좋다. 하지만…왠지 얼굴은 보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약속대로 학생관 입구로 향했다.


"선배, 저예요."


"아, 왔구나.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 그게 아니라…오늘 속 안 좋아서 선배 얼굴만 보고 집 가려고 했어요. 죄송해요."


"속이 안 좋아?"


 겨우 고개만 끄덕이자,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선배는 어느새 손에 소화제 한 병을 들고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사실 소화가 안 돼서 생긴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감사한 마음도 있고, 내가 정말 소화 문제를 잘못 느낀 걸수도 있으니. 하지만 소화제를 들이켜도, 여전히 울렁이는 기분은 여전하다. 아니, 속이 문제가 아니라 어쩐지…온몸이 울렁이는 듯한 느낌이다. 요새 하도 이리저리 날아다녀서 육지 멀미라도 하는 걸까. …그럼 반쯤은 저 양반 과실이잖아.


"여전히 안색이 나쁜데."


"그런가요? 아무래도 속이 문제가 아니었나 봐요."


 그렇게 말하고 멋쩍게 웃어보이자, 한동안 날 가만히 바라보던 선배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있지 에스텔."


"왜요?"


"키스, 할래?"


"…뭔 소리야! 그것보다, 지금 하면 약 맛밖에 안 날텐데요!"


"난 괜찮아. 지금은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혹시 있으면…내가 처리하면 되는걸."


 …그렇게 불온한 말을 입에 올리는 선배의 얼굴은 등 뒤의 여름하늘마냥 청량함마저 느껴진다.


"뭘 처리해요! 위험한 짓 좀 하지 마요! 아무튼, 그…하, 겠다는 거죠."


 젠장…내가 저 인, 아니, 악마를 좋아하지만 않았어도 무슨 헛소리냐며…그, 그래. 다 좋은데, 왜 하필 이런 상황이냔 말이야! 심지어 나 이게 처음인데! 긴장감에 눈을 꾹 감자, 여느 때처럼 산뜻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 눈은 왜 감는 거야?"


"아니, 할 거면 뜸들이지 말고 빨리나 하, 으…."

 

 무심코 놀라 그의 옷자락을 꾹 잡았다. 이내 입술 위로 부드러우면서도 낯선 감촉이 살짝 느껴진다. 분명 나는 선배를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긴 하고, 이런 걸 한번쯤은 상상해보기도 했지만, 이 시점에 키스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입술이 떨어진 후에도, 이상하게 실감이 나지 않아 괜히 입술을 만지작거려 본다. 그러고 보니, 당황해서 감각이 교란된 건가, 몸도 아까보다는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고….


"이제 괜찮아?"


 어쩐지 생각이 통한 느낌이지만 그래서 더 찜찜하다.


"무슨 상관이에요! 아니, 괜찮긴 한데…설마 방금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아, 설마 거기서 알려주지 않은 건가. 하하…그래놓고 나를 잘도 적이라고."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의아한 눈빛으로 선배를 바라보자, 선배는 표정을 가다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너는 인간이잖아."


"그렇, 죠…?"


"나는 마족이고. 지금은 이런 모습이지만."


"그렇죠."


 뭔가 유도신문 같기도 하고. 의아함을 담아 선배를 바라보자 그는 방금까지보다도 조금 더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넸다.


"에스텔, 너는 마법이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해?"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그래도 대답을 위해 머리를 굴릴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그냥 내 생각대로 답하자.


"마법이라면 마계에서 기원한 거 아니에요? 여기랑 거기를 구분하는 경계에 틈이 생겨서, 그 틈으로 마력이 새어나와 이상 현상들이 생기는 거라고. 그래서, 저는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투입된 거예요."


"그 틈은, 사실 강한 마족이 닫으려면야 닫을 수 있어. 나는, 나처럼 그 틈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 이들은 계속 닫아왔지. 하지만…한 군주는 그 틈을 열어야만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모양인지 끈질기게 그 틈을 열고 있어."


 …잠깐, 뭔가 짚이는 게 있는데.


"그 다른 군주가 뭘 원하는 건지도, 알아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이 쪽 사람들을 모두 너처럼, 마력을 받아들인 존재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야. 선대 군주가 인간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 일을 추진하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고 알고 있거든. 선대 군주는 마력과 단절됐던 존재가 마력을 접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았기 때문에 그 부작용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연구를 했지만, 이번 군주는…좀 성질이 급한 모양이지."


"부작용이요? 설마 아까처럼?"


