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아드라스테아 제국에는 공작부터 준기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위가 있다. 물론 제국의 황궁에는 귀족 아닌 이들도 다수 일하고 있으며, 그들도 하녀장부터 시작해서 말구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책을 가지고 거대한 제국의 중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황궁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는 누구도 딱 부러지게 그 직책을 말할 수 없는 이가 드나들고는 했다. 황궁의 누구를 마주쳐도 척척 직위나 칭호를 붙여 부르는 데 익숙한 제국 황궁의 구성원들이 그 사람을 어찌 불러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는 하는 것은 종종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당사자는 존칭도 필요 없이 그냥 이름만으로 불러도 아무렇지 않아 할 터였으나 다른 이들 입장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자가 황제의 칼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라 해도 황제가 선생님이라 부르는 이를 존칭을 붙인다 해도 이름으로 부르기에 거북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누구를 상대로도 딱히 호칭의 무례함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에델가르트 황제에게 그런 것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그럼 다른 문제가 있기는 하다는 소리군.”

“그야 있지. 왜 없겠어.”

제국이 점차 안정되며 뒤에서 칼로 처리해야 할 것도 적어져 황제의 상황이나 살피러 왔던 벨레스의 말에 에델가르트가 머리를 감싸쥐고 중얼거렸다. 존경하는 주군의 괴로워하는 모습에 황제에게 보고를 드리러 왔던 궁내경이 덤덤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벨레스. 그러니까 그렇게 일반인 신분으로 황궁에 드나드는 것이 문제라고 봅니다만.”

“딱히 귀족 작위가 필요하진 않은데.”

“작위도 직위도 없는 자가 폐하의 곁에 있으면 쓸데없는 오해를 사기 쉬우니까요. 배후에서 귀하가 제국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려 든다고 의심하는 자가 있을 수 있겠지요. 귀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폐하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처신에 수정을 가하는 편이 좋을 거라는 데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흐음……이제 와서 작위를 받는다 해도 네 말대로 황제 옆에 붙어 있던 인간이 작위를 받는 걸 경계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렇다고 내 일에 딱히 맞는 직위도 없고.”

“뭐……체계에 속하지 않는 단독 직위 정도야 꾸미려면 꾸밀 수도 있겠지요.  하긴. 그렇다 해도 이미 귀하라는 존재가 폐하 곁으로 드나든 지 오래되었으니 오해라는 측면에서 적절한 대책은 되지 않겠지요.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에델가르트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저기, 즐거운 대화 중에 미안한데.”

“딱히 즐거울 요소는 없는 대화였습니다만…….”

“……어쨌든. 아까도 말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거든.”

휴베르트와 벨레스가 동시에 그러면 뭐가 문제냐는 듯 에델가르트를 바라보았다. 에델가르트는 대답하기에 앞서 한숨을 한 번 내쉬어야 했다. 둘 다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닐 텐데. 아니, 이런 쪽으로는 원래 기대할 수가 없던가? 그래도 이쯤 되면 일부러 이러는 것은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휴베르트 쪽을 보면 의심이 더 깊어질 것 같았기에 벨레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이쪽은 이쪽대로 늘상 태연한 표정인지라 이렇다 할 근거를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결국 에델가르트는 그냥 터놓고 말하기로 했다.

“……두 사람. 내가 남녀도 안 가리고 양쪽으로 첩을 끼고 있다는 소문이 돈다는 거 알고는 있어?”

“……웬만큼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역시 입소문이란 건 쉽게 잡히지는 않는군요. 그렇다고 중신들을 다 입다물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다소 과격한 방법을 쓰려면 가능이야 하겠습니다만, 할까요?”

역시 에델가르트의 귀에 들릴 정도의 소문이라면 벨레스는 몰라도 휴베르트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에델가르트는 이미 ‘처리했다’는 사안에 대한 불안을 느끼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무슨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지 마. 지금까지 하고 있던 것도.”

“큭큭큭……명령이시라면. 하지만, 문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모든 문제를 네 식대로 해결하다간 제국민이 남아나지를 않겠어.”

자신이라고 항상 그런 음험한 술수만 쓰지는 않는다고 반박할 수도 있었지만 휴베르트는 그냥 어깨만 가볍게 으쓱했다. 사람 불안하게 만드는 동작이었지만 에델가르트는 일단 자신이 말한 바는 대체로 따르는 휴베르트를 믿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이 정말 친애하지만 어째서인지 때로 불안하기로는 마찬가지인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휴베르트와 에델가르트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던 벨레스가 그 시선에 대답하듯 입을 열었다.

“제국의 황제가 아직까지 결혼은커녕 약혼할 낌새도 없으니 그런 소문이 도는 거 아닐까?”

