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해달라는 장면은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나오는 씬을 패러디했습니다~ 










토르는 로키를 사랑했다. 그러나 로키는 어려웠다. 로키는 언제나 토르의 주위에 있었으나 그와 같지 않았다. 크게는 외모, 머리색과 눈동자, 체격이 달랐고 작게는 소소한 생활 속의 기호까지 두 사람은 전반적으로 차이가 났다. 형제라기에는 공통분모가 지나치게 적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형제였고 유년시절부터 많은 시간을 공유했다. 


늘 붙어다니던 형제가 조금씩 떨어지게 된 건 본격적으로 성장기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토르는 말랑거리는 손바닥으로 목검을 쥐기 시작했다. 쉽게 로키를 찾아낸 토르는 검술 연습을 하러가자고 제안했다. 그 말에 로키는 고개를 가로로 흔들었다. 싫어. 나는 책 읽을거야. 토르는 의아했다. 로키는 왜 검보다 책을 좋아하지? 

몇 년이 지나자 토르의 손에는 굳은살이 박혔고, 병사 서넛 정도는 손쉽게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토르는 온 궁전을 다 뒤져 동생을 간신히 찾아냈다. 사냥을 하러가자는 말에 로키는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마법 연습을 해야해. 토르는 뒤돌아 멀어지는 로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뺨을 긁적였다. 로키는 사냥보다 마법 연습을 좋아하는군. 


그 때부터 토르와 로키의 선호가 갈렸다. 검과 단검, 무술과 마법, 체련과 독서. 토르는 저와 다른 길을 고르는 로키가 궁금했다. 지금껏 누구보다도-어머니를 제외한다면- 로키에 대해 잘 안다 자부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알 수가 없었다. 모르는 것이 늘어갔다. 토르는 그에게는 어렵기만 한 마법서들을 로키가 어떤 기분으로 읽는지 모르고, 홀로 창 밖의 별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녹빛 눈동자가 무엇을 담은 채 빛나는지 몰랐다. 그것은 온전히 로키의 영역이었다. 토르는 그로부터 완벽하게 타자였다. 형제라는 이름으로 선뜻 경계를 지나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그 뿐, 토르는 분명하게 배제되어 있었다. 


아니, 넘나드는 것도 토르만의 생각일지 몰랐다. 로키는 어느 순간부터 제 속을 단단히 여며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고 그 대상에는 토르도 포함되어 있었다. 로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지.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로키를 보며 무리의 하나가 말했을 때 토르는 즉각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토르조차도 근래의 로키와는 거리감을 느꼈으니.


토르는 말할 수 없는 서운함에 잠겼다. 로키에게서 거부당하는 것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동시에 토르는 자신이 왜 서운해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루종일 숲을 쏘다니고 검을 맞대면서도 그와 친구들은 성 안으로 돌아와서는 각자 있어야 할 곳으로 헤어졌고, 토르는 이것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정도의 거리감은 어떤 사이든 간에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와 로키는 그렇지 않아. 토르는 눈을 깜박였다.







시간은 유용한 도구이며 아스가르드를 감싼 축복의 하나였다. 우주는 그들에게 긴 수명을 부여하였다. 주어진 시간은 길었고, 토르는 로키에 대한 무지의 영역을 하나씩 젖힐 수 있었다. 왜 왔어? 형이 좋아하는 사냥이나 가지.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며 묻는 로키 앞에 마주 앉으면 어깨를 으쓱하고는 제 할일에 집중한다. 오, 여기는 또 무슨 일이야 위대한 토르. 연회를 즐기지 않고. 시끌벅적한 홀을 빠져나와 정원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로키의 뒤에 서면 돌아보지 않은 채로 속삭인다. 토르는 가만히 로키를 바라보았다. 투덜거리면서도 저를 내치지는 않는 로키에게 기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렇게 토르는 가까이에서 로키를 관찰했다. 


