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정국이가 집중 못 하는 것 같으니까 여기까지 하자.”



고개를 들자마자 마주치는 시선. 흠칫 놀라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정국이가 귀여워 싱긋 미소를 지었다. 정국이가 집중을 못 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 치곤 본인 또한 상당히 따분해 보이는 민윤기.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내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한 민윤기가 우리 셋을 쭉 둘러보았다. 



“이거 끝나도 번호 안 바꾸니까 물어볼 거 있으면 연락해.”



평일에는 이런저런 스케줄로 꽉꽉 채워서, 주말에는 봉사하고 우리 집이나 정국이네에서 뒹굴뒹굴하다 보니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여름방학. 처음 만났을 때 잔뜩 날이 선 채 민윤기에 대한 불평으로 가득 차 있던 게 불과 얼마 전 일인데 벌써 개학이 3일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비호감이었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민윤기는 그저 필요한 상황에 필요한 말만 하는 편의 추구자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면서, 저렇게 사는 것도 나름 편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오늘이 마지막 미팅이라는 것을 절대 알아채지 못했을 터였다. 카페 안, 우리 주변의 공기는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민윤기는 과연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답은 '그렇다'였다. 그가 자신의 검은색 백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거.”



자신의 학교 로고가 찍혀있는 플래너 세 개였다. 



“아직 꽤 남았지만, 나중에 우리 학교에 원서 넣으면 연락해. 아니다, 합격하고 나서 연락해. 그땐 진짜 후배 대접 해줄 테니까.”



자신을 ‘선배님’이라고 불렀던 나와 지민이를 의식하고 한 말이었는지 그의 시선은 우리를 향해있었다. 하긴, 멘토링 프로그램이 끝난 거지 정국이는 방학 끝나도 계속 과외를 받는다고 했으니까. 담백한 작별 인사 후, 그는 시크하게 카페를 나섰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이미 준비해둔 짐을 챙겨 자리를 뜨는 박지민. 



방학 시작 직후부터 박지민은 날 피하기 시작했다. 멘토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물론 녀석은 만나서도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자신의 모든 동선에서 나를 배제했다. 봉사도 나와 겹치지 않는 시간대로 바꾸고, 과학실에서 소일거리를 처리하거나 보고서 작성을 도울 때도 귀신같이 내가 없는 시간에만 치고 빠지는 박지민에 혀를 내둘렀다. 그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나도 굳이 녀석에게 말을 붙이진 않았지만 좀 분하긴 했다. 왜 그런지 얘기라도 해주던가. 난 그 이유가 정국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







침대 위에서 노트북 모니터를 노려보며 박지민과의 불편한 분위기가 얼마다 더 지속될 것인가에 대해 고찰하고 있을 때, 열린 방문 사이로 정국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 



“들어와.”

“형은 독서실?”



뭔가를 의식하는 듯 자꾸만 뒤를 살피는 정국이. 오빠는 대체 정국이한테 무슨 말을 했길래 애가 이렇게 눈치를 봐? 넌 알 거 없다며 입도 뻥긋 하지 않는 오빠를 일찌감치 포기하고서 정국이를 추궁해봤지만, 정국이 또한 그냥 얼버무릴 뿐 내 의문을 풀어주진 않았다.



“응. 오빠 아침 먹자마자 바로 갔어.” 



묘하게 안도한 얼굴로 슬금슬금 내 방에 들어온 정국이가 익숙하게 책상 의자를 빼고 앉았다. 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동그란 시선을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도저히 태연하게 있을 수 없어 결국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그에게 물었다. 



“왜.”

“···?”



“왜 왔어?”

“··· 와. 서운하다 김여주.”



“아니, 여기 왜 왔냐는 게 아니고 그냥 무슨 특별한,”

“자기는 이유 없어도 잘만 찾아오면서.”



의자를 내 쪽으로 완전히 틀어버린 정국이가 툴툴거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인강 들어? 바빠?”



그 뾰로통한 얼굴조차 너무 사랑스러워 입가에 퍼지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감출 생각도 없었지만. 노트북을 닫으며 그에게 싱긋 웃었다. 



“안 바빠. 계획표 짜고 있었어. 근데 전정국 때문에 집중은 다 했네. 어쩔 거야?"

“나 방해 안 하고 그냥 조용히 보고 있었는데?”



정말 뭘 모르네. 



“네가 조용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서 집중이 잘 안 된다니까.”



