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을 피하는 방법


5부






"자, 이야기 해 봐."


"네?"


"네가 날 찾아올 정도의 고민. 하나 밖에 없잖아?"





이윽고 도진의 말에서 '카페', 




하는 말이 의미심장한 분위기로 흘러나온다.  





".....하아."




도진의 말에 송화의 표정이 기다렸다는 듯이 무너졌다. 커다란 한숨이 터져나오며 어깨까지 추욱 늘어졌다. 금세 팔자눈썹이 되어버린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할지, 아니 무슨 말을 해야할지 순간 깜깜해져버렸다. 그래서 송화는 손바닥에 입술을 묻고 팔꿈치를 괴며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도진은 기다려주었다. 재촉하지 않고 송화의 모습을 보더니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카페 많이 힘들지?"


"......네."





다른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에 서툴긴 했지만, 게다가 과선배인 도진과는 이렇게 단 둘이 마주앉아 미주알고주알 고민거리를 나눌 사이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예외였다. 그래, 지금은 예외다. 이 고충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한때의 도진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사장님 때문이지?"





도진이 소개해준 직장- 이 고민이었으니까. 




그것도 그 직장의 유일무이한 상사이자 제 고용주이자, 그 직장의 사장님이라 불리는 여자가 바로 이 모든 고민의 원흉이었으니까. 송화는 말 없이 눈을 파르르 감았다. 방금 도진에게서 사장님 때문이냐는 그 말을 듣자마자 조금 후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말을 해도 될까. 너무 답답해서, 정말이지 너무 답답해서 끙끙 앓다가 송화는 도진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연락을 하고 약속을 잡으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이래도 될까, 하는 질문을 수십 번도 넘게 했었다. 그래도 도무지 도진이 아닌 사람에게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억울한' 마음에라도 꼭 물어야했다. 





아니, 따져야했다. 선배는 분명 다 알고 있었으면서 굳이, 왜, 굳이- 





"그게..."





나한테 거길 소개해 준 거예요? 하고. 




 

그래,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정말 홧병이 생길 것 같았다. 사람이 고민을 하면 늙는다더니 그 말이 딱 맞는 것이었다. 송화는 사춘기의 반항기조차 있는 듯, 없는 듯 넘어갔던 그 유순하고 물같은 제 인생에 있어 강 씨 성을 가진 여자 하나 때문에 때 아닌 질풍노도의 혼란기를 겪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그러니까..."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니 어떻게 운을 떼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도진은 다리를 꼬고 의자의 등받이 뒤로 깊게 몸을 묻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송화의 고민은 모두 꿰뚫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송화는 괜히 마음이 불편하고 민망했다. 이 고민을, 그러니까 이 고민을 이미 도진은 다 알겠지만, 그래도 역시나 민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





그러나 말 대신 한숨만 나왔다. 몇 번 입을 오물거리면서 도진을 보며 말을 꺼내려해도 다시금 한숨이 픽-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내가 맞춰볼까?"


"네?"


"네가 뭐 때문에 날 찾아왔는지 말이야."





심호흡을 했다. 말해야해. 말해야 한다. 그래야, 그래야 내가 살 것 같아...





"왜... 말해주시지 않으셨어요?"





스스로도 제 눈동자가 떨리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장님이 여자 좋아하는 거- 





하는 말까진 차마 못했다. 





다만 송화는 왜 말해주지 않았냐는 말로 모든 것을 함축했다. 두 무릎 위에 주먹을 꽉 쥔 채 도진을 올려다 보며 심장이 쿵쿵 거리는 걸 생생하게 느끼며 도진에게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기다렸다. 사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더 있었다. 여자를 좋아하는 사장이 매일 야심한 밤까지 단 둘이 밀착 '야근'을 시키는 건 왜 말씀해주시지 않은 거예요. 그 사장이 변태에 또라이라는 건 왜 미리 알려주지 않은 거예요? 그 사장이란 여자가, 그런데 왜 그렇게 사람을 신경 쓰이게 하는 거예요? 





