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퍽 좋았다. 4년만의 귀가, 막사나 객지의 관사가 아닌 제 침상에서 모처럼 푹 잠들었다 깨어난 후였다. 지역 유지들은 평난후의 행차에 제일 귀한 전각을 비우곤 했지만, 그 어떤 호사라도 제 집만 하겠는가.

 

물론 한성에게 이 집이 그리 살가운 곳은 아니었다. 후에 봉해지기 전이나 후나 그는 항상 출정 중이었으므로 이 침실에서 자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4년 간 비웠던 침실은 분부한 대로 모든 것을 그의 취향에 맞게 관리되고 있었다.

 

우아하지만 담박하지 않게, 화려하되 조잡하지 않게. 수놓은 비단 침낭, 칠흑빛 모피 깔개, 금 등잔과 옥 향로 모두 헤진 곳, 그을은 자국 없는 새것이다. 4년 동안 한 번도 쓰이지 못한 물건들이 낡으면 그대로 버리고 새로 장만해 놓도록 했다. 모두 그의 것이되 낡은 것은 없다. 조정에 든지 20년 가까이 되도록 기량이 낡지 않는 한성 자신처럼.

 

그렇게 그는 평안히 제 집에서의 아침 일정을 수행하고 있었다. 장 집사가 헐레벌떡 달려와 고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선생께서 원 도련님의 방에서 묵으신 모양입니다. 서원 별당의 옷을 가져오시라 분부하셨습니다.”

 

장 집사가 다른 호칭 없이 ‘선생’이라고만 칭하는 이는 하나 뿐이었다. 한성은 의외의 소식을 듣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호통도 힐난도 없었지만 집사는 제 큰 실수를 들킨 것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선생이? 원이의 방에서?”

“예,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간밤 선생께서 오시는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했사온데…….”

“하하. 내 집에 눈이 몇인데, 장 집사. 그간 소경들을 먹여 기른 게군?”

 

한성의 웃음에 집사는 물론 곁의 시비들까지 무릎을 꿇었다. 이 집의 눈 뜨고 있는 사람 모두 눈이 파이고 싶지는 않았다. 아랫것들이 숨을 죽이건 고개를 조아리건, 한성은 말없이 소매 안을 더듬었다. 그의 손목에는 물론 어제 그가 회수한 환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환에서 아무런 다른 기척도 없는 것이 그의 심기를 더욱 거슬렀다.

 

다행히 그는 제 불쾌함을 눈앞의 가여운 사람들에게 풀지는 않았다. 그래봤자 불쾌함만 더할 게 분명했으니까.

 

“됐네. 그치가 신출귀몰한 것을 어쩌겠는가. 연유는 내가 물을 것이니 의관 정제하거든 바로 영화원으로 오라고 하게.”

 

그는 품 안을 더듬어 검은 열쇠 하나를 장 집사에게 건네주었다. 열쇠는 철도 아니고 돌도 아닌 것이 아침 햇살 아래서도 빛을 반사하지 않고 요사하게 검었다. 집사는 꾸벅 절을 하고는 부리나케 서원으로 달렸다.

 

한성은 집사의 떠나는 뒷 모습을 한참 노려 보다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나긋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시비를 불러 명했다.

 

“매화를 감상할 것이니 화로를 챙기거라. 오는 이가 추위를 많이 타니 숯을 많이 준비해야 할 게다.”

 

그의 명대로 곧장 시비들이 화로와 숯을 챙겨 후원으로 향했다. 한성은 그 후에도 몇 가지 급히 보내야 할 서신과 집안일을 해결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제 선생의 성미를 잘 알았다. 그의 선생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알 때는 더욱 게으르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런 선생을 오래 기다려줄 정도로 인내심이 많지 않았다.

 

한성이 당장 일어나 후원으로 갈 줄 알았던 시종들이 제 주인이 변덕을 부리나 싶을 때쯤 되어서야, 한성은 천천히 일어나 외투를 둘렀다. 그는 문간을 나서다 떠오른 듯 한 마디를 툭, 등 뒤로 던졌다.

 

“오시(午時)쯤 원이도 화원으로 오라고 이르거라.”

 


 

평난후부에는 정원이 여럿 있다. 사철에 어울리는 꽃을 정원마다 나누어 심어, 동쪽과 서쪽, 남쪽 모두 계절마다 풍취가 달라지곤 한다. 운 좋게 후부 안을 둘러본 혹자는 천지의 사계절이 모두 후부의 담벽 안에 있다고 하였다.