"응.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면 그 속도는 느려도, 언젠간 문제가 생겨. …네가 아무리 마력을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 체질이라고 해도, 마족과는 달리 마법을 쓰면 쓸수록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어. 아니, 네가 그런 체질이기 때문에…오히려 마력이 몸에 없으면 그 부작용은 더 심해지겠지. 그런 일은 없었으면 하지만…심하면, 죽을 가능성도 있고."


 얼추 조각이 맞춰진다. 그러면 지금 선배가 말하는 그 성질 급한 군주가 요정님이 모시는 주군이라는 건가? 그럼, 지금까지 이 일을 그만두라고 한 것도 어쩌면….


"하, 하지만…그걸 그대로 믿을 수는 없어요. 오늘 몸 상태가 안 좋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게 진짜 마력 부작용 때문이라는 근거는 아직 없잖아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하지만…나중에는 알게 될 거야."


 으음. 어쩐지 석연찮은 대답에 턱밑만 만지작거리다, 무언가 불현듯 떠올라 나는 선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 그리고 하나 더 궁금한 거."


"음? 뭐든 물어봐."


"한 구역의 군주라는 사람이 이런 데서 노닥거리고 있어도 돼요?! 가서 일해요 일!"


"하지만, 이것도 엄연히 일인데? 우선은 대립 세력의 주요 인물을 감시 및 견제하는 거니까. 아하하, 너한테는 못 당하겠어. 앞으로도 네가 계속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주면 좋겠는데." 


 뭐, 뭐라는 거야! 설마 고백?! 그래도 보통 그런 멘트로 평생 너의 잔소리를 듣고 싶어 이런 건 좀…아니지 않나? 더군다나 표정은 어째 수줍음마저 느껴진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 눈을 이리저리 굴릴 무렵이었을까.


"어, 뭐야. 둘이 사귀냐? 이라 이녀석, 얌전한 줄 알"


"응.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네."


 온화한 표정,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라 선배는 예상치 못한 이에게 '당장 꺼져'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 놀라 가만히 그 불청객이 물러나는 것을 보다 입을 열었다.


"…선배, 방금 그거 엄청 대책 없는 말인 거 아시죠?"


"지금은 아니지만 곧 사귈 거니까 괜찮지 않을까?"


"누, 누가 받아준다고! 저 가요!"


"나중에 보자. 더 있고 싶지만…오늘은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지. 잘 가, 에스텔."


 그렇게 선배와 헤어진 후, 나는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어째, 눈앞이 어질어질하다. 선배와 헤어진 후부터 다시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었지.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어져 나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아, 엄마는…아직 출판사랑 얘기 중일 테고. 어쩌지, 이러다 쓰러지면…큰일 나는 거 아닌가. 우선 다이얼 화면은 열었지만 정말 쓰러질지, 이게 죽을 그건지 모르겠으니 구급차를 부르기도 꺼려지고. 지켜봐줄 사람이 필요해.


"선배…!"


 아니, 바보야. 선배는 여기까지 오는 데 시간이 걸려. 아니, 애초에 주소를 설명해야 하잖아! 그렇다면.


"…요정님!"


 변신 펜던트를 손에 꾹 쥐며 이름을 부르자, 요정님이 나타난다.


"에스텔, 너…!"


 요정님이 빛가루를 내게 뿌리고, 내 콧잔등에 입을 맞추고서야 조금씩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킨다. 혹시 이것도 마력 때문에?


"날 불러서 다행이야. 큰일날 뻔했어. …미안해, 네게 신경쓰지 못해서."


"바쁘다, 하셨는데…와 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야. …내 손이라도 잡고 있을래? 조금은 나아질 거야. 상태 좀 나아지면, 왜 이런지 설명해 줄게."


 그렇게 요정님의 작은 손을 잡고 있자…아주 천천히나마, 상태가 호전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였을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창문?!

 

"…에스텔. 괜찮아?"


"서, 선배…? 여기 2층인데 거기서…엥…?"


 무심코 어릴 적 읽은 괴담이 머리를 스친다. 창문 밖에서 전단지를 돌리던 사람이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 집은 7층이었다는….


"날 발견하기 힘든 상황이었지. …어떻게 온 거냐면, 네 마력의 이상을 감지하고 온 거니까…잠깐, 들여보내 줄래. 네가 부르는 걸 들었는데도 들어갈 수가 없어서…."