속으로 생각하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는 당혹감에 눈을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런 내가 재밌어 죽겠는지 정국이의 입에선 시원시원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내 의자에서 일어난 정국이는 침대 가에 걸터앉아있던 내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앉았다. 



“그냥 보는 건데 뭐가 부끄러워.”



맞닿은 어깨를 장난스럽게 부딪치던 그가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그윽한 시선이 서서히 나를 옭아맬수록 마비라도 온 것처럼 심장이 찌릿찌릿해졌다. 잠깐. 우리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 이대로 가다간 이마가 부딪칠 것 같아 몸을 뒤로 빼는데 정국이는 어림도 없다는 듯 내가 물러선 만큼 다시 다가왔다. 조금씩 뒤로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침대 헤드와 물아일체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 후퇴할 공간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국이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좀 전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가까워진 거리에서 눈을 맞춰 오는 정국이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정국이가 오늘처럼 이렇게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그런가.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은 심장은 내가 어찌 손 쓸 도리 없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서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정국이의 맑은 눈동자에 눈도 한번 깜빡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러던 와중에 매트리스를 짚고 있던 손에 느껴지는 새로운 감각. 그의 길고 예쁜 손가락이 내 손 위로 포개어지며 살며시 감싸왔다. 맨날 잡는 손인데 난 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건지. 내 손을 빈틈없이 덮은 단단한 피부가 전해주는 온기만으로도 숨이 가빠 오고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이대로는 생각을 이어나가기도 힘들었다. 마치 무기 하나 없이 최전방에 나가 있는 장수가 된 것처럼 난 정국이 앞에선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그와 사귀기 시작한 지 벌써 두 달이 넘어가지만 우리의 스킨십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뽀뽀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포옹 한번 해본 적 없으니 말이다. 유난히 부끄럼을 많이 타는 내 템포에 정국이가 맞춰주는 거겠지만. 


김남준이 일으킨 그날의 키스 미수 사건 이후로 정국이가 이렇다 할 스킨십을 시도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단 둘이 있을 때마다 형성되는 그 미묘하고도 간지러운 분위기는 오히려 나의 자제력을 시험에 들게 만들어서, 이대로 가다간 분위기에 휩쓸려 내가 먼저 정국이의 입술을 겁탈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기에, 난 계속해서 머릿속에 주입했다. 내가 그려놓은 정국이의 안전지대를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내 머릿속엔 폭풍우가 일어나고 있었다. 안전지대든 뭐든, 지킬 수 있을 리가 없다. 코앞까지 바짝 다가온 정국이의 짙은 시선이 나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어. 이젠 아무래도 좋다.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뛰는 심장과 점차 불안정해지는 호흡. 아찔함을 느끼며 정국이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서서히 그의 얼굴께로 가져갔다. 


반대쪽 손까지 빼내어 그의 얼굴을 감싸는 동안에도 정국이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빤히 응시하는 동그란 눈동자와 예쁜 속눈썹에 홀려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당겨 부드러운 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꽤 긴 시간 닿아있던 입술이 그의 볼에서 떨어졌을 때, 내 얼굴은 이미 불타는 토마토처럼 달아오른 상태였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그대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 위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내려앉았다. 



“김여주.”



차분한 음성을 듣지 못한 척 딴청을 피우자, 정국이는 날 떨어뜨려 놓을 작정인지 내 어깨를 살짝 쥐어왔다. 안돼. 아직 얼굴에 오른 열기가 사그라지지 않았다고! 마음속으로 '버텨!'를 외치며 그의 허리를 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난 약속은 잘 지키는데,”



무슨 약속?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쳐다봤지만 정국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좀 전부터 우리 둘 사이에 놓여있던 노트북을 책상 위로 치운 정국이가 한쪽 팔로 내 허리를 감아왔다. 이어서 어랏, 하는 순간 등 뒤에 닿아오는 푹신함. 난 여전히 정국이의 허리춤을 잡고 있었고 눈 떴을 때 그의 가슴팍이 보인다는 사실은 여전했지만 분명 우리의 자세는 달라져 있었다. 천장이 보이도록 침대 위에 누운 나와 그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정국이. 힘줄이 잔뜩 잡힌 그의 팔이 양옆으로 단단히 버티고 있었다. 



“이건 네가 먼저 시작한 거니까.”



그 말을 끝으로, 정국이는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얼굴을 향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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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와 티트리 오일이 미생물 군집 형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 >



“포스터 잘 뽑았는데. 컬러도 좋고. 오자 있는지 한 번씩 더 읽어보고 나한테 가져와라.”