“그건……어느 정도는 인정해.”

아무래도 벨레스에게는 약해지는 에델가르트가 한 수 숙이고 들어갔다. 분명 소문의 원인 중에는 그런 것도 있었다. 제국의 황제는 마침 한창 포드라에서 일반적으로 결혼적령기라 받아들여지는 나이를 지나 있었다. 황제의 의무 중 하나가 하루빨리 안정적인 후계자를 장성시켜 두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에델가르트에게도 확실한 이유는 있었다.

“하지만 부마 같은 것을 만들어서 권력을 쥐었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는 않은걸. 딱히 내 자식이 황위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꼭 혈연에게 황위를 잇겠다는 욕심만 없다면 부마를 들이는 데 따르는 위험이 결혼에 따르는 장점보다 컸다. 에델가르트라고 해서 연애 같은 것에 아주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애초에 황족의 결혼이란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연애결혼이기는 힘들다. 게다가 배우자를 인생의 반려로 보는 관점에서라면, 결코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인물들이 둘이나 바로 곁에 있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에델가르트는 한순간 역시 황궁에는 영 근거 없는 헛소문은 돌지 않는다는 생각을 떠올렸다가 황급히 지웠다. 반쯤은 죄책감과 함께였고, 반쯤은 그 두 사람에 대한 원망과 함께였다. 그리고 에델가르트는 퍽 공정한 성격이었다. 그 원망이 자기변명을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팔짱을 낀 제국의 황제는 자신의 애첩이라고 소문난 두 남녀를 향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하지만 나랑은 달리 아무 문제도 없고, 심지어 연인이기까지 한 사람들이 소문의 또 다른 당사자인 것 같은데 말이야.”

전쟁 이후까지 드러나지 못하는 것들의 처리와 자신의 보좌로 자신의 시간이 없어 보이는 휴베르트에게 연애라도 해 보라고 권한 것은 반쯤은 농담이었다. 휴베르트 본인의 인생을 조금쯤은 챙기라는 의미였는데 거기에 대고 태연하게 벨레스와의 관계를 보고받은 것은 아직까지도 잘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에델가르트의 말에 황제를 향하고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에게로 힐끔 향했다. 

“예, 뭐……그렇습니다만. 그러니까 폐하의 말씀은 즉.”

“……두 사람이 결혼하면 많은 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아?”

아무리 이런 연애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휴베르트는 휴베르트다. 그런 얘기가 나올 정도는 진작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에는 놀란 기색의 흔적조차 없었다.

“어느 정도는……맞는 말씀이지요.”

이쯤 되자 궁금하기도 했다. 에델가르트가 전쟁을 끝낸 것이 벌써 5년 전이었다. 전쟁 직후 한동안은 겉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물밑의 전쟁이 계속 이어졌으니 결혼 같은 것을 생각할 여유가 되지 않았다 해도 어둠에서 꿈틀대는 자들의 잔당까지 정리한 지도 어느 정도 시일이 되었다. 적어도 연인 관계에서 결혼을 고려하고도 남을 만한 시간임에는 분명했다. 

“내가 타인의 인생사에 관여하거나 할 생각은 별로 없지만……일단 물어보겠는데. 혹시 뭔가 이유라도 있는 건가? 그렇다면 사과하겠어.”

“딱히……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만…….”

일단 상대가 휴베르트였기 때문에 반쯤은 예상한 대답이었다. 그 짝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네 그 통념과 맞지 않는 기준을 상대에게까지 강요하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한 마디라도 해볼 법 하건만, 공교롭게도 휴베르트의 상대는 그 말이 실로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기야. 이 두 사람이 여느 연인들처럼 달콤하게 군다면 그건 그것대로 놀랄 일이었다. 실제로 에델가르트도 휴베르트가 벨레스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흑수리 유격군 시절부터 짐작은 하고는 있었으나 그 관심이라는 것이 연인이라는 형태로 발전할 수 있는 종류라는 것은 짐작하지 못하지 않았나. 실제로 에델가르트도 가끔 저 둘이 사귄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 환청은 아니었나 싶게 적어도 황성에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으니. 사적인 곳이라고 해도 딱히 살갑게 굴거나 할 것 같지도 않지만…….

에델가르트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무례한 호기심을 죄책감과 함께 재빨리 치워 버리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모처럼 둘 다 황궁에 와 있으니 물어보겠는데. 공식적으로 결혼할 생각은 있어?”

에델가르트는 말을 뱉으면서도 왜 자신이 이런 제안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대답은 충분히 빨랐다. 

“엘이 필요하다고 하면 하지 뭐.”

