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발행 211116




본 내용은 픽션입니다. 등장인물과 언급되는 회사 및 지명은 허구입니다.




캐스팅과 스텝진까지 구성이 끝났으니 미팅을 빌미로 자리 하나가 만들어졌다. 고사 올리기 전 친목회 비슷한 자리라지만, 결국 술이나 진탕 마시는 게 전부다. 하루 이틀 쌓인 연차도 아니니 이런 자리야 이골이 났어야 하는데도 겨울은 매번 긴장했다.

차라리 감독이나 투자사 대표와 단독으로 만나는 거면 모를까. 술이 들어가서도 어떻게든 최겨울을 놓쳐선 안 된다는 게 매번 버거웠다. 타인의 기대와 판단에 부응하는 일은 늘 그랬다. 만족하게 해 즐거운가 하면 그건 딱히 겨울의 몫이 아니었기에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잘 웃어야지, 잘해야지. 그것뿐.

“왔니?”

초영과 함께 동석한 감독을 제외하곤 프로듀서와 이사는 확실히 익숙한 사람이라 괜찮았는데, 처음 만나게 된 상대역 배우가 낯설었다. 누구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얼굴. 그러고 보니 신경 쓰게 만드는 일이 많아 몰랐는데, 상대역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알아차리는 것조차 너무 늦었다.

“안녕하세요, 최겨울입니다.”

“여기 겨울 씨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렇게 매번 격식 차리고.”

“아이, 이 피디님은 만날 때마다 그렇게 띄워주시더라. 저 비행기 멀미해요.”

“정 이사도 잘 알지? 저번 작품에선 저 친구가 총괄했으니까.”

“그럼요. 우리 아주 잘 알지. 오랜만이야, 최 배우.”

“그러게요.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여행 다니셨다더니 얼굴 더 좋아지셨네요.”

배우가 예술을 하는 사람인 줄 아는 이도 있겠지만, 이만큼 비즈니스 생활력과 사회성이 없으면 결코 버티기 어려운 직업이 또 없다. 예술이긴 하지. 그런데 이게 종합 예술이라, 종합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비즈니스가 끼어든다. 이걸 버텨내지 못하면 끝이다. 그러니 사람이 중요하다는 결론으로 귀결되는데, 이게 가짜이든 진짜이든 서로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결국 역할극 비슷한 상황은 계속 이어지게 된다.

 


최겨울이라는 얼굴은 아주 어릴 때부터 만들어졌다. 아역배우 출신이라 불리게 된 굵직한 경력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그 과거를 전 국민이 알고 있단 사실이다. 옆집이나 친척 정도가 적당히 알고 지나갈 법한 시기를 모두가 안다. 그게 좋든 싫든 어쩔 수 없다.

과거에 대한 말을 하나라도 하면 대중은 뒤집힌다. 그때 몹시 힘들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말로도 지탄받곤 한다. 설령 업계를 떠난 사람일지라도 예외는 없다. 이미 너무나 많은 선례를 보고 자라면서 겨울은 두려움을 품었다. 언젠가는 당연히도 지탄과 미움을 받을 거란 결말을 예감하면서. 그러니 언제나 웃었다. 그러면 늘 괜찮았다. 다들 비타민 같은 최겨울만 기억해주니까.


그렇게 적당히 웃으며 호응하고, 명랑한 목소리를 내는 동안에도 이쪽 업계 신인일 저 초면의 여자는 내도록 어떤 반응 하나 없이 그저 앉아만 있다. 아니, 시선을 이쪽으로 맞추고 있다. 고요하고 또렷하게. 경계심도 없고, 공격적이지 않은 눈빛임에도 곧장 눈을 맞추기 어렵다.

저렇게 뚜렷한 눈빛은 늘 조금 그랬다. 괜히 혼자만 이상한 기분. 이런 자리에서 왜 저렇게 쳐다보는지 이해도 안 됐지만, 왜 보는 건지도 모르겠고. 계속 피하기만 하는 게 도리는 아닌데, 어쩌지 못하는 동안 내내 목만 탄다.

