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밀의 목격자 ]


“아- 귀찮아…”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학교로 돌아가며 율리안이 투덜거렸다.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5분. 문자 그대로 엎어지면 코 닫는 거리인데도 이렇게 귀찮은 것은, 제대로 챙겼더라면 하지 않아도 되었을 수고이기 때문이었다. 수학 과제 노트의 제출일은 내일. 아침에 일찍 가서 하는 방법도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끝낼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늘 걷던 복도와 교실이 어둠에 물든 것만으로도 색다른 느낌이었다. 부활동도 이미 끝난 시각이라 교사 안은 자신의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얼른 두고 온 노트나 챙겨서 집에 가야지. 익숙하던 7반 교실도 사람이 없는 것만으로도 낯설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놀고 있고, 자신도 린이나 어울려 노는 친구들과 함께 잡담을 하거나 교실 안을 뛰어다닐 것이 틀림없었다. 낯선 느낌이 괜히 싫어서 율리안은 얼른 교실로 뛰쳐 들어가 노트를 찾아 나왔다.


“…어?”


 노트를 찾아 나온 율리안이 복도를 걷는데, 반대편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사회과 연구실이었다. 어둠 속에서 만난 빛이 내심 반갑기도 하고 이 시간까지 남아있는 선생님이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젊은 선생님이 남아있지 않을까. 사회과의 젊은 선생님이라면 담임인 크로우나 역사 선생님 정도였다. 호기심과 장난기가 발동한 율리안은 발소리를 죽이고 연구실로 향했다.



“……?”


 연구실의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들어가면서 제대로 닫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크로우라면 벌컥 열고 들어가도 별 문제 없었지만, 다른 선생님이라면 곤란했다. 발걸음을 멈춘 율리안은 조심스럽게 연구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


 남아있던 것은 크로우가 맞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손님이 함께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의 절친인 린이었다. 책상에 엎드려 있는 듯 등만 보이는 크로우의 곁에 친구는 바짝 붙어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턱을 괴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부드러운 시선이 낯설었다. 자신이 아는 린은 분명 모두에게 친절한 좋은 녀석이었지만 저런 눈빛으로 누군가를 바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과 함께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이런 예감은 빗나간 적이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선 율리안은 벽에 등을 맞대고 숨을 들이켰다.


 2학년 7반의 담임인 크로우는 올해 첫 발령을 받은 신규교사였다. 키도 크고 잘생긴 외모에 여자애들이 처음부터 난리도 아니었고, 남자애들도 자신들을 잘 이해해주는 젊은 선생님을 금방 마음을 열고 잘 따르게 되었다. 선생님이라기보다는 나이 차이가 나는 친척형같은 느낌일까. 교사로서도 꼼꼼히 준비된 재미있는 수업 진행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평이 매우 좋았다.


 그리고 린은… 율리안과는 중학교 때부터 친구로, 단정한 얼굴과 상냥한 성격으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인망이 두터웠다. 가끔 어디서 호구짓하지 않을까 걱정이 될 만큼 순둥이에 착실한 녀석. 게다가 연애사태에는 어찌나 둔한지, 이제까지 율리안이 아는 것만으로도 한 손가락이 넘어갈 만큼의 여자아이들이 그 둔감함에 눈물지었다. 올 여름에는 전국 학생 검도 대회 8강의 전적을 거두며 검도부의 새 부장이자 차기 학생회장감으로도 물망에 오르고 있는, 이른 바 교내 인기인 중 하나였다.


 린은 반에서 반장을 맡고 있으니, 보통 학생들보다 크로우와의 접점이 많은 것은 이해가 갔다. 진짜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고 형동생처럼 지내는 것도 눈에 띄는 편애만 아니라면 남자끼리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까의 그 분위기는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도 보통은 아니었다. 린이 크로우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년 같은 달콤함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다시 한 번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런 쪽의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율리안이었다. 하지만 린과 크로우는 둘 다 남자잖아? 심지어 학생과 교사인데? 흔들림 없는 팩트가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대체 무엇이 어찌되어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심호흡을 한 율리안은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연구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


 자기도 모르게 너무 크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내는 바람에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때마침 불어준 바람소리에 묻힌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헷갈렸다.