도대체





여자를 좋아하는 강시은이 그렇게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건 왜 이야기 해주지 않았냐는 말이에요. 





그래서 지금 내가,  





내가!





내가 이상해지게끔... 만들...





"아, 역시 너한테도 그랬구나."


"네?"


"그 사장님이 원래 좀 그래."





제 격정적인 마음 속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평온한 도진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송화는 도리어 더 심장이 철렁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장님이 좀 그래, 하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딸꾹질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놀란 눈으로 도진을 쳐다봤다. 분명 도진은 제 고민이 뭔지 다 아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 고민이 너무나 당연스러운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아..."





그 사장님이 좀 그래, 그 사장님이 좀 그래, 그 사장님이 좀 그래...





방금 도진이 뱉은 그 한 마디를 머릿 속에서 반복하며 송화는 순간 멍해졌다. 그렇다면, 제게만 그런게 아니라...





"그...랬구나..."


"그래. 그러니까 신경 쓸 필요없어. 누구에게나 그렇거든."





아.





순간 송화는 맥이 탁 풀리는 걸 느꼈다.





역시, 그런거였어. 그 변태또라이 사장녀ㄴ은 어떤 사람에게든 다 그런 거였구나. 언제나 제게 보여주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또라이와 변태의 기질을 누구에게든 원없이 보여줬던 거구나. 옆에서 만지고, 감싸고,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뽀...뽀같은 것도 마음껏 하는 사람이었구나. 취향의 문제니 뭐니 하면서, 야근이니 뭐니 하면서, 걱정이 되니 뭐니 하면서,





...그랬던...





...거였구나...





 

저를 시은의 가게에 꽂아준 사람이자, 시은의 가게에서 가장 오래 버텼다는 도진은 제 연락에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일하고 있는 다른 카페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약속시간은 도진이 일하는 카페가 마감을 하는 시간으로 정했다. 너무 늦은 시간대라서 좀 그렇지 않냐는 도진의 말에 송화는 괜찮다고 했다. 하루라도 빨리, 아니 한시라도 빨리 저를 괴롭히는 이 고민을 해결해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다가도 몸을 일으켜 손톱을 잘근잘근, 뺨을 꾹꾹 누르며 생각에 생각을 이어나가게 했던 이 고민이, 무의식중에 내내 머릿 속을 맴도는 시은의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시계의 알람소리인양 화들짝 놀라며 전전긍긍했던 이 고민이-





이 고민이, 그저 제게만 '고민'이었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자신에게만 고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라는 것을- 송화는 생각조차 못했었다. 입을 맞췄다는 단 하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 입을 맞추기까지 시은과 있었던 묘한 분위기, 태산 때문에 경찰서에 불려간 밤의 그 걱정스러운 얼굴, 그리고 언제든 짓궂게 행동하면서 야근 때만 되면 한없이 사근사근하고 친절해지는 시은의 모든 행동들. 





그리고 다시 입맞춤으로 생각이 이어진다.





- 너 그거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다? 





송화는 제 아랫입술을 꾸욱 누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시은의 목소리가 정말 바로 그 때처럼, 제 귓 속으로 꾸욱꾸욱 눌러 담기는 듯 선명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 의외로 여자가 맞을지도 몰라.






그리고 방금 그 찰나의 순간에 깨달았다. 도진의 그 말에. 의외로 여자가 맞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은, 자신만을 위한 대사가 아니었다는 걸. 그러고보니 입을 맞추고나서 당황스러운 제 모습과는 달리 더 없이 평화로워보이기만 했던 시은의 표정이 떠오른다.






제 고민의 시간들이 너무나 하잘 것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순간 민망함이 다시금 온 몸을 감쌌다. 그리고, 





....뭐야.





왜 기분이 이렇게 나쁜 걸까...





기분이 나쁘고, 마음까지 콕콕 쑤셔오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힘이 탁, 풀려버렸다. 제 얼굴을 살피던 도진은 꼬고 있던 다리를 반대로 꼬며 한참 그렇게 송화의 얼굴을 보다가 입꼬리를 당겨 억지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 사장님이 원래 좀 그런 사람이라고 보면 돼. 그러니까 상처받을 필요 없어."