“굳이 할 이유가 없다면 하지 않을 이유도 없겠지요. 전통적인……그러니까, 사제를 주례로 세워서 교회의 인가를 받는 방식은……통일 제국의 근본상 어울리지 않는다고는 생각합니다만……그거야 뭐, 굳이 예전의 방식을 따를 필요는 없겠지요. 오히려 이 기회에 종교에 의존하지 않는 관혼상제를…….”

에델가르트는 스스로 사랑의 형태 같은 것에 별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 생각은 그리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정략결혼도 아닌 연애결혼일 텐데도 에델가르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긍을 넘어 방법을 논하고 있는 최측근들을 보자 아무리 그래도 결혼이란 게 이렇게 상관의 말 한 마디에 일 처리하듯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물론 그 상관이 황제이기는 하나 딱히 명령 같은 것도 아니지 않았나. 그러나 자신의 말은 어디까지나 제안이지 강요가 아니었다고 입을 열려던 에델가르트는 그새 벨레스와 함께 무언가를 종이에 적고 있는 휴베르트를 보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말한다 해서 딱히 신통한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도 않았던 탓이었다. 그래서 에델가르트는 보다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그건 뭘 적고 있는 거야?”

“혼인 서약서입니다. 이제 와서 대사교의 승인을 받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귀족의 혼인에 황제의 승인은 있어야 하니까요. 마침 분부하신 김에.”

휴베르트가 멋진 서체로 완벽하게 작성된 혼인 서약서를 에델가르트의 앞에 내밀었다. 벨레스와 휴베르트의 서명까지 마쳐 황제의 인가만 받으면 되는 훌륭한 문서다. 에델가르트는 그만 더 입을 열 의욕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가장 가까운 이들이 자신의 말 한 마디로 과자 하나 집어먹는 것보다 간단하게 결혼을 해치워 버리는 남녀인 것을 인정할 때도 되었다. 이 두 사람이라면 결혼 뒤에도 자신이 이혼하라고 한 마디만 하면 별 고민 없이 이혼해 버릴 거라는, 꽤 가능성 높은 상상을 한 에델가르트가 한숨과 함께 황제의 서명이 들어가야 할 곳에 펜을 끄적였다. 

“그럼 서류 처리는 먼저 해 두도록 하죠. 뭐……의도를 생각하다면 예식도 올려야 할 테니, 그건 적당한 사람을 찾아 조언을 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왠지 제가 준비할 예식은 폐하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것 참. 내 마음까지 헤아려 줘서 고맙군. 나가 봐도 좋아.”

에델가르트에게 예를 표한 휴베르트는 에델가르트 옆의 벨레스에게는 별다른 인사 없이 그대로 일거리를 챙겨 사라졌다. 에델가르트는 가끔 휴베르트의 저런 태도가 황궁 안이고 주군의 앞이어서 그런 것인지, 평소에도 저런 태도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건 휴베르트나 벨레스, 어느 쪽에 물어보기에도 이상한 질문이었기에 통일 제국의 황제는 그냥 호기심을 삼키고 어깨를 으쓱했다.

“어쩐지 두 사람에게 귀찮은 일을 떠맡겨 버린 것 같은 상황이네.”

“별로. 우리 결혼인데 뭐. 게다가 우리 일로 엘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는 벨레스의 얼굴에서 새신부의 설렘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한 적조차 없기에 에델가르트는 실망하지 않았다.

“예식을 올릴 생각은 없었던 거잖아? 투덜거린 건 미안해. 우습지도 않은 소문이 도는 건 사실이지만 딱히 그것 때문에…….”

“알아.”

“안다고? 뭐를?”

바쁜 황제의 집무실에서 손을 놓고 있기도 마땅찮은지 결재가 필요한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벨레스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에델가르트는 그 눈이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결혼하고도 첩을 두는 귀족이 한둘도 아니고. 우리가 결혼한다고 소문이 완전히 가라앉을 것 같지도 않은걸. 납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엘이 변명거리를 만들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거고.”

“……선생님도 귀족가의 문화에 꽤 익숙해졌구나.”

“뭐, 휴베르트랑 같이 살고 있으니까. 그래도 엘이 더 잘 알겠지.”

“그렇……아니, 휴베르트랑 같이 살아? 선생님 분명 앙바르에 집이…….”

“있긴 한데. 자주 오래 비우잖아. 고용인을 두기도 그렇고. 휴베르트네 집은 늘 관리도 잘 돼 있으니까.”

