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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당황한 초록색 눈동자에 작은 파문이 인다. 토르의 입에서 세 글자가 흘러나온 순간, 로키는 제 귀를 의심했다. 마치 세상이 순간 정지한 것만 같았다. 오직 로키 자신만 내버려 두고. 난 기껏해야 불타는 며칠 밤 정도를 생각하고 꺼낸 말이었는데… 뭐라고? 결혼식? 곱게 미간을 찌푸린 로키가 재차 물었다.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형. 결혼식… 이라고?"

"아니. 제대로 들었구나, 동생아."


…이런 세상에, 부리 신이시여. 멍하니 입을 벌린 로키가 잠시 공허한 침묵을 지켰다. 이건 정말, 자신의 투구를 걸고 맹세하건대 정말 한 번도, 단 한 번도 바란 적 없었던 일이었다. 하다 못해 그의 뇌리를 스쳐지나간 적도 없는 단어였다. 자신이 다시금 토르의 하나뿐인 동생이자 연인으로 아스가르드에서 살아가게 된 것만 해도 기실 기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래서 그냥, 두 형제가 발할라로 갈 때까지, 혹은 이 모든 감정이 식어 재가 될 때까지 그저 이렇게 지내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하나뿐인 형이, 설마하니 자신을 '공식적인 동생이자 연인'으로 제 곁에 세우려 들 줄이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형과 사랑하는 것과 그걸 모두에게 알리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 그래, 그렇잖아? 내 생각이 틀린 게 아닌 거잖아? 여기까지 생각이 이른 로키가 다시금 입을 연다.


"음, 형. 내가 진지하게…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음?"

"…우리 위대하신 아스가르드의 토르 폐하께서, 같은 배에서 나진 않았어도 어릴 때부터 쭈욱 함께 자라 온 동생과 그… 좀… 일반적인 형제 사이보다 침대 위에서 좀 더 깊고 에로틱한 사랑을 나누는 관계가 되었다는, 그런… 사실을… 음. 이렇게 온 우주에 대놓고 소문을 내는 게, 과연… 좋은 생각일까?"

"오, 나는 무척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로키."

"아니, 그러니까!"


태연한 얼굴로 대답하는 토르를 보니, 가슴 속이 왈칵 답답해진 로키가 언성을 높인다.


"우리가 굳이 꼭 모든 사람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건지, 난 그걸 묻고 싶은 거라고!"

"난 오히려 그 질문을 네게 돌려주고 싶구나, 동생아. 반대로 우리가 그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


언제 이렇게 토르의 혀가 매끄러워졌지? …이 교활한 폐하 같으니. 딱딱하게 굳어진 로키의 얼굴과는 반대로, 토르의 얼굴은 몹시도 평안해 보였다. 정말이지 밉살맞은 표정이었다. 당장이라도 옆구리를 찔러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참으며, 로키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래, 뭐 좋아. 일단 다 좋다고 치자고. 하지만 우리의 뒷일을 좀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어? 결혼식을 올릴 것이라 선포한다고 쳐. 근데 만약 형의 후계자 문제를 들멱이면서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자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그땐 어쩔 건데? 겨우 찾은 평화로운 아스가르드의 일상이 다시금 우리 때문에 엉망이 되면?"

"내… 후계자?"

"그래!"


몹시도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로키가 대답했다. 


"우리가 발할라로 갈 떄가 오더라도 아스가르드는 계속해서 존재하겠지. 그럼 형의 뒤를 이어 아스가르드의 왕이 될 누군가가 있어야 될 것 아냐! 아마 모르긴 몰라도, 벌써 누군가는 또 형의 자리를 노리고 있을 거란 말이야. 생각해 본 적 없어? 그 왕좌가 어떤 멍청이들에게는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일지?!"