 크로우를 바라보던 린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자기 입술로 가져갔다. 입술에 닿았던 검지 끝이 천천히 크로우에게 향했다. 손끝이 머무른 곳이 어딘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시 돌아온 손이 부드럽게 크로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하는 거야.”
“……깼어요?”


 살짝 잠긴 낮은 목소리에 린이 빙그레 웃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몸을 일으키고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크로우가 대답했다.


“그렇게 쳐다보는 데 당연히 깨지. 그리고 아까 그건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아무한테나 하는 거 아니니까 걱정마세요… 아야.”


 느긋하게 말하던 린이 크로우에게 꿀밤을 맞고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가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멍청아.”
“…아무도 없는데…”

 

 입을 비죽거리던 린이 얼른 크로우의 눈치를 살피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지켜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율리안은 참고 있던 숨을 천천히 내 쉬고는 발소리를 죽인 채 연구실 문에서 멀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혼란스러웠다. 린이 한 행동, 그리고 알고 있으면서도 받아 준 크로우의 반응. 누가 봐도 명백한 연인간의 애정표현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남자잖아? 심지어 학생과 교사! 사회적 통념과는 하나도 맞아 들지 않는 관계를 두 사람은 어째서 맺게 된 것일까. 그 어떤 전후사정도 알 수 없었지만, 아까의 모습으로는 서로가 원해서 된 것이라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었다.


“…이게 뭐야…”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알아버린 탓일까,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앞으로 린과 크로우를 어떤 얼굴로 보면 좋을지 몰랐다. 교실에서 함께 웃고 즐겁게 놀던 린의 모습이, 먼저 말을 걸어주던 크로우의 모습이 번갈아가며 떠올랐다.


 이제까지 같은 성별의 사람을 좋아하는 이들에 대하여 특별한 편견까지는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솔직히 내 주변에는 없었으면 하는 생각은 했었다. 아마 이것이 흔한 남자 고등학생의 심리일 것이었다. 그러나 린과 크로우의 모습을 보았을 때, 엄청나게 놀라긴 했지만 싫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율리안이 심하게 동요한 것에는 충격적인 사실도 있지만… 자신이 거기대한 거부 반응이 전혀 없었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휴-”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내쉬어 봐도 결론은 처음부터 정해져있었다. 소중한 친구와 형 같은 담임 선생님의 행복을 부수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사실 두 사람이 바라는 것도 사실 그게 전부일 것이었다.


 오늘 봤던 일은 전부 마음속에 묻어 두고 자물쇠를 채우기로 했다. 단단히 묶인 자물쇠가 풀리는 것은 린이 자신을 믿고 먼저 이야기해 줄 때로 정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웃으면서 축하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율리안은 생각을 매듭지었다.


“……아!!그래도 이건 너무 충격적이잖아!!!”

 

 스스로가 봐도 훌륭하게 친구를 위하는 마음으로 마침표를 찍으려 노력했지만, 곱씹어 생각해봐도 너무나 굉장한 일이었다. 2학년 여학생들에게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크로우와, 중학교때부터 은근히 두터운 팬층을 자랑하는 린이! 대체! 뭐가! 아쉬워서!? 아니, 사람 마음이 아쉽다고 어떻게 되는 건 아니지만, 둘이서 좋아할 거면 그 인기 나한테나 주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아까움과 억울함으로 침대를 뒹구는 율리안에게 엄마의 잔소리가 쏟아 진 것 또한 약속된 결말이었다.




[ Kiss in the Darkness ]

“…아직 안 가셨네요.”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짧은 노크와 함께 연구실로 들어오는 린에게 크로우가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겨울이 되며 부쩍 짧아진 해는 시계 바늘이 7시를 넘기기 무섭게 사라지고 없었다. 테이블 위에 쌓인 안내장 뭉치를 본 그가 빈 의자를 당겨 나란히 앉았다.