이제 토르는 로키가 책에 집중하다 마음에 드는 부분이 나올 때 살짝 웃는다는 것을 알고, 풀리지 않는 부분이 나오면 코를 찡그린다는 것을 알고, 밤의 선선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헝클고 지나가면 부드럽게 낮은 숨을 내쉰다는 것을 알았다. 로키의 작은 순간순간들을 알았다. 관찰과 주의로 이끌어낸 결과는 로키의 선호를 쉬이 구분 짓게 했다. 토르는 로키의 기분이 크게 상하지 않게 사냥을 권유하고 그를 방 안에서 끄집어 낼 수 있었다. 반복해 재촉하기보다는 묵직한 한 마디가 효과적이었다. 말을 던지고 가만히 로키를 응시하자면 한숨을 쉬며 보던 책을 덮는다. 마뜩찮음을 잔뜩 뿌리면서도 몸을 일으킨다. 로키가 자신의 공간에서 나와 그를 따라 걸을 때 토르는 빈 것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충족감이었다. 


복도를 두드리는 발소리가 하나가 아닌 둘임이 흡족했다. 토르는 로키를 가볍게 한번 흘겨보았다. 흰 피부를 조이고 감싸는 검은 가죽이 또렷하게 몸의 선을 드러내고 있다. 자신보다 미성숙한 로키는 소년인 듯 소년같지 않아 앳되었다. 토르는 저도 모르게 침을 참켰다. 눈이 로키를 덧그리며 훑어내렸다. 과연 이것이 진정으로 형제를 향한 마음인가? 토르는 피어오르는 생각을 밟아 누르며, 묠니르를 세게 잡고 고결함에 대해 되뇌었다. 유별난 형제애 정도는 괜찮았다. 괜찮을 것이었다. 


오딘의 아들로서 전장에 나가 무투를 뽐내게 되었을 때도 토르는 로키에게 말을 건넸다. 곁에 서거라. 함께 싸우자꾸나. 제 말에 로키는 고개를 숙였다. 얼핏 보이는 턱 끝이 단단히 굳어있어 토르는 그가 긴장했다고 생각했다. 알겠어, 형 곁에 서지. 느릿하게 말을 마친 로키는 토르와 잠시 시선을 마주치고는 먼저 등을 돌렸다. 복도를 돌아 로키가 사라질 때까지 토르는 눈을 떼지 않았다. 로키가 먼저 등을 보이지 않을 때가 분명 있었는데. 옛날에는......


그러다 토르는 문득 자신이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지 가정해보았다. 권유하지 않는다면, 아스가르드의 첫째 왕자이자 그의 형으로서 말하지 않는다면, 로키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곁에 설까? 오롯이 그의 의지로? 한 치의 부정 없이?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토르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 불확실함이 토르의 숨을 막았다. 로키의 자리는 언제나 토르의 옆이었다. 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믿어왔다. 허나... 토르는 더이상 자신할 수 없었다. 


더불어 토르를 거슬리게 만드는 사실이 있었으니 그가 로키를 완벽하게 아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관찰한다 한들 토르는 로키가 아니었으므로, 로키의 방 한켠에 자리한 책으로 가득찬 책장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것이 로키의 마음을 어떻게 물들였는지 도무지 도출할 수 없는 것이다. 

촘촘한 문장이 로키를 어떤 느낌으로 미소짓게 하는지, 아름다운 밤하늘이 로키를 무슨 느낌으로 이끄는지. 어쩌면 영원히 모를 일이었다. 토르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단정한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도록.

토르는 모름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로키를 알고 싶었다. 모든 것을, 로키의 느낌을 속속들이 파악하고자 했다. 로키의 눈은 더 그랬다. 늘 매력적이라 생각한 녹음의 눈이 자신을 볼 때 어떠한 이유로 빛나는지, 그 안에 무엇이 깔려있는지, 토르는 알고싶었다. 흔들리는 눈 안에 비친 여러 층의 감정과 감정의 이유를 알고 싶었으며, 자신이 로키에게 어떤 느낌인지, 얼만큼 물들일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토르는 그를 사랑했다. 소중한 동생이자 친구, 언제나 함께할 이. 








'키스해 줄래?'

로키는 종종 이런 식의 객쩍은 농담을 던졌다. 처음에는 당황으로 나무토막처럼 굳은 토르였으나 차츰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치는 법을 배웠다. 성애의 표현을 요구하는 얼굴은 장난기를 제외하면 말갛기 그지 없어, 토르는 로키가 혹여나 제 심란함을 알아챈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로키의 눈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초록에 어린 감정은 계속해서 변화했고, 토르는 무엇이 로키의 진심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로키였고, 모든 것이 저를 향한 로키의 느낌이었으므로. 색은 섞을수록 어두워지고 빛은 섞을수록 밝아지거늘, 로키의 감정은 과연 어느 쪽인가. 토르는 알 수 없었다. 