 아직 직접 열 기운은 없어 잠금장치만 대충 풀고 됐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선배는 창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은 날개랑 기타 등등이 달려 있구나. 그의 괜찮냐는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선배는 걱정스럽다는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손, 잡고 있어도 될까. 금방 나아질 거야."


"하지만, 이미 요정님이 잡고 있는걸요!"


"그럼 반대손이라도."


"…허어어."


 하지만 선배의 분위기는 꽤나 살벌해서, 앞에 붙은 '분' 자를 빼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저어, 미리 말해두겠는데 일단 지금 전 환자니까 두 분 다 제 앞에서는 싸우지 말아 주세요. 머리 아플 것 같아…."


"그럼, 에스텔."


 자신의 입술을 가리키던 선배는 천천히 내게 얼굴을 가까이했고, 그대로…내게 가볍게 입을 맞췄…잠깐, 뭐?! 그 덕분에 천천히 좋아지던 상태가 갑자기 확 좋아지긴 했는데…했지만…분명 객관적으로는 고마운 일이긴 한데, 왠지 고맙다고 말하기는 싫다. 내 상태를 잠시 살피던 선배는 쉬고 있으라며 요정님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여기서도 다 들릴 것 같지만.


"말 했잖아. 너희는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고. …너희가 벌인 일의 결과를 봐. 에스텔이 너라도 안 불렀으면 정말 죽을지도 모를 상황이었어."


"후…그래. 네 말이 맞아. 이 아이는…내 책임이 커. 전대 연구결과를 보고 괜찮을 거라고 섣불리 판단한 거지. 마력 촉매가 다르고 운용 방식도 달랐으니 그 결과가 정확히 들어맞을 수는 없는 거였는데. 에스텔은 처음부터 마력 친화도가 높은 편이었지. 마력 융화도 초반에는 아주 느리면서도 안정적이었으니, 마족화가 아닌 병존으로, 예전 사례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겠다 생각하고 방심했어…."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나…죽을 뻔했구, 나…? 사실 내가 마법소녀로 활동하는 것이 마력 촉매 연구의 일환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급여도 받아온 거고. 다만 마족화라. 그건….


"…인간을 동경한다는 이유만으로 굳이 이랬어야 했나요? …차라리 힘으로라도 빼냈어야 했어. 완전히 자리잡기 전에, 어떻게든 빼냈어야 했는데."


"아직 완전히 자리잡을 시기는 아니야. 지금도 마력 융화가 진행 중이고 에스텔의 감응력이 생각보다 더 좋긴 했지만, 완전하진 않아. 너도 느끼잖아. 이번이 첫 번째 쇼크야. 너도 팔십년 전 논문에서 읽었다시피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쇼크는 변곡점. 개인별로 속도는 다르지만 쇼크 직전에 급격하게 융화가 진행되다 한 번 겪으면 잠시 동안 멈춰. 물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 지는 보장할 수 없지만 이런 골든 타임에라도 해결한다면, 어느 정도 회복 가능해. 그리고 그렇게 준비 안 된 상태에서 강제로 빼내는 것도 에스텔에게는 위험 부담이 있다는 건…너도 알지? 넌 그걸 감안해서라도 막으려고 한 것일 테고. …내가 못미덥더라도,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조금만 기다려 줘. 나도 당장 내 계획을 실행할 테니."


 아, 나왔다. 목소리만 들어도 선배의 감정상태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배는 왜 이렇게까지 날 좋다고 하는 걸까. 정이라도 든 걸까, 나처럼. 그리 생각할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와요."


"에스텔."


 여전히 가라앉은 느낌이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천천히 내게 다가온 선배는 다시 한 번 내게 입을 맞췄다.


"잘, 견디고 있어줘. 널 도울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네."


 다음에 봐. 아프면 꼭 말하고. 그리 말하며 선배는 집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고맙다고 말을 안 했구나. 그렇게 메시지를 남기고, 나는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기에도 찜찜한데.


"다, 들렸지. …미안해. 마법소녀라느니, 아무리 실험이라는 건 밝혔다지만 그런 두리뭉술한 말로 널 꾀어낸 거나 다름 없으니까. 그리고 널 서포트하는 역할인데도 네가 부를 때까지 네 이상도 눈치채지 못했어."


"…저도 요정님에게 화내고 싶진 않아요. 솔직히 쓰러질 뻔했는데도 뭔가 큰일이 났다는 정도만 느껴지지 비현실적이라 그런가 실감은 안 나고, 이미 이렇게 된 거고…. 다만 미안하신 만큼…제가 앞으로 이런 일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주세요. 상황도 대충 들었어요. 요정님의 말이 맞다면, 지금이라도 어느 정도는 수습할 수 있다고. 그럼 수습해 주세요."


