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아시는 가끔 꿈을 꾼다. 보통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꿈을 꾸고 일어난 날은 어쩐지 조금 더 피곤했다. 어느 날은 누군가에게 쫓기기도 하고, 이상한 설정에 던져져 한참을 헤메기도 하고, 깨자마자 기억이 사라져 도무지 기억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주 가끔 어떤 대화를 하다가 꿈에 대한 화제로 쏠려 "넌 그런 적 없어?"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나 떠올리려 노력해보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요즘은 사정이 달랐다. 비슷한 꿈을 여러 번 꾼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 꿈이 조금씩 길게 이어져나가는 듯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꿨을 땐 단순한 우연이라고 여겼지만 서너 번 정도 됐을 때부터는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잠들기 전 책상에 앉아 간략한 일기를 쓰는 아카아시는 언젠가부터 일기장 한 귀퉁이에도 꿈에 관한 것을 적어두기 시작했다. 대강 "오늘도 그 꿈을 꿨다." 같은 식으로 몇 문장을 붙이는 정도였다. 그 길이가 점점 늘어나 이젠 내용을 기록해나가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말이다. 덕분에 일기장엔 그 날 하루가 어땠는지에 대한 언급은 현저히 줄어들다가 현재는 일기장이 아닌 몽상록(夢想錄)이나 다름 없었다.


다른 학교들과의 첫 합숙을 앞두고 있다는 생각으로 타이트해진 기분의 초여름 직전, 아카아시는 일기장을 펼치고 앉았다. 책상에 켜진 스탠드는 늘 아카아시의 올곧은 필체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잊을만하면 꾸곤 했던 그 꿈이 드문드문 이어진지 거의 1년인 지금, 아카아시는 애매한 아쉬움에 휩싸여 있었다. 어쩐지 다시는 그 꿈을 꾸지 않을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느낌. 아카아시는 펜을 들어 글자를 쓰려다 말고 처음으로 꿈에 대해 신경써 적기 시작한 페이지를 찾아 펼쳤다.



* * *



8月 14日

• 아침에 지각을 했을 뻔 했던 것 말고 특별한 일은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도착하니 네가 웬 일로 아슬아슬한 시간에 나타나냐는 반응을 보여 조금 머쓱했다. 요즘은 방학을 앞두고 다들 들떠있어서 학교 어딜 가든 조금 시끌시끌 하다. 대부분 적당한 말로 타이르고 넘어가시지만 고등학교 입학이 머지 않은 애들답지 않다며 혼을 내는 경우도 있다. 좀 더 바빠지는 입장에선 마음 편하게 놀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린다는게 가끔 부럽기도 하다.

• 이번 여름도 꽤나 덥다는 예보를 봤다. 지금도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하고 있는데, 계속 버텨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 아찔하다. 땀에 흠뻑 젖어선 매일 녹아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는 불평도 점점 많아진다. 이런 날씨엔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다. 늘 그렇듯 아직 한참이나 남은 겨울을 상상해본다.

• 일단 오늘은 일찍 누워보기로 한다. 이상한 꿈에 시달린 것도 어제 잠이 부족해서였던 것 같으니까. 저번에도 꿨던 꿈인 것 같은데, 같은 걸 다시 꾸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조금 오래되어 보이는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들어가면 여기저기 반짝이는데 어쩐지 조용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있다가 꿈에서 깬다. 항상 거기서 끝이 났다. 내가 마음 쓰고 있는게 있나. 어쨌든, 혹시 모르니 알람을 여러 개로 맞춰두는게 좀 더 좋을지 모르겠다.



8月 31日

• 유치할지도 모르지만, 8월이 끝날 때마다 오전 0시를 기점으로 여름도 완전히 끝나버리는 상상을 한다. 9월 옆에 여름이란 단어를 두는 것은 어색하니까.

