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흘은 나라가 들썩였고, 일주일이 지나서는 온 대륙이 혼란 속으로 빠졌다. 연수국에 귀속되어 있는 나라는 합쳐서 열둘은 되었다. 땅덩어리 하나를 장악하고 있는 만큼이나 그 권위란 대단한 것이었다. 벌써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지 50년도 넘었고, 모두가 평화 속에 만족하고 살았다. 그런 와중 황자의 시해를 모사하는 이가 있다는 이야기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아수라장이 되고도 남았다.

화홍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모든 신료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 나라에서 대체 누가 황자를 시해하려한단 말인가. 첫날에는 분명 나라에 반감이 있는 자가 분명하다고 그리 여겼다. 그들은 하나같이 범인을 색출해야 한다며 주청을 올렸다.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그 시해를 모색한 자를, 거짓이라면 헛소문의 근원을 찾아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왕으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돌아온 것은 침묵 뿐.

이튿날에서야 그들은 하나의 의심을 시작하였다. 왕이 전부 알고 있었음에도 묵인했다. 그 의심은 빗발치듯 쏟아져 그들을 뒤흔들어 놓았다. 곧 의심은 더 커져 왕이 모사한 일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렇다면 왕이 황자를 시해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그리 성군은 되지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폭군도 아닌 이였다. 적당히 정사를 해결하고 적당히 여색을 밝히는 이였다. 그는 욕심이 많지 않았고 평화를 즐겼기에 전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항상 이런 태평성대에 태어난 것이 자신의 복이라며 연회에서 농을 삼는 것을 보았던 이들도 몇이 있었다.

그런 그가 황자를 시해하자고 생각했다면 분명 누군가가 사주한 사람이 있다. 왕을 사주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답은 이미 정해져있지만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어 입 밖에 차마 내밀지를 못하였다. 하지만 서로의 눈을 보며 모두 같은 단 하나의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 태평성대를 만든 제국의 군주. 황제.

사흘 째. 이 날을 기점으로 대전에 매일같이 비쳐들던 범인 색출을 위한 항소문은 줄어들었다. 대신 황자의 보호를 강화하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번에는 왕이 답을 하였다. 허한다는 말과 함께 곧, 많은 인력을 동원하였다.

자연스레 황자의 거처에는 더 많은 군관들이 대기하였고 무사도 둘이 붙었다. 황자는 어디론가 함부로 향할 수 없었으며, 어쩌면 사실상 감금과 다를 바가 무엇일지도 몰랐다.

 

“오늘은 어딜 가야할까. 차마 발이 떨어지질 않는구나.”

도하의 한숨에 나루는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그가 시우를 보지 못한 지 열흘이 넘었다. 사흘마다 한 번씩 궁 밖으로 외출을 하긴 하였지만 시우가 철저히 감시를 받는 상황에서 그가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몰라 나올 때마다 서고에 꼭 들러보곤 하였다. 어쩌면 그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감으로 발걸음 하였다 허탈하게 돌아 나오기를 세 번을 반복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의 속이 타들어가고 있음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 날 저녁 이실직고하였던 나루의 앞에 온 세상이 무너진 표정을 보이던 도하는 그녀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고 말았다. 최대한 정제하여 말하였음에도 차마 진실을 숨길 수는 없어 그나마 꺼낸 말은 ‘시우 도련님, 아니 황자마마께서는 실망하신 기색을 보이셨습니다.’였다. 물론 그 한 문장으로 도하는 충분히 절망하였지만, 나루는 차마 그가 보였던 차가운 감정을 설명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포기’였다. 아마도 도하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시우는 더는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나루는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감히 왕자마마께 그런 말을 할 용기라고는 나질 않는 열 살배기 나인이었다.

도하는 자신이 오해를 풀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시우가 자신의 진심을 몰라 줄 리가 없다며 그가 언제 나올 수 있을지 모르니 일단은 사한당에 계속 다니는 것으로 해두었다. 물론 그것은 저를 도와 준 아이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였다. 대역을 맡아주는 것만 해도 고마웠는데 이런 큰일에 강제로 손을 빌리다 못해 일까지 시켜 놓았다. 그리하여도 군 말 없이 다 해준 아이에게서 배움을 뺏는 것은 차마 도하로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서고에 들렀다 텅 빈 자리를 마주하고서 되돌아 나오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도 조용한 곳으로 모실까요?”