 

개중에도 가장 큰 후원인 영화원에는 홍매화를 잔뜩 심어 놓았다. 추위에 한참 지치고 봄은 아니 오시나 지칠 때 쯤 되면 후원에서 한 송이, 두 송이 매화꽃이 피어 났다. 곧 담벼락 안에 붉은 불길처럼 꽃무더기가 피어나고 매화향이 천지에 자욱해지면, 시 한 수 절로 흘러나올 진풍경이 완성되었다.

 

이 후원은 원도 잘 알고 있었지만, 원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홍매화가 가득 폈을 때 그 안에 들어서면 정신이 온통 산란해졌고 곧 길을 잃을 것 같았다. 이 풍경을 한 번 보려고 평난후 댁과 연을 쌓으려는 자들도 있다던데, 오히려 이 집의 장자가 귀한 것을 모르는 꼴이었다.

 

“내가 아버지처럼 고상한 취향이 없는 탓이지. 어쩌겠어?”

 

원은 붓을 고쳐쥐며 투덜댔다.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러 아버지의 처소에 갔다가 ‘영화원으로 오라’는 명을 전달 받은 후 내내 이런 상태였다. 집중은 영 안되고 눈에 뵈는 것마다 거슬린다. 그러나 눈에 뵈는 것들 - 이 집의 벽돌 하나 상 다리 하나 다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니, 아버지를 원망할밖에. 아버지는 왜 쓸데없이 고상해서 아들을 불편하게 하시는지?

 

가뜩이나 아침부터 정신이 뒤숭숭했는데 하필 영화원으로 부르다니. 아버지와 관련된 건 대체 왜 쉬운 게 없을까?

 

‘아까 분명 그 사람도 영화원으로 부르셨단 말이야.’

 

원의 눈앞에 다시금 그 사내가 떠올랐다. 제 침상에서 잠들어 있다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유유자적 떠난 그 사내. 아니, 여우. 그가 여우일 때의 날렵한 사지와 풍성한 은빛 털, 그 촉감이 떠올랐다. 그러다 다시금 사내의 모습이 떠오르고, 자신이 여우의 등허리를…… 그러니까 그 사내를 어루만졌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도저히 붓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멋대로 휙 던진 붓이 바닥으로 구르며 진한 먹방울을 날렸다. 방이가 달려와 붓을 주워 바쳤다.

 

“도련님, 오늘 습사는 어째 한 줄도 못 마치시네요.”

“알 바야? 어차피 정해진 진도도 없는데…….”

”후 나으리께서도 돌아오셨는데 게으름 부리다 괜히 꾸중만 들으시게요?“

”아, 몰라!“

 

방이는 잔소리를 하면서도 원이 아예 책을 집어 던지고 걸상에서 주르르 미끄러지는 건 말리지 않았다.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기는 그도 주인 못지않았다. 아침부터 도련님 방에 있던 그 손님은 뉘시며, 옷 가져오라는 말에 장 집사는 왜 자기네 18대 조상 귀신이라도 본 듯 놀란 것인지? 게다가 제 방에 그 손님을 모시고 있던 원이조차 뭐가 뭔지 모르고 있으니 궁금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원은 한참을 책을 뒤적거리다, 바깥의 얼어 붙은 연못에 돌을 던지다, 도로 와서 붓을 먹에 적시다 하더니 결국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아버지께서 사시를 알리는 종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는데 나설 채비를 하는 것이었다.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시간까지는 아직 두 식경은 남았는데요.“

“무슨 소리. 걷다 보면 미시가 될 텐데. 너야말로 아버지께서 계신데 너무 방만한 거 아니야?”

 

원은 망설이는 방이를 그리 놀려주고는 곧장 영화원으로 향했다. 눈을 쓰느라 여념이 없던 시종들이 원을 알아보고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원이는 시종들이 애써 눈을 치운 보람도 없게 자꾸 한 쪽 편에 쌓아 놓은 눈더미에 발을 빠뜨렸지만 말이다. 걷는 내내 가기 싫은 마음과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이 부딪혀 싸웠다. 마음이야 어떻게 싸우든 다리는 부지런히 걸었으니, 평소라면 두 식경 정도 걸렸을 거리를 그 절반 만에 주파하고야 말았다.

 

후원 입구에 이르자 벌써 은은한 매화향이 담장을 타고 넘어 왔다. 겨울 중 유일하게 향이 나는 꽃을 피우고 있는 곳이니 향만으로 금은보화로 꾸민 궁궐 못지않았다. 원이 들어서자 입구에 섰던 무사들이 패를 나누어 그를 안내했다.

 

‘아버지는 집에서도 항상 호위를 받으시려나?’