대관식 날에도 이와 같았다. 때때로 질투하기도 해, 하지만 내가 형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의심하지마. 로키의 눈은 진지했다. 그러다가도 곧바로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이제 키스해 줘. 장난스레 웃으며 말하는 로키에게 토르는 그만하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살짝 가슴을 밀며 웃으니 로키도 그를 보며 웃었다. 그래. 이 정도면 되었지. 토르는 생각했다. 그와 로키는 천년이 넘도록 삶을 공유했다. 이보다 더 긴 나날이 두사람을 기다렸다. 그러니 지금까지처럼 흘러가게 두면 되는 거였다. 함께라는 것은 변하지 않을 테니. 

하지만 느릿하게 흘러가던 두 사람의 세계는 급격한 너울을 맞이했다. 





'안 돼....'


로키가 스스로 손을 놓아 우주의 심연으로 사라지고 허망히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을 때, 토르는 심장이 쪼개어진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했다. 

아버지로부터 자신들이 친형제가 아니라는 사실을들은 뒤에도 토르는 납득하지 못했다. 로키에게는 그것이 그리도 중요하였나? 그와 로키는 함께 놀고 함께 싸웠다. 모든 순간을 함께했다. 고작 그런 진실따위가 두사람을 갈라놓기란 불가능했다. 

로키가 눈물 흘리며 분노하던 이유는 단지 그것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해보아도 토르는 로키가 왜 스스로 궁니르를 놓아버렸는지, 왜 스스로 차디 찬 우주에 떨어지기를 골랐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토르는 자신이 로키를 아직도 모른다는 것에 답답해졌다.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궁전은 무겁고 적막했다. 






로키는 살아있었다. 초췌해진 모습으로 미드가르드에 나타난 로키는 인간들을 지배하겠다 소리쳤고 자신을 칼로 찌르기도 했다. 동생의 낯선 모습에 토르는 어찌해야 하는지 길을 잃었다. 데리고 돌아가야만 해. 그 일념만이 토르를 메웠다. 싸움이 끝나고, 재갈과 족쇄를 직접 로키에게 채우며 토르는 이제 다 잘 되리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로키는 있어야 할 자리에 다시 있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토르는 테서렉트가 담긴 상자를 돌렸다. 


그러나 아니었다. 로키는 완벽하게 타인을 바라보는 눈으로 토르를 노려보았다. 그가 아는 로키가 아니었다. 토르는 로키가 유폐된 지하감옥으로는 한 걸음도 들어놓지 않았다. 엇나간 동생에 대한 분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사실은 그를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해서였다. 낯선 이처럼 이를 드러내는 로키를 억지로 곁에 붙들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손을 놓아 저버릴수도 없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토르에게는 로키가 필요했다.


'배신하면, 너를 죽이겠다'


최대한 담담하게 읊조린 말에 로키의 눈이 익숙한 이채를 띠었다. 언제 시작해? 묻는 목소리에는 직전의 감정이 능숙하게 지워져있다. 무엇이 진심인지 가늠하지 못하게 만드는 발화. 토르는 자신과 함께하겠다는 로키의 말에 안도하면서도 그를 온전히 믿지 못했으며, 믿지 못하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단지 이리 해야한다고만 믿었다.

그리고 로키는 토르의 품안에서 한번 더 죽었다. 그를 위해 한 게 아니야. 빛을 잃은 눈이 감기고 토르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핏기 잃은 얼굴에 알프헤임의 흙바람이 흔적을 남겼다. 토르는 오열했다. 또다시 자신 탓이었다.





'로키는 명예롭게 죽었습니다.'


아스가르드를 떠나 아홉 세계를 방랑하면서, 토르는 로키와의 과거를 되짚었다. 어쩌면 자신이 잘못된 방식을 취했는지 모른다. 그토록 긴 시간 로키를 봐 왔으면서.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로키의 기분을 거르스지 않으며 한 모든 권유들이 실은 아니었다면? 그의 말을 로키는 따라야 할 명령으로만 생각했다면? 