"…"

"할아버지에게는 오딘이 있었고, 아버지에게는 형이 있었어. 그럼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누가 있지? 나?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설마 나한테 낳아 달라고 할 생각은 아니길 바라. 보다시피 난… 일단은 남성의 몸이니까. 내가 여자로 변신할 수 있다고 해서, 아이까지 낳을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라고! …어쨌든 이건 그저 하나의 예일 뿐이지만, 앞으로 형이 아스가르드를 통치하는 데 있어 꾸준한 걸림돌이 될 만한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고. 이런 건, 사실 우리가 먼저 들쑤시고 나오지 않으면 조금 더 오래 묻어둘 수 있는 문제야. 그런데 그걸 굳이 앞당겨서 들고 나올 구실을 만들어 줄 필요는 없단 말이야!"

"…음, 그래. 로키. 나도 알아. 알고 있다."


동생의 폭풍 같은 힐난이 끝나고 나자, 토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상치 못한 엄청난 책망을 받은 탓인지,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는 조금 더 탁해져 있었다.


"너는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나 역시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야. 제법 오랫동안 고민했단다. 내 사랑하는 동생을 잠깐도 보러 가지 못할 만큼, 그렇게 치열하게 말이다."

"…"

"그리고 결론을 내렸지. 역시 그런 문제는 말이다…"

"…?"


자신을 떨떠름한 눈으로 보는 로키를 향해, 활짝 웃은 토르가 내뱉었다.


"우리 둘이 한 이천년쯤…? 같은 침대를 사용한 이후에나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더구나."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토르?"

"오딘의 수염에 맹세코 그럴 생각은 없단다. 로키."

"오, 제기랄! 대체 이게 뭐야?!"


언제나 고상함과 우아함을 잃지 않던 동생의 입에서 오랜만에 심히 예의가 없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장면은 신선했다. 저런 모습조차 사랑스럽다고, 토르는 멍하니 생각했다. 로키는 자신과는 다르게 몹시도 섬세한 구석이 있어서, 가끔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부분까지도 일일이 계산하고 신경을 쓰는 버릇이 있다.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길 바랐다. 적어도 자신과의 문제에서만큼은. 이로 인해 어떤 결과가 도래하든, 자신은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었다. 하물며 발할라에까지 찿아가 죽은 로키의 영혼을 되살려낸 자신이 아닌가. 


토르의 생각은 그러했으나, 정작 이들의 문제는 '결혼식'이라는 화제에 대한 둘의 사고방식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데에 있었다. 안타깝게도, 토르는 사랑하는 동생이 아직도 제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를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존재가 사랑하는 이의 오점으로 남길 바라지 않았다. 심지어 피를 나눈 사이인 이들도 뭔가 계기가 생기면 서로 갈라지지 않는가? 라그나로크가 일어났던 바로 그날, 수르트를 깨우기 위해 궁으로 들어왔던 로키는 어린 시절부터 줄창 봐 왔던 홀 천장의 벽화 너머의 그것을 보았더랬다. 피를 뒤집어 쓴 정복군주인 오딘과, 그녀의 곁에서 위풍당당하게 군을 지휘하고 있었던 헬라를. 하지만 오딘의 정복을 그만두며 홀로 지옥 속에 갇혀버린 헬라를. 아무리 잊으려 애써도 그녀가 맞은 결말은 로키의 뇌리에 깊게 박혀 떠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은 그녀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로키는 그녀처럼 온 세상 만물을 자기 밑에 두기 위해 피를 찾아다니는 전쟁광은 아니지 않은가? 단지 가벼운 장난을 치는 걸 조금 좋아할 뿐이지. 


어쨌든, 헬라는 아홉 왕국을 현명하게 다스려 왔던 자기 아버지의 치세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단 하나의 얼룩이 되었다. 형과 자신의 삶은 길었다. 친자식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의붓동생인 자신이 그러지 않으리라는 가능성이 제로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의심은 그의 주특기였다. 로키의 내면에 토르에 대한 사랑이 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토르의 진심까지 알게 되며 이전보다 좀 더 옅어진 것일 뿐. 여전히 그는 완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언제나 아름답고, 강하고, 고결하고, 간혹 멍청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자신의 하나뿐인 형을 사랑했기에, 토르와의 관계를 모두의 앞에서 공인하는 것은 오히려 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로키는 자신이 결국 그 신중함을 포기하게 되고 말 것이라는 점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토르의 기질과 관련되어 있었다. 