“그래, 겨울 씨. 두 사람은 완전 처음이죠?”

“내 정신 좀 봐. 미안해요. 우리 이야기 하느라 인사가 늦었네. 이쪽은 한서우. 연극판에 있어. 우 감독이 적극적으로 추천해서 연기하는 걸 봤거든? 좋-아. 잘해. 둘이 붙여 놓으면 정말 재밌을 거 같아.”

“안녕하세요. 한서우입니다.”

뻗어져 나오는 가지런하고 다부진 손은 굴곡이 또렷해서 어제까지 나무와 펜, 가죽 따위를 만졌을 것 같은 느낌이다. 마주 잡기 직전의 찰나 동안, 겨울은 단상에 빠지고 만다. 이 사람 이쪽이겠구나, 하는 막연한 확신과 함께.

“선배님이 현, 이신 거죠.”

“……네?”

“이야, 서우 씨는 계속 생각했지만, 정말 캐릭터가 확실하다.”

“우 감독이 최 배우처럼 한 배우한테도 역할에 대한 설명 없이 시나리오만 줬댔거든. 보니까 벌써 본인이 민수라고 확정 지었나 보네.”

“그러게요. 조금 의외다. 저랑 이사님은 겨울 씨가 민수라고 생각했는데.”

“아하하. 그러게요. 저도 그쪽이 익숙하고요.”

“그럼 물어보자. 서우 씨는 왜 본인이 민수라고 생각했어요?”

“감독님께 상대 역이 최겨울 선배님이라는 말만 듣고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되게 많이 떨리더라고요.”

“그렇지, 아무래도 상대가 대선배고. 그 유명한 최겨울이라는데~.”

“거의 이틀 동안 엄두도 못 내다가, 혹시라도 기회 놓칠까 겨우 읽었거든요. 그렇게 봤더니 선배님이 하셔야 하는 캐릭터가 현이라서. 상대역이라고만 들었으니까 당연히 제가 민수겠구나, 했습니다.”

“한 배우 저 눈빛 좀 봐. 벌써 역할에 몰입했네.”

“뭐야, 뭐야. 서우 씨 혹시 겨울 씨 팬이라거나?”

감독과 초영은 조용히 웃고만 있는 동안 저들끼리 신나서 떠드는 이사와 피디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는데, 어쩐지 쉽지 않다. 진지한 낯의 그가 고작 인사하나를 끝으로 계속 겨울을 바라보고 있던 탓이다. 어째선지 다들 전혀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다. 아니면, 모르는 척이라도 해주는 걸까. 혼자만 괜히 신경 쓰는 걸까. 손바닥 아래로 고이려는 복잡한 마음을 달래려다 겨울은 제 몫의 보틀을 어느새 텅텅 비워버렸다.

“겨울 씨, 건조하죠? 여기 좀 그렇지. 말 그만하고 식사부터 시작할까요?”

“아뇨, 괜찮아요. 두 분 오랜만에 뵙고 그래서 너무 좋은데. 그래도 확실히 배는 고픈 거 같고. 하하.”

“그래, 우리 잘 먹자. 우 감독이랑 윤 실장님도 전부 먹고 싶은 것 주문하세요. 오늘은 내가 낼게.”

초영이 이미 주문을 넣어 뒀으니 음식이 올 거라 답하자, 곧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숨이 트인 겨울은 동시에 터무니없이 민망해지고 말았다. 연기는 대학 연극부까지만 임했고, 이후로는 연출부에 머무르면서 연출 관련 일을 더 많이 했다는 사람에게 신경이 쏠려 정신도 못 차린다니.


한 번도 상대의 경력과 연차에 연연한 적 없지만, 대체 어떤 연기를 했기에 굵직한 경력의 성격도 보통 이상인 이 사람들이 다 좋다 한 건지는 궁금했다. 그러니까 오히려 생각할 게 너무 많다 보니, 머릿속에 무언가 피어오르는 게 대체 무엇인지 제대로 읽어낼 겨를이 없다.