옆에 서거라. 그렇게 말하면 로키는 따랐다. 옆을 걷다 자연스레 조금 뒤로 가 토르를 따라왔다. 토르가 이를 당연하게 생각한 것은 모든 행동에 로키의 의지가 깃들었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토르는 한치의 의심없이 로키가 제 사람이라 믿었고 그렇기에 로키를 동행하게 했다.

그는 로키를 사랑했다. 그렇다면 로키는? 토르는 망설였다. 로키의 눈동자가 드러내는 감정은 오랜 관찰에도 명확하지 않았다. 때때로 로키는 토르를 노려보았다. 이글거리는 눈은 질투와 증오였다. 때때로 로키는 토르를 울 것 같이 보았다. 일렁이는 눈은 그리움과 애정이었다. 그리고 언젠가의 순간, 토르가 홀린 반짝이던 눈은, 사랑과 경애였다. 토르는 로키의 시선 한 구석에서 언제나 사랑을 감지하고 있었으나, 형제라는 이유로 자신이 줄곧 모른 체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틀림없이 형제애가 아닌 붉은 정염이었다. 순간 토르는 그동안 로키를 향했던 모호한 애착이 어디에서 기인하였는지 의식했다. 

로키도 정말 자신을 사랑했을까? 모든 감정과 느낌이 한 사람을 향해, 그의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이 집착을, 로키도 느꼈을까?


로키와 자신이 떨어져 존재했음이 개탄스러웠다. 어릴 적처럼 죽 붙어있는 것이 가능했다면, 더 나아가 별개가 아닌 커다란 유기체로 함께 녹아드는 것이 가능했다면. 그랬다면 토르는 로키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깨닫지 못했던 감정의 작은 조각마저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토르는 짤막하게 숨을 토하고 말았다. 이기적이군. 로키는... 원하지 않을 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로키에게 토르의 곁은 고통이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로키에게 토르는 그를 힘들게 하는 이에 불과할지 모른다. 어쩌면 로키는.... 

토르는 그가 진정으로 로키를 사랑했으며, 자각못한 마음으로 로키를 자신에게 묶어두려 했음 또한 뒤늦게 알아차렸다. 로키를 당연시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좀 더 일찍 깨닫고 돌아보았어야 했다. 형은 뭔가를 아는 게 참 느리지. 심술궂은 로키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간다. 그래. 로키. 토르가 중얼거렸다. 손을 들어 눈가를 덮었다. 이제야 알다니, 바보같이. 로키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토르는 로키를 기리기 위해 팔에 이름을 새겼다. 이것으로 영원히 잊지 않을 터였다. 







또 다시 로키는 토르를 속였다. 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로키가 나타난 순간 토르는 그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을 뻔했다. 그를 추모하던 모든 순간이 스쳤고 온갖 말이 뒤엉켜 목을 꽉 붙들었다. 살아있다는 것에 당장이라도 하고싶은 이야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토르에게는 우선 순위가 있었고 이를 따라야했다. 아스가르드가 위험했다. 토르는 로키의 가슴 위로 묠니르를 대고 살짝 눌렀다. 죽음이 거짓이어도 상처까지 거짓은 아니었겠지. 로키가 얼굴을 찡그린다. 



'로키? 로키, 여기다.'

괴상망측한 행성의 이상한 의자에 묶여있으면서도 토르는 로키를 확인하자마자 이름을 불렀다. 다행이었다. 바이프로스트에서 튕겨나간 로키도 그와 같은 곳에 도달한 듯 했다. 생사를 확인해 기뻤다. 허나 로키는 아닌 것 같았다. 표정이 굳으며 못 볼 것을 본 모양이지 않은가. 그렇군. 토르는 홀로 곱씹던 가설이 맞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심장이 차갑게 식어갔다. 어쩌면, 로키는 그의 곁보다 다른 곳이 더 편한지도 몰랐다. 낯선 옷을 입고 낯선 이들과 즐겁게 담소하는 로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로키는 자신에게로 다가왔다. 우습게도, 토르가 로키를 멀리하려하니 따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여덟 살 적 뱀으로 변해 자신을 찔렀던 이야기를 늘어놓자 즐거운 듯 웃는 모습은 천진하기만 하다. 휘어지는 눈 안에는 또다시 온갖 감정이 엉켜있다. 