“그래. 쉬고 싶구나.”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 이리도 흥이 떨어져 본 적이 없었는데. 시우가 없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까지 세상이 지루할 수 있을까. 마치 인생을 다 산 늙은이가 된 기분이었다. 도하는 고작 열 살인 자신이 이런 생각까지 하는 것을 보면 누군가가 비웃겠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도 정말 사실이었다. 무언가가 텅 비어버린 마음이 허전하여 즐거움이란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을 어찌하란 말일까.

그렇다고 서고에 더 있고 싶지도 않았다. 여긴 시우와의 추억이 너무 많아 견딜 수 없이 외로워졌다. 그의 흔적이 많은 만큼이나 더 큰 쓸쓸함이 몰아닥치는 것은 도하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라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다전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녀가 말한 곳이 어디인지는 익히 들어보았다. 찻잎의 향이 아름다운 곳이라며 나루가 여러 번을 이야기 하였던 곳이었다. 잔잔한 아름다움이지만 또, 민가의 생활감이 깃들어 있다며 가끔 피곤할 때 가면 나름 즐겁다고 생글거리며 말하던 나루를 도하는 기억하였다.

“그러렴. 그 곳으로 가자.”

사실은 무엇이 되어도 좋았다. 모든 세상이 어지러웠다. 시우의 마음도 문제였지만, 왕의 의중을 알 수 없는 것이 더 문제였다. 차라리 범인을 색출하라고 한다면 다음 반격이라도 나갔을 터인데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자신이 어찌 해야 할지. 답답한 가슴을 누군가 뻥 뚫어주었으면 하는 욕구가 들었다.

나루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천천히 걸었다. 도하보다 딱 세 걸음을 앞서 자신의 상전이 잘 오고 있는 지 시시때때로 확인하였다. 생각에 잠긴 그가 혹여나 넘어질까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도하는 잡념을 없애고 길을 걷는 것에 집중하자고 마음먹었지만 그도 잠시였다. 곧 다시금 스쳐오는 생각들은 의식을 천천히 삼켰다. 결국 나루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는 텅 빈 인간이 되어 버리고 혼이 빠져버렸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다전에 다다라서였다.

“그럼 저는 시간에 맞추어 오겠습니다.”

“그래. 부디 조심하거라. 위험한 일이니.”

도하의 당부에 나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맡은 일은 황자가 머문다는 거처의 주변을 탐색하고 오는 것이었다. 황자의 거처를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관군들이 많은 커다란 대옥하나만 찾으면 되었으니 하루만에 위치를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경비는 삼엄하였다. 대놓고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함부로 기웃거리다가는 들키기 십상이었다. 누군가가 기색을 눈치라도 챈다면 그녀는 소속을 밝혀야 했고 고스란히 화란궁에게 화살이 돌아가고야 만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 곳의 분위기를 살펴 다음 일을 도모하여야 했다. 시우의 오해는 언제라도 풀 수 있지만 당장 그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잠시라도 때를 놓쳤다가는 그대로 끝이었다. 그렇기에 나루의 임무가 막중하였다.

나루가 멀어지는 것을 잠시 쳐다보다 도하는 다전에 들어섰다. 확실히 향긋한 찻내음이 확 퍼졌다. 코끝을 간질이는 것이 기분 좋은 향이라 차분해진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몇 사람이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도하는 제일 구석진 자리 하나를 잡고 앉았다. 곧 중년의 여성이 그에게 와 주문을 받았다. 도하는 차림표에서 적당히 아무거나 집어 골랐다. 그녀는 친절히도 웃으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곧 돌아갔다. 칸막이가 쳐져 있어 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공간에, 혼자가 되었다.

나루는 아마도 크면 유능한 아이가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선에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여성만이 있는 나라라 모든 관직에도 여성이 서고 왕도 여자였다. 그런 곳에 간다면 분명 그녀는 큰 뜻을 이루지 않겠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언젠가는 한 번 이야기 해보아야겠지. 사실은 이 일에 이렇게까지 휘말릴 이유도 없던 아이에게 갸륵한 마음이 들어서기도 하였다. 일이 마무리만 된다면 그는 정말 그녀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시우를 구한 뒤에나 할 수 있었다. 지금 제가 생각할 것은 너무도 많았다. 살면서 무엇 하나 철저히 계획을 세워 해 본 것이 많지 않았다. 처음 일을 꾸민 것은 시우를 만나기 위해서였고 이제는 그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제 앞길 한 번 역시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고서 그저 언젠가 이뤄질 꿈이라고 희미하게 그려내기만 할 뿐, 그를 위해 실제로 행한 것은 별로 없었다.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한 사람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 은시우, 그 한 사람이 신도하를 이렇게나 다른 사람으로 만들 줄 누가 알았겠나.