일단 시선부터 돌려보기로 한다. 모르는 척을 어떻게든, 해보자. 부딪혀오는 눈빛을 도무지 감당할 재간이 없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입가에서 피어오르는 가벼운 경련이 의식되었다. 진짜 미치겠네.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싱글싱글 웃다 말고 정신이라도 차릴 겸 화장실로 대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 제일 고요하고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을 공간. 이제는 정말 그러리라고 철석같이 믿는 건 어렵겠지만, 그래도. 이곳만큼 편한 공간이 없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볼 수 없으니까. 먼저 말 거는 게 실례니까. 천천히 손도 씻고 매무새를 다듬는데 기척보다 먼저 질문이 닿았다.

“괜찮으신가요?”

“네? 네. 그럼요. 괜찮아요.”

“안색이 조금….”

거울 속 어깨 너머로 다가오는 시선은 얼굴이 아니라 손목에 고정됐다. 물에 젖을까 걷어 올린 소맷자락 아래로 옅게 멍든 손자국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이전에 매니저가 잡았던 자리다. 망할. 얼마나 정신을 팔고 있었으면 이런 걸 보여주지. 아마추어도 아니면서. 귀가 순식간에 빨개지는 게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 몸부터 돌렸다.

“괜찮습니다.”

마주 보며 내놓는 단정한 대답과 입매, 그새 단추까지 채운 소맷자락까지. 그게 전부 어떻게 보일지 알기 때문에 더 맑게 웃어 보였다. 신경 쓰지 말고 꺼지라는 뜻이 이렇게 완연한데, 이만하면 적당히 알아듣고 지나쳐야 하는 거 아닌가? 왜 계속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는 거야.

“저기, 한서우 씨?”

“…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예?”

“괜찮으세요?”

“아, 예. 예. 저도 괜찮습니다. 곧 따라가겠습니다.”

명랑히 웃으며 나온 겨울은 낮고 풍부한 목소리가 자꾸만 어설프고 진득하게 등 뒤를 어루만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기침을 참기 어려웠다. 그렇게 늦은 새벽,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속에 들어찬 걸 전부 게운 뒤에야 지끈대는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작품은 가을 막바지부터 정식 촬영에 들어가게 되었다. 스텝이 모인 것도 빨랐지만, 초영의 회사 이름값으로 투자며 제작 지원까지 붙게 되어 진척될 게 없는 덕분이었다. 대본 리딩이며 고사, 인터뷰, 제작발표회, 의상 테스트와 여러 일에 내도록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도 겨울은 오히려 붕 뜬 기분이 들었다. 실감 나지 않는 것과는 전혀 달라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건지 자신도 난감한 상태라 일단 대본에 집중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좋은 편이었다. 도전적이고 젊은 감독이 내놓을 레즈비언 영화에, 여태 보여준 적 없는 연기로 이미지 변신을 할 유명 배우 최겨울과 주연작으로 영화계 데뷔를 하게 된 연극계 연출 출신 상대역까지. 모조리 크고 작은 이슈를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약간의 악성 댓글과 걱정으로 치장한 모진 말이 오가기도 했지만, 그 정도야 여태 따라붙은 어떤 말보다 가볍게 느껴져 괜찮았다.

 





 



로케이션을 끝낸 촬영팀과 연출진은 긴 회의 끝에 결국 감독이 내정하고 있던 조용한 바다 마을로 촬영지를 정했다. 숙소를 비롯해 오가는 비용이며 여러모로 예산이 닳아빠질 만큼 뽑았어야 하는 길이었으나, 다들 입을 모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현지 바다와 그곳의 등대가 시나리오 속 모습을 쏙 빼다 놓은지라 도무지 포기하기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함께 가진 못했어도 인서트 숏과 사진 몇 개를 받은 지라 얼른 가보고 싶어 발이 동동 굴려질 정도로 동감했다. 숙소는 마을 회관과 읍내에 그나마 있는 호텔을 쓰게 되어 다행이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고, 무슨 촬영을 한다고 하니 적당히 거리 두며 참견하는 정도라 상황도 양호한 편에 속했다.