토르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결심이 서면, 그리고 그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면 끝까지 관철해내는 이다. 하물며 그 문제에 관련되어 있는 게 동생인 로키에 관한 것이라면, 그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터였다. 정말 슬프게도, 로키의 형은 그보다 고집이 훨씬 셌다. 고집만 센가? 힘도 셌다. 자신이 형보다 완력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결과는 분명 달라질 것이라고, 로키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바람은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잠시 물러서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나을 것이다. 긴 침묵 끝에, 생각을 정리한 로키가 입을 열었다. 


"좋아, 일단."

"…?"

"…생각해 볼게. 한 번 생각은 해 보자고, 생각은."

"로키…!"

"아직 Yes라고 말한 건 아니야, 형. 아니라고!"


제 말이 끝나자마자 토르의 입가에 떠오르는 웃음기를 감지한 로키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었다. 만약 결혼식을, 하게 된다면 준비해야 할 게 얼마나 많겠는가. 고대의 마법을 좀 더 연구할 시간은커녕, 도서관에 박혀 마법책을 읽을 시간마저 모조리 다 빼앗기게 되겠지. 어서 제 방으로 돌아가 쉬고 싶어져서, 로키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토르가 그런 그를 부축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팔을 뻗었지만, 동생의 괜찮다는 손짓에 다시금 자세를 바로했다. 완연한 햇살 아래, 아까보다 조금 더 창백해진 얼굴의 로키가 말했다.


"난 이만 쉬어야겠어. 우리 폐하께서도 본래 했어야 할 일이나 하러 가시는 게 좋겠군. 그럼…"

"잠깐, 로키! 저녁 회의가 끝난 후에 잠시 보자꾸나. 오늘만큼은 네 곁에 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틀거리며 사라지는 동생의 뒷모습이 위태로워, 벌떡 몸을 일으킨 토르는 그저 멍하니 그 쪽만을 바라본다. 그의 곁에는 풀잎이 잔뜩 붙은, 붉은 망토자락만이 남았을 뿐이다. 혼자만의 갈등에 빠져 있는 동생의 입술이 오늘따라 유난히 붉었던 것 같다는 생각에, 토르 역시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에 어딘가 촉촉하고 불순한 감정이 어려 있는 것은 물론이었다. 토르는 자신의 무지를 탓했다. 얼마만에 제대로 본 동생의 얼굴인데, 어떻게 키스 한 번 해 주지 않고 그대로 보냈단 말인가! 어쩌면 자신은 그리 좋은 연인은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곧, 로키의 입술이 통통하게 부풀어오르고 종내는 부르틀 때까지 키스를 퍼부을 수 있으리라. 어디 입술뿐이겠는가? 좀 더 은밀한 곳까지도…


"하루쯤 쉬어가는 대가로는 나쁘지 않군."


결혼식. 그 단어를 혀끝에서 천천히 굴려 보던 토르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래도 이 정도면 차고 넘치는 대가가 아닌가? 로키의 입에서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지만. 오랫동안 한 자세를 유지해, 살짝 굳어버린 근육을 풀어 주던 토르가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곳에서 바라본 아스가르드의 하늘은, 최근 자신이 올려다 본 하늘 중 가장 아름다웠다.


*


아스가르드의 왕제는, 꼬박 삼일 밤낮을 새며 갈등한 끝에야 토르의 제안에 동의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자신이 이길 수 없는 문제를 오래 붙들고 있지 않는 동생의 성격상, 로키가 대답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을 소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했지만, 의외로 빠른 허락에 아스가르드 왕의 기분은 요 며칠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급하지 않은 일들은 마뜩잖은 얼굴의 브룬힐데에게로 넘긴 후, 대낮부터 동생의 집무실을 찾아온 형은 피로와 짜증으로 며칠 동안 가시를 바짝 곤두세우고 있는 고슴도치를 온갖 달콤한 말로 어르고 달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는 별 소득이 없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로키의 얼굴에, 토르는 정말 필사적이었다.


"네 취향대로 모두 맞춰 주마, 동생아. 응?"


윤기 나는 검은 책상 위에, 로키를 위해 그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막 올려놓은 토르가 한껏 심통이 나 있는 그를 살살 달래며 말했다.


