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드세요? 

르웰린은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톨비쉬를 바라보았다. 

톨비쉬는 흐릿한 눈을 깜빡였고 신음소리가 섞인 숨소리로 대답했다. 상처가 불타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등의 상처를 후벼파며 끌어내리는 듯한 통증이었다. 가슴은 저릿거렸고 속에서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톨비쉬는 결국 주변을 살펴보기 보다는 눈을 감은채 통증을 삼켜내는 것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르웰린이 잘 처신했을테니 남은 것은 저 혼자가 잘 참아내면 되는 일이었다.

멀린님은 스케줄이 있어서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톨비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쪽이 오히려 긍정의 신호였다.

톨비쉬는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르웰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밖으로 자리를 피했다.

홀로 남은 톨비쉬는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 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에 안도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고르륵, 고르륵. 어둠 저편에서 가느다란 물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깨어지고 부서지고 남은 형태는 얼마 없었지만 그 누구의 것과도 같지 않는, 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그만의 별.


톨비쉬는 어둠속에 홀로 놓여진 한줌의 별을 손안에 쥐고 속삭였다.

오늘따라 당신이 보고싶습니다.


병실 탁자 위에 놓여진 톨비쉬의 핸드폰에 짧은 메세지가 떠올랐다.

[나도요.] 


톨비쉬는 비로소 마음을 놓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여기 어디? 정신을 차린 밀레시안은 낯선 섬 위에서 깨어났다.

섬? 아니면 바위? 밀레시안은 잠시 주변을 경계했지만 이내 자신의 생각이 모두 정답이었음을 확인했다.

그곳은 섬인 동시에 바위였다. 파도속에 깎여내려간 섬의 일부.

밀레시안은 기울어진 비탈길 아래 반쯤 잠겨있는 신전의 기둥을 바라보았다.

마치 어느 성격 나쁜 신이 남의 신전이 지어진 섬을 집어들었다가 대충 내팽겨친 모양새의 이상한 섬이었다.

밀레시안은 비 바람에 깎여 맨들맨들해진 바위 위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밀레시안의 추측이 맞다면 이곳이 아마 아발론이라는 곳일 것이다.

밀레시안은 내 말이 맞아? 하고 물었다.

밀레시안의 앞에는 오래간만에 만나는 도우갈이 앉아있었다.

맞아. 티르 나 노이 최후의 생존자의 몸 안에 깃든 이계의 영혼은 말했다.

이곳이 이 세계의 중심지. 최초의 땅. 이곳의 인간들은 이 땅을 창조주 아튼시미니가 축복을 내린 성지로 여겼었지.

밀레시안은 그 축복받아 마땅한 곳에 이계의 영혼만이 가득하다는 것에 비웃음을 보냈다.

그래서? 밀레시안은 그의 대답에 이죽거리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되물었다. 왜 나를 이곳에 데려온거야?

도우갈은 그런 여행자를 부드럽게 올려다보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지. 아니지 밀레시안. 그 어느것도 너를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았어. 도우갈이 단 한번도 그 작은 마을을 떠나지 않았던 것과 같이 밀레시안은 이곳에 속해 있었다. 

아니야. 밀레시안은 부정했지만 도우갈은 맞아. 라고 대답했다.

이계의 영혼은 기이할 정도로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으로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은 막연히 그를 모래빛이라고 칭했지만 이런 요사스러운 반짝임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내 기억이 잘못된걸까 아니면 지금의 그가 변질된 걸까.

밀레시안은 그의 뺨에 손을 뻗었다. 따듯하고 조금은 거친 피부가 손바닥 가득 쥐어졌다.

황금의 눈동자는 기분좋게 휘어지며 웃었다. 밀레시안은 그 눈을 보며 말했다.

너는 그가 아니구나. 밀레시안이 기억하는 도우갈은 잿빛 눈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식으로 부드럽게 웃지도 못했다.

밀레시안은 그가 떠나갔음을 안타까워 했고 동시에 슬퍼했다. 내가 내가 아니듯이 너도 그가 아니야.

이계의 영혼은 말했다. 그 땅에서 이 몸을 가지고 나오기가 쉽지는 않았지. 


버려진 세계, 티르 나 노이는 에린의 대칭점에 서 있는 세계였다. 

그곳에 있는 곳은 에린에도 있었고 에린에 있는 것은 그곳에도 있었다.

에린에 밀레시안이 있었듯이 그 땅에는 글라스 기브넨이 있었다.

그의 육신은 붕괴하는 동시에 에린에 큰 상처를 남겼고 결국 그 상처는 이 세계를 집어삼켰다.

밀레시안은 몇번인가 에린에 나타났던 그가 아닌 또다른 글라스 기브넨의 육신들을 해치웠었지만 그것은 모두 그의 뼛조각에 가죽주머니를 뒤집어 씌운 인형일 뿐이었다.

