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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보루는 창문에 못 박힌 나무판자였다. 


지서는 도주로 삼았던 창문 건너편에 그런 것이 달려 있다는 사실이 다소 경악스러웠지만, 지금으로선 기회였다. 도끼를 가져오라 소리치는 놈을 뒤로하고 움직이자 총알이 쏟아졌다. 아주 고맙게도 명중률은 바닥이었다. 


지서는 조소하며 염두에 두고 있던 또 다른 도주로를 향해 뛰었다. 천장 구석에 뚫린 환풍구.


하프시티의 천장은 대체로 낮았고 지서는 충분히 높이 뛸 줄 알았다. 


팔 힘으로 좁은 통로에 상체를 올려놓기 무섭게 종아리에 따끔한 고통이 스쳤다. 쯧. 지서는 혀를 차며 발끝부터 수화했다. 


놈들은 주황색 맘바의 꼬리가 환풍구 속으로 사라지고서야 나무판자를 뜯어내고 들이닥쳤다.


그냥 문으로 들어오는 게 더 빨랐겠어. 지서는 소란의 반대방향으로 기어가며 가느다란 혀를 날름거렸다. 


그러나 그 모양은 유유히, 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종아리, 지금은 꼬리가 된 부위로부터 붉은 선이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적들 중 후각이 쓸 만한 놈이 있으면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일 터였다. 


그래 시간. 이 정도면 충분히 시간을 끈 것 같은데. 


대체 언제 오려는 걸까? 지서는 문득 맹렬히 그가 보고 싶어졌다. 경계란 경계는 다 세우면서 알량한 다정 하나에 안절부절 못하던 황금색 눈동자가….


그 순간, 바닥이 얇아진 듯 하더니 몸이 아래로 훅 꺼졌다. 


캉 카가가강!


소리가 요란했다. 빌어먹을 부실공사! 지서는 예기치 못했던 충격에 몸을 말다가 번쩍 눈을 떴다. 배관과 전기선이 다 드러난 천장. 거기에 겹쳐지는 추격자들의 발소리.


“저기 있다!”

“잡아!”


수화를 풀고 다리로 땅을 박차기 무섭게 총알과 날붙이가 날아들었다. 지서는 아직 충격이 다 가시지 않은 배를 움켜쥐고 넘어질 듯이 달렸다. 휘청거리며 코너를 돌자.


“은지서!”


거짓말처럼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서는 아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언젠가 서안이 했던 말이 아득히 들렸다. 사랑은 무릎 꿇는 것이고 조아리는 것이지. 그 사람이 아니라 평생토록 우리를 농락한 운명에게 말이야. 그네들이 가장 우습게 아는 우리의 목숨을 내어놓고, 그저 무력하게 그 사람이 울지 않기를 바라는 거란다…….


그러니까 하필이면 그 장면에서 발이 꼬인 게 우연은 아니었으리라. 


아, 지독해라. 지서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투박하면서도 다정한 손길을 느끼며 그리 생각했다. 


언니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그 사람도 같은 생각을 하면 어떡해?


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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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 자체는 그리 치명적이지 않았다. 


배에 바람구멍 나고서도 계속 움직여서 문제가 커진 거지. 


사인은, 과다출혈인가. 시윤은 고꾸라진 자신을 바로 눕히는 손길을 느끼며 생각했다. 피에 젖은 포대마냥 온 몸이 무겁고 시야가 가물거렸다. 와중에 소리는 잘만 들렸다.


“시윤아! 그러게 빠져 있으라니까, 김시윤!”

“시윤, 눈 감지 마. 안 돼.”

“어, 리더. 여기 끝나긴 했는데. 김시윤이….”


도을 씨는 언제 온 거지. 설마 지금 목소리 떨리는 건가? 하여간에 이 사람들은, 정이 너무 많다니까.


“김시윤. 제발, 시윤아.”


그래. 그 분야로는 네가 제일이지. 


반파된 시야로 밝은 주황색이 어른 거렸다. 시윤은 잔뜩 일그러졌을 창백한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으나,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피에 젖어 움찔거리는 게 고작. 


와중에 손가락 사이로 질척이는 감촉이 그 묘한 음료를 떠오르게 해 기분이 미묘해졌다. 시윤은 눈썹을 좁히며 밭은 웃음을 흘렸다. 꽤 맘에 들었는데, 그거. 돌이켜보니 맛있다고 솔직하게 말하지도 못했네.


웃는 시윤을 보며 지서의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왜 그랬어.”


몰라. 이 와중에 그걸 제대로 설명할 줄 알면 그게 너지 나겠냐. 나는 그냥.


“니가 없음 안 되겠다 싶어서…….”


정리되지 않은 말 뒤로 탄식이 붙었다. 아. 이 지경이 되어서야 선명하게 고개를 쳐드는 아쉬움과 후회, 미련, 그리고 갈망에 시윤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만약 다음이 있다면… 맛있었다고 말해야지. 이번에는 꼭…….


두려운 건 여전했다.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맞추는 건 시윤에게 맞는 방법이 아니었다. 해 봐서 알았다. 괜히 시도했다가 더 괴로워질 수도 있었다. 둘 다. 


하지만 네가 나를 기적처럼 봤으니까. 


그런 표정을 한 사람을 놓칠 수는 없겠다고, 깨달았을 뿐이었다. 너무 늦게 깨달았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시윤은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였다. 부디 못한 말을 전할 다음이 있기를 바라며.


그 뒤로는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보이는 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늙은 의사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들은 듯도 했고, 미안하다 사과하는 정현의 손길을 느낀 듯도 했다. 


온전히 정신을 차렸을 땐 방이었다. 요람에서 지냈던 그 방. 