벨레스가 그럭저럭 한가해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둠에서 꿈틀대는 자들의 잔당을 처리하고, 그 뒤에도 적대적인 레아의 측근들이 꾸린 세력이나 구 퍼거스령, 구 동맹령에서의 소요를 뒤에서 처리하는 것은 주로 벨레스의 몫이었다. 그런 임무를 맡고 있으니 비밀 엄수를 보장할 수 있지 않는 한 고용인을 두기도 곤란한 것은 사실이다. 앙바르에 연고가 없는데다 평민 출신인 벨레스가 그런 고용인을 구하기는 당연히 어려운 일이다. 물론 베스트라가 쪽에 부탁을 한다면 그 정도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겠지만……에델가르트의 스승은 그런 귀찮은 방법을 택하느니 그냥 잠시 제도에 돌아올 때마다 집이 아닌 베스트라가에서 머물면 된다는 합리적인 결론을 내릴 사람이었다. 

“왜? 이것도 곤란한가? 귀족의 평판 문제라면 어차피 휴베르트는 별로 평판이…….”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의외라서.”

“왜? 사귀는 거 알고 있었잖아?”

“그러니까……별로 그런…….” 에델가르트는 그냥 솔직해지기로 했다. “연인 같은 모습을 본 기억이 없어서. 같이 살기까지 한다니 놀란 것 뿐이야.”

“아아……휴베르트는 나보다 엘이 더 잘 알지 않아? 딱히 엘을 신경써서 그런 건 아니야. 집에서도 그런걸. 뭐, 그래도…….”

“잠깐만. 선생님. 그 뒤에 무슨 말을 들어도 무서우니까 그 이상은 말하지 말아 줄래?”

“그러지 뭐.”

벨레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의 무례한 호기심에 답을 얻어 버릴 뻔한 에델가르트가 식은땀을 흘리는 사이 벨레스는 잠시 다른 길로 샜던 화제를 돌려놓았다.

“어쨌든. 황족이나 귀족들의 분위기라면 엘이 나보다 더 잘 알 텐데도 그렇게 말한 건 우리……나를 신경 써 준 거잖아? 고마워.”

에델가르트가 아끼는 선생님은 좀처럼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이제는 그럭저럭 그런 직설적인 화법에도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기껏 돌려 한 배려가 이렇게 직구로 돌아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당황에 얼굴을 확 붉힌 에델가르트가 황급히 말을 주워섬겼다.

“뭐어……휴베르트하고는 지겨울 정도로 오래 알았지만 그 남자가 제대로 누군가의 반려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기 힘들잖아? 하지만……선생님한테도 괜한 참견이었던 모양이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스스로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휴베르트를 감싸려고 한 것인지, 벨레스의 추측대로 벨레스를 위했던 것인지조차 모호했다. 아마 둘 다겠지. 자신이 남말 할 입장은 되지 않지만 어쨌든 태생부터 지금까지 평범한 삶과는 거리가 있는 시간만을 보낸 벨레스가 기껏 인간의 삶을 살게 되었는데 그 짝이란 것이 또 에델가르트 주변의 인물들 중 평범함을 기준으로 줄세운다면 제일 뒤에 가 있을 남자라는 사실이 신경쓰였는지도 모른다. 에델가르트 자신도 전쟁 이후까지 뒷세계의 처리를 맡김으로써 벨레스의 평범하지 못한 삶에 일조하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좋아하는 이가 평범하게 행복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의도야 어찌되었건, 그게 과연 필요한 일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문제였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감각은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것이었다. 그 낯섦을 어찌 다룰지 고민하는 에델가르트를 향해 벨레스가 말했다.

“아니. 고맙다고 했잖아. 난 예식도 꽤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 그래? 하지만 지금까지 전혀 생각 없던 거잖아?”

“그야 뭐……휴베르트도 그런 거랑은 영 연이 없는 사람이고. 나도 딱히……그래도 네가 바라는 거라면 하고 싶어. 휴베르트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고민도 안 하고 알았다고 하지 않았을까?”

“뭐야, 그게……휴베르트나 내가 바라는 대로 한다는 거야? 당신 의사는?”

예전부터 은근히 그런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에델가르트가 인상을 찌푸리자 정리된 서류를 에델가르트의 책상으로 가져오던 벨레스가 서류 뭉치를 내려놓고 에델가르트의 미간을 가볍게 눌렀다. 넓은 제국에서도 이런 식의 허물없는 접촉은 오직 벨레스에게만 허용된 특권이다. 벨레스는 에델가르트의 미간을 다 눌러 펴고 나서야 가볍게 말을 뱉었다.

“그야 물론 내 의사에 따라 내린 결정이지. 나는 휴베르트도 너도 좋아하니까.”

대사교의 총애를 받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자의적인 판단으로 교단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키는 제자의 손을 들어 준 사람이 할 만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에델가르트는 그 말의 의미에 앞서 덧붙여진 말에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 그런 소리 하지 마. 휴베르트가 없어서 망정이지.”

“으음. 휴베르트도 동의할 것 같은데. 걔도 별 다를 거 없거든.”

“그것 참 상상이 잘 되는 추측이네.”

