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책상 위에는 시대에는 맞지 않는 깃펜과 잉크가 있었고 책상 끝부분은 검은색 잉크가 묻어 있었다. 라미는 검은색 잉크를 들고 서류에 쏟았다. 서류에 적힌 글씨는 검은색 잉크에 젖어 알아볼 수 없게 됐다.

 

“이사님은 이걸 보면 뭐라고 하실까?”

“드디어 미쳤군.”

“어쩜 예상을 벗어나시지 않지!”

 

라미는 지독히 무표정한 얼굴과는 다르게 희극적인 대사와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춤을 추 듯 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지러워, 하지 마.”

“싫어요.”

 

라미는 생기발랄한 목소리로 작게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추더니 은가람의 눈을 마주 보면서 쏟아 붙였다.

 

“이사님, 오늘은 몇 시간 주무셨어요? 아, 보나 마나 밤 새우셨겠죠. 밤을 꼴딱 새워서 한 짓이라고는 온 세계의 CCTV 감시? 뭐, 아니면 그 잘난 얼굴이라도 관리하셨어요? 그럼 그만두세요. 재능 없으시거든요.”

“그래서 회사 서류를 저렇게 만들었다고?”

“외웠어요, 그리고 지금처럼 잠도 못 잔 상태로 서류작성을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가족도 안 건 들이는 내 건강을 일일이 체크할 시간에 일이나해.”

“첫째로 저는 이사님의 비서고, 이건 일이에요. 둘째로 가족 분들이 이사님을 안 건 들이는 건 이사님 성격 때문이죠. 셋째로 친 가족은 아니지만 나름 연인이죠, 동생 분은 이사님보다 절 더 좋아하는데.”

 

은가람은 귀찮다는 듯 머리를 헝클였다. 다크써클이 거뭇한 눈을 꾹꾹 누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불만이라서 이러는 건데.”

“당신이 잠 안 자는 거?”

“거짓말.”

“흥,…눈치 하난 빨라서.”

 

라미는 발랄하게 돌면서 방을 나가려 고 했다. 긴 연갈색 머리가 흔들렸다.

 

“우리 어머니는 은가람, 당신처럼 일에 미쳐 살았다가 결혼기념일 때 아버지께 금잔화 한 송이를 받았거든요. 그 꼴 나기 싫으면 알아서 처신 잘해요!”

 

은가람은 라미의 뒷모습을 계속 쳐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잤더니 머리가 아팠다. 머리에 두통이 있어도 화가 난 라미를 달래야 됐다.

은가람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라미의 부모님은 결혼기념일 날 이혼하셨다. 아직도 생생히 생각난다. 일을 하다가 결국 결혼기념일조차 잊어버린 엄마, 엄마를 기다리다가 자버린 나, 일어났을 때는 거뭇해진 눈가를 누르면서 화를 내는 엄마와 눈가에 눈물을 매달고서 화를 내는 아빠가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엄마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었지만 짜증이 서린 눈에 겁을 먹어서 결국 이불을 뒤집어쓰고 억지로 잠을 자는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식탁 위에는 금잔화 한 송이가 있었다.

 

 

그리고 은가람은 내 생일을 잊어버렸다.

라미는 자신의 아버지도 그랬는데 자신역시 그러지 못할 이유야 없다.

 

라미는 발을 구르면서 꽃집으로 뛰려갔다.

 

 

* * *

 

 

은가람은 딱 라미가 꽃집을 도착할 때 즈음 오늘이 라미의 생일인 것을 기억했다.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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