".....몰...랐어요."


"모를 수 밖에 없지. 나도 그런 사람 처음봤어."





저도 처음이에요- 진짜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고 송화는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정말 일순 손 끝에서 펑! 하고 몸 속을 팽팽하게 떠돌고 있던 긴장의 기운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것 같았다. 공기가 빠진 풍선처럼 힘없이 푸쉬쉬 가라앉는 그 느낌이 그렇게 불쾌할 수가 없었다. 





"네가 너무 순진해서 그래. 너이기 때문에 더 놀랐을 거야."


"......"


"그런 사람이 물론 흔하진 않지만 나름 좋은 경험일지도 몰라. 앞으로 또 그런 사람이 없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그래도...전..."






알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며 도진이 짐짓 아랫입술을 꾸욱 다문 채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며 말했다. 송화는 이제 코까지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이게 뭐라고 눈물이 나올 것 같은지 알 수 없었다. 혼자 진지하게 마음앓이를 했던 것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시은에겐 정말 별거 아닌 행동들, 말들, 그리고 스킨십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묘하게 배신감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야속함, 민망함, 속상함, 그리고 배신감. 이 배신감이 누구를 향한 건지 너무나 명확하지만 차마 분명하게 마주하기 무서웠다. 왜, 도대체 무엇에 배신을 느껴야하는 걸까, 도대체 무엇에, 





내가 사장님한테...





"그냥 그만둬버려."


"......"


"많이 놀랐나보네. 하긴, 나도 그렇게 사람을, 그것도..."





도진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그대로 한숨쉬듯 푸욱 내쉬며 말을 이었다.





"여자를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단 말이야."






....어?






엥?






"네에!?"


"막말로 내가 중딩 때부터 알바인생이었거든. 너도 알지? 해보지 않은 알바가 없다고 했었잖아. 어지간한 진상 손님이나 고용주들을 만나봤지만 이렇게 특이한 사람은 처음이었다니까."


"오빠. 바, 방금 뭐라고..."


"응? 아, 그 사장님 여자 싫어하는거? 엄청 싫어하잖아. 그런데 내가 보기엔 여자, 남자 구분없이 사람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 같이 일하면서 진심으로 웃는 걸 못봤다니까. 유달리 여자를 더 싫어하긴 해. 이건 내가 장담할 수 있어."






푹 숙이고 있던 고개가 어딘가에 놀란듯 움찔 거리며 도진을 향했다. 






"여자를 싫어한다구요?"


"어. 무지 싫어하지? 표정관리도 안되고 말이야. 나 일하기 전에 그만 둔 애가 너 윗 학번에 정은이 알지? 걔였고. 그 전엔 걔 친구 호정이였고..."






.....이게 무슨 말이야....






"게다가 손님들에게는 그나마 낫다고 하지만 역시 너무 딱딱하잖아. 예전에도 그 사장님 태도 때문에 시비붙은 적이 많다더라. 사실 나 일할 때에도 아슬아슬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그래서 거기 대학로 입구에 파출소 있지? 얼마나 시비가 많이 붙었으면 거기 파출소장이랑 엄청 친해. 





"....아."





시큰해지던 울음기가 일순 싹 사라짐을 느끼는 송화였다. 오히려 황당함에 몸이 떨릴 정도였다.





"처음엔 그냥 여자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일하다보니까 그냥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 자체를 귀찮아 하고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더라고. 뭐랄까, 전문용어로 사회성이 좀 부족하다고 볼 수 있겠지. 그냥 사람 자체가 도도한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생각해봤는데 약간 나르시즘? 그런 사람에 가까운 것 같아. 본인 이외에 다른 사람자체에 그냥 무심한거지. 표정도 완전, 알지? 웃어도 웃는게 아닌 느낌. 그 사장님 웃으면 더 차가워 보이지 않아?"