에델가르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번 자신과 이들에 대한 소문이 영 근거 없는 헛소문이라고 화낼 수만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 내막은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지만 어쨌든 제 측근이란 이들이 이 모양이었으니. 하지만 에델가르트는 동시에 이런 한 쌍의 묘한 충성에 대한 대가가 고작 그 정도의 헛소문이라면 꽤 받아들일 만한 손익계산서라고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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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는 귀족 중의 귀족답게 모든 상대에 대해 적절한 호칭과 예법으로 대할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놀랄 만한 이야기를 한 상대는 비록 통일제국의 일등 공신이기는 했으나 본인과 황제의 동의에 의해 어떤 작위도 받지 않았다. 그래서 페르디난트는 이제 그 유효기간이 다했음에도 한때 그들의 관계를 정의했던 오랜 호칭을 계속 사용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지금 사소한 문제조차도 되지 않았다.

“선생님이 결혼한다고?”

“응. 그래서, 아무래도 네가 귀족식의 예법에 밝을…….”

페르디난트는 또한 귀족다운 예의를 갖춘 남자이기도 했으나 벨레스의 말이 가져다 준 놀라움은 가장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기 어렵게 만들었다. 페르디난트는 벨레스의 말을 끊고 다시 물었다.

“결혼이라니, 누구랑 말이지?”

“휴베르트.”

지나치게 깔끔한 대답은 모든 것이 명쾌하다는 착각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 그렇군. 휴베르트와……휴베르트? 내가 아는 그 휴베르트 말인가?”

벨레스는 옛 제자에게 늘 친절한 편이었다.

“휴베르트 폰 베스트라 맞아.”

벨레스는 평온하게 대답했지만 그 대답이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불러온 파장은 결코 작지 않았다. 벨레스가 페르디난트를 찾는 것을 보고 오랜만에 선생님과 시간을 보내려 모여들었던 흑수리 유격군 출신들이 제각기 어떻게 얼굴로 놀라움을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다채로운 예시들을 선보였다. 차라리 에델가르트와 결혼한다고 했다면 이보다는 덜 놀랐으리라. 그 휴베르트랑? 그 녀석이 사랑……같은 걸 할 줄은 아는 녀석이던가?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은 드물게도 영지를 떠나 있던 베르나데타의 외침이었다.

“서서서선생님……! 베르는, 베르는 휴베르트씨가 상대라도 선생님 편이니까요……!”

베르나데타로서는 이만한 용기도 없을 것이다. 벨레스는 일단 그 용기에 감동하기로 했다. 

“그건 고마운데……왜 휴베르트를 상대해야 하는 거지?”

“그러니까……에? 휴베르트씨한테 협박당하거나 한 게……아닌가요?”

충분히 할 만한 상상이라고 생각했기에 벨레스는 화를 내는 대신 살짝 웃었다.

“아니야.”

그 말이 충분한 이해를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이 흑수리 반 아이들의 잘못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카스파르가 이해했다는 듯 손을 번쩍 들었다.

“아, 나 그거 알아! 정략결혼 말하는 거지!”

“흐음? 선생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데는 동의하지만……글쎄……지금 상황에서 휴베르트가 선생님과의 정략결혼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적다고 생각하는데.”

“이 상황에서 그렇게 침착하게 생각을 할 수 있다니 대단하네요, 린 군……하지만 맞는 말이긴 하네요.”

“응”

벨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자 슬슬 무서운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추측을 확인해 보기로 한 것은 결혼 상대의 이름에 눈을 조금 크게 떴을 뿐 침착을 유지하고 있던 린하르트였다. 주변 친구들이 제각기 혼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을 본 린하르트가 한숨과 함께 대표로 물었다.

“그러니까 즉, 두 사람이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다, 그거잖아요?”

모여 있는 사람들은 꼭 그 단어를 썼어야 했냐고 묻고 싶었다. 벨레스 혼자라면 모를까 그 휴베르트와 엮여서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파괴력이 큰 단어였다. 그러나 린하르트는 자신이 뱉은 단어의 충격에 졸도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친구들을 무시한 채 벨레스를 바라보았다. 

“응. 맞아.”

거짓말이라고 우기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모여 있는 사람 모두가 그들의 선생이 어떤 성정을 가졌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닌 것이다. 모두에게 모범이 되어야 할 귀족답게 가장 먼저 가혹한 현실에서 헤어나온 페르디난트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아, 그래서 나를 찾은 거였군. 귀족의 예식에 대해 조언을 얻고 싶은 건가?”

“조언……이라기보다도 준비를 좀 도와 줄 수 있나 해서. 원래 예식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엘도 바라는 것 같고……황제의 뜻이니 조금 화려해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그런 거라면 네가 적임일 테니까.”