부장 쌤이 나가신 후 우리는 잔뜩 고조된 채로 완성된 포스터 옆에서 재잘거렸다. 소소하게 참여했던 나도 이렇게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인데 선배들은 오죽할까. '방학 내내 고생해서 만들어낸 내 새끼'라며 즐거워하는 선배들의 얼굴에도 깊은 벅차오름과 뿌듯함이 묻어났다. 



개학한 지 거진 두 달이 지나고 비로소 완연한 가을이 찾아왔다. 중간고사 기간이 끝나자마자 우릴 반긴 것은 본격적인 학회 준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이번 일주일도 끝이 나긴 하는구나. 고등학생 생물 학회가 이제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






“갈 때는.”

“선생님 차.”



“올 때는.”

“지하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힌 정국이가 말했다. 



“저녁 일곱 시가 넘어서 끝나는데 그 시간에 혼자서 지하철 타고 오겠다고?”

“일곱 시 정도면 다니는 사람 많아서 상관없네요.”



“후, 그냥 내가 가야겠다.”

“그러지 마. 괜히 나 때문에 합숙 훈련 빠지면 안 되잖아.”



연이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던 정국이가 문득 고개를 내리며 입을 열었다. 



“여자 선배들 있다고 했잖아. 같이 오면 안 돼?”

“한 명은 안 봐도 바쁘고 다른 한 명은 바쁠 예정이라 방해할 수 없어.”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몰두하던 정국이는 곧 뭔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






학회 당일. 따로 지하철을 타겠다고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긴 박지민과 모두가 따로 올 거라고 예상했던 커플 선배들만 빼고 나와 진희 선배, 석진 선배는 과학 쌤의 미니밴에 몸을 실었다. 심포지엄이 열릴 회장은 학교에서 1시간 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석진 선배의 성화에 조수석에 앉게 된 나는 백미러에 비치는 정장 차림의 석진 선배와 진희 선배를 흘끗 확인했다. 선배들이 방학 내내 매달려온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날. 그렇지만 오늘은 석진 선배에게 또 다른 의미의 디데이였다. 학회 끝나고서 진희 선배에게 고백한다고 했으니까. 소리 내 말 할 순 없었지만 마음속으로 응원의 말을 건넸다. 잘 될 거예요. 힘내요 선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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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보다 훨씬 더 복잡한 장내에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난 끝장이야. 눈을 크게 뜨고 선배들 뒤에 찰싹 붙어 이동했다. 배정받은 자리로 이동해 포스터를 스탠드에 고정한 후 다른 포스터들을 구경하러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회장 입구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박지민이 보였다. 곧 녀석과 눈이 마주쳤지만 아주 찰나였다. 박지민이 바로 고개를 돌려버린 것이다.  



개학식 이후에도 박지민과 나 사이에 서먹해진 분위기는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2학기가 시작하고 수준별 교실의 자리가 고정되기 전, 난 1학기와 마찬가지로 교탁 앞자리를 고수했으나 박지민은 아니었다. 학기 첫날 아침, 내가 혼자 있던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박지민은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 외면하고 무시하는 박지민의 태도에 처음엔 어이가 없었고 그다음엔 화가 났지만, 결국 마지막에 남은 것은 서운함이었다. 친해지자고 온갖 감언이설로 날 꼬드겨 자신과의 대화에, 자신의 존재에 너무나 익숙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는 이유도 알려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으려 하다니. 박지민의 반질반질한 뒤통수가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세게 후려치고 싶었다.



먼저 시선을 피한 박지민은 뒤쪽에 보이는 선배들을 발견했는지 내 옆을 지나쳐갔다. 허탈한 실소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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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랑 지민이는 점심 먹고 와라.”



하릴없이 포스터 주변에서 서성이던 우리가 꽤 따분해 보였던 건지, 선생님이 우리 둘을 부르셨다. 박지민에게는 구미를 당기는 제안이 아니었겠지만, 난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점심 같이 먹으면서 대체 왜 그러는 거냐 허심탄회하게 얘기라도 해보자.



“같이 먹으러 가자. 나 혼자 가면 길 잃어버릴 것 같아서.”

“··· 그러던가.”