이따금 인근 주민과 크고 작게 얼굴 붉힐 일이 생길 때면, 어떻게든 달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에너지를(결국 돈을) 소모해야 한 것에 비하면야. 얼굴이 많이 알려진 겨울은 마지막까지 의상 테스트를 하느라 조금 늦게 출발하게 되었는데, 그동안 관심이 떨어져 오히려 다행이란 반응이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촬영지에 합류하게 된 겨울의 차 안은, 더할 나위 없이 고요하다. 온갖 메모와 질문으로 가득한 대본을 들여다보느라 여념 없는 사람과 운전대를 잡은 사람 사이에선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창문이라도 열고 싶지만, 이쪽 바람은 차가워서 목에 나쁘니 물부터 마셔 보라던 게 거의 한 시간 전 마지막 대화다. 그걸 대화라고 할 수 있다면.

“선배님.”

“…네.”

방금까지 머릿속에서 온갖 욕을 쏟아내느라 급하게 내놓은 대답이 약간 흔들려, 창피함으로 귀 끝이 빨개졌다. 이 불편한 동행은 매니저가 원인이라면, 원인이다. 사무실에서 그렇게 싸운 이후로 매니저가 피곤하고 아프니 잠시 쉬겠단 선언을 한 탓에 의상이며 이것저것 실은 큰 차량으로 직접 오가게 되었는데, 초영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대뜸 서우를 붙여준다고 했다.

그 말에 겨울은 시나리오를 받던 날 약속한 와인을 무의식중에 퉁 내려놓고 말았다. 750만 원짜리라 그런지 깨지진 않았지만.

“벌써 구해왔네?”

“나 운전할 줄 알아요.”

“그래, 나도 알지. 그런데 거기 길이 험하대서. 넌 밴으로 오고 가야하고. 마침 서우 씨가 운전 경력이 긴 데다, 연출하는 동안 극단에 있는 어린 애들 픽업도 했대 그 정도면 믿을 만하잖아. 그리고 너 낯 가리는 거 티 안 내려면, 그렇게라도 얼굴 보는 게 낫지 않겠니?”

반박하지 못하는 게 억울해서 조금, 아주 조금 분했다. 나도 운전 잘하는데. 험한 운전 할 줄 아는데.

“서우 씨는 흔쾌히 좋다고 했으니까, 이참에 좀 더 친해져 봐. 그만 피하고.”

“내가 언제 피했다고.”

그러자 초영이 싱긋 웃었다.

“그럼 됐네.”

대체 되긴 뭐가 됐다고. 깊은 한숨을 꾹 눌러 담으려니 운전석에서 훨씬 가벼운 숨이 웃음처럼 흩어졌다.

“저한테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아, 촬영 들어가면 천천히 할게요.”

그러자 곧 차가 옆 도로로 빠진다. 내비게이션은 새로운 경로를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고, 겨울은 저도 모르게 몸 돌린 소리가 나도록 옆을 봤다.

“그럼 천천히 한다고 하시니까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선, 밥부터 먹죠.”

“네? 그게 뭐가 천천히인데요?”

“앞으로 20분은 가야 하거든요.”

그거랑 이게 대체 무슨 상관인데요, 라는 뾰족한 말이 자각과 함께 멎었다. 생각만 하려던 게 입 밖으로 나온 것보다, 타인에게 싫은 소리를 내놓았다니 식은땀이 날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모르는 척 다시 대본으로 눈을 돌린 겨울은 슬며시 피 맛이 도는 걸 느끼고서야 입안 살을 짓씹는 걸 멈췄다. 정신 차리려는 행위에 정신을 빼앗기는 사이, 차가 멈췄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가게가 저기 앞에 덩그러니 있다.