"너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고상한 것을 좋아하지 않느냐. 아스가르드 최고의 장인이 우리의 결혼식 예복을 만들어 줄 거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푸른 이파리와, 붉은 꽃잎들이 별처럼 박힌 망토도 함께 말이지. …그래, 어릴 때의 너는 니다벨리르에서 만들어진 아버지의 팔찌를 무척이나 갖고 싶어했지. 내가 에이트리를 찾아가, 우리의 결혼을 축복하는 의미로 새로운 황금 팔찌를 만들어 달라 말할 거다. 네 눈처럼 맑은 에메랄드를 촘촘히 박아 달라고 하마. 그리고 네 목덜미가 허전하다면…"


토르의 따뜻한 손가락이 천천히 동생의 흰 목덜미를 쓸자, 반사적으로 로키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런 반응이 몹시도 흡족한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토르가 하던 말을 마저 잇는다.


"그 또한 만들 수 있겠지. 네 마력을 증폭시킬 수 있는, 마법의 힘이 담겨 있는 목걸이 말이다."

"…오."


비로소 로키가 반응을 보였다. 토르의 이번 제안이 꽤나 흥미로운 듯,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올린 그가 노래하듯 말했다.


"그건 좀… 구미가 당기는데? 그런 게 있다면, 내가 형을 이기는 것도 마냥 꿈은 아닐 거야. 어쩌면 이번엔 정말로 형을 때려눕힐 수도 있겠네."

"그래. 할 수 있다면 해 보거라, 로키. 네가 내게 대련을 하고 싶다 말한다면 기꺼이 그리 해 주마."


연인이라고 보기에는 꽤나 살벌한 말들이 오가고 있음에도 그저 제 눈앞의 동생이 사랑스럽기만 한 듯, 토르는 로키의 이마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애정이 가득 담겨 있는 그의 눈은 상냥하고도 따뜻했다. 후에 그들의 결혼식이 성사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영특한 너구리는 이 대목에서 '망할 해적천사! 내가 가르쳐 준 방법이긴 하지만, 아주 두 놈들이 쌍으로 지랄들을 하고 있네!'라는 평을 남겼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둘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면 이 참에 네 그 거대한 뿔이 달린 투구를 새로 제작하는 건 어떻겠느냐, 로키?"

"고맙지만 그건 사양할게. 아직 제법 쓸 만하거든. 결혼식에서조차 투구를 쓰고 있으라는 거야? 형의 예전 그 대관식처럼, 습격이라도 있을 예정이야?"


여전히 냉소적인 어투였지만, 말의 끝자락에는 키들거리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래서일까. 사랑하는 동생이 망쳐 놓았던 먼 옛날의 일을 꺼냈음에도 불구하고 토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어꺠를 으쓱한 로키가 마저 말했다.


"그렇게 많은 걸 준비할 필요는 없어. 설마 내게 니다벨리르를 통째로 갖다 줄 생각인 건 아니지?"

"네가 원한다면 무엇인들 아깝겠느냐, 동생아. 다만… 아스가르드의 평화에 저촉되지 않는 한에서라면 말이다."

"흐음. …형은 폭군이 되긴 글렀네. 안 그래?"

"오, 그 편이 훨씬 더 낫지 않겠느냐? 고상하고, 사랑스러운 나의 동생과 평생 함께 아웅다웅하며 살려면 말이다."


이런, 조금 더 토르를 골려 줄 생각이었는데! 아쉽게도 로키는 결국 사랑하는 제 형을 향해 웃고 말았다. 살짝 비어져나온 틈새를 놓치지 않은 토르의 손이 슬금슬금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감싸안자, 로키가 자연스레 제 형의 어깨에 살짝 기댄다. 어릴 때부터 서로를 봐 왔던 형제는, 안타깝게도 서로의 화를 풀어 주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웃음을 멈춘 로키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다시금 질문을 던진다.


"전에도 했던 얘기지만, 토르. …난 여자가 아니고, 형의 아이를 낳을 수도 없어. 형과 내가 '공식적인' 관계가 된다 해도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저들 앞에서 요란하게 결혼식을 올린다고 해서, 대체 뭐가 달라지는 건데? 왜 이렇게 하고 싶어하는 거야?"