 요정님은 재차 내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마력 융화에 대한 것이나…그대로 마력 융화가 진행되면 일어날 일도. 마력 융화가 진행된다는 것은 마족과 가까워진다는 것인데, 먼 옛날 적잖은 인간이 그 과정에서의 충격으로 위험해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당장 내일 폐하를 뵈러 가는 게 어떻겠니. 마침 휴일이기도 하고. 그 녀석에게 온 공문을 확인하고 어느 정도 계획을 세워둘게. 폐하는…흔히 생각하는 오만방자하고 무례하신 분은 아니야. 네 입장에서 받아들이긴 힘들겠지만 아주 온화하신 분이지. 다만 하나를 보면 다른 건 잘 보이지 않으시는 타입이랄까. 이번 일이 일어난 데 그 이유도 없지는 않을 거고. 아무튼, 직접 대화해서 폐하가 이 상황의 심각성을 아시는 게 좋겠어. 세게 말해도 돼. 아니, 그렇게 해 줘. 내가 최대한 커버할 테니. 내 신임은 상당하거든."


 그렇게 난 날이 밝자마자 요정님과 처음 만났던 공원으로 향했다.


"이제 문 열게. 꽉 잡아…."


 요정님의 작은 손을 꽉 잡고 나는 눈을 꾹 감았다. 강한 바람이 한동안 주변을 휩쓸다, 어느 순간 잔잔해질 때 눈을 뜨니 주변에는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뭐랄까, 상당히 요정 나라 같네요. 요정님이 이렇게 커지신 것도 신기하고. 저보다 키가 크셨구나."


"뭐, 우리 일족이 인간들이 말하는 요정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 두 번째 의문에 대해서는 이쪽이 내 본모습이라 하면 되려나. …자, 이쪽이야."


 야광 버섯들이 난 길을 따라 나아가자 곧 큰 건물이 보인다. 나는 요정님의 안내를 따라 알현실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폐하. 마법소녀로 활동 중인 에스텔입니다.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요정님이 알려주신 궁중식 인사를 건네자, 아마 내 상사일 터인 저 마왕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정도로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 그래…! 에스텔…그대가 마리벨이 말한 '마법소녀'인가! 만나보고 싶었다!"


 우선 과하게 들뜬 상태 -어째 좀 불안한 것도 같다- 인 군주님과 악수를 나누고, 그의 질문들에 차분히 답했다. 그리고 폐하는 내게 혹시 질문이 있냐 묻는다. 질문…이라면…. 나는 이 질문이 가져올 파장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정말로 인간을 좋아하나요? …선왕님처럼."


 정적. …이렇게 된 거 다시 물어보자.


"정말로 인간이 좋아서, 마법이라는 주제로 공감대를 만들고 대화하고 싶으신 건가요?"


"…왜 묻는 거지."


 나는 심호흡을 하고, 지금껏 있었던 일들을 전했다. 지금 이 순간도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일들뿐이지만, 어찌 되었든.


"마리벨 님께 들었습니다. 저는 특히나 마력 친화도가 체질이고, 그래서 빠르게 마족화가 진행중이라고. 아직 완전히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이제 주기적으로 마력을 집어넣지 않으면, 몸에 이상이 와요. 당장 어제 상당히 위험한 고비를 겪었고,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마력을 주기적으로 공급받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요정님께 들었고요. 촉매 제작 등 실험 부작용으로 열린 마력 틈을 닫으며 새 마력 촉매의 안정성을 시험하는 역할로 제가 선택되었다는 것도 알아요. 그리고 마력 촉매를 연구하신 이유는 선대 왕께서 미처 이루지 못했던 숙원인 마법 사용 경험을 나누며 인간들과 교류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그런 폐하께서도 인간들이 저처럼 되길 바란 건 아니실 테죠."


 다시 한 번 정적이 흐른다. 다만 폐하의 표정은 화난 이의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미안하네. 어제 보고는 받았어. 무언가 성과를 내야 한다는 것에 급급해 이런 결과를 낳은 거지. 다른 존재와 교류를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상대를 소중히 해야 하는 것인데, 나는 그걸 간과하여 그대에게 큰 해를 끼쳤어. …정말로, 미안하네."


"…이미 이렇게 된 거, 사과는 충분합니다. 다만 제가 원하는 건 이 상황의 해결책이에요."