밀레시안이 환생을 거듭하며 제 육신을 별빛에 소각했던 것 처럼, 그 영혼은 단 하나의 유일성을 유지했다.

그리고 결국 그 또한 신성을 얻었다. 밀레시안이 반쪽짜리 신성을 얻은 것과 같이 그 또한 변질되고 뒤틀리며 본래의 자신을 잃고 이 땅에 내려왔다.

무슨 용건으로? 밀레시안은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말했으면 내가 갔을텐데.

도우갈은 밀레시안이 쓴 미소의 가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체념을 삼키고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한 미소. 밀레시안이 그에게 말했듯이 밀레시안 또한 이런 식으로 어른스럽게 웃지 못했다.

이계의 신성은 말했다. 너에게 거래를 제안하려고.

밀레시안은 무엇에 대한 거래인지도 묻지 않은채 대가부터 물었다. 대가는? 

그가 대답했다. '내가 낙원을 부술 수 있게 허락해줘.'

(music : 1.40)


시간이 거꾸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거래의 대가는 낙원이었다.]

밀레시안은 말도 안된다는 듯이 웃으며 한발자국 물러섰다.


[밀레시안은 눈앞에 나타난 이계의 존재를 바라보았다.]

‘안돼?’ 

당연하지.


[믿음은 이름이었고 마음이었으며 명예였고 육신이었다.]

‘어째서?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잖아’ 

남아있어, 문 밖에 아직 한참 더. 셀 수 없이 수많은 이들이 남아있어.


[수많은 믿음들 중에 밀레시안이 가질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계의 신성은 부정했다. 

‘아니, 그들은 이제 없어. 문 안쪽도, 문 바깥쪽도. 더이상 구분할 필요는 없어. 네 귀에 들려오는 이 파도소리가 이 세상의 전부고 네가 보고 있는 이 작은 섬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안식처야. 이곳은 최초이자 최후의 성지. 밀레시안. 더이상 이 세계에 네가 지킬 것은 아무것도 없어.’


[밀레시안은 아주 오랫동안 자신의 믿음을 기다렸다.]

‘이제 넌 자유야’


[그 믿음은 이따금씩 나란히 서는 발걸음이었으며 그 믿음은 이따금씩 친애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부정했다. 아니야. 그는 내가 이곳에 다다르는 것이 승리라고 말했어.


[그 믿음은 이따금씩 동경의 색깔을 띄었고 그 믿음은 이따금씩 구원의 소리로 울렸다.] 
‘누구의?’


[밀레시안은 언제나 답을 위해 증명해야 했고 언제나 그 과정을 설명해야 했다.]

알터의, 아벨린의, 피네, 그리고 그밖에 수많은 기사들의.

나를 믿어준 사람들의 승리.


[믿음으로 기반된 유예된 날들이 이어졌었다.] 
‘그럼 왜 그에게 창을 던졌지?’


[미래가 결정되었을 때 그 남은 날들은 믿음으로 채울 수 밖에 없었다.] 
이계의 신성은 물었다.

‘너는 무엇을 붙잡으려고 했지?’


[영원은 있었지만 자유는 없었다.] 
밀레시안은 그를 톨비쉬라고 불렀지만 이계의 신성은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아니. 아니야. 밀레시안. 너는 그가 누군지 몰라.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고. 이 세계가 무엇인지도 몰라.’


[이해가 있었지만 신뢰가 없었다.] 
‘너는 이 세계를 믿지 않아.’


[신뢰가 없었기 때문에 사랑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희망이 없었다.] 
‘너는 네가 네 자신임을 믿지 않고 너의 기억을 믿지 않고 너의 운명을 믿지 않아. 네가 스스로를 부정했기 때문에 지금의 내(신성)가 있고 지금의 내가 있기에 내 앞에선 네(불완전한 반신)가 있다.’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러하였듯이’ 


[밀레시안은 기꺼이 자신의 이름을 저울 위에 올렸다.] 
한 때 밀레시안의 믿음을 받았던 이계의 신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밀레시안의 양 뺨을 감싸쥐었다. 

‘너는 이 세계를 사랑하지 못했지만 떠나는 것 조차 할 수 없었다.’ 


황금의 눈동자 가득 밀레시안의 얼굴이 담겼다. 따스하고 또 상냥했다. 

그는 도우갈의 얼굴로 부드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이곳에 너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도우갈은 고개를 기울여 밀레시안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곳에 너를 신뢰할 이의 이름이 없었기에’

밀레시안은 도우갈의 팔을 붙잡았지만 이계의 신성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지독한 갈망속에서도 단 한번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되려 미련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하나쯤은, 한번쯤은. 이 날 이 때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면 이 다음번에는. 이 다음의 시대에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생명. 