페르디난트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벨레스의 인선에 감탄했다. 다만 그 감탄의 방향은 다소 차이가 있었다. 페르디난트는 그런 예식의 조력자로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자신을 택한 벨레스의 안목에, 다른 이들은 페르디난트의 열정에 말 한 마디로 불을 당겨 버린 수완에 대한 감탄이었다. 

“그야 물론……! 아아, 선생님은 평민 출신이니 제도의 의상실 같은 곳에 연줄이 부족하겠지. 그런 거라면 당연히 이 페르디난트 폰 에기르가 적임일 수밖에! 빈틈없이 준비해 줄 테니 내게 맡기도록 해! 흐음. 하객 명단은 휴베르트가 작성할 건가? 하지만 그 녀석도…….”

“제가 뭐 어떻다는 말씀이신지?”

“끄허억?!””끼야아악!”

도무지 귀족답지 않은 페르디난트의 비명은 다행히도 그보다 몇 배는 큰 베르나데타의 비명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퍽 익숙한 비명인지라 휴베르트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황급히 뒤돌아 앉은 페르디난트를 내려다보았다.

“뭐, 뭐야……왜 네가 여기에?”

“궁내경인 제가 황궁을 돌아다니는 게 이상한 일입니까……재무부에 볼 일이 있어 황제 폐하와 함께 둘러보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만.”

“어? 그, 그렇군. 폐하도 함께 계셨군요.”

“아, 난 신경쓰지 마. 내가 방해했군.”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던 곳은 재상의 집무실에 딸린 응접실이었다. 모처럼 방문한 도로테아와 티타임을 나누고 있다가 뭔가 재미있겠다 싶었던 카스파르가 선생님과 동료들을 끌고 들이닥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재상의 집무실과 재무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페르디난트는 일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황궁의 관리나 고용인 대부분으로부터 두려움을 사고 있는 휴베르트였으나 이 궁내경은 모여 있는 이들에게 있어 오랜 동료이기도 했다. 어쨌든 청소년에 가까운 시기부터 부대껴 온 사이에는 아무리 어렵고 무서운 인간일지라도 그 위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그래. 휴베르트 너도 귀족이기는 하나 이런 화려한 예식 준비는 익숙하지 않겠지.”

“귀하는 제 직책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페르디난트는 익숙하게 휴베르트의 말을 넘겨 버렸다.

“네가 선생님과 결혼하는 것은 놀랍지만……걱정하지 마. 다른 사람도 아닌 선생님의 결혼식이다. 내가 빈틈없이 돕도록 하지!”

이 통렬한 무시에 대해 무언가 한 마디 하려던 휴베르트는 곧 귀찮은 일에 부려먹을 사람이 하나쯤 있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예식을 올리는 것 자체가 휴베르트의 취향과는 거리가 있는 일이다. 에델가르트의 뜻에 따라 진행하는 예식인 만큼 어차피 휴베르트 자신의 취향보다는 보여질 모습에 주의를 기울일 생각이었으니 페르디난트의 진행 쪽이 대중에게 보여줄 용으로는 나을 것이다. 아무래도 벨레스가 부탁한 것 같아 보이는데 과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알아서 받아들이고 고생해 준다는 것을 말릴 이유가 없었다. 빠르게 결론을 내린 휴베르트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뭐,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한다면야 맡겨도 괜찮겠지요……큭큭큭…….”

“아아, 물론이지! 맡겨만 줘! 예식은 언제쯤이지?”

“글쎄요……그렇게 미룰 이유도 없으니 수금의 달이면 어떨까 싶습니다만……선생님?”

“응. 괜찮아.”

그 자연스러운 문답에 다시 충격을 받은 이들과는 달리 페르디난트는 생각보다 촉박한 일정에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뭐? 빨라……! 준비할 시간이 몇 개월밖에 없잖아? 이건 서둘러야겠군……우선 반지와 의상 주문부터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겠어. 좋은 가게들은…….”

“아아……반지라면 저는 있는 것으로 괜찮습니다. 새로 맞출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으음? 반지……는, 그렇군. 결혼을 논할 정도라면 이미 준비했을 수 있겠지.”

당연한 일이다. 다만 페르디난트는 그 휴베르트가 반지씩이나 준비할 남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방 한쪽에서 도로테아가 작게 ‘사람이 사랑을 하면 바뀐다더니…….’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에 많은 이들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둘이 그런……지도 꽤 오래된 것으로 아는데. 한 번도 반지를 낀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군.”

