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이 빌어먹을 버러지같은 놈아!"


린신이 방문을 벌컥 열더니 성큼성큼 걸어들어간다. 참을성이 바닥이 난 린신이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도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식충이를 향해 버럭 소리를 내질러 버린다.

방에 한기가 들어차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임수였던 자, 아니 붕대 속에서 나온 생명체는 삶의 활기를 잃은 채 무기력하게 시간만 축낼 뿐이었다. 며칠 지나면 털고 일어나겠거니 한 것이 벌써 이레가 지났다.


"어서 일어나라고! 이 쓰잘데기 없는 녀석아!"


창문을 거침없이 열어젖힌다. 그제야 방에 쏟아져들어오는 햇빛때문에 잔뜩 찡그리고 눈을 뜨는 녀석이 퉁명스럽게 입을 연다.


"...상관하지 말라고. 좀."

"아니 상관해야겠어."


언제 또 들고왔는지 서책들을 이부자리에 반쯤 흘러내리듯이 걸쳐져있는 녀석에게 우르르 쏟아내어 버린다. 힘좋은 린신이 대체 몇 권이나 들고 들어온건지 세기가 힘들 정도이다. 몸 위로 쏟아지는 책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아픔보다는 화가 치민다.


"이게 다 뭐야. 아직 눈도 잘 안보이는데."

"뭐긴, 앞으로 읽어야할 책들이지."

"내가 왜."

"그리 시간만 축내고 있을거면 책이라도 읽으라고."

"싫어."

"네가 그따위로 굴면 참으로 좋아할 사람이 많겠는데."

"......................"

"너를 죽이려고 하였던 자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어. 네가 이리 추욱 늘어져 멍충이처럼 있으면 이제 진짜 그들의 세상이 되어버리겠지. 캬, 생각만해도 좋겠다야."

".............꺼져."

"그래도 듣기는 싫은가봐? 양심에 찔리기는 하나보지? 혼자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상처는 있는대로 다 받은 척 하고, 고상하고 우아하게 살아가고 싶으시다? 웃기지마. 너 그러라고 고생고생해서 살려둔 목숨이 아니라고"

"닥쳐."

"시간이 가고있어. 금보다도 중한 시간이. 애초에 화한독의 불완전 해독을 원한건 너였어. 그런데 모습이 좀 바뀐 일로 그리 흔들릴 거라면 애초부터 아예 시작하지를 말았어야지."

"...............린신."

"애먼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그냥 그만둬."

"그만해."

"너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이었어?"

"..............."

"곁에서 바라보는 나는, 힘들지 않을거라 생각하는거야?"


진심을 담아 말하면 튕겨질까 두려워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더는 안되겠다. 그대로 되돌아오는 칼에 찔리는 한이 있더라도 망가져가는 그를 더는 못보겠다. 린신이 마음을 담아 그를 아프게 찌른다. 상처입을 것을 알면서도 날이선 칼을 가차없이 휘두른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라면, 매장소라면 알아차릴 것이다. 이리 시간을 흘려보내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바뀌기 시작할 것이다. 린신이 믿고있는 매장소라면, 그라면... 이토록 흔들리는 모습따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눈 앞의 나약한 이는, 형편없이 가라앉아 흔들리는 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매장소와 같은 이가 아니다. 매장소의 얼굴로 저런 바보같은 모습따위 보이지 않아야 한다. 린신이 알고 있는 그는, 저런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애처럼 굴고, 정신차리고 좀 자라지 그래."


- 이토록 기다리고 있는 나의 마음을 알아차려줄 때까지, 축 처져있는 모습 지켜보며 기다리기 힘드니... 그러니 제발 그만 흔들리고 어서 일어나줘.


마음 속의 말은 차마 다 꺼내지 못한 채 린신이 그대로 방문을 나선다. 생명체의 눈에 흐릿하게 비치는 린신의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하게 보인다. 한숨을 내쉰다.

밖으로 나온 린신은 린신대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저런 꼴을 보자고 지금까지 고생한게 아니었다. 흰 털이 빠지고 화한독을 해독하는 동안 흔들리지 않았던 그였다. 그렇기에 붕대에서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나와도 별일 없을거라 자신했었다. 붕대에서 나온 모습을 보고 린신이 잠시 흔들렸지만 바로 마음을 다 잡았다. 하지만 예상외로 형편없이 흔들린 것은 오히려 임수였다.


