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바라왔던 것이 있다. 기다리고 염원해왔던 것. 남쪽 나라에 가는 일이다. 무완은 말없이 발코니에 서서 먼 산을 바라보았다.

세간에 도는 무완에 대한 소문이 아주 거짓은 아니다. 사생아가 아니라 정확히는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 전 부인에게 태어난 딸이다. 반란 과정 중에 부인은 암살당했고 창 씨 왕조가 세워졌다. 무완은 왕권이 안정될 때까지 하인인 척 숨어 지냈고 다음 왕위계승권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남쪽 나라의 작은 영지를 다스리는 자작이었다고 한다. 무완은 어머니를 닮았고 그건 다른 형제들과의 차이점이 되었다. 하지만 무완은 아버지의 신분 상승을 두 눈으로 보며 자랐다. 밑바닥의 삶도 경험했다. 그렇기에 왕좌란 곳이 얼마나 치열한 장소인지도 알고 있었다.

왕자들은 세력을 얻기 위해 왕녀에게 들러붙었지만 무완의 관심은 왕녀에게 없었다. 물론 왕자들이 왕녀의 대공이 되거나 왕녀가 그들의 부인으로 들어가면 남쪽 나라를 등에 업게 될 것이다. 무완은 여자였고 혼인을 방법으로 세력을 얻는 건 그로선 불가능했다.

발코니 너머로 흑의를 입은 사람이 다가왔다. 무완은 손을 가볍게 들었다. 흑의의 사람은 무완의 방 안으로 쏜살같이 들어왔다.

"어때?"

"허술하진 않지만 촘촘하지도 않습니다."

언제까지 왕국으로 만족할 텐가. 황제의 이름은 역사 속에서만 아른거릴 셈인가. 무완은 씩 미소지으며 별다른 의도 없이 옆을 돌아봤다. 연회장에선 본 적 없는 여자가 발가벗은 채 낮은 발코니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깜짝 놀란 무완은 커튼 속으로 몸을 돌돌 말았다가 체면을 떠올리고 밖으로 나왔다. 여자와 남자를 구분해 구역을 나눠 묵어갈 방을 줬기에 망정이지 남자라도 있었으면 큰일 날 모습이다. 왕족에게 내준 방 근처에 고용인의 방이 있을리도 없을 터, 분명 천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무완은 황급히 물었다.

" '저건' 뭐지? 아니, 저긴 누구의 방이야?"

"왕녀님의 방입니다."

"왕녀님이 어째서 미친 나체의 여ㅈ……."

무완이 말끝을 흐렸다. 그는 천천히 미소지었다.

"이거, 큰 소문을 낼 수도 있겠군."

중얼거린 무완은 이불을 잔뜩 끌어와 옆 발코니에 던졌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던 사람은 이불을 맞고 옆으로 넘어졌다. 힘 조절을 잘못했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뜬 무완은 곧 여자가 일어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밤이라 해도 춥지 않으신가요? 그거라도 두르세요!"

여자는 놀란 토끼 눈으로 무완을 바라보다 경계하며 고개를 저었다. 무완이 멋쩍음에 뒤통수를 긁적이다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결례를 용서해주세요. 그대를 화나게 한 것 같으니."

여자는 눈썹을 찌푸리며 이불을 도로 무완에게 집어던졌다. 이불을 서둘러 받아안은 무완이 비틀거리자 흑의의 사람이 어둠에서 나와 잡아주려 했다. 무완은 중심을 잡으며 계속 숨어있으라고 눈짓을 줬다. 흑의의 사람은 다시 모습을 감췄다.

"보통 화가 난 게 아니군. 제 이름은 창 무완. 북쪽에 있는 나라에서 왔습니다. 여기보다 여름이 더 서늘합니다. 이 나라는 왜 이리 더운지, 그대도 그런가 봅니다."

여자는 무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불을 흔들며 무완이 수화에게 물었다.

"그쪽으로 넘어가는 것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아가씨?"