낙원이 될 수 없는 영혼이 있었다. 

불완전하고 또 불안정해서, 밀레시안은 이따금씩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이 멈추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혹시 거기 누구 있어요? 

밀레시안은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새벽녘에. 뜨거운 태양아래, 비가내리는 구름너머에. 눈이 내리는 설원. 세상의 끝에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말을 걸며 말을 걸기를 반복했었다.


나를 보고 있는 건 당신인가요? 

밀레시안은 더듬더듬 그의 이름을 찾았지만 그 누구의 이름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것은 여신의 이름도 아니었고 마신의 이름도 아니었다.

밀레시안은 신들의 왕과 여신의 자매들의 이름도 알았지만 그들 또한 아니었다.

기사들이 말하는 위대한 신의 이름도 아니었다. 그 무엇도 당신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마음은 점점 커져서 하나의 신앙처럼 자라났지만 밀레시안은 신앙을 검으로 삼는 기사들을 보며 다시금 제 마음이 틀려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신앙은 아니었으나 전적으로 행해지는 믿음이었고, 그것은 아직 사랑이 아니었으나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이었다.


‘그럼에도 너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고 믿음을 버리지 못했다.’


홀로 존재하지 못하는 개인의 감정.

맹목적이었어도 이해와 설득, 설명을 필요로하지 않았던 온전한 한쌍의 관계.

그 어떤 고통과 시련이 있다 해도 무너지지 않았고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이 흘러도.

다시 만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증명의 존재를 알기에 알기에 매번, 밀레시안은 실망하고 또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끝자락 조차 닿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이 갈망을 채워줄 이름은 ‘이 세계’ 밖에 있었기에.


밀레시안은 밀어내려던 도우갈의 팔을 붙잡은채 숨을 헐떡였다.

물에 젖은 몸이 무거웠고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버거웠다.

무엇을 줄 수 있어?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거래였다.]

내가 낙원을 주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어?


이계의 신성은 웃었고 또 울었다.

‘그건 이 세계에 없어’

그는 애처롭기 짝이 없는 작은 이방자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오직 그것만이 이 불완전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었다.


‘쉬이- 착하지.’ 

어린 아이를 달래는 어른처럼 그는 밀레시안을 다독이며 말했다.


‘내가 너에게 받은 것을 되돌려주마.’

밀레시안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며 도우갈에게 매달렸다.

그 하나의 진실을 인정하기까지가 힘들었다. 너무 무서웠다.

의식의 시작(티르코네일)에서부터 이곳까지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이 너무나도 멀고 또 험난해서.

밀레시안은 울부짖으며 속안에 있던 서러움을 모두 토해내었다.


‘네가 나에게 그러했던 것과 같이’

세상은 뒤집히고 또 뒤집혔다.


‘너를 해방시켜 주마.’

빙글빙글 돌아가는 동전 한 닢.

심연의 깊은 곳에 떨어져내리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흐르고 지나가버렸다.


‘이곳을 떠나. 밀레시안.’

세상의 끝을 알리는 맑은 금속소리가 났다.

깨어진 황금의 심장으로부터 황금색 가지가 뻗어나왔다.

뿌리를 심장에 둔 이계의 거목은 위로, 옆으로, 아래로 다시 반대방향으로.

세상은 돌고 돌기를 반복하며 위와 아래를 바꿔나갔다.

금빛 궤적은 둥그스름한 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나뭇가지는 밀레시안을 꿰뚫었고 남아있던 바위를 부수며 거침없이 성장해나갔다.

이윽고 최후의 성지, 이름없는 작은 바위섬이 무너져 내리며 세상의 모든 것이 검은 파도 아래 가라앉아 버렸다.

밀레시안을 품은 황금색 별은 짙고 깊은 바다아래 가라앉으며 점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밀레시안이 바닥에 닿았을때 남은 것은 손아귀에 쏙 들어 올만큼 작은 조각 하나 뿐이었다.

그 안은 황금색보다는 붉은색에 가까운 보석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액체처럼 요동쳤으나 액체는 아니었고 형태를 갖추었으나 고체도 아니었다.

보석을 두른 황금색 얇은 막은 다른 가지들과 마찬가지로 금방 바다에 녹아들어가 버렸다.

남은 것은 붉은 보석뿐이었다.

붉은 조각은 바닷물이 닿자마자 파스스 녹아버리며 검붉은 연기를 흩어내었다.

옅은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흩어진 연기는 바다를 돌고, 다시 돌아 밀레시안에게로 돌아왔다.

아주 오랜 시간을 지나서. 아주 먼 거리를 돌아서.