'난 너를 아꼈다 로키.'
'하지만 우리의 길은 오래 전에 갈라졌구나.'


토르는 부러 로키 쪽을 향하지 않았다. 이건 그가 줄 수 있는 기회였다. 로키는 토르를 떠나려 했고, 그것이 그의 바람이라면 이제 토르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죽은 동생보다야 소식 없는 동생이 나았다. 의식적으로 다짐하며 말하자 로키도 긍정했다. 어쩌면 다시 안 만나는게 나을지 모르겠네. 진심일까? 토르는 만의 하나를 대비하며 로키의 어깨를 두드렸다.

만의 하나는 놀랍게도 들어맞았다. 토르는 혀를 찼다. 진지해지려다가도 이렇게 행동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질 않았구나. 토르는 키스를 조르던 그의 가슴을 슬쩍 밀쳐내던 것처럼, 로키의 장난-혹은 진심-에 대응했다. 

'너는 아직도 너무 뻔해. 사람은 성장이라는 것을 한단다.'

나도 그렇고. 뒤따르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토르는 하나의 가능성을 간직했다. 왜인지 로키가 따라오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 이 예감마저 맞는다면, 토르는 이번에야말로 그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었다. 바닥에 누운 로키에게서 멀어지며 토르는 어렴풋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로키. 내 예상을 빗나갈 테냐? 아니면 또 뻔한 행동을 할 테냐? 








그러니- 로키가 우주선을 이끌고 아스가르드에 당도했을 때, 토르가 웃은 것은 당연했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났음에도, 토르가 그를 두고 나아가며 따라오라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결국 로키가 토르를 선택한 것이다. 토르는 끓어오르는 힘을 느꼈다. 헬라에게 당한 상처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오딘의 조언으로 진정한 힘을 해방한 뒤 토르는 곧바로 백성과 로키가 있는 바이프로스트로 향했다. 다리 끝에서 헬라의 병사들을 하나씩 지워내가다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단번에 번개를 불러 내리찍었다. 그들 사이를 가로막던 적들이 사라졌다. 토르는 로키에게로 가까워졌다. 뿔투구와 단도로 익숙하게 싸우는 동생을 보며 낯섬과 그리움이 호흡을 타고 흘러나왔다. 토르는 짧은 숨에 태연을 담아 뱉어냈다. 


'늦었구나.'

'눈이 하나 없어졌네.'


아무렇지 않게 답이 돌아왔다. 대꾸하는 로키의 눈에는 토르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감정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짙은 녹색은 여러 층의 감정으로 복잡했으나 토르는 놓치지 않고 그에게 필요한 것을 집어냈다. 분명하게도 사랑이 존재했다. 

기분좋은 두근거림이 심장에서부터 온 몸을 감쌌다. 토르는 막 병사의 턱에 단검을 쑤셔넣어 돌리는 로키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힘을 주어 자신을 돌아보게 하자 로키가 순순히 따라왔다. 로키의 그 녹색 눈동자에 자신이 담겨있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언제나 구하던 의문이 비로소 해소되는 순간. 토르는 두 사람 사이 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느꼈다. 우선순위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끝에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로키. 우리 결혼하자.'


로키는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이 작자가 눈알을 하나 잃고 뇌도 날려먹었나 하는 얼굴이었다. 반응이 꼭 예상대로라 토르는 유쾌해졌다. 


'너도 날 사랑하잖느냐. 나도 널 사랑하니, 그럼 되었지.'


자신만만하게 말하니 로키는 말을 받아칠 기력마저 상실한 듯 했다. 토르는 로키는 가만히 응시했다. 이곳이 전장이고, 아스가르드의 운명이 그의 손에 걸려있다는 사실이 멀게만 느껴졌다. 이럴 때가 아니라 이성이 재촉했으나 토르는 이번만큼은  이성 대신 감정과 느낌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사실 조금 심술을 부리는 것도 맞았다. 이제야 돌아온 동생을 옆에 묶어두려는 의도이기도 했고. 우리는 언제나 유별난 형제였지. 마음이 통한 순간 결혼한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닐 지 몰라. 토르는 진정으로 생각했다.

로키가 단검 하나를 멀리 던져, 일어나려는 적에게 명중시켰다. 그를 힐끔대며 진위를 캐내려들다 턱을 굳히고는 고개를 기울인다. 토르의 표정과 눈빛에서 이것이 장난도 거짓도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로키의 입술이 달싹였다. 