도진에게서 쏟아지는 이야기들이 어느새 페이드아웃되고 있었다. 송화는 이런저런 '강시은 보고서'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도진의 목소리가 꼭 매미소리처럼 느껴졌다. 분명 울리긴 하는데 집중이 되지 않았다. 다만 제 머릿 속에서 이따금 저에게 장난을 걸고 쿡쿡 거리며 웃어대는 시은을 떠올릴 뿐이었다. 





"게다가 그 사장님이 결벽증도 있는 것 같더라고. 누구를 만지는 건 더 말할 것도 없고, 자기를 만지기라도 하면 표정이 아주 그냥, 살기 등등해져서 저절로 그만두겠다는 말이 나온다니까. 내가 예전에 컵을 떨어뜨려서 깨뜨린 적이 있었거든? 거기 컵 엄청 비싼 거 쓰잖아. 그런데 그런 건 아무런 말도 안하더라. 오히려 나보고 조심하라니 뭐라니 하더니 말이야-"




그런데 있잖아.




어쩌다가 잠시 사장님 팔을 스친 적이 있었거든?




그랬더니 아주 그냥 표정이 매섭게 변해서는,




"건들지마- 이러더라고."


"....네에?"


"사람을 만지는건 고사하고 자기 몸에 닿는 것도 끔찍히 싫어해."





그걸 아예 대놓고 이야기하더라. 그래서 그 사장님 별명이 원래 강시크였어. 강시크. 예전에 알바생들 서너명 쓸 때는 강시발이었대. 존나 재수없어서. 근데 본인도 자기 재수없는거 잘 안다더라. 진짜 특이하지 않냐?  






"그러니까 신기한거지. 그렇게 예쁘장한 얼굴에 그런 성격이라니. 솔직히 그런 사람이 어떻게 카페를 할 생각을 했는지도 이해가 안간다니까."





그래도 너 오래 버티는거다? 난 네가 일주일만에 나올 줄 알았는데, 하는 도진의 말도 이젠 잘 들리지 않는다.










* * *









"......"





생각의 정리, 그래 정리가 필요하다- 





하는 마음조차도 하얗게 떠버린다. 송화는 지금 날씨가 어떤지, 자신이 어떤 보폭과 속도로 걷고 있는지, 지금 집으로 걸어가는 중에 지나가는 차, 사람, 간판, 건물들은 무엇인지 조차 하나도 의식하지 않았다. 그냥 두어걸음 앞의 길바닥을 보면서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세상에 오직 자신과, 시은과, 그리고 제 고민들만이 둥둥 떠있는 느낌이었다.





오늘 나는 무단결근을 했다.




그 이유는 사장님이 뽀뽀를 해서이다.




그렇다면 사장님이 뽀뽀를 한 이유는-




여자를... 좋아해서...





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





도무지 생각과 논리들이 이어지질 않는 것이다. 도대체 강시은, 그 변태또라이 사장은 그렇다면 왜, 도대체 왜- 지금껏 제게 그런 행동들을 했을까. 야근이랍시고 진득히 몸을 부대끼며 웃어주고, 사근사근 말을 걸어주던 모습은 환상이었을까. 게다가 미국에 갔을 때 헬로키티 수첩에 빼곡 적어온 매뉴얼이랍시고 제게 무심한듯 걱정이 담긴 말들을 내어놓던 모습은? 거기다 태산이 저를 강제로 태우려했을 때 나타나 버럭 화를 내며 제 손목을 잡아챈 그 모습은?





그리고, 그리고...





사람과 닿는걸 싫어한다면서 그렇게 제 주위를 맴돌며 치던 그 장난기 어린 모습은 도대체 뭐란 말이야. 앞치마를 묶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항상 제가 하는 말마다 푸스스 소리라도 나듯 예쁘장하게 눈을 휘어뜨리며 웃던 그 얼굴은?





송화의 발걸음이 더뎌진다. 결론없는 생각들은 오히려 혼란만 크게 키우는 것 같았다. 





설마, 진짜...





"......혹시.. 진짜 또라이인가..."


"그럴지도?"


".....!"






꺄악-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 뒤쪽에 힘이 그대로 풀렸다. 