"그대의 지인이 제거하는 자들의 군주라 들었네. 그대를 적극적으로 돕고 싶어하던 눈치던데, 이미 심어진 마력선까지는 제거하지 못하겠지만, 아직 성장 중인 것들까지는 말끔히 없앨 수 있을 거야. …연락도 해뒀으니 이제 곧 오겠군."


 소개만 듣고도 단번에 누구인지 알 수 있었고, 그 얼굴을 보며 내 추측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인사…같은 거 하기에도 시간이 없겠지. 준비할게. 심호흡 하고."


"앗, 네…."


"목 아래쪽에, 쇄골 사이에…마력을 모은다 생각해 봐. 네 펜던트가 있는 곳. 거기서…마력을 뽑을 거야."


"뽑아요?!"


"아, 급하게 하진 않아. 많이 아프지도 않을 거고. 방해하는 건 없으니까. …천천히 추출해서, 흡수하고, 없앨 거야. 급하게 하면, 너도 위험해지고. 자, 눈 감아 보자."


 그 말대로 눈을 감자, 마법을 쓸 때 나타나던 혈관을 흐르는 낯선 감각들이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고, 그 흐름은 내 펜던트가 있는 위치로 집결했다. …뜨거웠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게, 추출의 과정일까. 감은 눈에 힘을 주며 생전 느껴보지 못한 열기를 견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괜찮아?"


"네. 좀 나른하긴 하지만."


 확실히 아까보다 산뜻하긴 하다. 그렇게…선배는 그대로 날 안…엥…?! 안타깝게도 부끄럽지만 도망갈 기운이 없는 내 눈앞에 선배는 작은 광석을 가져왔다.


"이게…그거예요?"


 아주 엷은 에메랄드빛을 띈 수정은 이것이 내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의 결정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하고, 맑은 빛깔을 띄고 있었다.


"응, 네 마력…이었던 거. 네 마력도, 네 마음을 닮아서 이런 빛깔인 거야."


"…이런 상황에 무슨 낯간지러운 소리를…."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을 느낄 때, 요정님이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로 다가온다.


"마음 같아선 에스텔은 우리가 맡아두고 싶지만, 네가 안 된다고 할 거지? 에스텔도 네가 더 편하지 않을까 싶고."


"제, 제 의견은요?!"


"너 쟤 좋아한다며."


"그렇긴 한데!"


"그럼 된 거 아니니?"


 지금껏 고생 많았고 미안했다며 내 등을 톡톡 두드리는 요정님 뒤에 쭈뼛거리는 폐하가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껏 신세 많았네. 정말로…미안하고, 혹시 문제나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하게."


"…네."


 그렇게 나는…남은 하루를 선배의 집무실…소파에 앉아서 보냈다.


***


 …그리고, 이것은 조금 시간이 흐른 뒤의 일.


"이게 마법소녀물 결말이면 얼마나 독자들이 어이가 없을까. 주인공이 마족과 주기적으로 접촉해야만 하는 반마족화에 메인 빌런과의 약혼엔딩! 심지어 마계 서기관 일까지 하고 있고, 주인공의 어머니는 주인공이 그걸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라고 알고 있음! 이거 완전 뒷목 잡는 전개 아닌가요?! 그리고 그…이제 내려가도 괜찮지 않아요?"


"안 돼."


 그렇게 말한 선배는 날…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귀엽게 말꼬리 늘인다고 내가 봐…봐줄 것 같아! 다 좋은데 무릎 위에 앉히는 건 뭐랄까…부끄러운데!


"아 진짜…. 그러고 보면 이것도 뭐…제가 다 마법소녀가 된 바람에 생긴 일이니까, 만약에 제가 정말 그런 거랑 아무 상관없이 평범하게 살았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어쩌긴. 이 자리는 적임자에게 넘기고 난 인간인 척 평범하게 살려고 했지. 너랑."


"뭐, 뭐래 진짜…! 그리고 맘대로 그래도 괜찮아요?"


"세습제가 아닌걸. 나도 시험 봐서 들어온 건데."


"…웃겨 정말."


 다만 왜 선배가 입학식 무렵부터 내 존재를 찾아헤맨 건지 아직 잘 모르겠다. 선배 말로는 내가 어릴 때 선배를 도와줬다는데, 기억이 나야 말이지.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 그리 생각하며 조금 변덕을 부려 선배에게 살짝 입을 맞춰 본다.

『드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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