깜짝 놀란 여자가 방 쪽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고 멍청해 보이는 여자다. 왕녀의 발코니에 사람을 이리 쉽게 들이다니. 무완이 이불을 안고 발코니와 발코니 사이를 간단하게 뛰어넘어 한 번에 가까이 다가오자 여자가 놀란 눈으로 무완을 바라봤다. 왠지 무완의 기분이 울렁거렸다. 무완은 이불로 여자의 몸을 가려주며 묻고 싶은 것을 꺼냈다.

"아가씨께서는 어떤 이유로 왕녀님의 방에 계신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여자는 제 목을 감싸고 입술을 움직였다. 작은 숨소리만 터져 나왔다. 그제야 여자의 목에 새겨진 깊은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저렇게 베이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

무완은 멍하니 여자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자는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무완의 손을 쳐냈다. 손이 차가웠다. 무완은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 상처는 괴로운 사연이 얽힌 것인가요? 이것만 답해주세요. 왕녀님이 낸 건가요?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여자는 방을 가리킨 뒤 손으로 엑스자를 만들었다. 조금 화난 것처럼도 보였다. 무완은 하나 더 질문했다.

"목소리만 빼면 건강한 것 같은데 왜 여기 계신 거죠? 왕실 관계자가 아니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곳일 텐데. 왕녀님께서…감금하신 건가요? 만약 그런 거라면 작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해도 괜찮습니다……."

무완은 뒷말을 조심스럽고 작게 속삭였다. 여자는 고개를 계속 세차게 젓다가 감금한 것이냐는 물음에 고갯짓을 멈췄다. 무완은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힘이라면 당신 하나는 구해드릴 수 있습니다."

무완이 천천히 손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함께 가실래요?"

여자는 멍하니 무완의 손을 바라보다 천천히 제 손을 들어 그 위에 올려놓으려 했다. 순간 커튼을 세게 치는 소리가 났다. 여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스레 옆을 돌아봤다. 무완은 순식간에 제 목 앞에 드리운 칼끝을 내려다보며 내민 손을 거두고 미소지었다.

"왕녀님."

"창 공주님께서는 사리 분별이 되는 친절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판단이 틀렸군요."

왕녀는 매섭게 쏘아붙이면서도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왕녀는 무언가에 크게 실망한 것 같았고 여자는 지친 것 같았다. 무완은 세 치 혀를 부드럽게 굴렸다.

"저는 다만 발코니에서 발견한 가련한 아가씨가 어딘가를 그리워하는 듯해 말을 걸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제 방 발코니에서 대화를 나누는지도 여쭈어봐야 겠군요."

"보통 여자가 나신으로 밖을 내다보지는 않죠. 낮은 하인이라 해도 같은 여자끼리 그런 악취미를 내보이진 않고요."

왕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이 여자, 왕녀의 큰 허점일까? 왕녀의 동생과도 이야기를 나눴지만, 연회의 시작부터 끝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무완은 아무거나 던지는 셈 치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낮에 이상한 소문이 돌더군요. 왕녀님이 인어와 정분이 났다던가. 저야 물론 왕녀님의 결백을 믿지만. 애초에 인어를 애완용으로 키우는 건 인륜적으로 맞지 않는 행위입니다. 존경하는 왕녀님께서 인륜을 저버리진 않으시겠지요."

"이 사람은…인어가 아닙니다. 제가 인어와 정분날 일도 없습니다."

왕녀는 얼굴을 싸하게 굳혔다. 이겼다. 무완을 확신을 가지고 미소지었다.

"단잠을 방해한 것 같아 송구스럽네요. 전 이만 물러날 테니 좋은 밤 보내세요. 아가씨도요."