"자신이 저리 나락으로 떨어질 줄 알고, 나약한 자신을 챙기게 하려 내게 모든 것을 준비시킨 것인가."


사라져버린 매장소가 남기고간 서찰의 내용을 곱씹는다. 그와의 과거를 되새겨본다. 온갖 학문을 섭렵하게 하고, 무예도 닦게 하였으며 의술까지 공부하게 하였던 날들. 다방면의 지식을 자신에게 전수해준 것들이 모두 다시 만나게 될 또다른 자신을 키워내기 위한 과정이었다니. 린신이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곱게 접어둔 종이를 펼쳐낸다. 눈앞에 쏟아지는 그의 마음과 닿고싶다. 밀려오는 그리움때문인가. 어쩐지 매화향이 나는 것도 같다. 그럴리가 없는데 말이다.


"그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과거를 준비하는 마음은 어땠을지."


그리고 채 준비되지 않은, 원석에 가까운 린신을 자신의 손으로 갈고 닦으며 다가올 미래를 위해 천천히 공들여 다듬어내었을 매장소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10대시절부터 곁에서 지켜보며 마음이 자라나기를 기다려주었을, 이제는 사라져버린 정인을 이해해보려 애쓴다.


- 어쩌면 벌을 받는지도 모르지. 마음이 채 자라지 않은 나를 그토록이나 기다리게 했는데. 그 마음에 제대로 응해주지도 못하고 상처만 잔뜩 주고 결국 사라지게 해버렸으니.


시간의 흐름속에서 뒤늦게 깨닫는다. 한쪽이 깊어지면 다른 쪽은 얕아져서 단 한번도 마음의 깊이가 같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이번만큼은 자신이 기다려줄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라도 곁에서 기다려주리라 마음먹는다. 입술을 꾹 다문 린신이 어깨를 쭉 펴고 당당히 걸어나간다.






시간을 달려서

린신×매장소



10. 매장소 (1)






자그마한 방 안에 갇혔다. 마음이 닫혔다. 스스로 만든 감옥 안에서 하루를 보낸다. 가루가 되어 부서진 온몸이 붕대를 풀고 완전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깨어졌던 그릇은 조각조각을 덧대어 비로소 온전해졌으나 그에 담긴 영혼이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다. 

방안이 어둠으로 잠기어있다. 잠긴 창문 틈 사이로 빛이 새어들어온다. 낮인지 밤인지 구분되지 않았던 방안에 길게 늘어진 빛이 시간을 알려온다. 하필이면 꼬리를 늘어뜨리는 빛줄기가 무기력하게 늘어져있는 임수였던 자의 눈 위로 흘러내린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의 그가 눈을 감고 고개를 틀어보려 애쓴다. 하지만 제멋대로 움직이는 근육이 말을 듣지 않는다. 눈이 부셔 눈을 뜰 수가 없다. 의지대로 되지 않는 하찮은 몸뚱이. 비참함에 눈물이 조금씩 새어나온다. 며칠전에 붕대를 풀었다. 바뀐 몸 상태때문에 탕약을 바꾼게 그만 잘못되어 마비가 왔다. 린신은 곧 괜찮아질거라 하며 안심시켰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희망보다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음이 무겁다.


-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조급해진다. 시간이 자꾸 흐르는 것이 아쉽다. 이렇게 누워있으려고 화한독을 불완전하게 해독한게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일어나 7만 적염군과 부모님, 그리고 기왕전하의 억울함을 풀어내고 싶다. 하지만 몸도 제대로 가누기 힘든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꽉다문 잇새로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를 외면하는 것 뿐이다.


"...참지 말고 소리내라고 그랬지."


흠칫. 이불 속에서 놀라 몸을 뒤척인다. 채 돌아오지 않은 시력때문에 희뿌옇게 보이는 방 어딘가에 그가 있었나보다. 지독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밤새 끙끙 앓는 자신의 곁을 지킨 모양이다. 미안함이 솟구친다. 공기의 흐름이 바뀐다. 가까이 다가온 모양이다. 희미하게 약초내음이 느껴진다. 마음이 조금 안정된다. 일부러 빛이 들어오는 쪽으로 앉은 모양이다. 더이상 눈이 부시지 않는다. 그 자그마한 배려조차 고마워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자신의 처지가 서럽다.


