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아빠랑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이런 질문을 할 만한 나이가 됐다고 생각해서인지, 마음이 컸다고 생각해서인지 문득 아빠는 새엄마가 정말 좋아서 같이 사는 거냐고 물었다. 아빠는 한숨을 푹 쉬고는 그닥 안 좋아한다고 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랑도 살아야 하는 때가 있다고 그러셨다. 좋아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한다고 하는 걸까.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사랑은 하는 그 모순을 나는 열아홉이 된 아직도 모르겠다. 실은 아직도 새엄마가 불편하다고 얘기했다. 아직도 새엄마가 처음 집에 왔을 때를 곰곰이 떠올리면 당시의 감정이 미약하게 꿈틀거린다. 딱 한 번, 새엄마가 아직 아빠의 여자친구였을 때. 아빠가 새엄마를 차로 집까지 데려다 준다 그러길래 따라갔다. 아빠가 좋아하는 사람이 어떨지 궁금했다. 10분도 안 걸려서 헤어졌지만, 차근차근 서로를 알아갈 기회가 더 있을 거라 생각했다. 기회는 무슨. 아빠가 무턱대고 오늘부터 같이 살겠다고 집에 데려왔을 때 느꼈던 감정은 질투도, 실망도 아니었다. 그냥 조금 외로웠다. 내 공간이 서서히 좁아지겠구나 하는 외로움, 집에서 마음 편히 뒹굴거리려면 한참이 걸리겠구나 하는 외로움. 오래된 얘기를 뒤적이는데도 울컥하는 걸 보니 슬프긴 슬펐나 보다. 아빠 얘기를 들으면서 그러려니 했다. 내가 슬프고 외로웠던 걸 이제 와서 어쩌겠어. 앞으로 잘 살면 되지. 덜컹거리는 차 안을 가득 채워오던 먹구름을 걷어내고 자잘 살기로 다짐했다.  내 최고의 모습은 외롭고 슬픈 걸 티내지 않는 거였다. 

 다짐은 매일같이 한다. 호흡마냥 잘 살겠노라 다짐한다. 좋아하는 사람과 이따금 저녁을 함께하고, 문득 바다를 보러 가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잘 지냈으면 좋겠다. 내가 괜찮아졌으면 좋겠다. 유월 중순이 되면 뻐근하게 몰려드는 더위에 잠시 겨울을 떠올렸다 무더위를 직시하고 싶다. 나에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만큼 더욱 무뎌져야 할 시간도 많아지겠지만 괜찮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충분히 잘 지내고 있고, 잘 지낼 거다. 

 조금만 욕심 부려서 누가 나 좀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사랑에 빠지면 뭘 해도 사랑스럽게 보인다고 그러던데, 별 특징 없이 무난한 사람한테도 적용되는 말인지 궁금하다. 무난한 만큼 여린데. 내가 좋아하는 시간대나 장소, 그늘이 지는 방향을 잔뜩 알려 줄 수 있는데. 서로의 속도에 맞춰 나란히 걷는 사람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친구고 애인이고, 호칭을 떠나서 그냥 좋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내 사주에 그런 복이 없으면, 나라도 좋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나부터 좀 사랑해 보게. 비 올 때마다 보글거렸다는 아기 때의 나는 귀엽지만 그보다도 나는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사랑하고 싶다. 과거의 나는 그 당시의 내가 일찍이 사랑했어야 했다. 열아홉, 스물이 되기까지 반 년정도가 남았다고 해도 애정이 필요하다. 스물다섯, 아니 서른이 된다고 해도 애정은 언제나 필요하다. 내 친구는 if를 안 좋아한다고 그랬는데, 사실 나는 만약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렇게라도 해야 위로가 되니까. 내가 조금이라도 죄와 벌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친구야, 쏘리. 그래도 앞에서는 만약이라고 안 말하도록 조심하고 있어. 

 유월부터 여름이 물러날 때까지는 한껏 웅크려서 살겠구나. 쨍한 바다 기포가 사람들 몸에 닿아서 녹는 것처럼 매일같이 사라지겠네. 벌써 걱정이다. 내가 나를 잃지 않게 해 주세요. 종교는 안 믿는데 그래도 늘 최고의 모습으로 지냈어요. 눈 감았다 뜨면 겨울이게 해 주세요. 바깥은 여름인데 안은 겨울인, 그런 곳에 데려다 주세요. 

쓰고 지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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