• 늘 같은 곳에서 끊기곤 했던 꿈이 뒤로 조금 이어졌다. 내가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일까. 선택이라고 하긴 조금 민망하다. 그냥, 다른 행동. 매번 서있던 곳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가까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간 것 뿐이지만. 선물 가게인 것 같았는데 인형이나 열쇠고리, 가방 같은 것들이 있는게 뭐 그냥 평범한 느낌이었다. 딱히 마음에 드는게 없어 구경만 하다가 나오기 직전 눈에 띄는 헬륨 풍선 하나를 샀다. 어릴 때 말곤 만져본 기억이 없는데, 꿈이지만 기분이라도 내고 싶었나보다.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를 하고 나왔을 때 꿈에서 깼다.



10月 15日

• 오늘은 연습이 영 마음대로 되지 않아 심기가 불편했다. 사소한 미스도 잦았다. 이런저런 날도 있는거라는 말은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걸 최소한으로 만드는게 실력이니까. 그래도 날이 선선해져 이전 보다는 살만하다.

• 그 꿈을 또 꿨다.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제자리를 빙빙 돌다 깼다.



11月 3日

• 이제는 낯이 익은 놀이 동산의 매표소. 'Ticket'이란 글자 중 하나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양새다. 나는 자연스럽게 표를 끊고 들어갔다. 우연히 관찰한 티켓에는 자유 이용권 같은 글자가 아니라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Keiji Akaashi'. 그걸 보며 걷다보니 이제는 동네의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을 정도로 익숙한 곳에 서있었는데, 어쩐지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해야 한단 생각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마다 깼었기 때문에. 어떻게 할까 하다가 지난 번에 들어갔던 선물 가게에 들어갔다. 역시나 그렇고 그런 물건들. 나는 오늘도 헬륨 풍선 하나를 샀었다. 풍선 하나를 달랑 들고 서있자니 뭔가 민망해서 가까이 있는 벤치로 걸어가 앉았다. 하지만 풍선을 손에 쥐고 앉아 있는 것도 민망하지 않은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놀이 동산인데 뭐 어때, 하고 있는데 참 조용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없고, 큰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는 놀이 동산이라니. 그때 뒤쪽 어딘가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별로 신경쓰지 않았는데, 느낌상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돌아봤다. 나 이외의 사람은 처음이라 좀 놀랐는데 꿈에서 나랑 아는 사이인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한참 찾았잖아, 같은 말을 했던 것 같다. 내가 선물 가게에 들어가버려서 엇갈렸던건지. 아무튼 나는 그 사람이 내민 손을 자연스럽게 잡았다. 날 보고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보다 키가 좀 더 컸던 남자. 이건 잊을만 하면 다시 꾸는 것 같다. 이번엔 다른 사람이 나왔다는게 좀 신기했다.



12月 27日

• 벌써 연말이라니 믿기지는 않지만, 나름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보냈다. 쌓여 있는 눈이나 빙판길을 피해 조심히 걷는 것이 좀 번거롭긴 해도, 내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게 나쁘진 않다. 사실 정신이 좀 없어서 일기를 쓰는데 조금 불성실해졌다.

• 꿈 속의 매표소 직원이 처음으로 말을 걸어왔다. 대화를 한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가 던진 말이 기억에 남아 하루종일 틈이 날 때마다 떠올랐다. "오랜만에 뵙네요. 하지만 그 분은 오늘 먼저 가버렸어요."였던 것 같은데, 그 말을 하며 티켓을 줄 수 없다 해서 오늘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꿈이란 늘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지만 그 말이 꼭 정말 나를 몇 번이고 만났던 사람이 건네는 말이라고 느껴졌다. 일기장을 뒤적거려보니 마지막으로 꿨던 날이 약 두 달 전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묘한 기분이다.