 

원은 제 앞길을 짚어주는 무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후부 곳곳에 호위 무사야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었지만, 그 무사들이 집안 사람이 이동하는 데마다 따르지는 않았다. 이건 마치 원이 이 집의 손님이라도 된 것 같았다. 아버지의 친위 무사에겐 이게 당연한 건가? 아버지의 장자라고 해도 예외는 없을 정도로?

 

‘아버지는 도대체 4년간 어떻게 지내신 거지?’

 

만발한 매화꽃은 원의 의문에는 답하지 않은 채 붉은 꽃망울과 향취를 자랑할 뿐이었다. 한참 나무 사이를 헤쳐 나가 누각에 이르니, 높이 올라앉은 사람이 보였다.

 

그 사내였다. 백의를 입은 사내가 난간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홍매화 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은 더 이상 무사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다. 숨도 쉬지 않고 누각을 오르니 사내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차올랐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왜 여우의 모습을 하고 있나요? 왜 간밤 내 침상으로 올라 왔나요? 왜 아침이 되니 사람으로 변한 건가요?

 

4년 전에는 왜 내 앞에 나타났나요?

 

왜 그동안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나요?

 

사내는 원이 순식간에 계단을 타오르는 데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원이 제 코 앞까지 왔을 때에야 고개를 돌려 올려다 보았다. 사내의 검은 눈동자에 의문의 기색이 짧게 스쳤지만, 그나마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사내는 원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원이 사내 앞에 섰을 때, 첫 마디는 이러했다.

 

“헉, 헉, 헉.”

 

물어볼 게 너무 많은데 숨이 턱끝까지 차서 말문을 못 열겠다. 원이 한참 숨을 못 고르자 사내는 피식 웃더니 다탁의 찻잔을 원에게 건네 주었다. 다 식은 차지만 계속 꼴사납게 헥헥거리는 것보단 나았다. 원은 차를 한 번에 털어 마시고 간신히 심신을 진정시켰다. 그제야 좀 여유가 생겨 사내를 찬찬히 볼 수 있었다.

 

사내는 아침에 원의 방을 나설 때와는 달리 머리칼을 단정히 정리하고 있었다. 손에 달랑 들고 나갔던 옥잠이 제자리에 얌전히 꽂혀 있는 걸 보니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누가 빗어준 것일까? 자신이 직접 정돈한 것일까? 오늘 오전 내내 여기서 꽃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입 안에서 또 질문들이 굴렀다. 온통 하얀 사내가 있어서인지 지천의 매화가 더욱 붉어 보였다. 반대로 사내는 눈처럼 창백해 보였지만.

 

무엇부터 물어야 하지? 원의 머리가 부지런히 고민을 하는 새, 입에서 한 마디가 툭 굴러 나갔다.

 

“저희 뵌 적이 있지요?”

 

사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아침에 본 얼굴을 그새 잊지는 않았단다.”

“아침이 아니라……. 4년 전에 뵌 적이 있습니다. 그, 4년 전 여름에, 동호의 죽림에서.”

“4년 전?”

 

이번에는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내는 고개를 이리 저리 갸웃대다 다시 원을 뜯어보았다. 그러나 그 탐색이 그리 성의 있지는 않았다.

 

“흐으음, 그런 일이 있었나? 꿈을 꾼 게 아니냐?”

“있었어요. 분명히. 한밤중에 숲속에서 제 앞에 나타나셨었어요.”

“4년 전이면 너는 영 꼬마였을 것 같은데, 잘도 기억을 하는구나?”

 

그야 영 꼬마긴 했지. 그땐 여덟 살이었으니까.

 

원은 정말 여덟 살 꼬마로 돌아간 듯 울고 싶어졌다. 드디어 4년 전 사람을 만나고 독대까지 했는데, 정작 그 사람은 ‘꿈이 아니냐?’ 따위 소리나 하고 있다니. 제 기억이 맞다는 걸 증명해줘야 할 사람이 저러고 있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이 자는 다 잊어버린 주제에 미안하다는 말도 없다.

 

원의 큰 눈에 원망이 잔뜩 고였다. 사내가 원의 눈가를 쓸며 살살 달래었다.

 

“그리 원망하지 말거라. 날 원망하면 앞으로 너만 고달플 터인데.”

“왜 저만 고달픕니까?”

“그야 내가 너의…….”

 

이어지는 답은 등 뒤에서 들려 왔다.

 

“그분이 앞으로 네 스승될 분이시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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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문제 때문에 너무 간만에 업데이트 하고 ㅠㅠ 코로롱 후유증이 생각보다 길었읍니다 ㅇ<-<

다시 업뎃 주기를 맞추는 것을 목표로 ㅇ<-< ㅇ<-< 

동양 사극 기반 vs 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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