“선 따라서 접으면 되나요?”
“…응. 고마워.”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도와주는 제자가 고마웠다. 혼자 해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단순 작업이지만 둘이서 하면 더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크로우가 말했다.


“이것만 마치면 퇴근할 건데, 저녁 같이 먹을까?”
“물론이죠.”


 딱 한 마디 말에 두 사람의 공기가 바뀌었다. 모처럼의 연인의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는 린이었다. 기쁜 표정을 짓는 린을 보고 크로우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후배들이 많이 놀란 것 같더라구요.”
“라울이 그랬어? 교실에서 보는 거랑은 또 다르네.”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데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손을 움직이며 검도부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 놓는 린에게 크로우가 의외라는 얼굴로 되물었다. 단 한 가지 면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지만, 역시 자신이 아는 것과 다른 일면이 나타나면 놀라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쌓인 팜플렛을 반 정도 접었을 때였다.


“…어!?”


 연구실의 형광등이 몇 번 깜빡거리더니 순식간에 빛을 잃어버렸다. 복도의 형광등과 컴퓨터의 전원까지 전부 사라진 것을 보니 형광등의 문제가 아니라 전기계통의 문제인 모양이었다. 손을 멈춘 크로우의 머릿속에 아침 회의에서 들었던 안내가 떠올랐다.


“아- 맞다. 오늘 저녁에 전기 점검한다고 했었어. 야근할 사람은 주의하라고 했는데… 딱 지금 시간이네.”
“그런 거예요? 고장난 게 아니라 다행이네요.”


 크로우의 말에 린이 안심한 듯 쥐고 있던 팜플렛을 테이블 위로 돌려놓았다. 아무리 손에 익었다 해도,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고장 난 것을 고치는 것이 아닌 단순 점검이라면 길어도 10분 내외. 어설프게 움직이는 것보다는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


캄캄한 연구실에서 조명이라고는 창가에서 스며드는 흐릿한 달빛 뿐. 어둠에 눈이 익으며 상대의 실루엣이 스르륵 떠올랐다. 잘 이어지던 대화가 끊기며 짧은 침묵이 흘렀다.


“…크로우쌤.”
“……왜?”


 나지막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괜히 앳되게 느껴졌다. 살짝 린의 어깨에 얹힌 크로우의 손이 옷자락을 타고 내려와 린의 손을 겹쳐졌다. 하나의 감각이 흐려지면 다른 감각이 그만큼 예민해진다더니, 사실이구나. 작은 온기에서 이렇게 상대방의 존재가 또렷이 느껴졌다. 겹친 손을 맞잡으며 그가 투덜거렸다.


“…딱히 무서워서 부른 거 아니에요.”
“그래? 무섭다 그러면 안아주려 했는데.”


 딱히 린이 겁을 내고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선수를 치고 들어오는 모습이 되려 귀여웠다. 짓궂게 받아치는 크로우를 두고 한숨을 쉰 린이 손을 잡아끌었다. 드르륵-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쌤이 무서웠던 거 아니에요? 제가 안아드릴게요.”
“……그래그래.”


 평소라면 학교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에 저항이 있었겠지만, 주변을 메운 어둠 덕분에 작은 여유가 생겼다. 크로우가 빈 손으로 그의 등을 토닥여주자 린이 조금 더 힘을 주어 크로우를 끌어안았다. 맞닿은 어깨에서 느껴지는 울림과 조금 빨라진 심장 소동에 새삼 자신이 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생각을 한 듯, 린이 살짝 크로우의 턱을 들어 올리고 입술을 겹쳐왔다.


“……학교다.”
“아무 것도 안 보이잖아요.”


 주의를 주는 크로우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린이 다시 한 번 입을 맞추었다. 이마, 뺨, 코끝, 턱, 입주변… 닿기만 하고 떨어지는 버드 키스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기분 좋았다.


“…언제까지 할 거야.”
“……불이 켜질 때까지?”


