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은 종이봉투였다.
읍내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 너머에서는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진아, 집에서 뭐, 종이로 된 쇼핑백 같은 거 있지, 하나만 가져와라. 그러고서 전화는 끝. 참 나, 내 대답은 듣고 끊어야 될 거 아니야.... 툴툴대며 집 어디에 처박혀 있던 종이봉투 하나를 꺼냈다.
종이봉투를 챙길 때부터, 병원에 다른 누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 병실에 두 분 말고 달리 있을 사람도 없고, 있던 적도 없고. 그런데 그날은 달랐단 말이지. 웬 젊은 남자 하나가 빈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그쪽으로 고갯짓을 하며 물었다.
“뭐야?”
“이쪽 손자.”
“웬 손자. 그간 보이지도 않더니.”
손은 종이봉투를 내밀면서 시선은 그 남자에게 고정돼 있었다. 병실에서 나올 때까지도 그 남자만 봤다. 자꾸 눈에 밟혀. 어디에서 봤었나? 이런 식상한 작업 멘트 같은 걸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진짜 본 것 같았다. 저 코 하며, 속눈썹 하며....
저 사람이 궁금해졌고, 내 성격상 그런 거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거다. 언뜻 들으니까 자기네 할아버지 댁에서 지낸다는 것 같아서 그날 이후로 틈 날 때마다 할아버지 댁으로 갔다. 또 언뜻 들은 그 사람 이름은 윤화평이랬고.... 할아버지가 그만 좀 오라며 슬슬 질려할 때 쯤, 그때 다시 만났다, 그 남자를.
“어! 야, 너 진이야? 유진? 이야... 맞네. 시간 진짜 빠르다, 엉. 그 쪼그맣던 애가 이렇게 컸어?”
“저 아세요?”
“삼촌 기억 안 나?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본 지가 벌써... 꽤 됐다, 그치?”
“그치는 뭔 그치. 기억 안 난다니까.”
괜히 성질을 더 부리면서 말했다. 강아지처럼 생긴 탓인가, 괜히 나 때문에 속 좀 잔뜩 상해 봤으면 싶어서.
“성깔은 여전하다, 응? 이게 어디서, 삼촌한테 말이야....”
“삼촌? 그 정도 나이는 안 될 거 같은데.”
“삼촌이지, 그럼. 오빠는 아니잖아.”
대충 하는 말이 어이없어 픽 웃었더니 거기에 대고 한마디 얹는다.
“너 되게 예뻐졌다, 응? 어릴 때는 진짜 못생겼었는데. 매일 성질만 부리고.”
그렇게 말하면서 얼굴을 양껏 찌푸리는 게 귀여웠다. 잘생긴 사람이 얼굴 찌푸린다고 못생겨지나.
“저 예뻐요?”
“야, 너도 진짜 낯짝 두껍다. 그걸 어떻게 그냥 냉큼 받어.”
“예쁘냐니까?”
“예쁘다는 말에 뭐 그렇게 집착을 해? 안 본 사이에 성격이 더 이상해졌어. 할아버지! 얘 뭐, 어디 아파요? 왜 이래?”
“안 아프거든. 어이없어, 진짜.”
툴툴대는 말에 피식 웃었다. 아저씨인지, 삼촌인지, 오빠인지. 생긴 건 오빠가 맞는 거 같은데. 본인은 아니라고 부정한다.
“말이 짧어, 엉?”
“삼촌, 아니 오빠는 아까부터 반말이었으면서 뭘.”
“그래... 그래라. 아주 그냥 네 마음대로 해.”
으이구, 으이구 하며 돌아서는 등에 폭 달려가 안았다.
“차 있죠? 나 좀 데려다 줘.”
“애가 어떻게 컸길래 이렇게 당돌하냐.... 잘 컸네, 어. 어디 가서 기죽을 일은 없겠다, 너.”
한숨을 푹 쉬며 발걸음을 옮기는 등을 따랐다.
와, 무료택시. 택시 공짜로 타는 건 처음이었다. 기분 되게 새롭네. 미터기 숫자 안 올라가는 택시 탈 일이 살면서 얼마나 있을까 하는 것 따위의 생각을 했다. 앞으로 이 택시 자주 탈 것 같기는 한데.
“번호 좀.”
“번호?”
“자주 좀 보자고.”
집 앞에 다 와서 내가 내민 핸드폰에, 삼촌이 숫자를 꾹꾹 찍었다. 번호를 찍으면서 내 눈치를 보는 게 뭐 잘못한 강아지 같았다. 강아지고 뭐고, 저 삼촌은 이제 나한테 발목 잡혔다. 아주, 영업 방해로 경찰서 갈 때까지 가보자고.
묭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