'....형, 진지하게 미쳤어?'
'전혀.'
'결혼이고 자시고... 왜 하필 지금 그런 말을 해?'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말이지.'


부정하지는 않는군. 토르는 발키리를 불렀다. 로키는 그의 곁에서 머뭇대고 있다.


'발키리!! 주례 좀 서주게.'
'폐하, 제가 아직 술이 덜 깼나요? 드래곤팽은 내가 멀쩡하다고 말해주는거 같은데?
'아니, 그대의 청력은 멀쩡해.'



발키리가 해골의 어깨를 잘라내며 혀를 찼다. 뜨악한 표정이 사안의 황당함을 말해주었으나 토르는 이미 결심한 뒤였고, 남은 것은 실행 뿐이었다. 왕의 뜻을 누가 거스르겠는가? 검을 휘두르며 발키리가 진심을 담아 구시렁댔다. 


'이놈의 왕가에 제 정신인 사람은 아무도 없군.'

'얼른! 시간이 없어,' 


토르는 그들을 향해 달려드는 적에게 가볍게 번개를 내리찍었다. 몸을 내밀고 상대하려던 로키가 대상을 잃고 주춤거렸다. 어디를 도망가려고. 토르는 로키를 잡아 멀리 가지 못하게 했다. 발키리의 마지막 남은 망설임을 쫓으려 토르가 한번 더 소리쳤고, 황량한 풍경 위로 어울리지 않는 말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적의 시체와 먼지, 불운히 희생당한 아스가디언들 위로 발키리의 목소리가 퍼졌다.


'알겠습니다. 예에, 오- 오늘 우리는 신성한 오딘의 아들과... 또 하나의 오딘의 아들이 영원을 맹세하는 자리에 모여.... 아홉세계의 평화와 축복이 두 사람을- 이런 씨발!!!'


막 잘라낸 해골 병사의 어깨에서 진득하니 불쾌한 검은 점액이 발키리의 갑옷 위로 튀었다. 발키리가 기겁하며 거칠게 털어냈으나 액체도 고체도 아닌 것은 잘 떨어지지 않았다. 발키리는 이제 발로 해골을 짓밟고 있다. 욕설이 끊이질 않는 것을 보아하니 이쪽은 숫제 잊은 모양이다. 토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안 되겠군.

토르가 로키의 손을 붙잡아 품안으로 당겼다. 이 상황으로부터 맹렬하게 벗어나고 싶다는 느낌이 동생의 눈에 쓰여져 있었지만 문제되지 않았다. 저 녹빛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말하는 가장 깊고 짙은 층위의 감정이 무엇인지, 확신했으니까. 도망가지 않고 이곳에 온 것은 너지.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토르가 낫낫하게 주장했다. 


'로키. 사랑한다.'


로키는 눈을 도르륵 굴리기만 했다. 또, 부정하지는 않는다. 토르는 유쾌하게 씩 웃었다. 폐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고백과 함께 끌어올렸다.


'로키 오딘슨. 나의 형제이자, 친구이자, 나의 심장. 나를 남편으로 맞아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겠소?'


진짜 지금 이게 뭐하는 거야. 로키가 살짝 몸을 떼어내며 중얼거렸다. 허나 내용과는 다르게 음성이 흔들렸다. 토르는 얼마 남지 않은 해골들에게 번개를 죽 메다꽂는 중이었다. 파지직, 적들의 몸이 강력한 번개에 부서지는 소리가 배경처럼 깔렸다. 두 사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고, 토르의 하나 남은 눈은 로키의 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마침내 로키의 눈이 깜박였다. 


'좋아, 그렇게 하겠어.'


로키!! 토르는 반색했다. 당장이라도 그를 껴안으려는데 뺨 옆을 날카로운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로키의 남은 단검이었다. 토르의 뒤에 언제 다가왔는지 칼을 든 해골 병사 하나가 주저앉아 있었다. 미간에 정확히 단검이 꽂혀있다. 여기 전장이야. 정신 안 차릴래? 형? 때를 놓치지 않고 날아오는 독설에도 토르는 개의치 않았다. 로키의 손을 꽉 부여잡아 기쁨을 표시할 뿐.