1月 10日

• 내가 벤치에서 만났던 사람과 함께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놀이 동산 안의 어딘가는 맞았지만 벤치에서는 멀리 떨어진 곳 같았다. "솜사탕 같은거 싫어하나?" 하기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그럼 아이스크림은 어떠냐고 해서 "네, 뭐…." 같은 식으로 떨떠름한 대답을 했던 것 같다. 정말로 먹고 싶었다기 보단 어쩐지 거절하기가 뭐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때 그 남자의 얼굴을 처음 봤는데, 묘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검은 고양이 얼굴의 그것은 눈 부분이 딱히 크게 뚫린 것 같지 않아서 내가 보이기는 하나,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이스크림을 건네주던 손목과 흰 셔츠 소매가 기억난다. 우리는 조금 걸어다니다가 놀이기구를 몇 개 탔다. 회전목마도 탔지만 나 혼자였다. 남자는 내가 샀던 헬륨 풍선을 들고 서서 내가 지나갈 때마다 손을 들어주거나 가만히 쳐다보고 있거나 했는데 (사실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정말 날 보곤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한 번도 손을 같이 흔들어주지 않았다. 회전목마에서 내렸을 때, 그는 내게 풍선을 돌려주었다. "놓치면 안 돼. 그래야 네가 어딨는지 잘 보이니까."라고 하면서. 하지만 그걸 계속 잡고 있는 것도 좀 번거로운 일이라 나는 바지의 벨트 고리에 묶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그랬더니 좋은 생각이라며 풍선을 다시 가져가 내 뒤쪽에 묶었다. 내 상상으론 그 모습이 좀 웃기지 않았으려나 싶다. 다른 곳으로 발길을 옮기기 전에 핸드폰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나도 이 꿈을 꾸는 것을 즐기고 있는거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들고,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은 흥미로워서 되는대로 기록해두려고 한다.



3月 6日

• 입학식이 얼마 남지 않아 싱숭생숭한 기분인 요즘이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때의 아쉬움 같은 건 오래 전 일 같이 느껴질 정도로. 원하던 곳에서 원하는 걸 계속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뜨기도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가벼워지진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 지금 생각해보니 꿈을 꿀 때마다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는 것 같다. 처음 꿨을 때 쯤엔 분명 날이 밝았는데, 오늘은 슬슬 저녁이 되어가나 싶을 정도로 하늘이 물들어 있었다. 몇 달이나 흘렀는데 이제사 저녁이라니, 그 정도로 느린 시간이 현실이면 어떨지 궁금하다. 이번 꿈에선 별 소득은 없었다. '소득'이라고 하니 어딘가 이상하지만. 그저 평범하게 놀이 동산을 거닐었을 뿐이다. 산책만 할거라면 꼭 그 장소가 아니어도 되지 않나. 좀 특이한 것은 그렇게 높거나 무서운 기구들은 없었다는 것과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는 것이다. 통째로 빌린 곳에 초대 받은 것 같다. 아, 거대한 그네 비슷한 곳을 지나칠 때 그 가면을 왜 쓰고 있는지 물어봤는데 남자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얼굴이 보이질 않으니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뭔가 고민을 한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그가 제자리에 멈춰서더니 "내가 얼굴을 보이면 넌 그걸 기억할 수 있어?"라고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의 의미와 대답을 고민했는데, 남자는 가만히 서있더니 몸을 돌려 먼저 걸어가 버렸다. 걸음이 왜 저리 빠른가 하며 열심히 뒤쫓아 가다는데 속도가 나지 않아 힘들어 하다가 잠에서 깼다. 그 사람을 잡고 싶었는데.



4月 18日

• 입학 후 새로워진 것들에 익숙해지고 있는 중이다. 아직 분위기를 파악해가는 중이긴 해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필요 이상으로 신경써봤자 실수만 많아질 것 같아서 주의하고 있다. 새 교복은 어색하지만.

