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가을의 예상보다도 더 자연스럽게 가을의 일상에 합류했다. 가을은 시간이 나면 미술실의 이정을 찾아가 수다를 떨었고, 야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늘 그 벤치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다가 뒷문을 열고 집으로 걸어갔다. 주말엔 가끔 이정이 가을의 집에 와서 같이 밥을 먹고, 가을의 가족과 이야기를 하거나 티비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 급식이 별로인 날에는 잔디와 준표, 이정과 가을이 함께 만나 식당에 가서 밥을 먹기도 했다.




가을이 잔디와 준표를 함께 본 건 이정과 밥을 먹으면서 본 게 처음이었다. 평소 잔디의 말에서 둘의 사이가 평범한 연인과는 좀 다를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도 더 투닥거리는 모습에 가을은 당황했다. 하지만 준표가 저러는 것도 아주 얌전해진 거라는 이정의 설명에 가을은 곧 적응해갔다.




이정이 없었던 일상이 어땠는지 좀 흐릿해질 정도였다. 이정이 함께하는 가을의 일상도 여전히 평범한 축에 속했다. 소이정이란 사람은, 물론 어딜 가던 시선이 따르긴 했지만, 그래도 일반인 고등학생이었다. 학교에서의 시선도 시간이 지나니 익숙해졌다. 가을과 이정의 부모님이 잘 아는 사이라는 말이 어느새 퍼진 건지, 아니면 가을과 이정이 같이 있는 모습이 자주 보이자 학생들도 익숙해진 건지, 가을을 향한 수군거림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가을이 이정을 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가 중간고사 직후였는데, 어느새 기말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방에서 공부하던 가을의 집중력은 서서히 무너졌고, 결국 책상 위에 엎어졌다. 왜 시험 기간엔 날씨도 좋은지, 친구와 맛있는 걸 먹으면서 수다나 떨고 싶은 날이라고 생각하던 가을은 휴대폰을 꺼내 이정에게 문자를 보냈다. 공부해요? 응. 문자 답장하는 거 보면 아닌 거 같은데. 그러는 너는 공부 안 하고 뭐 하는데. 가을이 대답하지 못하고 우는 이모티콘을 잔뜩 보내자, 이정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저 공부 회피용으로 문자를 보내던 가을은 전화가 오자 살짝 놀랐지만,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





“여보세요?”

“공부 안 하고 뭐해?”

“하고 있었거든요.”

“내가 방금 문자 보낸 사람은 누군데?”





이정의 말에 가을이 저도 모르게 우는소리를 하며 이실직고했다. 열심히 하다가 잠시 쉬면서 문자 보낸 거거든요 진짜 너무 집중 안 돼요 어떡해요 날씨는 또 왜 이렇게 좋은지 그냥 친구랑 카페 놀러 가서 맛있는 거 먹고 마시고 싶어요 아니 공부 안 하는 거까진 안 바라니까 진짜 맛있는 스무디 한 모금만 딱 마시고 싶다… 평소 투정 부리지 않는 가을의 우는 소리가 이정은 재밌게 느껴지는지 가만히 듣고 있었다. 가을이 말을 멈추자, 구세주 같은 한마디를 했다.





“카페 가서 같이 공부할래?”





가을은 이정이 보지 못하는데도 격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완전 좋아요. 전화기 너머로 느껴지는 가을의 기쁨에 이정이 미소지으며 30분 뒤에 나오라 하며 전화를 끊었다. 가을이 분주하게 외출을 준비하자, 공부 안 하고 어딜 가느냐는 아빠의 잔소리가 이어졌지만 이정이 같이 공부하자고 나오라 했다는 말에 잔소리는 곧 멈췄다.




이정이 30분 뒤에 나오라고 했지만, 가을은 30분이 되기 전 미리 나와 있었다. 집 앞에서 기다리는데, 처음 보는 승용차가 가을의 앞으로 다가왔다. 의문스럽게 그 차를 바라보자,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면서 이정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정에게 면허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운전하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라 가을의 얼굴에 놀라움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더운데 왜 미리 나와 있어?”

“이거 선배 차예요?”