그리고 송화가 꺄악! 하고 내지른 덕분에 제 뒤로 조심스레 다가섰던 인기척도 덩달아 놀란 모양이었다. 놀란 몸은 더디게 걷던 걸음조차도 꼬이게했고, 결국 꼬인 다리에 스스로 걸려 넘어지게 했다. 송화는 놀라면서도 저보다 더 좋은 반사신경으로 제 허리를 감싼채 같이 넘어진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돌아보기도 전에 누군지 알아챘다. 물론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 익숙하고 아찔한 향기, 저보다 반뼘쯤 큰 키, 그리고 제 뒤를 언제나 이렇게 익숙하게 안아주고 잡아주던 사람은, 그것도 여자는 이 세상에 한 사람 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란 심장이 귓바퀴에서 쿵쿵 뛰었다. 





"어, 엄마야..."


"엄마 아닌데."


"....또...또라이.."


"혼날래?"





이게 어디서 또라이래, 하는 말이 들린다. 이젠 시은에게 놀라고 당황했던 것들에 대한 면역력이라도 생긴건지, 대담하게 또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지라도 된 듯 싶었다. 아니, 사실은 한참이나 저를 고민하고 고민하게 하는 이 상황에 대한 야속함이 송화를 오히려 차분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사장님이었다. 




강시크, 혹은 강시발로 불렸다는 여자.




그 사람이다. 




하루 온종일 제게 질풍노도의 고민을 선사해준 당사자.




제 허리를 감싸안은 손이 한 개에서 두 개로 늘어난다. 꼭 백허그라도 하는 것처럼 두 팔로 제 허리를 가득 안아오는 손길이 이내 저를 일으켜 세운다. 부축아닌 부축을 받으며 주춤거리던 송화가 조심스레, 머뭇머뭇거리며 제 뒤에 있는 시은을 올려다보았다.





꼭 죄라도 지은 것마냥, 겁에 질린 것마냥, 저를 동그랗게 올려다보는 송화의 토끼같은 표정을 보니 시은은 저도 모르게 웃고싶지만서도 꾸욱 그 웃음을 참았다.





"......"


"그래, 오늘 하루 네 멋대로 가게에 나오지 않고 나 혼자 하루종일 그 많은 손님들에게 서빙, 계산, 음료제조를 맡긴 심정은 어때?"


"문자 했잖아요..."


"아, 문자? 설마 '사장님 오늘 몸이 안좋아서 하루만 쉴게요, 죄송해요.' 하는 그거? 요즘엔 알바생들이 통보식으로 휴가를 신청하면 고용주들이 알아서 벌벌 기어가야되는 아름다운 세상인가봐. 아, 이런 걸 보고 네가 저번에 그랬지? 갑질이라고? 응?"


"......"


"놀라서 전화했더니 전화는 받지도 않고." 





그때서야 송화는 힐끔, 조금 피곤해보이는 시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늦은 밤의 가로등을 등진 그 얼굴에 그림자까지 드리워져 더욱 안쓰럽게 보이긴 했다. 그렇지만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여유롭고 도도한 분위기를 감출 순 없었다. 송화가 생각하는 시은의 가장 큰 특징을 고르라면 저 고고한 포커페이스였다. 언제든 흐트러지지 않는, 그래서 그 너머의 의중을 도무지 짐작조차하기 힘든, 그런 사람. 새삼 자신이 가진 분위기와 얼마나 동떨어진 사람인지 송화는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의 뽀뽀 한 번에 세상에 모든 고민을 짊어진 사람이 되었던게 순간적으로 허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죄송해요. 그렇지만..."


"자."


"네?"


"오늘 손님이 너한테 주라고해서 가지고 온 거야."




시은이 건넨 갈색의 봉투에 송화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아 손바닥을 쫙 펼쳤다. 그 위로 톡, 그 선물이라고 불린 갈색봉투가 올려진다. 제 손바닥에 있는 물건을 한 번, 그리고 시은의 얼굴을 한 번 번갈아 쳐다보며 깜빡깜빡 눈을 감아대던 송화가 이내 물음표를 잔뜩 달고 마침내 시은의 얼굴만을 쭈욱 쳐다본다. 이게 뭐예요? 하는 표정이었다.