• 저번 꿈이 끊겼던 부분이 조금 가물가물 해서 마지막으로 썼던 부분을 찾아봤다. 오늘도 기억나는대로 적어보자면, 목소리를 쥐어짜냈는데도 큰 소리가 나지 않아 꽤 고생했다. 겨우겨우 소리를 냈을 때 (이름을 몰라 저기요, 정도로 부른 건 조금 미안했다.) 그 남자가 멈춰 섰다. 그제야 나는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를 따라가는 느낌으로 걸었는데 잠시 후 멈춘 곳은 대관람차 앞이었다. 내 쪽으로 가만히 고개를 돌려보기에 "이번에도 나 혼자 타라는건 아니겠죠." 했더니 "같이 타자."고 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고 앉았다. 바람 소리가 멀게 들리는 좁은 공간에 있으니 갑자기 약간 어색한 느낌이 들어서 가면을 쓰고 있는게 답답하진 않느냐는 말을 꺼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궁금하냐고 묻기에 솔직히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대관람차에서 내리기 직전 "무언가 바라지 않기로 했었는데."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회전목마, 한 번 더 탈래?" 하는 질문을 했는데 왜 회전목마랑 대관람차만 타느냐고 하니까 "꿈이랑 제일 어울리잖아." 하곤 앞서 걸어갔다. 이게 꿈이라는 걸 아는거야? 속으로 그렇게 묻는 순간 눈을 떴다. 감흥 없는 알람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도 나는 한참 동안 멍한 상태로 누워있어야만 했다.



* * *



아카아시는 정리되지 않은 문장들로 두서없이 쓰여진 기록들을 모두 읽은 후에도 쉽사리 펜을 움직이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참 지루할지도 모르는 꿈일 뿐인데 뭐가 이리 사람 기분을 오묘하게 만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누군가 "네가 꿨던 꿈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뭐야?" 하고 묻는다면 단박에 이 꿈을 떠올리겠지만, 이 기분을 상대에게 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 기분을 설명하려 해봐도 듣는 사람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냥 놀이 공원에서 놀다 온 꿈이잖아?" 같은 말이나 하겠지.


검은 잉크를 토해내는 펜이 가장 먼저 만들어낸 것은 어떤 글자가 아니라 서툴게 그려진 회전목마였다. 언뜻 보면 초가집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간략하게─아카아시는 방금 '간략한 그림'이라는 건 못그렸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그려진 모양새다. 타인이 훔쳐볼 일도 없을텐데 그 엉성함이 걱정됐는지 아래에 작게 '회전목마'라고 적었다. 하지만 본인이 기억하는 고양이 가면 만큼은 제법 그럴싸 하게 그려냈다는데선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제 손에서 펜을 빙빙 돌리던 아카아시는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맨 윗줄에 날짜를 적었다.