“여, 여기서 식사를 하자고요?”

“근처에선 여기가 제일 맛있어요.”

“뭘 파는지도 모르겠는데요?”

“해장국 집입니다.”

이런 거 못 드시는 건 아니죠. 뻔히 돌아보는 눈빛과 어투가 어쩐지, 또다시 왈칵 분했다. 꼭 한참 어린 동생 취급이라도 당하는 거 같잖아.

“먹을 줄 알아요.”

모른다. 한 번도 안 먹어봤으니까. 눈앞에 있는 뜨끈한 국물. 가습기에서 나올 법한 김이 희게 퍼지는데, 이게 지금 대체 무슨 일인지. 여태 이런 거 먹어본 적 없이 28살을 먹었느냐 하면, 그랬다. 당연하게도. ‘여배우’라면 응당 지켜야 할 이미지가 있으니까.

친숙하고 가까운 이미지 같은 거 대충 핫도그나 닭갈비, 샌드위치로 채워왔다. 식품 광고라면 대체로 반려해대서 그나마 찍었던 게 우유다. 고작. 술 마시고 난 다음 날의 해장이란, 직접 만든 꿀물이나 배달되어 온 쌀국수 같은 거였다. 그거 말곤 관심 둬 줄 생각이나 겨를조차 없었다. 온갖 파티와 뒤풀이에서 술 마시는 동안에도, 해장국 같이 먹자던 사람 역시 딱히 없었다.

“선배는 이런 거 안 먹겠네.”

전전전 여자친구, 아마도 5년 전쯤 만났던 동갑내기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있다. 꼬박꼬박 말끝마다 선배라고 하는 게 어쩐지 거슬렸던 걔. 겨울은 그때 어떤 대답을 내놓았는지 더듬다 말고 또다시 번뜩 정신을 되찾아왔다.

“안 드세요?”

유달리 말끝이 묵직하고 둥근 저 특유의 목소리 때문에.

 


이내 고개 저은 겨울은 익숙한 척을 하려, 일단 숟가락부터 푹 꽂아본다. 반은 반항심이다. 주황빛이 살짝 도는 듯한 갈색의 국물 속 거무죽죽한 시래기가 걸린다. 채소랑 고기가 다 들어간 모양이지. 대충 다 때려 넣어서 끓인 음식인가. 이걸로 어떻게 해장이 된다고 하는 거야.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불만과 의문은 대차게 입안으로 들어간 숟가락과 함께 순식간에 끝났다.

“…와.”

“맛있죠.”

“네.”

“많이 드세요.”

식탁이라고 부르기엔 과하게 오래된 나무 탁자 위. 구실처럼 놓인 반찬엔 손댈 정신이 없도록 해장국인지 뭔지를 아무튼 열심히 먹었다. 대답 역시 꿀꺽 삼켜버렸단 것과 눈앞의 사람이 어떤 얼굴을 하는 지도 전혀 모른 채, 겨울은 배 안쪽 저기 어딘가부터 뜨끈히 가득하게 채워지는 느낌이 꼭 술을 부르는 맛 같다고 생각 했다.

“소주 한잔하실래요?”

그걸 또 어떻게 알았는지. 먼저 물어보는데 냉큼 그렇다고 하기엔 슬쩍 민망해 눈이나 굴리며 꿀꺽 삼키는 동안, 서우가 소주 한 병을 빠르게 시켜버린다.

“전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드세요. 몸 따듯해질 거예요.”

해장국. 해장국과 반주. 눈앞에 운전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혼자만 소주를 마시는 일까지 전부 처음인 겨울은 한두 잔 비워낼수록 신이 났다. 마치 드라마 속 평범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그게 사실 뭔지도 잘 모르지만. 이런 맛이었구나.

“이런 거 드라마에서나 봤는데.”

“뭘요?”

“이렇게 해장국 마시면서, 소주 먹는 거요. 혼자 캬~하고.”

“해보니까 어떠세요.”

“완전 좋아요.”