"...린신."

"그래."

"언제 일어날 수 있게 되는거야?"

"글쎄. 운이 좋으면 며칠."

"운이 나쁘면?"

"알 수 없지."

"............"

"화한독이 그리 쉽게 해독이 될 줄 알았어? 화기와 한기가 충돌하는 것 자체를 다스린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

"시간을 가지고 기다려야해.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하지."

"내게는 시간이 없어."

"그리 안달하면 있던 시간도 사라져. 그러니 버리고 비우는 연습을 하자고."

"............"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지. 해낼 수 없는 것들에 굳이 집착하지 말고."


겨우 붙여낸 육체가 정신을 따라간다. 바뀐 모습에 충격을 받아 수저를 들 힘도 없어 며칠동안 누운채로 린신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기절하듯 잠이 들고 깨기를 수십 번. 악몽을 꾸었다.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는다.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도 혼란스럽다. 비참함의 끝을 보았다. 린신은 그런 그를 보며 비죽 웃었다.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군... 랑야각에 처음 왔을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그저 넘어가려 하였던 린신이었다. 더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둠에 갇혀 마음이 부서진 그를 보고있을 수 없기에,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처참하게 박살내어 다시 일으키고 싶어진 린신이었다. 그래서 그를 끝없는 나락으로, 바닥으로 내 치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라면 기꺼이 아수라 속에서 이를 악물고 기어올라올테니 말이다.


"너, 이런걸 가지고 뭘 그래. 랑야각에 막 주워왔을 시절, 온몸이 너덜너덜해 정신이 없을 때 내가 입에서 입으로 밥을 먹여주기까지 했는걸."

"뭐?"


매장소, 아니 임수였던 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채 알지 못하였다는 표정이다. 분함때문인지 놀람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굴욕감때문일까. 온몸을 부들부들 떤다. 이불을 부여잡고 있는 손이 애처롭다. 이를 꽉 깨물어 뿌득-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개의치 않는다.


- 그래, 채 마음이 자라지 않은 너는 아직 그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게 정상이지. 온갖 풍파에 고생하고, 절로 다듬어져 빛이 나는 '그'와는 다른 사람이니 말이야. 너는 아직 한없이 어리구나... 보고픈 나의 정인과 같지만, 또 다른 사람이야... 


아련한 생각을 끊어내며 린신이 피식 웃는다. 똑바로 그를 바라보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한다.


"못 알아듣는 척 하지 마. 볼 것 안 볼 것 다 보여준 사이에, 겨우 이런 것 가지고 움츠러들지 말라고."

"내가 뭘."

"앞만 보고 가라고. 기죽지 말고, 어깨 당당히 펴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신경쓸 시간이 아까우니까."

"아..."


명민한 자이니 아마 린신의 의도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산산히 부서져 가루가 되어 풀풀 날리는 듯한 그의 정신에 따스한 물을 붓고 정성스럽게 반죽해낼 것이다. 하나씩 아름답게 빚어내어 펄펄 끓는 지옥불에 쳐넣어 단단하게 구워져 다시는 상처입지 않을때까지 단련시킬 것이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계획한 그 모든 일을 하도록 철저하게 준비시키고 기꺼이 만들어낼 것이다. 린신 자신의 손으로 그를 만들어낼 것이다. 매장소를 빚어낼 것이다. 비록 지금은 사라져버리고 없지만 일어날 일 모두를 꿰뚫어보고, 여리기만 하였던 린신을 제 손으로 키워내어 미래의 일들을 준비해두고 떠난 '그'를 위하여 말이다. 또 눈앞의 한없이 나약한 또다른 '그'를 위하여 해내고 말 것이다. 

린신이 조금씩 떨리고 있는 그의 손을 잡는다. 떨림이 잦아든다. 분함이 가라앉는다. 쏟아낸 말이 효과가 있었나보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내쉰다.