5月 4日

• 오늘은 아침 부터 기분이 멍해서 하루를 어떻게 마무리 했는지 모르겠는 날이다. 수업 시간에 이름이 불리거나 해도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하고, 이야기를 하다가도 "그렇지?" 같은 말을 두 세 번 정도 들어야 으응, 하고 대답하는 일이 잦았다. 그 이유는, 거의 1년 정도 이어져 온 이 꿈이 오늘을 마지막으로 끝나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심란하지만 가까운 사람에게 상담을 해볼 정도의 일은 아니기에 혼자 마음에 담아두고만 있었다. 이렇게까지 느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 조금 부끄러워지지만, 글로 적어두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 지금껏 나는 내가 꿈 속의 주인공이라기 보단 '그것을 구경하는 또 다른 나'라는 느낌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깨져버린건 아마 그 남자 때문일 것이다. 날은 처음 보다 많이 어두워져 있었고, 우리가 회전목마 앞에 도착했을 땐 은은한 불빛이 켜져 있었다. 잔잔한 노래도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광경이 꽤나 예쁘다고 생각했다. 다락방에서 우연찮게 오르골을 열면 나올 것 같은 모습, 이라는데서 상상되는 그것과 비슷했다. 우리는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안 가 회전목마가 멈추었을 때, 남자는 가만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 나만 타요?"라고 물어도 아무 말이 없어서 나는 별 수 없단 생각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장 바깥 쪽의 아무것에나 올라타 앉자 회전 목마는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차, 풍선을 맡기는 걸 깜빡했다, 했지만 어디 걸리거나 하진 않아서 괜찮겠지, 하고 신경쓰지 않았다. 남자는 단 한 번도 손을 흔들어주지 않았다. 그저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었을 뿐. 이상하게도 난 그게 어쩐지 서운해져서 그 남자가 보이지 않는 잠깐 동안에도 상체를 이리저리 움직여 그를 찾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회전목마에 타는 동안엔 나와 그 남자 말곤 주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새카맸던 것 같다. 회전목마가 멈추고 내가 거기서 내려왔을 때, 우린 서로를 마주보고 계속 서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 남자였다. "기억할 수 있어?"라는 맥락 없는 질문.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체 하면, 와줄거야?"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알 수 없는 울먹거림이 자꾸 올라와 참느라 혼났다. 남자는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난 ……ㄹ… 테ㅊ…야." 자신의 이름을 말해준 것 같았다. 나에게 자기 이름이 뭐냐고 되물어서 내가 대답했고, 그 일을 다섯 번 정도 반복했다. 남자는 내 손을 잡더니 자기 손에 천천히 깍지를 꼈다. 그리곤 다른 손으로 한참 동안이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절대 잊으면 안 돼. 아냐, 넌 깨어나자마자 날 잊을거야. 그래도… 날 잊으면 안 돼." 분명 웃으면서 말했던 것 같은데 난 이상하게도 그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갈 시간이야." 우리는 출구를 향해 걸었다. 보고싶을거예요, 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매표소에서 봤던 직원이 그 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을 향해 걸어가다 허전한 느낌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나와 함께 걷던 남자가 제자리에 서있었다. 안 가느냐고 물었더니 "풍선이 없는 널 어떻게 찾지?"라고 물어왔다.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름을 말해줘요."라고 대답했다. 그제야 그는 인사하듯 손을 흔들어줬다. 남자가 '웃었다'고 느낀 순간 잠에서 깨어났는데, 꼭 기억할거라고 생각했던 그 얼굴과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게 너무 속상해서 남모르게 눈물을 찔끔 했다. 바보 같다.



아카아시는 쉬지 않고 적어내려간 글을 한 번 훑어내리곤 뻐근해진 손을 주물렀다. 노트 위에서 도르륵 굴러가던 펜은 필통 옆에 멈췄다. 스탠드를 끄고 자리에 누운 후 한참 동안에도 그 남자를 떠올렸지만 아무것도 기억나는게 없었다. 그렇게나 몇 번이고 대답했는데, 다른 것들은 그리 자세히 기억나는데 어째서 그의 얼굴과 이름만 이리도 흐릿한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사실 그거, 꿈일 뿐이잖아? 그런 마음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그 절실했던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약속을 잊어버린 것 같은 죄책감 비슷한 것에 맘이 눌린 하루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눈꺼풀 덕분에 겨우겨우 끝날 수 있었다.



* * *



요즘의 아카아시는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조금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일기장엔 별 다른 말을 적지 못하고 잠들었다. 여름 합숙을 앞둔 요즘의 연습은 전보다 타이트해진 느낌이었지만, 보쿠토 코타로라는 사람은 늘 그마저도 부족한듯 했다.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제는 꽤나 익숙해져 자연스럽게 그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는 아카아시였다. 다른 선배들은 본인들 몫에서 탈출했다는 기쁨과 아카아시에 대한 미안함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보쿠토 모르게 눈빛을 보내곤 했다.



"아카아시는 첫 합숙인데 긴장 안 돼?"

"조금요. 기대도 되지만."



하지만 간혹 성가신 것만 빼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후부터는 가까워지는데 무리가 없었다. 늦게까지 개인 연습을 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에 나누는 짧은 대화들도 한 몫 했을지 모른다. 덕분에 이젠 굳이 매점까지 함께 가는 사이가 되었는데, 스파이크를 꽂을 때마다 미세하게 날려오는 바람엔 매번 숨이 탁 트인다.


그렇게 후쿠로다니의 세터로써 자리를 잡아가는 사이, 아카아시의 일기장엔 꿈이 어땠다느니 하는 내용이 끼어드는 일은 없었다. 연습 말고는 특별한 일도 없어서 개인 연습 일지가 되어버린지 오래였다.



"졸려."