 연인의 입맞춤은 기뻤지만 여기가 어딘지는 잊지 않은 크로우였다. 살짝 멀어지는 그의 뺨을 린이 다시 어루만졌다. 또 다시 입술이 닿는다고 생각한 순간, 벌어진 틈을 타고 말캉한 촉감이 밀려 들어왔다. 혀끝이 몇 번 닿았다 떨어지고 자연스럽게 포개진 입술의 위치가 서로 비껴섰다.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아…”


 짧은 틈새로 숨결이 섞였다. 열어 주지 않는 문을 두드리듯 린이 크로우의 아랫입술을 달콤하게 깨물었다. 흐릿하게 철분의 비린 맛이 났다. 린이 속삭였다.


“…키스하고 싶어요.”

 

 녹아내릴 듯 달콤하면서도 거칠기 짝이 없는 남자의 목소리에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좋아하는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늦은 시각의 학교, 전기까지 나가버린 지금 남아있는 것은 이 두사람뿐일 것이 틀림없었다. 갈등에 빠진 크로우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린이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한 듯 다시 입술을 포갰다. 아까와 달리 처음부터 맹렬하게 얽혀오는 혀가 크로우의 것을 옭아맸다. 등줄기를 따라 찌릿찌릿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쾌감에 마음이 흔들렸다. 적극적이진 않지만 천천히 반응을 돌려주는 그를 두고 린이 기쁜 듯 다시 한 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안 쪽이 잇몸이 쓸려 올라가는 느낌에 살짝 눈앞이 흐릿해졌다.


“…!?”
“…조금만 만질게요.”


 불쑥 들어온 온기에 어깨를 움츠리는 크로우에게 린이 말했다. 어리광을 부리는 설탕 같은 목소리를 거부하기 힘들었다. 어느 새 풀린 셔츠의 앞섶 사이로 들어온 뜨거운 손가락이 천천히 피부를 어루만졌다. 쇄골에서 시작해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온 손끝이 가슴 끝에 닿았다. 그가 크로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맞추었다. 지릿한 아픔이 곧 자국으로 변했다.


“…린!”
“…좋아해요.”


 평소에도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 사용하는 것은 정말 반칙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허락했다가는 멈출 수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깨를 밀어내는 손을 린이 억지로 맞잡으며 깍지를 꼈다.


“…!”


 그 때, 형광등이 몇 번을 깜빡이고는 원래 기능을 되찾았다. 전기 점검이 끝난 모양이었다. 밝은 연구실 안, 바짝 붙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스스로가 봐도 이질적이었다. 린의 동작이 멈춘 틈을 놓치지 않고 크로우가 얼른 의자를 끌고 뒤로 물러섰다. 풀어진 셔츠의 앞 단추를 채우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그의 모습에 린도 작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검은 머리칼 아래 드러난 귀 끝이 새빨갛게 물든 것을 보니 새삼 자신이 한 행동이 어떤 것인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너 말이야……”


 크로우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린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만큼 고개를 숙인 채 얌전히 뒷말을 기다렸다. 그 모습이 마치 꼬리를 내리고 축 처진 강아지처럼 보여서 차마 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내가 이러니까 녀석이 틈만 나면 덤벼드는 거겠지. 쓴 웃음을 삼킨 크로우가 말을 이었다.


“…학교에서 이러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일단 들어올 때 문은 잠갔어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건가.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서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그에게 린이 말했다.


“…싫으면 앞으로 안 할게요…”
“……학교에서는 하지 마. 학교에서는.”


 크로우가 걱정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들켜서 곤란해지는 사태이지, 연인의 적극적인 애정표현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결국 또 지고 마는 것은 크로우쪽이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린의 어깨를 두드리며 덧붙였다.


“곤란한 거지, 화가 난 건 아니야. …빨리 하던 일 마무리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네.”


 겨우 고개를 든 린이 크로우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아까 보여줬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큰 갭이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그나저나, 이러다 진짜 졸업하기 무섭게 홀랑 덮쳐지는 것은 아닐까. 시키는 대로 열심히 팜플렛을 접는 린을 바라보며 크로우는 마음속으로 오늘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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