"그러니 이제 정신을 좀 차리지."

"....................."


힘이 빠진 그가 스르륵 잠에 빠져든다. 린신은 그를 얌전하게 재우는 것으로 만족한다. 스스로를 가둔 감옥 안에서 걸어나오기를 기대하며, 그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창틈으로 새어들어온 빛이 어느새 방 안을 훤하게 비춘다. 당당하게 존재를 뽐낸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임수의 모습을 엿보는 듯하다. 반대로 빛을 잃고 잠들어버린 이는 말이 없다. 조용히 숨을 내쉬는 그의 곁에서, 린신이 그를 바라보며 누워 잠을 청하여본다.


"또 긴 밤이 되겠구나..."


밤이 깊어진다. 잔인한 세월이 흐른다. 비우고 버리는 날들이 힘겹게 지나가고, 드디어 지금을 받아들이고 채우는 날들이 시작된다. 다행히 마비는 일시적이었다. 조금씩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쉽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아니, 그러지 말라 하였거늘..."


계절이 오는 듯이 가버린다. 컴컴해진 방 안에서는 시간을 가늠하기 힘들다. 린신이 기분이 이상하여 몸을 일으킨다. 역시나 옷을 훌훌 벗어내고 잠들어있는 생명체가 눈에 들어온다. 습관이라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화한독의 한기와 화기가 충돌하여 열이 치솟았다가 순식간에 곤두박질치는 몸이 되었는데도 붕대에서 막 나온 매장소, 아니 임수였던 자는 갑갑함을 참지 못하여 잠잘 때 옷을 벗어내버린다. 십여 년이나 된 버릇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가슴을 쓸어내렸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추위에 달달 떨면서도 옷을 입고 자지 않아 급하게 체온을 끌어올리기 위해 애썼던 밤들도, 반대로 너무 더워하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자다가 끙끙 앓던 적도 몇 번이었는지 셀 수가 없다.

린신이 추워서 손끝이 차가워져있는 그의 손을 비벼주며 서둘러 이불을 덮어준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린신이 오늘밤도 아예 그의 곁에서 잠을 청하리라 마음먹는다. 말을 제대로 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악몽을 가장 가까이에서 알아차리게 되었지만 모르는 척한다. 티를 낸다면 아파하게 될 것은 그이기 때문이다.

임수를 버리고, 과거를 비우는 시간들은 쉽지 않았다. 발목을 붙든 망령들이 달려들어 악몽에 시달렸다.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임수가 자신의 바뀐 몸 상태에 쉬이 적응하지 못한다. 매일매일이 살얼음을 걷는 나날들이다. 머리는 아직도 불타오르는 태양같은 성정을 잊지 않고 있는데, 몸은 얼음보다도 더 차가워졌고 아이보다도 더 나약해졌다. 그 간극을 견디지 못하는 그가 오늘도 제 화를 이겨내지 못해 바들바들 떨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흑요석같았던 눈동자가 이제는 화한독 때문에 색이 빠져 갈색이 되어버렸다. 온몸의 색이 생명이 빠져나가듯이 함께 흐릿해졌다. 표정이 없는 그가 고개를 돌려 린신이 있는 쪽을 바라본다. 제대로 보이고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아침부터 힘이 넘치네. 보기 좋아."


댓바람부터 린신이 그를 끌어안고 밖에 나오더니 저 멀리에 세워둔다. 린신이 무얼 하려는지 몰라 가만히 있던 그에게, 자기가 있는 곳까지 걸어오라는 손짓을 한다. 그가 순간 미간을 찌푸린다. 온전하게 돌아오지 않은 시력 덕분에 찡그려보지만 흐릿하게 보이는 린신이 어쩐지 웃고 있는 듯하다. 넉살좋게 껄껄대는 저 주둥아리를 마음껏 패주고 싶은 마음이 울컥 올라온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한걸음 또 한걸음 움직이는데 식은땀이 절로 흐른다. 말을 듣지 않는 팔다리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주먹을 꾹 쥐어보지만 그때뿐이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가 금방이라도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린신은 저 멀리에서 구경만 할 뿐 도와줄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래. 여기까지 걸어와 봐."