녀석은 사람 면전에 대고 한숨을 내쉬고서 회장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박지민이 점심을 사러 간 동안 회장 근처의 나무 그늘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후 나타난 박지민의 손에는 편의점 삼각 김밥 두 개와 샌드위치가 들려있었다. 쟤랑 둘이서 점심 먹는 것도 진짜 오랜만이네. 도시락 뚜껑을 열자 아기자기하게 데코 되어있는 오므라이스와 각종 반찬들이 보였다. 풋, 절로 웃음이 터졌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내게 정국이가 후다닥 달려 나와 손에 쥐여준 도시락통. 정국이한텐 미안하지만 이렇게 잘 만들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정말 못하는 게 없다니까. 계란과 함께 떠먹은 볶음밥은 비주얼만큼 맛도 좋아서 꿀꿀하던 기분이 단번에 풀렸다. 


오가는 대화 없이 한참을 먹기만 하다 수저를 놓았다. 이 상태로 계속 먹기만 하다간 체하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아서. 



“우리 얘기 좀 하자.”

“··· 할 얘기 없는데.”



“우리,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



“··· 사람을 그렇게 대놓고 없는 사람 취급할 거면 적어도 이유는 말해 줘야지. 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야. 김여주.”



“··· 어?”



“나 너 좋아해.”



뭐? 의외의 인물에게서 상상도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놀란 뇌가 더디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 뭐?”

“내가 너 존나 좋아한다고.”



“······.”

“좋아하니까 친해지고 싶었고, 좋아해서 가까워지고 싶었어. 그동안 티도 많이 냈다고 생각했는데.”



박지민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나직이 읊조렸다. 이제껏 따지려고 벼르고 있던 모든 말들은 흔적도 없이 증발한 지 오래였다. 박지민이 날 좋아한다고? 전혀 몰랐다. 아니. 난 정말 몰랐나? 조금도 의심한 적 없었어?


정국이에게 유난스럽다 싶을 정도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지민이의 호기심, 날 볼 때마다 주인을 기다리던 삽살개처럼 살갑게 눈웃음을 짓던 모습들. 재밌지도 않은 내 이야기에 빵빵 웃음을 터뜨리는 그 애를 그저 웃음 장벽이 이상하리만치 낮은 애로 치부하곤 했다. 



“넌 왜 과고에 안 가고 여기에 온 거야! 원서까지 통과됐었다면서. 나 참, 너도 진짜 알 수 없는 인간상이다.”


“또, 또.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 학기 초부터 귀찮게 졸졸 따라다닌 게 누군데 그래? 게다가 난 확실한 이유가 있으니까 안 갔다 치고. 넌 여기 왜 온 건데?”


“너 만나려고.”



그 날 그 애의 말에 장난스럽게 받아치지 못한 이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기도 했거니와 개구진 목소리와 대조되는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그 미소 때문이었다. 



말없이 눈만 깜박이는 나를 보며 또다시 씁쓸한 미소를 짓던 박지민이 담담하게 물었다. 



“그런데도 내가 너한테 이유를 말했어야 한다고 생각해?”

“···.”



“둘이 사귄다는 얘기 들었을 때 축하는커녕 표정 관리도 힘들더라.”

“···.”



“네가 전정국이랑 사귄다고 해서 내 마음이 하루 만에 불 끄듯이 꺼지는 게 아니니까.”

“···.”



“그런 나한테 계속 네 옆에 있으라고 하면, 너무 잔인하잖아. 그건.”

“···.”



“···.”

“그럼··· 아니, 그래서··· 이젠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는 거야?”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말 한마디 뱉기가 너무나 조심스럽기도 했고. 내가 지민이의 마음을 미리 알았더라도 바뀌는 건 전혀 없었을 거란 생각에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애초에 친구 운운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나, 내가. 



“그만 들어가자.”



박지민은 내 질문을 듣지 못한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등에 대고 다시 한번 물었다. 



“우리··· 나중에라도 다시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거야?”



자리에 멈춰 선 박지민이 어깨 너머로 나를 돌아봤다. 이번에도,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끝나고 데려다줄게.”

“··· 어?”



“전정국이 부탁하더라고.”

“··· 혼자 갈 거야.”



“너흰 둘 다 참 잔인하네.”

“···.”



“괜찮아.” 

“···.”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



“나 동아리 그만두려고.”










 



“이건 네가 먼저 시작한 거니까.”



그 말을 끝으로, 정국이는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얼굴을 향해 내려왔다. 숨결이 충분히 섞일 정도의 거리에서 멈칫한 것도 잠시, 입술에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 촉. 도장을 찍듯 짧게 누르는 입맞춤이었다. 그의 입술이 떨어진 후에도 눈을 뜰 수 없었다. 살며시 뜬 눈 사이로 어둡게 가라앉은 정국이의 눈동자가 보였다. 파르르 떨리는 기다란 속눈썹과 감정이 고조된 듯 붉어진 그의 볼이 사랑스러웠다. 정국이를 보는 내 얼굴도 저렇게 사랑스러울까. 