“차 나왔습니다.”

어느 새 차가 우려질 정도의 시간이 되었었나보다. 요즘은 잠깐만 이런 저런 생각을 해도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버렸다. 주인장은 도하의 답을 듣기도 전에 빠르게 나가주었다. 그가 혼자 있고 싶음을 알아서였을까. 아니면 그저 다전의 특징인 것일까. 도하는 잠시 생각해보았다가 이내 제가 신경 쓸 바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찻물이 꽤나 맑은 것에 비해 향은 그윽하였다. 향이라면 사실 그가 좋아하는 것이 따로 있긴 하였지만 객관적으로는 이 차의 향이 더 좋겠지. 도하는 소매 춤에서 슬그머니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것은 이미 다 말라비틀어지고 부서져 흔적도 찾기 힘든 당잔대였다. 보랏빛이던 그 것은 먼지를 머금고서 회빛깔이 된 지 오래였다. 도하는 목이 메었다.

그 날, 나루에게서 서고에서의 일을 들으며 도하는 온 정신이 혼미하였다. 이 일에서 시우의 오해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개입이었다.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지만 해 줄 이야기도 없었다. 차마 ‘네 아버지가 내 아버지에게 너를 죽이라고 했어.’라고 말할 용기는 도하에게 없었다. 아니,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 누구도 그런 소리를 쉽게 할 사람은 없다.

도하에게 믿을 것이라곤 시우가 자신을 신뢰할 것이라는 작은 희망뿐이었다.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라면 분명 믿어 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이 다 망가져버린 당잔대를 보면 그것을 썩 믿을 만하지도 못하였다.

약간은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도하는 이렇게까지 시우를 위해 머리를 싸매고 위험한 일을 일삼고 있거늘, 시우는 혼자서 오해해버리고 말았다. 물론 분명 열쇠와 당잔대를 나루에게 맡긴 것이 그 원인이었지만 정말 둘 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단 말이다. 도하가 그런 일을 해낼 장소도, 나루를 밖에 보낼 명분도 정말 그에게는 주어진 선택지가 없었다. 그 자신조차도 망설였지만 그 모든 것 보다도 그가 살기를 바랐으면 하는 마음이 우선이기에 내줄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저를 위해서나, 타인을 위해서라면 굳이 그 것을 내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간언컨대 도하는 자신하였다.

당잔대가 다 바스라져가는 것이 마치 그의 마음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는 것 같아 초조하였다. 시우를 만나서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설명하고 싶다. 그의 얼굴에서 안도의 미소가 흘렀으면 좋겠다. 하지만 모든 것을 망쳐버릴 그 결말을 맞이하지 않기 위하여 도하는 참고 또 참았다.

더는 시우의 오해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자. 도하는 제 고개를 뿌리치듯 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급한 불부터 끄라 하였다고, 당장 다음 계획을 세우는 것이 먼저였다.

왕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당장 죽일 수 없음은 자명하였다. 이제 해야 할 일은 황제가 명을 거둘지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중간에 서신을 가로채어 확인하던가 아니면 왕, 즉 제 아버지에게 직접 묻는 수밖에 없었다. 두 가지 모두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자는 먼저 제가 그 서신에 접근할 권한은 어디에도 없었다. 왕에게 묻는 것도 불가능하였다. 그는 답을 해주기 전에 제가 어떻게 알았는지 추궁할 것이다.

답이 나오질 않는다. 차라리 무슨 명이 떨어져도 시우가 절대 죽을 수 없는 명분을 만들어주는 것이 낫겠다 싶은데. 딱히 좋은 수가 생각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죽을 수 없는 명분. 황제가 시우를 차마 건드릴 수조차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제 아들이 눈엣가시라 먼 나라까지 보낸 자였다. 궁에서 며칠간 소문을 모은 결과였다. 시우가 제 아비의 눈 밖에 난 자식이라서 이렇게 온 나라를 떠도는 것이라고 나인들에게까지 다 퍼졌으니 사실 도하의 귀에 들어오지 않을 리도 만무하였다.

답답함이 속을 꽉 채워 아무런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조용한 곳에 혼자 있으면 무엇이라도 생각날까 싶어 자리를 지켜보았지만, 결국은 아무런 답도 얻지 못한 채였다. 도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앉아있었기에 시간이 다 되었다. 슬슬 나루가 찾아올 시간이 되었음을 창밖의 기울어가는 해가 알리고 있었다.