가을과 이정이 동시에 말하곤,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얼른 타라는 이정의 재촉에 가을이 냉큼 조수석에 올랐다. 부모님 가끔 한국 오실 때 모는 차인데, 한국에 잘 없으시니까 거의 내가 써. 가을의 질문에 이정이 답하며 부드럽게 차를 몰았다. 면허 딴 지 얼마 됐어요? 두 달 반? 이정의 대답에 가을이 장난스레 위에 달린 손잡이를 잡자, 이정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정의 차는 도시 외곽으로 빠졌다. 생각보다 멀리 있는 그들의 행선지에 가을이 어디 가냐고 물었지만, 이정은 그저 카페에 간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이정과 가을이 소소한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차는 어느새 주차장이 넓은 건물에 도착했다. 차에 내려서 보니, 건물 전체가 카페인 듯했다. 동네 골목에 있는 소소한 카페를 생각했던 가을은 약간 놀랐지만, 이정은 익숙한 장소인 듯 자연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말이라 사람이 꽤 있었다. 이정을 따라가며 가을이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는데, 카운터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어, 이정이 왔어? 친근하게 이정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가을이 카운터로 고개를 돌렸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성이 이정을 반갑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이정을 닮았지만, 차가운 느낌이 드는 이정과 달리 따스한 느낌이 더 강한 사람이었다. 누군지 궁금해지는데, 그 사람도 가을이 궁금했는지 이정에게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가을이야. 같은 학교 후배니, 뭐니 하는 설명도 없이 이정은 그저 이름을 말했다. 하지만 그 설명에도 이정을 닮은 남자는 놀란 얼굴을 하며 가을이??? 하고 되물었다. 많이 놀랐는지 카운터에서 나와 가을 앞에 서서는 가을과 눈을 맞추었다. 가을이가 이렇게 컸다고??? 예상외의 반응에 가을은 그저 어색하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나 기억 안 나? 일현이 형? 형…이요? 자신을 형이라 소개하는 일현에게 가을이 의문을 담아 되물었다. 가을의 의문에 일현이 와하하 하며 호탕하게 웃고는 부연설명을 했다. 기억 안 나는가 봐. 너 어릴 때 이정이가 나이 많은 남자는 형이라고 부르는 거라 그래서 다 형이라고 불렀거든. 이정이만 소이정소이정 하면서 이름 불렀고.




처음 듣는 이야기에 가을이 이정을 돌아보자, 이정은 쓸데없는 소리를 다 한다며 주문이나 받으라고 일현에게 핀잔을 주었다. 이정의 핀잔이 익숙한 듯, 짜식- 하며 이정의 어깨를 두드린 일현은 카운터 뒤쪽, 원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 뭐 마실래? 이정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이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현은 다시 가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가을이는? 가을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딸기 요거트 스무디요!




아까 인사와는 달리 생기 넘치는 말투에 일현이 또 웃음을 터뜨렸다. 자리에 앉으면 가져다줄게. 일현의 말에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한 가을은 이정을 따라서 카페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이 넓어서 공부하기 편한 자리였다. 가을은 신나게 가방에서 책과 필통을 꺼내 책상에 펼쳐놓았다. 그러곤 가을처럼 가방에서 책과 필기구를 몇 개 꺼내고 있는 이정에게 물었다. 저 사람 누구예요? 내 사촌 형이야. 소일현. 이정과 비슷한 얼굴에 친척일 거라곤 예상하던 바였다. 속으로 이 집안의 유전자에 감탄하며 가을은 더 궁금한 걸 물어보았다. 나랑 선배 사촌 형이랑 언제 봤어요? 어릴 때 형이 우리 집에 잠깐 살았거든. 그때 봤어.







어떤 상황에서 일현이 이정의 집에 살 게 되었는지, 가을이 어쩌다 일현과 만나게 되었는지 막힘없이 설명하는 이정을 보며 가을은 감탄했다. 간혹 어릴 적 이야기가 나올 때면, 이정은 디테일까지 전부 기억하여 가을에게 말해주었다. 이정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마치 가을도 자신의 어릴 때를 기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와 역시 기억력 대단하다. 가을의 칭찬에 이정이 씩 웃었다. 가을은 이정이 만족했을 때 저렇게 웃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을로 인해 이정이 저렇게 웃을 때면, 가을은 어쩐지 뿌듯함을 느꼈다.