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 대화를 관망하고 있던 에델가르트의 말에 시선이 휴베르트의 손으로 몰렸다. 그 손은 언제나처럼 단정한 흰 장갑을 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휴베르트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큭큭큭……뭐어……금속에 닿으면 별로 좋지 않을 것들을 종종 다루니까요……기껏 받은 것을 망가뜨려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독을 말하는 거라는 것은 한때 같은 전장을 헤쳐나왔던 이들 모두에게 분명했다. ‘사람은 쉽게 안 바뀌는 법이지.’라고 중얼거린 것은 린하르트였고, 이번에도 꽤 많은 이들의 동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선을 벨레스의 손 쪽으로 옮겼다. 그 손가락이 비어 있는 것에는 별 의문이 없었다. 휴베르트와는 다른 의미로 험한 일을 많이 하니 그 실용적인 성격에 반지를 끼고 다니지 않는 것쯤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휴베르트는 동료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남자였다. 불행히도 그리 좋은 쪽으로는 아니었다.

“아, 나는 맞춰야 해.”

시선을 깨달은 벨레스가 그렇게 말하자 지금껏 나오는 말들마다 열심히 끄덕이던 고개들이 기울어졌다. 입을 열 수 있던 것은 아무래도 휴베르트의 상급자 쪽이었다. 

“선생님이 잃어버렸을 것 같지는 않고.……”

“응. 내가 필요없다고 했어. 휴베르트 건 예전에 아버지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주라고 해서.”

별로 어이없음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은 되지 않는 말이었다. 에델가르트뿐 아니라 모두의 황당하다는 시선을 받게 된 휴베르트도 이 상황이 썩 익숙하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어쨌든 대답을 피하지는 않았다. 

“큭큭큭……제가 반지라도 곁들여서 고백할 것 같은 남자일 거라고 생각이라도 하신 겁니까?”

물론 아니다. 모여 있던 이들은 기대를 배신하지 않은 휴베르트에 대한 감동을 제각기 구겨진 얼굴로 아낌없이 표현했다. 카스파르는 오랜 지인의 특권을 살려 벨레스에게 결혼은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떻느냐는 조언을 건넸지만 당연하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에델가르트의 발언은 그런 동료들의 마음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참……대단한 커플의 결혼식을 보게 됐군.”

“큭큭…폐하의 치적에 포함해 기록이라도 해 둘까요?”

“재미없는 농담은 그만둬. 어쨌든 재상이 도와준다니 걱정은 덜었군. 황제가 눈치 없이 대화에 너무 길게 참여해도 안 좋을 테니 나는 이만 가보겠어.”

에델가르트가 응접실을 떠나자 자연스럽게 휴베르트도 따라 사라졌다. 남겨진 이들 사이를 감도는 황망한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페르디난트가 목소리를 높였다.

“자, 그럼……지금은 근무중이니 퇴궁 후에 제도에서 제일가는 세공사를 찾아 선생님 집으로 보내도록 하지. 어디로 보내면 되지?”

“아……베스트라 후작가.”

“음?”

“베스트라 후작가에서 살고 있으니까, 사람을 보내려면 거기로 보내면 돼.”

에델가르트의 전례가 있어서 충분히 조심해서 말했음에도 이번에 찾아온 침묵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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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즐거워 보이십니다.”

“응?”

벨레스는 잠시 휴베르트의 말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생각했다. 세 그릇째 해치우고 있는 식사를 두고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런 일상적인 일을 소재로 하는 스몰토크 같은 것과는 별 관련이 없는 인물이었다. 편한 사람이 상대라면 더더욱. 빠르게 답을 내린 벨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생각보다 재미있어.”

“뭐, 당신은 저와는 또 다르니까 말입니다. 에기르가의 그 남자도 꽤 신이 난 것 같더군요.”

네 번째 그릇을 끌어당기던 벨레스가 잠시 손을 멈추었다. 휴베르트란 남자가 결코 속을 읽을 수 없는 자라 믿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벨레스는 그 부류에 속하지 않았다. 그런 오해를 퍽 즐기며 이용하기도 하는 이 남자가 그렇지 않아도 긴 페르디난트란 이름을 굳이 더 늘여 말한다는 것은 명백한 불만의 표시다. 벨레스는 그 불만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지는 않았다.

“지금 질투하는 거야?”

“……제가 질투 같은 걸 할 사내로 보이십니까?”

“응. 귀엽네.”

벨레스의 확답에 휴베르트는 잠시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벨레스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했다. 

“큭큭큭……그렇군요. 의외입니다만, 저는 그자가 귀하 곁에서 즐겁다는 듯 떠드는 것이 퍽 불쾌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도 알겠지만 걔는.”

“예에. 당신에 대해서도 그자에 대해서도, 꿈에서라도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래서 의외라는 겁니다. 제가 귀하를…….”