"우리 알바님이 평소에 이미지 메이킹을 잘했나봐. 네게 고맙다며 손님이 갖다줬어."




그 아침마다 오는 손님이라던데. 원래는 할머님이랑 같이오던...




"아! 아, 알 것 같아요."




아, 우와, 우와아, 하며 꼼지락꼼지락 몇 번 봉투의 끝을 만지더니 송화는 시은의 눈치를 조금 보고는 슬쩍 봉투를 열어 그 안을 쳐다보았다. 핀, 머리끈, 그리고 핸드크림과 사탕처럼 생긴 비타민C가 보였다. 아 이런 거 받으면 죄송한데, 어떡하지... 우와... 안그래도 앞머리 때문에 이거 필요했는데. 아 핸드크림 마침 떨어졌는데- 하며 혼잣말인양 조곤조곤 쉴새없이 말하던 송화가 이내 다시금 시은을 슬쩍 쳐다보더니 시은의 이마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왜?"


"이거 받아도 돼요?
 

"그럼? 가게에 알바생이 너 말고 다른 사람이 있어?"


"아..."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고맙거나 감사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괜스레 시은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가게에 돌아가면 꼭 답례를 해야겠다는 생각같은 걸 해야하는데, 그런 생각보다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시은의 눈치만 보이는 송화였다. 





"......"





아, 왜 자꾸 쳐다보는거야 진짜...





".....한 개 드릴까요?"


"내가 네 선물 받으려고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아니... 피곤해보이시니까..."




부스럭 거리며 봉투 안에서 투명한 비닐꾸러미를 꺼낸 송화가 이내 꼼지락 거리더니 비타민C 라고 커다랗게 씌어진 사탕의 껍질을 벗겨 꺼내었다. 그리고 그대로 시은에게 내밀었다. 식사도 못하셨죠? 하는 말을 기어들어가듯 하며, 조금 떨리는 손길로 검지와 엄지에 동그란 사탕을 집어 시은에게 내민 것이었다.





"......"





시은은 표정이 없었다. 송화의 말에 대답도 없었다. 그리고 일절 다른 반응도 없었다. 그저 부동의 자세로 송화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화...났겠지?




아니, 화났나봐...





새삼 이렇게 시은을 마주하니, 갑작스레 무단결근을 한 자신의 행동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송화는 허공에서 파들파들 떨리며 시은에게 향한 그 비타민C 사탕이 꼭 반성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걸 시은은 받지 않고 있다.




"...너나 먹어."




아니, 받지 않을 생각인가보다.




....아.





진짜 화났나봐...





꼭 때굴때굴- 하는 소리라도 들리는 것처럼 송화의 눈이 당황스러움에 이리저리 부산하게 시선을 옮겨댔다. 이 자리에서 넌 해고야- 이런 말을 듣는게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할 것 같다. 그래, 차라리 그런 건 괜찮지만 묘하게, 정말 마음이 묘하게 불편한 것이었다. 사실 원인제공은 시은이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들었다. 뽀뽀와 무단결근. 도대체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디에 더 이 고민의 무게를 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송화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





그렇지만 정말 하루 온종일 시은의 그 갑작스런 입맞춤 때문에 새삼 제 인생의 가치관과 성적취향 등이 송두리째 흔들렸고(지금도 흔들리고 있는 상태였다), 또 생각지도 못한 도진의 대답에 지금 어찌해야할 지 알 수 없는 시점에서, 시은까지 이렇게 나타나니 어디서부터 어떤 말로 이 사단을 풀어낼지 아득하기만 한 것이었다. 결국 허공에서 움찔 거리고 있는, 심지어 껍질까지 깠던 그 사탕을 쥔 손이 민망해 송화는 마른기침을 한 번 내뱉고는 다시금 시은을 흘끔 올려다보며 눈치를 봤다. 그리고 머뭇머뭇 제 입 속으로 가져갔다.





"...진짜 죄송해요. 그렇지만 이건..."