밀레시안은 다시 온전해졌고 그 어떠한 것도 자신을 묶어둘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영혼을 붙잡던 맴돌이는 풀렸다. 에디드 소울 현상을 유지하던 매개체가 사라졌기 때문에 밀레시안은 비로소 육신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하늘에는 별이 없었고 바다 아래에는 땅이 없었다.

밀레시안은 다시 육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붕괴되기 시작한 밀레시안의 육신으로부터 거대한 신성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대한 힘의 붕괴는 에린의 질서를 거스르고 다른 세계를 잇는 통로를 만들어 내었다.

과거의 글라스기브넨의 육신이 티르 나 노이를 붕괴시켰던 것과 똑같은 현상.

그러나 불완전했던 그것과 달리 밀레시안은 수많은 칭호들을 손에 넣었다.

밀레시안은 여신의 구출자였으며 빛의 기사였고 에린의 수호자였다. 황금의 용은 밀레시안의 운명을 인정했다.

주신, 아튼시미니가 별의 이름을 인정했다.

수많은 인도를 받아 새로운 낙원이 완성되었다.

그 운명의 궤는 에린의 운명과 같은 것이니, 통로를 여는 신성은 이제 거스르는 방향이 아닌 올바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흠잡을 데 없이 아주 완벽한, 그리고 공정한.

세계와 세계를 맞바꾼 거래였기에 깨어진 이름의 주인은 기쁘게 그 거래를 받아들였다.

밀레시안은 눈을 감고 파도속에 잠겨들었다.


하늘도 땅도 없는 곳에 바다가 있었다.

그 바다의 한 가운데 별이 있었다.

별의 육신에서 시작된 거대한 흐름은 세계를 부수고 다시 또 이어내며 새로운 세계로 뻗어나갔다.

거꾸로 떨어지던 시계가 멈추고 밀레시안의 선택을 기다렸다.

어디로? 자유를 얻었기에 밀레시안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었다. 나아갈지, 계속해서 뒤로 돌아갈지.

그러나 더이상 이 땅에 남은 미련이 없었기에 밀레시안은 단 한번도 제 손에 쥐어보지 못한 것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물결이 흔들렸다. 보글 보글 피어오르는 은빛 기포가 수면을 뒤흔들며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카즈윈은 그러한 물결을 바라보며 나지막히 숨을 내쉬었다. 입술에 닿는 숨이 더웠고 뺨은 뜨거웠다.


밀레시안. 

그가 이름을 불렀다.

파사삭거리는 작은 소음을 내며 깨어져 가는 자신의 별을 보며 그는 다시한번 나지 막히 별의 이름을 불렀다.

밀레시안.

시계는 한바퀴를 돌았고 또 한바퀴를 돌았다.


쉼없이 돌아가는 시계침을 바라보며 마법사는 조용히 화면을 응시했다.

또 하나의 세계가 깨어지고 있었다. 그 하나의 세계는 하나의 발걸음.

그 발걸음은 분명 하찮았지만 그들은 아주 천천히,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세상에서 가장 머나먼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한글자 한글자를 천천히 집어삼키는 세계의 뱀처럼, 모든 글자들이 지워지고 마침내 단 한마디의 말만이 하얀 화면 위에 남아있었다.


[당신 누구?]

멀린은 커서가 깜빡이는 화면을 바라보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대답해. 얼른 대답해 수리부엉이. 멀린은 초조하게 손톱끝을 깨물다가 문득 모니터 옆에 자리한 작은 어항을 바라보았다. 보골보골, 작은 거품이 수면을 두드리고 있었다.

걱정마. 멀린은 씩 웃으며 말했다. 저녀석은 제대로 대답할 거야. 날 믿어. 밀레시안.


그들은 오랜 여정을 결심했다. 보았으니 알 수 있었고 알 수 있으니 염원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분명 닿을 것이다. 무슨일이 있어도 네가 있는 세계의 문에 닿아 진정한 낙원(너)을 다시 만나고 말리라.

그는 그렇게 믿으며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즈윈은 한참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손을 움직였다. 나는 헤루인 팀의 팀장... 카즈윈.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당신과 직접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 동안 일어난 일들은 대충 들어서 알고 있어.

카즈윈의 말에 밀레시안은 환하게 웃었다.


[그거 참 궁금하네요.]

물거품은 부그르르 하고 흩어지며 수면을 잔잔하게 뒤흔들었다.


[어떤 이야기 였는데요?]

카즈윈은 어항 앞에 앉아 천천히 자신이 봐왔던 이야기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2019.05.09

https://twitter.com/teclatia_con/status/1126269957006708736 

https://twitter.com/teclatia/status/1101798953111060480

대충 살자... 길은 없지만 대충 어떻게인가 유니콘스럽게 건너갈 방법은 있는 베그절벽처럼 https://spinspin.net/teclatia 칭찬박스

베그절벽 지박령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