"…달라질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난 온 우주에 선언하고 싶은 거다. 동생아."

"…"


왕의 음성은 낮고도 진중했다. 한층 깊어진 그의 눈동자가 자신을 주시하자, 로키가 입을 꾹 다문다.


"그들 모두가, 우리가 서로의 잃어버린 반쪽임을 알 수 있도록 말이다. 그 어떤 것도 너와 날 갈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하고 싶은 것이지."

"…흐음. 그렇다 해도… 그게 우리가 결혼식을 거행해야만 한다는 필수적인 이유가 되기엔 조금 부족한 것 같은데?"

"오, 왜 충분치 않단 말이냐? 훗날 아둔한 누군가가 네게 감히 수작을 걸어 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조차도 달갑지 않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 형에게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세운 로키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으로 유쾌함이 어려 있는 웃음이었다. 거리에 나타날 때마다 모든 이들의 눈길을 한 번에 사로잡는 외모의 소유자가 그런 말을 하니, 되려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그런 말은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냐? 외모든 능력이든 간에, 내 명성은… 몹시 안타깝지만 형에겐 조금 못 미친다고. …정말 인정하긴 싫지만."


말을 끝내는 순간, 로키의 뱃속에서 묘한 감정이 일었지만 그는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그 묘한 감정은 아마도 질투심일 것이었다. 자신이 강인하고 아름다운 제 형에게 평생 품어왔던 그것. 이럴 때마다 로키는 자신과 토르가 긴 시간 동안 함께 자라 온 형제라는 것을 다시금 새로이 깨닫곤 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제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내 명성이 어디에까지 알려져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로키. 이건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야."


토르가 거칠게 말했다.


"그래, 나도 알아."


로키도 그에 응수했다. 일순 그의 집무실 안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로키는 이 상황이, 어린 시절부터 가끔 겪곤 했던 형제 간 감정의 대치 상태라는 점을 기억하고 있었다. 성향이 달라도 너무 달랐던 둘은 평소엔 잘 싸우지 않았지만, 아주 가끔, 이런 상태가 며칠을 넘겨 지속될 때가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토르가 먼저 자신의 방을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물론 대다수의 경우에는…


"…좋아. 뭐가 됐든 난 형 곁에 있을 테니, 상관없겠지.."

"나도 마찬가지란다."


놀랍게도, 로키의 한 마디에 토르의 얼굴은 따사로운 봄볕처럼 풀어졌다.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가 사르르 녹자, 로키가 찬찬히 숨을 들이쉰다. 여전히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는 쉽지 않은 일이니까. 하물며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일지라도. 그의 녹색 눈동자가 토르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정말 솔직히 말하면, 토르."

"…네가 '솔직히'란 단어로 말을 시작하면 난 조금 불안해지곤 한단다, 동생아."

"오, 그럴 필요 없어.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리니까.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건, 형이 날 제대로 '설득'하는 거야. 난 여전히 우리의 사이를 타인에게 공인받고 나면… 형제끼리 결혼하고 나면 뭐가 달라질거라는 건지 이해가 안 가거든."

"…"


자신을 바라보는 로키의 눈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짙은 초록색으로 물든 그의 눈동자는 또릿했다. 이것은, 그의 사랑스러운 동생이 진실한 '대화'를 원한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의 말에 엄숙히 고개를 끄덕인 토르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로키에 대한 그의 감정은 단순히 사랑, 이라는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랜 세월 함께 자라 온 형제에 대한 내리사랑과 육체적 관계를 나누고자 하는 에로스적인 사랑이 뒤섞여 있어, 당사자인 토르조차도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요약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 로키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어쩌면 로키는 이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게 수치스러운 걸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자신의 동생은 진흙탕을 밟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잘 하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심리 추측을 하려니, 그의 머리는 쥐가 날 지경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단순하게. 눈을 감은 토르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번쩍, 눈을 뜬 토르의 풍부한 속눈썹이 파르르 흔들렸다. 자신조차도 잠시 잊고 있었던, 가장 본질적인 이유가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로키를 향해 해야 할 말이 떠오른 즉시, 토르는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왕의 대관식만큼이나, 결혼식은 특별한 일이지 않느냐."