우물우물 거리며 송화는 제가 얼마나 혼란스러운 고민 속에서 하루동안 지옥처럼 살아야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장님에게도 설명이 필요해요... 왜냐면..."




우물우물, 제 입 안에서 굴러가는 사탕이 꼭 제 눈동자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말해야할까. 





그러니까 왜 입을 맞추셨죠- 라고 물어야 하나. 아니면, 도대체, 왜 자꾸 저한테 막 야근같은 거 시키고, 걱정해주시고, 만져대는 거예요, 하고 묻는게 나을까. 아니 애초에 왜 자신을 제외한 다른 알바생을 쓰지 않는 것인지를 물어야 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송화는 그 모든 용기가 사그라드는 걸 느꼈다. 묘하게 차가워진 시은의 태도를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또다, 저 포커페이스. 무심하고 차갑게 쳐다보는 예쁜 얼굴엔 웃음기도 없고, 그렇다고 화가난 것이라고 단정지을만한 표정도 아니다. 





"....."




침묵이 길어질 것 같아 송화는 마침내 결심을 했다. 사장님이 저한테 뽀뽀만 안했어도, 아니 야근이고 나발이고 그런 짓만 안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 아니에요- 




하고 말하자. 그래, 그렇게 말하고 물어보는거야. 도대체 왜 자꾸 나한테- 





"선물 한 개 더 있어."


"네?"


"손 줘 봐."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팔짱을 끼고 있던 시은에게서 드디어 말이 떨어졌다. 오랜 침묵을 깬 시은의 말이라 송화는 허둥대며 그 말에 집중했다. 손 줘 봐, 하는 말이 들리자마자, 방금 선물을 받았던 것처럼 얼떨결에 다시금 공손하게 두 손바닥을 모아 올리는 송화였다. 




"......"


"....뭐, 뭔데요?"





그러나 시은은 아무것도 줄 생각을 않고 계속 저를 쳐다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가지런히 모아 손바닥이라도 맞는 아이마냥 시은의 앞에 두 손을 모아올린 송화는 민망한 제 손바닥과 시은은 힐끔힐끔 번갈아 쳐다보며 다시금 물음표를 달고 시은을 올려다본다.  





"서른 둘. 건강해. 가게 하나 있고.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또라이는 아니야."


"네?"




팔짱을 낀 채 시은이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한 번도 시은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말투가 송화에게 들린 건 그때였다. 우물우물 입술을 달싹거리며 힐끔힐끔 제 눈치를 보는 것이 과연 제가 아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변태또라이 강사장녀ㄴ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시은은 잠시 입을 가리고 아, 음, 흠흠, 하며 입술에 그 말간 혓바닥까지 낼름 축여가며 여전히 저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전만해도 저를 빤히 쳐다보던 그 눈빛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 웃지못할 광경을, 너무나 준비없이 송화의 눈에 들어서자 송화는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게다가 불그름한 가로등의 불빛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부끄러워서 일어난 홍조인지 얼굴까지 조금 붉히고는





"뽀뽀는 미안했어."





토옥!





그 말과 함께 제 손바닥 위로 토옥! 소리나게 올려진 '선물'이 보인다. 언제나 우아하게 커피를 내리던 그 손. 태산에게 붙잡혀 난감한 상황에 맞딱뜨렸을 때 제 손목을 잡아챘던 그 손. 바로 시은의 손이었다. 





"야근 빼줄테니까..."





흠흠, 하고 다시금 헛기침까지 하며 시선을 왼쪽으로, 또 오른쪽으로 옮겨대는 사람이 과연 '강시크'라는 별명을 가졌던, 그 뻔뻔했던 강시은이 맞는지 모르겠다. 이제 송화는 쩍 벌어진 제 입 밖으로 튀어나와 또르르 길바닥으로 굴러가는 비타민C 사탕이고 나발이고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그 커다란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사..."





제 손바닥 위에 올려진 '선물'인 시은의 손 끝이 조금 떨고 있다.





"...사겨주면 안돼?"















웹소설(GL) zezeme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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