"그러게 어제 일찍 주무시라고 했잖아요."

"떨려서 잠이 안 오는 걸 어떡해! 블로킹 연습 잔뜩 할 거니까."

"매일 하시는거면서."



합숙 장소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아카아시는 가만히 창 밖을 응시했다. 서로를 파악하는 미묘한 눈빛들이 난무할 분위기와 AB전 내내 오고 갈 긴장감을 상상해본다.



"넌 깨어나자마자 날 잊을거야."



불쑥 떠오른 한 마디에 기분이 묘해진다. 그래,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어렵사리 보여준 얼굴이나 몇 번이고 말해준 이름 같은 건, 눈을 뜨는 그 찰나의 순간에 모두 사라져 버렸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덜컥거리는 이유는 뭘까. 아카아시는 그가 속삭이던 이름을 떠올려보다 이내 포기했다. 옆에서 한껏 신이 난 보쿠토가 자꾸만 말을 걸어온 탓도 있었다.


합숙 장소는 그리 먼 곳이 아니어서 얼마 걸리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딱 지루해지기 직전에 내리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천천히 버스에서 내렸다. 이미 먼저 도착해 연습을 시작한 학교들은 체육관 안에 모여 시끌시끌 했다. 옷부터 갈아입어야겠지, 하며 걸어가는데 뒤에서 큰 소리로 인사하는 보쿠토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뒤이어 도착한 버스에서 내린 네코마 배구부가 보였다. 유독 어떤 한 명과 티격태격 장난을 치는 걸 보니 가까운 사이인듯 했다.



"아카아시!"

"……."

"아카아시이!"

"네네, 보쿠토 상. 갑니다."



방향을 틀어 되돌아가자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소개하며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1학년이라느니, 큰 기대는 안 했었는데 엄청 마음에 든다느니, 그러고보니 켄마도 아카아시도 세터라느니, 둘이 맞붙으면 어떨지 궁금하다느니 하는 별 내용 없는 것들이 그것이었다. 살짝 고개를 꾸벅 하자 켄마라는 이름의 세터는 눈짓으로 인사를 대신하더니 게임기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코노하가 부르는 소리에 보쿠토는 알았다고 대답하며 얼른 가자는듯 고갯짓을 했다. 하이텐션을 주체 못하는 발걸음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카아시는 "얼른 뒤따라갈까~" 하는 말소리에 고개를 들었는데, 순간 마주친 시선에 당황했다. 버스에서 언뜻 들었던 차기 주장이 이 사람인가? 어지간히 날카롭게도 생겼다. "아아…, 네." 어정쩡한 대답 말곤 별 다른 대화는 없었지만 체육관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아카아시는 혼잣말을 빙자한 질문을 받았다.



"내 이름 안 궁금해하네."

"아, 이름이…."

"뭐게?"

"네?"

"엄청 고민하다 알려줬던건데 섭섭하잖아? 물론 예상은 했지만."



뭐야, 이 사람. 아카아시는 다른 대꾸를 하기도 전에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검은색의 반팔 티셔츠가 더운 바람에 흔들거렸다. 이 기시감은 대체 뭘까 싶어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역시 아쉬워서 안 되겠네, 하는 말이 들렸다. 빙글 돌아 제자리에 서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천천히 드러내는 것을 보곤 아카아시의 눈은 무언가를 깨달은듯 커졌다. 제대로 정리할 수는 없는 상태로 만들어진 어떤 확신은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자마자 참을 수 없는 감정으로 터져나왔다.


또 뒤돌아 가지 마요.


아카아시는 그가 서있는 곳을 향해 뛰어가듯 걸었다. 처음 보는 사람의 옷을 그렇게 필사적으로 잡아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성적으론 아무 설명도 할 수 없지만 그냥 알 수 있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아카아시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회전목마, 혼자 타기 싫었어요."

"……."

"그런데 같이 타자는 말을 못했어요."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아카아시를 내려다보던 그는 가만히 상체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난, 쿠로오 테츠로야. 널 한참 찾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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