“저 손님. 죄송하지만 지금 자리를 비워주셔야겠습니다.”

마침 일어난 도하에게 주인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가득 지은 채 연신 고개를 숙였다. 보니 손님들이 다 불만을 품었음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하는 사정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기에 다들 내보내십니까?”

“그것이 황자마마께서 여기 납신다 하여, 지금 전부 자리를 비워 놓으라는 관군의 명이 떨어졌습니다. 저희도 명을 받은 것이라 어쩔 수 없어.”

완전히 제멋대로가 따로 없었다. 아마 시우의 뜻이 아닐 것이다. 그저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던 그의 부탁에 관군은 자신들이 편하고자 다전을 전부 비우라는 멋대로의 명을 내렸겠지. 마치 자신이 그라도 된 마냥.

도하는 단 한번이라도 시우를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궁 밖의 사람들 중 자신이 황자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정말로 관군도 눈치를 채지 못할 것이다. 잠깐 시우의 친우로서 말을 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도하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다전을 나가서도 도하는 그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 그가 관군 다섯을 뒤에 데리고서 오는 것이 저 길 끝에서부터 보였다. 도하는 마치 뛰기를 멈추었던 가슴이 다시 쿵 쿵 뛰는 기분이 들어 제 자리에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시우를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는 곧 다전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이 도하를 보고야 말았다. 그의 표정은 미세하게 떨렸으나 곧 굳어버렸다. 슬쩍 눈을 피하더니 도하를 무시하고서 다전에 들어가려 하였다. 도하는 그런 그를 붙잡았다.

“시우야.”

관군들이 도하를 막아섰다. 수상한 인간이 시우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골치 아픈 일이었으니 당연하였다. 그러나 도하는 그들의 사정을 신경 써줄 정신이 아니었다. 도하는 관군들의 틈 사이로 시우에게 시선을 보냈다. 제발. 대화라도 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다면 적어도 오늘밤 잠은 잘 수 있을 텐데.

“물러나라. 독대하겠다.”

“하지만.”

“내 오래 아는 자이다. 어차피 저 자는 무기도 없지 않느냐. 고작해야 나랑 동갑내기 아이다. 스무살이 넘은 장정이 다섯이나 있으면서 그 하나 막지 못한다면 그것도 참으로 우습겠구나.”

시우의 도발과도 같은 말에 그들은 울컥하였으나 참고서 물러섰다. 도하는 시우에게로 한발짝 다가섰다. 어딘가 야윈 것이 영 걱정되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오물거리다 서고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 열쇠는 정말로 내가 사정이 있어서.”

“나는 너를 믿었어.”

시우가 도하의 말을 가로막았다. 도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과거형은 곧 현재는 그렇지 않다는 말과도 같았다.

“네가 나를 믿는다고 한 것을 믿었고, 너와 우리의 약속이 소중하다고 믿었어. 내가 네게 보인 것들은 전부 진심이었는데 너는 아니었어.”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이번에는 그 뒤를 막은 사람이 없었음에도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시우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억울함은 다시 솟구쳤다. 정작 제게 그렇게 말하는 자신은 얼마나 저를 신뢰해서 제게 거짓을 말하였는가.

“너도, 네가 황자마마라는 거 말 안했잖아.”

어린 치기는 결국 상대를 탓하는 결과만을 갖고 왔다. 도하는 내뱉고서 후회하였지만 이미 입 밖으로 터져 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알고 있었어?”

아마도 이곳에 황자가 온다는 말이 먼저 퍼진 것을 모르겠지. 하지만 그런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이미 도하는 그 전부터 시우가 황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 너도 내가 황자라는 사실을 알아서, 그래서 나한테서 마음을 떠나보낸 거야.”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도하는 전부 아니라고 하고 싶었으나 그가 황자이기에 이 모든 일은 일어난 것도 사실이었다. 그의 오해를 풀어주자니 정작 말할 수 있는 것들은 현실뿐이었다. 앞도 뒤도 막혀 갈 곳이 없다.

시우는 싸늘하게 도하를 스쳐 지나갔다. 도하는 그를 잡을 수도 없었고 시우는 아마도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관군들은 시우의 뒤를 따라 다전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거리만이 도하의 눈에 보였다.

도하는 누군가를 붙잡고 울고 싶었지만 정작 그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실은 처음부터 없었다. 시우의 앞에서는 늘 웃기만 하였지 울어 본 적이 없었거든. 아마도 다른 일 때문에 울고 싶었어도 아마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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