휴베르트는 말을 마치지는 않았다. 흑수리반의 동료들이 알았다면 안심했을지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어떤 말은 그들뿐 아니라 휴베르트에게도 그리 익숙하지 않았다. 다행히 눈앞의 상대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말을 충분히 읽어 주는 사람이었다. 휴베르트는 그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 조금 전 자신을 껄끄럽게 했던 감각에 다시 이르렀다. 갑작스럽게 페르디난트를 질투하느냐는 화제가 되어 묻지 못한 것이었다.

“어쨌든, 귀하께서 그렇게 즐거워할 만한 일이라면, 이런 행사도 필요없는 일은 아니었겠지요.”

결혼식 준비에 불만이 없다는 듯한 어조는 아니었다. 벨레스는 어디 한번 들어 보자는 듯 휴베르트를 바라보았다. 휴베르트는 자신의 방 서랍 속에 있는 작고 반짝이는 물건을 생각했다.

“귀하는 제게 양친의 유품을 넘겨주셨습니다. 반지 하나 준비할 줄 모르는 남자를 앞에 두고 상관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런데 지금은, 퍽 즐거워 보이시는군요.”

“그건…….”

“네. 귀하는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 진심이었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갓 인간이 되었던 그때의 귀하에게는 없던 호오가 지금은 생겼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그때 갓 인간이 되었다는 말은 육체적으로는 그리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르지만 감정의 측면에서는 어폐가 있었다. 그러나 벨레스는 그 오류를 지적하는 대신 휴베르트의 태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휴베르트의 말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대답을 내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는데. 재미있다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고, 딱히 지금까지 아쉬웠다는 건 아니니까.”

벨레스의 말에 잠시 멈칫한 휴베르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어쩌면 그런 대답을 예상하고 한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음험하고 비겁한 남자라고 평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남자기도 하고.”

다행히도 휴베르트는 진작 식사를 끝내고 테프를 마시고 있었다. 들고 있던 잔으로 얼굴의 당혹을 감출 정도의 여유는 충분했다. 그러나 테프 잔 하나로 전부 가리기에는 벨레스는 휴베르트를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자의 어리광을 받아 주는 건 선생의 특권이지.”

결국 휴베르트는 입술만 적신 테프 잔을 내려놓았다. 

“큭큭……제게……어리광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은 귀하 정도입니다만.”

“그래야지. 아내를 여럿 둘 수는 없잖아. 한 명이면 충분하지.”

아내라는 말을 눈앞의 상대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꽤 익숙지 않은 일이었지만 휴베르트는 해냈다. 그리고 그 결과가 꽤나 만족스럽다고 생각했다. 휴베르트는 조금 전 제대로 마시지 못한 테프 잔을 다시 들어올리며 베르나데타가 보았다간 기겁할 것이 분명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분명히 한 사람이면 충분하겠지요. 그리고……한 사람 정도는 있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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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제국의 재상이 신이 나서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다만 그 상대에 대한 정보는 모호한 편이었다. 재상이 고른 재단사나 세공사 등이 베스트라 후작가를 드나든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그것은 농담거리도 되지 않는 추측밖에는 끌어오지 못했다. 일부 가벼운 이들은 가십거리에 대한 즐거운 공상을, 보다 교활하거나 신중한 이들은 재상의 결혼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와 가치를 따지며 계산을 시작했지만 그해 수금의 달에 열린 결혼식의 청첩장을 받은 이들은 그런 공상과 계산들을 다 폐기처분하고 정신적 음주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어쨌든 결혼 준비라는 것은 꼭 당사자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놀라움으로, 누군가에게는 황제의 궁내경과 비공식적인 황제의 검의 결합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 이 결혼은, 재상이 주재한 결혼답게 수금의 달에 어울리는 화려함으로 치루어졌다. 몇몇 가까운 이들은 그 화려함이 결혼식의 당사자인 두 사람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우려했지만 사교도 아닌 황제가 나서서 축복해 준다는 사실은 그럭저럭 그 화려함의 무게를 잡아 주었다. 그리고 어쨌든 지인의 결혼식에 지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이들은 결혼식 당일 내내 언제나처럼 철판 위에 그린 것 같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던 휴베르트가 결혼식의 마지막에 살짝 붉어진 얼굴로 신부에게 입맞추는 것을 보고 졸도에 가까운 정신적 충격을 받았기에 그 어울리지 않는 화려함을 실제로 지적할 수 있던 이들은 아무도 없었고, 덕분에 그 결혼식은 참석한 이들에게 깊은 인상과 앞으로의 고민만을 남기고 끝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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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ㅋㅋㅋㅋ리퀘박스에 휴베레스가 들어왔는데요....먼저 쓰고 있던 휴베레스가 있어서 그만....이걸 먼저 마무리해 버렸네요....리퀘받은 것도 조만간 들고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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