짜증이 나서라도 끝까지 해내고 말리라 이를 꽉 깨문다. 린신의 계획은 생각보다 성공적이었다. 붕대를 감은 채 창 밖만 바라보던 날들이 끝나자마자 방 밖으로 기어이 이끌어낸다. 방 안만이 전부였던 그의 세상을 가차없이 박살내어 버렸다. 자꾸 신경을 건드려서 화를 내게 만든다. 하늘과 땅을 오가는 기분을 일부러 자극하여 분노의 화살이 자신에게 향하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오늘도 역시 그런 날의 연속이다. 이제는 하루라도 빨리 몸의 상태를 끌어올리기 위해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들도 꾸역꾸역 먹게 하였다. 탕약의 쓴맛 따위는 이미 잊은지 오래이다. 채 몇 걸음 되지 않지만 제 힘으로 걷게 만들었다. 린신이 속으로 웃는다.


"잘 했어. 그리 할 수 있으면서 어제는 왜 그리 약한 척 하였나?"


몸도 성치 않은 그가 지팡이에 의지하여 부들부들 떤다. 린신 가까이에 가서 눈을 잔뜩 흘기자, 그의 반응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린신이 환한 표정으로 말한다.


"착한 아이는 상을 받아야지. 오늘은 자네가 몇 걸음 걷는데 성공하였으니 내 친히 입맞춰 주지."

"죽고 싶어? 어서 썩 꺼져."


살기가 넘치는 그의 눈. 형형한 눈빛. 끓어넘치는 진심을 담았다. 분노의 불꽃이 튄다.

린신은 매장소의 얼굴을 한 임수에게 새로운 모습을 엿본다. 아직 '임수'라는 자의 영혼의 빛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생각한다. 힘이 빠져 작아지기는 하였만 채 소멸하지 않았다. 기억속의 매장소와 '임수'는 다르다. 매장소의 얼굴에서 익숙하지 않은 임수의 모습이 흘러나와 린신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처음으로 보는, 제 정인의 색다른 모습.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매장소의 영혼이다. 유난히 꾸물대는 시간이 흘러, 자신의 손으로 그의 영혼을 눈이 부시게 피어나도록 하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그 전에 임수의 영혼을 비워내고 버려야 하겠지만 말이다. 입맛이 써지는 린신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어두운 감정을 걷어내고 발랄하게 말한다. 눈앞의 이를 위하여 백번 천번도 이미 하였던 행동이기에 쉽게 표정을 꾸미어낸다.


"미인의 손에 죽을 수 있다면야 영광이지. 어서 기력을 차려 나를 죽여주게나. 오늘도 내게 한없이 매정한 그대여."

"..............좀 닥쳐줄래?"


되도 않는 말을 한다는 듯이 그가 거침없이 내뱉는다. 표정은 이미 싸늘하다. 그런 그의 모습조차도 더욱 즐겁다는 듯이 껄껄 웃는 린신이다.


"그래도 오늘은 상태가 아주 좋아. 몇 걸음 더 걸을 수 있겠어."


라고 장난스레 말하며 다시금 뒤로 물러선다. 그러면 린신을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던 임수였던 자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너 따위 아주 짜증이 나."


미간을 찌푸리며 그가 지팡이를 팩하고 집어던진다. 그가 화를 내든지 말든지, 린신은 호탕하게 웃고 있다. 그의 통통 튀는 반응이 즐겁다는 듯, 껄껄 웃으며 린신이 그의 곁으로 다가온다.


"짜증이 난다고."

"오늘도 내게 짜증내줘서 고마워."

"듣기 싫어."

"'짜증'이라는 감정을 보이는 것은 아주 긍정적 상태라고. 적어도 우울해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러니 내게 마음껏 화내고 마음껏 짜증을 내 주라고."

"...................."


듣기 싫은 말을 내뱉었는데도 기뻐하는 모습이라니. 그는 린신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여도, 어떤 행동을 하여도 무조건 좋게만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진심으로 화가 나려 한다. 저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속을 지녔기에 저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인지. 마음이 바다와도 같은 사내인가 아니면 아예 속이 없어서 저런 모습을 내보이는 것인가. 두 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생각에 잠기려는 찰나 다리의 힘이 풀린다. 감정의 커다란 기복이 그대로 병약한 육체를 지배한다.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진다. 휘청하는 그의 몸을 린신이 날듯이 다가와 부축한다. 조금 무리를 한 모양인지 벌써 혼절하여 있다. 린신이 힘없이 감겨있는 눈꺼풀을 내려다보며 품속의 이를 소중하게 끌어안는다.