"그렇겠지."

"그리고 내 생에, 누군가와의 결혼식은 단 한 번뿐일 거다, 로키."

"…?"

"그러니 나의 왕비도 내가 살아 숨쉬는 동안에는 오직 단 한 명뿐일 테지. 동생아, 바로 네가 내 왕비가 되어 줬으면 좋겠구나. 오직 너 하나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이니."


차분하게 말을 마친 토르를 멍하니 주시하는 로키의 표정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없었다. 환희도, 절망도 보이지 않는 그의 창백한 얼굴은 토르가 늘 봐 왔던 그것이었다. 손을 뻗어 로키의 차가운 볼을 감싸 쥔 토르가 자상하게 말한다.


"때로는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 쪽이 더 나을 때가 있지 않느냐."

"…"

"발할라에서 나를 따라 돌아왔던 그 날처럼, 한 번만 더 나를 믿어다오, 로키. 내가 너와 결혼하여 너를 내 왕비 자리에 앉힌다고 해서, 네가 내 하나뿐인 동생이라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형, 난…"

"네가 뭘 걱정하는지 조금은, 아주 조금은 짐작이 간다. 하지만 부디 이 추측이 맞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이 또한 기억해다오, 동생아. 나는 너를… 결코, 내 누이처럼 만들지는 않을 거다. 누이처럼 그렇게, 홀로 운명에 맞서다 생을 마감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야."

"!"

"…나는 아버지가 아니니."


크게 일렁이는 로키의 눈동자는 그의 마음 속 동요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남아 있는 자신의 가슴 속 어둠을 정확히 짚어낸 토르의 말에 요동치기 시작한 마음을 가다듬기도 전에, 그의 머리를 끌어당기는 손이 있었다. 곧이어 입술이 겹쳐졌다. 오랜만에 맛보는 연인의 입술은 달았다. 얄팍한 아랫입술을 가볍게 핥고 깨물어 안으로 스며들어오는 키스는 부드러우면서도 불같았다. 그새 방치해두었던 몸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자신의 몸을 끌어안은 두툼한 손이 이내 관능적인 손길로 천천히 마른 등을 쓸어내리자, 로키는 금방이라도 토르를 침대로 이끌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복잡한 머릿속이 하얗게 불타 사라질 때까지 있는 대로 허리를 흔들고, 교성을 내뱉고, 하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토르의 인내심이란 쓸데없이 대단한 것이어서, 키스를 끝낸 후 그는 그저 로키의 몸을 가만히 끌어안은 채 어깨에 턱을 올려두고 있을 뿐이었다. 잔잔한 목소리로, 토르가 입을 열었다.


"나와 결혼해 다오, 로키."

"…그래."


그래, 해. 결혼하자, 형. 로키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줄곧 그의 가슴 속에 남아 있던 불안의 안개는 어느새 꺠끗하게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래, 좋아. 형의 옆에 설 수 있는 이는 오직 나뿐이란 걸 보여줘. 우리가 함께, 같은 공기를 들이쉬고 호흡을 교환하는 그 길고 긴 생애 전반을 통틀어, 오직 서로의 존재만을 바라보고 가슴 속에 담을 거란 영원불멸의 약속. 그거 하나면 돼. 아스가르드의 하늘 아래에서, 모두의 축복을 징표로 삼아서. 나와 결혼해 줘. 사랑하는 나의 형, 나의 폐하. 


토르의 얼굴에 기쁨이 번지는 것을 바라보며, 로키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약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살아온 자신의 인생에서, 지금 이 순간만큼 가슴이 떨리는 순간은 없었다. 그런 둘을 축복하기라도 하는 듯, 로키의 집무실 창문 밖에서 퍼엉, 하고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아스가르드 왕족의 집무실과 한참 먼 거리에 있는 로켓의 방에서 무언가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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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거의 다 왔네요. 다음에는 올댓유 완결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늘 읽어주시는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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