얘기하는 사이 일현이 그들의 테이블로 다가와 가을의 스무디와 이정의 커피, 그리고 스콘도 하나 가져다주었다. 이건 서비스. 가을이가 어릴 때 좋아했던 거야. 가을이 웃으며 감사하다 하는데, 일현이 가자마자 이정이 비웃으며 말했다. 저거 거짓말이야. 형 있을 때 스콘 먹은 적도 없고 퍽퍽해서 싫어했어. 장사를 하더니 거짓말이 늘었네. 이정이 고개를 저었다. 이정의 행동이 어쩐지 우스워 가을이 가볍게 웃었다.





“내가 어릴 때 스콘 싫어했어요? 근데 지금은 스콘 엄청 좋아해요. 그럼 됐죠, 뭐.”




가을의 관심은 스콘보단 스무디에 있었다. 분홍빛 스무디를 한 모금 마시더니, 가을은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을 지었다. 만족하며 펜을 잡고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 가을에 비해, 이정은 생각이 많아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창 공부하다, 잠깐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던 가을은 넓은 창을 통해 밖에 별채처럼 따로 만들어진 건물을 보았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공간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이정이 미술실에서 입는 커다란 앞치마를 맨 사람이 건물에 들어가고 있었다. 카페에서 저런 앞치마를 입을 일이 있나 싶어 건물을 바라보던 가을은, 자리로 돌아와 이정에게 물었다.




카페 옆에 작은 건물은 뭐예요? 책을 보던 이정은 가을의 질문에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거? 그들이 앉은 자리는 창이 좁아서 그 건물의 지붕밖에 안 보였지만, 가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예 공방. 저 건물 뒤쪽에 가마도 있어. 이정의 설명에 가을은 아빠의 말이 떠올랐다. 이정의 집안이 대대로 도자기를 굽던 유서 깊은 집안이라던. 오 신기하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공방을 바라보는 가을에게 이정이 말했다. 구경갈래? 이정의 말에 눈을 반짝이던 가을은, 금방 시무룩해졌다. 아니요… 오늘은 공부하러 온 거니까 다음에 구경시켜줘요. 그러곤 책을 찢어버릴 듯한 기세로 붙잡아 보기 시작했다.







저녁 시간이 되어 이정과 가을은 일어날 채비를 했다. 떠나기 전 일현에게 인사하려고 카운터로 다가가는데, 일현은 누군가와 이야기 하느라 그들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일현과 얘기하던 사람이 인기척을 눈치채곤 그들을 돌아보았다. 이정아! 알바생인가 싶었는데 반갑게 이정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엔 사촌 누나인가 싶어 가을은 또 긴장하였다. 왔으면 공방 들르지. 놀러 온 것도 아닌데 뭐. 무심한 이정의 대답에도 그는 가볍게 미소지으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가을을 돌아보았다. 누구야?




안녕하세요. 왠지 인사해야 할 것 같은 타이밍에 인사하는 가을에게 이정이 설명했다. 일현이 형 여자 친구 차은재. 이정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이정은 스스럼없이 차은재라고 불렀다. 은재 또한 이정의 편한 호칭에 개의치 않는 듯 웃고 있었다. 어쩐지 익숙한 실루엣에 기억을 더듬던 가을은, 아까 봤던 공방으로 들어가던 사람이 은재임을 알아챘다. 얘는… 이정이 은재에게 가을의 설명을 망설이자, 은재가 놀리듯 웃으며 물었다. 친구랑 같이 공부하러 온 거야? 아까 일현에겐 이름만으로 쉽게 설명하던 것과는 다른 이정의 태도에 가을이 학교 후배라고 말하려던 찰나, 일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얘가 가을이야. 이정이 첫사랑.”





일현의 발언에 가을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고, 이정은 또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다며 일현에게 핀잔을 주었다.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이만 간다고 자리를 벗어나는 이정의 뒤꽁무니를 가을도 쫓아 나갔다. 뒤에서 입시 끝나면 공방에 놀러 오라는 은재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정은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흔들었고, 가을만 뒤돌아 꾸벅 인사하자 두 사람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가을은 어쩐지 두 사람의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이정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





이정은 마치 방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뭐 먹을래? 하고 가을에게 물었고 가을 또한 아까의 일은 잊은 듯 시험 기간엔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야무지게 대답했다. 하지만 가을의 마음 한구석엔, 일현의 말이 작게 남아서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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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현은재 등판! 어쩌다보니 이정이 외동아들 설정되어서 사촌형으로 나왔어요...

++)tmi: 오늘 스벅가서 딸기요거트블렌디드 마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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