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my sun and the moon.





유찬과 제민의 관계가 달라진 이후 유찬은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별다른 것은 없었다. 유찬은 드라마 촬영에, 제민의 회사 일에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스케줄에 바빴다. 단지 바뀐 것이 있다면 유찬이 잠을 자는 공간이랄까. 유찬의 직업 특성상 시간대가 들쑥날쑥한 탓에 일정하지가 않아 불편할 텐데 유찬이 제민을 기다리다 잠이 들면 안아 들어 침대로 옮겨 품에 안고 잠을 청했고, 제민이 자고 있으면 유찬이 꼬물꼬물 침대로 들어가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팔베개를 해주며 안아주었다. 제민과 만나고 얼마 안 됐을 무렵 넥타이로 눈이 가려지고 무서움에 울다 지쳐 잠들었을 때, 제민이 옆에 있어 줬단 걸 모르는 유찬은 이렇게 누군가와 한 침대, 이불에서 잠드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떨려서 옆에 제민이 있다는 게 적응되지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적응되어 이제는 제민이 없으면 허전했다. 


기다림. 무언가를,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설레면서도 그 과정은 힘들고 외로웠다. 언제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날을 기다리면서 쉼 없이 달려왔고, 그러다 지치는 날에는 꿈에서 부모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드라마 촬영이 중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제민이 해외출장을 떠났다. 갑작스럽게 잡힌 일정이라 유찬은 제민의 출장 소식을 매니저에게 전해 들었다. 촬영 중이라 어차피 연락을 받을 수 없었겠지만 메시지 하나 정도는 직접 남겨주지 않은 게 서운했다. 


제민이 출장을 떠난 지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가 이제는 제민의 체향이 흐려진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너무해.. 


얼마나 바쁘길래 연락 한 통 없는 걸까. 제민이 연락이 없으니 유찬은 선뜻 먼저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제민의 연락을 늘 기다리던 입장이었으니 먼저 연락한다는 것이 어려웠다. 관계는 달라졌지만 먼저 해도 괜찮은 건지. 혹 연락했다가 바쁜데 방해가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되었다. 그래서 유찬은 촬영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제민의 연락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보고 싶어서.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갈수록 유찬은 보고 싶은 건 저 혼자뿐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이제는 자신이 기다리는 거 알면서 이렇게 방치해두는 제민이 조금 밉기도 했다. 안고 있던 제민의 베개를 미워지려는 제민을 대신해 주먹을 쥐고 툭툭 때렸다. 


아무리 바빠도! 밥도 안 먹어? 화장실도 안가? 잠도 안 자? 내 생각은 조금도 안 한다 이거지 지금? 어? 조금이라도 했으면 이럴 수는 없지! 나쁜 놈아! 


인정사정없이 베개를 쥐어팼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 핸드폰이 울리자 유찬은 재빨리 핸드폰을 집어 들었지만 야속하게도 제민이 아닌 매니저에게서 온 전화였다.


" 응 "

- 일어났네? 씻었어?

" 지금 씻어 "

- 30분 뒤에 도착하니까 얼른 준비해.

" 응 "

- 찬,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아니에요... 나 씻어야 해. 끊어요."



샤워를 하면서도 제민에게 전화가 올까 싶은 마음에 세면대에 올려둔 핸드폰을 힐끔거리고, 매니저의 차를 타고 가면서도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제민의 위치가 저와 다르고, 바쁘고, 중요하단 걸 알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집에서 나올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은 유찬을 매니저는 힐끔거렸다. 


" 오늘 몇 신 없으니까 금방 끝날 거야. "

" 가봐야 알지 뭐. 형, 대표님 연락 온 거 없어요? "

" 민 대표님? 없는데. "

" 아.. "


우진에게라도 연락이 왔다면 제민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물었는데 우진도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정말 많이 바쁜 건가.. 


촬영 준비를 끝내고 대본을 보며 대기하고 있는데 전화를 받고 들어온 매니저가 잠깐 볼일을 보고 온다는 말에 유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촬영이 있을 땐 유찬의 곁을 지키며 대사도 쳐주고, 현장을 지켜보며 모니터링을 해주던 매니저가 자리를 비운다니 이상했지만 그럴만한 일이 있으니 그러겠지 생각하고 넘겼다. 기분은 엉망이었지만 유찬의 7년 경력이 헛된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촬영에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았다. 


촬영을 끝내고 매니저를 찾다가 전화를 걸었다. 차를 세울 곳이 적당하지 않아서 주차장 구석에 있다는 말에 투덜거리며 매니저가 알려준 곳으로 걸어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촬영 내내 오지도 않았는지 별거 아니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 생각하면서 걷던 유찬의 걸음이 뚝 멈췄다. 매니저가 알려준 곳에 세워진 차에 기대서 있는 사람은 제민이었다. 


제민은 유찬을 보고는 조수석 문을 열었으나, 오다 말고 가만히 서 있는 유찬에 고갯짓으로 조수석을 가리켰다. 그러나 유찬은 움직이지 않았고, 홱 돌아서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 했다. 분명 저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서는 유찬에 제민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유찬을 붙잡았다. 