한율은 주먹을 꽉 쥐고 순식간에 반대편 발코니로 넘어가는 무완을 노려봤다. 인어가 관람 용도로 쓰인다는 건 대외적으로 알려졌지만 인어 중 몇몇을 왕실에서 사들여 키운다는 것은 아직 나라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은 특급 비밀이다. 수화가 진짜 인어라는 걸 밝힐 순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화가 나는 건 자신이었다. 수화에게 잘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최선을 다해 안전하게 살도록 하고 있다고. 그런데 수화가 무완의 말에 홀딱 넘어가 손을 뻗고 있었다. 이곳이 그렇게도 싫은 걸까. 아직 신임 하나도 주지 못하는 것 같아 가슴이 따가워졌다. 한율은 말없이 수화를 끌어안았다. 의미심장한 눈으로 보이지 않는 무완을 냄새로 쫓던 수화는 화들짝 놀라 몸을 굳혔다. 한율은 나지막이 속삭였다.

"애완용 같은 걸로 널 데려온 게 아니야. 믿어줘."

수화의 눈은 턱없이 맑아 읽을 수가 없다. 한율은 눈을 꽉 감고 수화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절대, 절대 그런 게 아니야. 가엾어서도 아니고, 과시하고 싶어서도 아니야."

한율은 속삭이면서도 어째서 그를 데려온 건지, 그것 하나만은 말해주지 않았다. 다 거짓말 같아. 날 바다에 되돌려줄 마음도 없으면서. 수화는 눈을 감았다.

한번 깬 잠이 다시 오지 않아 한율은 침대에 누워서도 수시로 뒤치락거렸다. 욕조에 앉아 그런 한율을 계속 구경하고 있으니 창밖 너머로 하늘이 흐리게 밝아왔다. 가까이서 보고 싶었지만 한율이 깨어있어서 왠지 발코니 쪽으로 보내줄 것 같지가 않았다. 수화는 죽은 생선처럼 말없이 파란 하늘을 바라봤다 자리에 앉은 한율이 노란 종을 흔들자 복도에서 한율을 준비시키기 위한 사람들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나가는구나. 수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틀 연속으로 외교와 관련된 일정에 숨이 막혀 한율은 푹 한숨 쉬었다. 칼을 휘두르기가 훨씬 더 쉽고 힘들지 않았다. 몸에 모래주머니를 찬다 해도 몸을 조이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시녀가 알려준 일정은 오페라 관람이었다. 이미 박스석이 예매되었다. 북쪽 나라의 귀빈들을 보내기 전에 선보이는 오페라로 아마 극장 단원들의 부담이 엄청날 것이다. 신유리 백작 부인은 이런저런 옷을 고르기 여념이 없었다. 곧 옷걸이를 도로 걸어놓게 한 유리는 하인이 들고 있는 옷을 하나하나 물으며 방긋 미소지었다. 한율의 기분을 띄워주려는 유리의 노력에 한율도 긴장을 조금 풀고 그나마 노출이 적은 파란 드레스를 골랐다. 오늘 날씨가 아침부터 후덥지근한 것을 고려한 탓인지 원단이 아주 얇았다. 바람이 잘 통해 나쁘진 않았지만, 질감이 까슬까슬해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 옷 만든 사람이 누구죠?"

"마담 고 씨입니다."

"안감이 환상적이라고 전해주세요."

하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자 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대로 말하면 본 의도로 거꾸로 알아들을 것이 뻔하다. 유리는 불안한 예감을 떨쳐내려는 듯 한율의 머리를 꼼꼼히 빗질하고 이런저런 머리 모양을 시범적으로 해주며 의견을 물었다.

이런저런 머리를 고민해본 끝에 폭포수 머리 스타일로 결정해 유리가 열심히 한율의 머리를 따주는 동안 그는 거울을 통해 수화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분명 심심할 것이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 한율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본능적으로 제 왕녀님이 무언가 해괴한 생각을 떠올린 것을 눈치챈 유리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아니나 다를까, 머리가 완성되기 무섭게 의자에서 내려온 한율이 수화의 양손을 꼭 움켜잡고 물었다.

"여기에만 있기 심심하지? 같이 오페라 보러 갈래?"

유리는 경악했다.

글 드림

眞 宵香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