“다행이네요.”

“제가 말을 지금 이상하게 하고 있나요?”

“아뇨. 전혀 안 그렇습니다.”

넹. 그리고 다시 후루룩, 캬. 그렇게 소주 한 병이 다 비워졌다. 손가락부터 광대까지 온통 따끈따끈한 기분. 뜨끈한 국에 소주의 조합은 겨울을 훈훈하게 익혀냈다. 이마가 무겁고, 실실 웃음이 나오는 기분. 그래서 웃었더니 마음마저 몽실하게 떠올랐다. 웃기만 하지, 혼자서 잘 걷는데 구태여 부축해 조수석에 태운 서우가 움직이자 또 바깥 풍경 역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신기하네.

“우리 지금 어디 가요?”

“촬영지 숙소 갑니다.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할 거 같아요.”

“밖에 노을 지는데.”

“창문 조금 열어드릴게요.”

초겨울을 담은 바람이 시원하고 맑다. 경쾌하게 굴러가는 바퀴와 타닥타닥 갈리듯 튀어 오르는 자갈 소리도 좋다.

“우와. 진짜 예쁘다.”

“위험하니까 고개 빼지 마세요.”

“시원한데.”

“네.”

“허, 치사해.”

그러자 곧 등 뒤에서도 뭔가 튀어 올랐다. 웃음소리 같기도, 노랫소리 같기도 했는데 약간의 심술이 올라온 겨울은 모른 척하기로 마음먹곤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바람이 정말 좋아서 그런지, 편안하고 느긋해지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든 상관없단 마음이 들 정도로.

 

 

 

망할.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은 무시한 채, 이불에서 기어 나와 겨우 바닥으로 착지한 겨울은 샤워실로 가는 내내 욕을 참지 못했다. 내일부터 촬영인데 술이라니. 제정신 아니지, 진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자기비하처럼 살결에 두텁게 달라붙는 옷부터 훌렁훌렁 벗자 차츰 정신이 돌아왔다. 안 돌아와도 되는 기억과 함께. 해장국. 노을. 그리고………. 으악.

“선배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뇨, 아뇨!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물건을 실수로 떨어트려서 놀랐어요.”

저도 모르게 나와버린 고성부터 수습한 겨울은 정전기 때문에 비죽 솟은 짤따란 머리털을 쥐어짰다.

“서우 씨는 왜 연기하려고요?”

“무슨 말입니까.”

“원래 연출하다가 연기한다는 게 쉬운 선택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한다고 했어요, 연기?”

“……글쎄요. 선배님은 왜 시작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사랑받으려고 했지.”

“그래서 사랑받고 있다, 느끼세요?”

“아뇨. 그럴 리가. 아무도 최겨울 사랑 안 해요. 사랑이고 나발이고, 그게 뭐야. 해본 적도 없어.”

미쳤다. 미쳤어. 미쳤나 봐. 똑같은 말만 염불처럼 외는 가느다란 몸뚱이가 욕실 구석에 처박혔다. 아역으로 출발해 어느덧 차세대를 대표하는 전 국민의 행복 비타민. 언젠가 예능에서 들었던 가볍고 낭랑한 멘트가 좁은 욕실 안에 물소리와 함께 웅웅 울린다. 28살 인생 최악의 위기는 미치게 시리다. 온몸이 새빨개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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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내내 저는 정말 재밌는데 읽어주시는 여러분도 재미가 있으시려나요 덧붙여 본 이야기는 완전히 픽션입니다 저는 아는 거 없고요 늘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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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장국이 어떤 해장국인지는 입맛에 맞게 상상하셔요 저는 뼈다귀해장국도 정말 가끔 먹는 사람이라 별로 감흥 없어서요 돼지국밥도 희게 먹고 해장엔 쌀국수가 제일이라고 생각해요


3

겨울 맛은 하 편에서 좀 더 살려보겠습니다


4

날이 차니 감기 조심하세요 곧 돌아오겠습니다



take your broken heart make it into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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