" 어디 가"

" 놔요, 이사님 보기 싫으니까.. "

" 뭐? "

" 이사님 보기 싫다고요 "


눈물이 가득 차오른 눈으로 제민을 쏘아보았다. 정말 미운데 제민을 보자마자 미운 감정은 눈 녹듯이 녹아버리고,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있어서 속상하기도 했다. 


" 집에는 가야지, 타. 얼른. "

" 싫어요. "

" 싫으면 걸어오게? "

" 제가요? 왜요? 여기 얻어타고 갈 수 있는 차가 수십 대인데, 도형이 형도 있고 "



저 멀리 제민의 등 뒤로 보이는 도형을 보고는 이쪽을 보고 있지도 않는데 유찬은 잡히지 않은 손을 번쩍 들고서 흔들었다. 유찬의 시선을 따라 제민도 시선을 옮겼다. 유찬의 회식 날, 식당 앞에서 봤던 남자와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그때의 분위기상 애인 사이인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도 신경 안 쓰는 모습에 자신이 잘못 느낀 건가 싶었다. 


" 저 사람이 김도형인가 뭔가 그 새끼 매니저야? "

" 아니요, 도형이 형... 근데 그게 왜 궁금한데요? 뭐가 궁금한 건데? "

" 왜? 궁금하면 안 돼? "

" 씨이... 네! 저분 이번에 드라마 끝나면 결혼하시거든요? " 

" 누구랑? "

" 있어요. 오래 사귀고 동거 중인 사람. 엄청 다정하고, 저 형밖에 모르고, 틈나면 연락하고, 눈에서 꿀 떨어지고, 말투도 얼마나 다정한지 연애 초기인 줄 알았다니까요? 어? 누구랑은 딱 반대죠, 자기야. 여보야. 어휴... 자기, 여보 없는 사람 서러워 살겠나. 안 그래요, 이사님? "


유찬의 말을 가만히 듣던 제민은 피식 웃고는, 뺨을 톡톡 두들겼다. 서운해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나 삐졌어요'하고 대놓고 귀엽게 행동할 줄이야. 당장에 예뻐해 주고 싶지만 장소가 장소이니 만큼 조심해야 했다. 


" 어, 안 그래. 일단 가자. 자기야. "

" 네, 네? "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보는 유찬을 잡아끌며 차로 데려가 조수석 문을 열어 타라는 듯 고갯짓을 하자 멍해진 유찬은 얼떨결에 차에 올라탔다. 차체에 머리를 부딪힐까 손으로 유찬의 머리를 조심히 감싸주고는 조수석에 앉는 것까지 확인하고선 조수석 문을 닫았다. 운전석 쪽으로 돌아와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고 스타트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걸었다. 


그때까지도 유찬은 멍하니 있었다. 혹시 제민이 너무 미워서 혹은 너무 보고 싶어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제민이 저를 데리러 온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었다. 제민은 몸을 틀어 조수석 헤드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 훅 들어온 가까워진 제민을 보다 유찬은 제민의 볼을 꼬집었다. 


" 쓰읍, 혼나. "

" 말도 안 돼. 진짜라고요? "

" 뭐가 말이 안 돼? "

" 전부 다.. "

" 그럼 확인해보면 알겠네. 진짜인지 아닌지. 진짜면 내가 원하는 거 하나 무조건 하기. "

" 네? "


제민은 멍한 유찬을 바라보다 입술에 촉 입 맞추었다가 떼고는 안전벨트를 채웠다. 달칵. 소리와 함께 제민은 몸을 바로 하고선 액셀을 부드럽게 밟으며 핸들을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최대한으로 밟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 아이를 안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마음껏 예뻐해 주고 싶었지만 혹여나 사고라도 나면 시도조차도 못하고 이 세상을 뜰 수 있으니 교통법규를 철저히 지키며 집으로 향했다. 


해외지사에 문제가 생겨 거의 일주일가량을 눈곱 뗄 새도 없이 쪽잠을 자며 일했다. 중간중간 일이 풀리지 않을 때면 유찬이 생각났다. 일을 잘 처리하고 돌아가야 자신이 아니라 저를 탐탁지 않아 하는 자들의 머리를 조아리게 할 힘을 채울 수 있었고, 단 몇 시간이라도 빨리 유찬을 볼 수 있었다. 매니저가 우진에게 전달하는 소식을 들으며 시간이 나면 연락을 해봐야겠다 생각했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유찬이 서운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날도 기다렸다고 말했던 아이가 말도 못 하고 급히 출장을 가게 된 저를 얼마나 기다렸을지 안 봐도 눈에 훤했다. 혼자서 울고 있는 건 아닌지, 엉뚱한 상상을 하며 괜한 오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저 역시도 유찬이 걱정되었고, 먼저 연락을 한다면 그것을 핑계로 잠시나마 쉬면서 목소리를 들으며 충전을 할 텐데 하는 생각을 저도 했으니 유찬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거다. 


어쨌든 한참 멘탈이나 작은 부분에도 신경 써야 하는 요즘 유찬의 기분을 망친 원인 제공자가 되었으니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피곤함을 뒤로하고 데리러 왔더니 쪼르르 달려와서 안기기는커녕 김도형을 이용해 도발을 하려고 하다니, 뒷감당은 어찌하려고. 겁도 없이 도발한 유찬을 어떻게 혼내줄까 생각하며 제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2019년 남은 시간 잘 마무리하시고, 2020년 모두 행복하세요. 2019년 감사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