정국이 아래에 거의 깔린 상태로 그의 시선을 오롯이 받고 있자니 민망함이 밀려왔다. 시선을 둘 곳이 없어 애꿎은 천장만 노려보다 차라리 감고 있는 게 덜 민망할 것 같아 다시 질끈 눈을 감았다. 프흣, 내가 좋아하는 정국이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즐거운 듯 기분 좋게 울리는 소리. 



뜨거운 숨결이 다시 가까워진다 싶더니 감은 눈 위로 그가 살짝 입을 맞춰왔다. 매트리스를 짚고 있던 손은 어느새 내 귓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의 티셔츠를 가득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긴장감에 딸꾹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예고 없이 입술 위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방금 전 그랬던 것처럼 그는 한참 동안 가만히 입술만 맞대고 있었다. 귓불을 어루만지던 손은 어느새 목덜미로 내려왔다. 목과 어깨 위를 유영하는 커다란 손에 한창 온 정신이 쏠려있을 때 그가 살짝 고개를 틀었다. 코가 비스듬히 부딪치는 것이 느껴져 얼굴이 붉어졌다. 갑작스레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오는 느낌에 발끝이 바들바들 떨려오던 찰나, 입술 사이로 말캉거리는 것이 밀고 들어왔다. 깜짝 놀라 정국이의 어깨를 꽉 붙잡았지만 그는 그것을 신호로 더욱더 깊숙이 파고들 뿐이었다. 달콤한 숨결이 나를 잡아 삼키듯 입안을 휘젓고 다녔다. 숨이 차다는 것을 인지했을 즈음 맞대고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었다. 입술을 뗀 정국이는 이내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숨은 쉬어야지. 여주야.”



나의 토끼 왕자님을 처음 만나 ‘이게 바로 첫사랑의 느낌인 건가?’하고 설레던 그 무렵부터 시작된 바람이 있었다. 삶을 이루는 근본적인 임무를 수행하듯 언젠가부터 의무적으로 그에게 고백했었던 그 시절에도, 그에게 더이상 내 마음을 드러내지 말아야겠다 다짐했던 그 시점에도, 정국이의 갑작스러운 고백을 받았던 바로 그 초여름날에도, 나의 바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내 첫사랑인 그와 함께하게 되는 것. 


첫 키스의 로망은 늘 가지고 있었다. 정국이가 아닌 다른 그 누구와도 이룰 수 없다 생각했던, 말 그대로 비현실적 이상이었다. 다정했던 첫 키스 후, 우리 사이가 실감이 나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은 뜨거워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정국이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몸을 일으켜 앉으며 내 얼굴을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왼손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혹시 눈물이 나와도 그가 보지 못하도록. 내 등과 침대보 사이로 들어온 다정한 손길이 나를 일으켜 앉혔다. 그 다정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정말로 눈물이 쏟아진 것은. 손가락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감출 방법이 없어 고개만 푹 숙이자 정국이가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놀랐지. 미안해. 자제했어야 했는데···. 내가 진짜 미쳤나 보다.”



그의 품에 완전히 파묻혀 미동도 할 수 없었지만,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자기 때문에 우는 줄 알고 어쩔 줄 몰라하는 정국이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울다가 웃다가, 정말 이게 뭐야. 내가 아직 울고 있나 확인하려는 듯, 정국이는 이따금 몸을 떨어뜨려 내 얼굴을 살폈다. 그럴 때마다 난 활짝 웃으며 그 애와 눈을 맞췄다.



“··· 바보야, 네가 왜 사과를 해. 그냥 좋아서 우는 건데.”



눈물 콧물 범벅을 하고서 활짝 웃는 내 얼굴은 분명 굉장히 기괴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질세라 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힘을 실어 그의 품에 안기자 정국이는 청량한 웃음을 터뜨리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뽀뽀 세례에 간지럽다며 그의 얼굴을 밀어내자 마지막으로 내 귓가에 입을 맞춘 정국이가 나직이 속삭였다. 



“너무 좋다. 나 네가 너무 좋아, 여주야.” 



예쁜 꿈속을 걷는 것처럼 따뜻하고 포근하던, 그와 함께한 열일곱의 마지막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별 헤는 밤 복사나무 꽃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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