"그래도 오늘은 좀 더 걸을 수 있을 줄 알았거늘... 아직은 무리인가."


나지막히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한숨이 섞여있다. 장난스러웠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걱정하는 얼굴빛을 숨기지 못한다. 애틋한 마음을 담아 그제야 엉키어있는 머리카락을 곱게 쓸어내린다. 순식간에 흘러넘쳐버린 마음은 알아주는 이 없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이토록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건가."


깊어진 눈빛의 린신이 품안의 그를 가뿐히 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비록 기절해버린 이는 린신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차분하게 이부자리에 그를 눕힌다. 눈을 감고 잠에 빠져있으면 영락없이 사라져버린 제 정인의 모습이다. 눈빛은 아직 그와 다르지만, 멍하니 눈을 마주쳐 올때마다 숨을 몇 번이나 참았던 린신이 잠든 그의 앞이 되어서야 제대로 숨을 내쉰다.


"참 한심도 하지. 이 자는 사라져버린 그와 다른 사람인데. 나이도 다르고, 눈빛도 다르고, 하는 행동은 천양지차인데도, 왜 이리 심장이 자꾸만 홀로 두근대는 것인지."


온기에 물들어가는 뺨을 쓸어내려본다. 닿아오는 매끄러운 살결이 이미 기억 속의 그와 동일한 이라고 말해준다. 육체라는 그릇에 담기어 있는 영혼의 색이 달라져버렸는데도, 그 외물에 현혹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자신이 우스울 따름이다.


"곁에 있는데도 채워지지 않는 빈 자리를 어찌하여야 할까."


그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홀로 조용히 중얼거리어 보지만 깊은 잠에 빠져버린 이는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 내 소중한 그대여. 너의 마음이 자라나기를 기다릴게. 내 손으로 너의 영혼을 꽃피워낼 그날을 기다릴게. 내가 너의 곁에서 너를 지켜봐 줄 테니까. 너를 지킬테니까. 하지만 너무 오래걸리게는 하지 말아줘.


잠들어있는 그를 보며 그의 너머에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린신이다. 순간 눈가에 반짝 물기가 맺히지만 이내 하늘을 올려다보아 스르륵 사라지고 만다. 오늘따라 흐린 하늘이 원망스럽다. 소복히 쌓인 그리움이 먼지처럼 빛을 잃어 회색이 되어있다. 차마 닿지않는 마음이 야속하다. 깊이를 알 수 없게 된 마음을 꾹꾹 누르며 린신이 동그란 그의 이마에 입맞춘다. 입술에 닿아오는 열기가 심장을 널뛰게 만든다. 닿고 싶다, 닿고 싶다, 가지고 싶다. 품안에 가두고 아무에게도 내놓고 싶지 않다. 가까스로 욕망을 억누른다. 애써 아랫입술을 꾹 깨문다. 밤은 길다. 잠들기는 틀렸다. 원없이 그의 얼굴을 보리라 마음먹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있는 그가 편안해 보인다. 오늘은 부디 단꿈에 빠지기를. 꿈에서나마 그토록 그리워하는 부모님과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린신이 애써 웃는다.













어린 린신을 다듬어내고 미래를 준비하는 어른 매장소 

→ 어린 임수/매장소를 다듬어내고 미래를 준비하는 어른 린신


그리고 상대에 대한 크기가 달라 엇갈리는 마음을 담고 싶었습니다 : )




이제 수습만 남았군요.

결말을 제일 먼저 생각해두고 시작했으니 2월이 가기 전에는 끝내겠죠 뭐. (체념


그래도 잊지않고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포스타입 오류로 두 단계 전 저장된 글로 읽으신 20분 죄송합니다.

왜 제목이 바뀌어 전전 단계글로 발행되었는지 모르겠네요.

10의 제목은 '습관'이 아니라 '매장소 (1)'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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