살았네.


반쯤은 실감하지 못한 채로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옆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들어보자 허리께에 엎드린 주황색 머리가 보였다. 시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얘는 또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 


…아, 맞다.


시윤은 한 박자 늦게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 무슨 말을 했는지 떠올렸다. 시윤의 목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손을 들어 입을 텁 막은 시윤은 그 간질간질한 감각을 조용히, 오래 만끽했다.


그 다음으로 들이닥친 건 허기였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다. 시윤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누워있었던 거지. 생각하기 무섭게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불 꺼진 방 바닥에 온온한 빛이 비쳤다.


“…시윤?”


연우가 시윤을 보더니 활짝 얼굴을 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발걸음은 두 걸음을 채 가지 못해 사그라들었다. 곤히 잠들어있는 지서 때문이었다.


시윤은 웬만하면 배려라는 단어를 모르고 사는 연우가 자발적으로 발소리를 죽이는 것에, 지서가 제 옆에 머문 시간을 가늠할 수 있었다. 다시금 가슴 한 쪽이 간질거렸다. 


“몸은.”


연우가 침대 맡에 놓여있던 컵을 건네주며 물었다. 컵 안에 물이 찰랑였다. 시윤은 씩 웃으며 컵을 받아들었다.


“괜찮어. 시간은?”

“하루 좀 넘게.”

“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 시윤은 계속해서 시선에 걸리는 주황색 머리카락을 힐끗거리며, 드물게 연우 앞에서 말을 어물거렸다.


시윤과 연우는 요람이 아니었다. 원래라면 진즉에 이곳을 떠났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시윤에게는 미련이 남아버렸다. 그렇다고 연우에게 곧이곧대로 말하기에는, 그의 발목을 또 잡고 싶지 않았다. 브레멘에 함께 잡혀있던 세월만 해도 충분했다. 

만약 연우가 떠나기로 선택한다면. 


겨우 깨달아서 무게추를 맞춘 마음이라도, 시윤은 이별을 준비해야 할 터였다. 


…그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시윤.”


연우가 방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로 음절을 뱉었다. 시윤도 어깨를 굳혔다. 


그다지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난 여기 남을 거야.”


연우의 대답을 들은 시윤의 눈이 접시만큼 커졌다. 연우가 작게 키득거렸다.


“언니, 혹시-”

“너 때문 아냐. 나 때문이지.”


별로 겪어보지 못했던 형편 좋은 전개에 곧 시윤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부러 짓궂게 짓는 길쭉한 웃음이 아니라 아이처럼 환한 미소가. 


“그럼 결론 난 거지?”


그때 불쑥,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시윤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내렸다. 


대체 언제부터 깨 있었던 건지 지서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연우는 알고 있었던 듯 시윤을 놀리듯이 눈을 흘겼다. 


시윤과 연우는 그렇게 요람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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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이 늘어난 요람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는 봄이었다. 


시윤과 지서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옥상에 마주앉아 있었다. 쾌청한 날씨와는 다르게 둘 사이 분위기는 은근히 엄숙했다.


오늘부터 1일 같은 소리를 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연인이 되었으니, 페로몬과 발정기에 대해 한 번은 이야기를 해야 했던 것이다.


“방금, 뭐라고?”


해봤자 자신의 거부증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줄 알았던 시윤의 입을 떡 벌어졌다. 지서는 눈을 내리깔며 재차 말했다. 


“페로몬이 없다고. 생성도, 감지도, 흡수도 못 해.”


그 꼴을 본 시윤의 눈이 찌푸려졌다. 벌써 콩깍지가 씌었는지 그게 시무룩해 보인 탓이다. 덕분에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나갔다. 


“잘됐네.”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언행이었으나, 둘 뿐인 이 대화에서는 적절한 선택이었다. 지서의 낯이 밝아졌으므로. 시윤은 안도하며 말을 이었다.


“야, 내가 이전 발정기를 어떻게 보냈는지 아냐? 한 번은 하다 토했고, 또 한 번은 향 피워놓고 하다 졸도했고, 이후로는 그냥….”


제정신인 적이 없었다는 말은 굳이 안 해도 되겠지. 시윤은 껄끄러운 과거를 꿀꺽 삼켰다. 여러 사람을 찾게 된 건 분명 자신의 이 빌어먹을 체질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내내 정착하지 못했던 삶. 


“아무튼 그래, 엿 같았다고. 그럴 바엔 차라리 없는 게 낫지.”

“하지만, 거부증이랑은 별개로 흡수를 못하면 좋지 않잖아. 그렇지?”

“그렇긴 한데.”


그러나 이렇게 되고 나니, 그 빌어먹을 것도 행운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시윤은 대수롭지 않은 척 툭 내놓은 말에 지서의 표정이 완전히 펴지는 것을 기꺼이 바라봤다. 그의 미소를 따라 제 입꼬리도 올라갔다. 대체 어떤 얼굴일지 가늠도 안 됐다. 


밀고 당기기가 끝난 후에도 시윤은 여전히 지서에게 휩쓸리는 중이었지만, 지금 그만큼 대수롭지 않은 것도 없었다. 최근 시윤에게 그보다 더 충만한 감각은 없었으니까.


평생의 불행을 대뜸 행운이라 칭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시윤은 기쁨에 차 말했다. 


“난 평생 내가 어디에도 맞지 않는 조각이라고 생각했는데.”


니 옆에는 어째 딱 맞는 것 같다, 야.


딱하지만, 대차게도 틀려먹은 소리였다. 




다음주부터는 주 1일 연재로 전환됩니다! 아마 월요일 연재가 될 것 같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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