저 멀리, 헬라가 날아온다. 바이프로스트의 끝에 착지한 그녀는 여유롭게, 느긋하게 그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토르의 손을 놓지않은 채로 로키가 목을 울렸다. 


'토르 오딘슨. 아스가르드의 왕이자 나의 형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나와 영원을 함께 걷겠어? 사랑을 맹세하겠어?'
'물론.'


헬라가 코앞이었다. 토르는 드래곤팽을 휘두르는 발키리를 다시 불렀다. 발키리가 벌컥 성을 냈다. 작작하라는 의미가 분명했다. 


'발키리!'
'자, 이제 둘은 부부가 됐고요. 맹세의 키스 필요하면 빨리 해요!!!!!'


타이밍 좋게 헬라가 손을 휘둘러 수십개의 창을 날렸다. 토르와 로키는 몸을 굴려 간신히 피했다. 중요한 순간, 예기치 않게 잠시 떨어지고 말았지만 토르는 곧장 로키에게로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 했다. 헬라는 비웃음을 띠고 마구잡이로 무기를 소환했다. 토르가 조금이라도 로키와 가까워지면 재차 멀어지기 일쑤였다. 키스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데, 휘익 몸을 날려 앞으로 날아간 발키리가 헬라의 창을 드래곤팽으로 쳐내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소리쳤다. 


'키스하라고!!!!당장!!' 


'토르!! 키스한다!!' 멀리서 헐크의 메아리도 들려왔다. 

그래서 두 사람은 키스를 했다. 










'만약 네가 진짜라면 안아줬을 거다.'

'진짜야.'

로키는 유려하고 가볍게 뚜껑을 낚아챘다. 토르의 입가가 저절로 올라갔다. 어깨를 으쓱한 로키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온다. 한 발짝을 남겨놓고 멈춰서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코를 울리는 것이다. 


'너무하네 토르. 내가 아무리 냉혈한이라지만, 청혼받은 당일 도망갈 사람은 아니거든.'
'당일이 아니면 도망갈 의향이 있고?'
'그건 앞으로 형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지.'


로키의 손가락이 토르의 안대와 뺨을 어루만졌다. 아슬아슬한 거리가 좁혀지는 것은 찰나였다. 키스해주게? 로키의 질문에 토르는 처음으로 키스로 화답했다. 완벽했다. 동생의 입술을 탐하며 토르는 그들이 이미 오래 전 이렇게 되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로키의 입 안은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아는 것이 하나 늘었군. 기분 좋은 충만함이 토르의 가슴을 타고 솟아났다. 






'왕좌에 오르시죠,'

지켜야할 국민이 있고, 곁에 로키가 있다. 토르는 모든 것이 다 잘 되리라 예감했다.

'어디로 향할까요?'
'지구. 지구로 가자.'

지구라는 말에 로키의 표정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토르는 속으로 웃었다. 걱정말거라. 다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토르는 로키를 사랑했다. 로키는 분명 알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으나 그것은 방해가 되지 않았다. 토르는 이제 로키가 자신을 볼 때 희미하게 미소짓는 것을 알고, 키스할 때 입 뒤쪽의 여린 점막을 간질이면 평소보다 조금 높은 톤으로 신음하는 것을 알고, 무엇보다도, 로키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기꺼이 그의 곁에 와 아스가르드와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칼을 휘둘렀다는 것을 알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수많은 해묵은 감정이 켜켜이 놓여있고 풀리지 않은 앙금 또한 존재하였지만. 그럼에도 토르는 로키를 사랑했다. 로키도 필시 그럴 것이다. 

천 년은 길었다. 그리고 아직 사천 년이 넘는 시간이 그들 앞에 놓여있다. 아스가르드가 파괴되고 오딘이 발할라에 들어갔으며 많은 백성이 명을 다했다. 비통과 슬픔이 그들 전체를 덮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갈 것이고, 토르의 곁에는 로키가 있을 것이다. 잠시 떠나간다 해도 결국은 그의 곁으로 돌아오면서. 

피난선의 왕좌는 본디 그가 앉았을 왕좌에 비교하면 무척이나 초라했다. 하지만 토르는 괜찮았다. 다 잘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틈을 비집고 나온 미소가 입에 걸렸다. 그와 로키는 괜찮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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