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ring: 평행세계 스티브 로저스/토니 스타크(아이언맨)/스티브 로저스(쉴드 국장)
Rating: R



그 회로도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섬세한 수수께끼였다. 이제껏 만나본 적 없는 고도의 정신이 만들어낸 우아한 도전. 리드 리쳐드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회로도에 몰두했다. 그가 수열을 풀어가자 수식과 수식 사이에 감추어진 또 다른 수식이 애니그마처럼 드러난다. 일반인들에게는 난수표가 있어도 해석 안 될 골치 아픈 암호였지만 리드에게는 이 숫자들은 시나 다름없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수식은 처음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혼나겠지만, 그가 지금 느끼는 전율은 수잔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동과 흡사했다.

한 가지 의문이 있다면 한갓 위치추적기에 이런 질문을 숨겨놓은 상대의 의도다. 이런 회로도가 추적기 안에 있다는 것은, 로제타스톤을 빌딩건물의 초석으로 삼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기실 위치추적기 자체는 매우 단순한 편이라 해석이 어렵지 않았다. 과감한 생략과 단축이 흥미롭긴 했지만, 수수께끼를 낼 장소를 만드느라 그랬는지 구조가 간략화 되어 있어서 복제를 하는 데는 하루나 이틀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수수께끼의 회로도는 위치추적기의 역할과는 전혀 상관없는 물건이었고, 리드 박사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회로도에게 깊은 흥미와 의문을 동시에 느꼈다. 저 세계의 자신은 왜 이런 물건을 추적기에 숨겨 보냈을까? 아무런 의도 없이 보냈다고 하기엔 상대의 정성이 대단했을 뿐더러, 질문 자체도 지나치게 정교했다. 그가 아니라면 이 회로도가 질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가 침식을 잊고 연구에 몰두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이미 일상이 된 일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식구들은 밥 먹을 때나 재워야한다고 느꼈을 때만 그를 방해했다. 벌써 때가 됐는지 의례적인 방해가 찾아왔다. 연구실의 문을 똑똑 두드리며, 쟈니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매형, 점심 드세요.”

“조금 있다 가겠다고 해. 다 됐어.”

“그러다가 음식이 식으면 누나한테 혼날 걸요. 또 연구실 출입금지형이 받고 싶으세요? 누나가 포스 필드로 연구실 막아 놓으면 매형도 못 들어가잖아요.”

연구성애자인 매형이 매번 화를 자초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쟈니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다시 한 번 충고했다. 과연 연구실 출입금지 형이란 이야기는 효과가 있는지 리드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리던 리드는 미간을 문지르며 멋쩍게 쟈니를 바라보았다.

“어, 쟈니? 언제 왔어? 벌써 밥 먹을 시간인가?”

“네. 매형. 점심시간이에요.”

역시 이번에도 건성으로 대답한 거였군. 그들이 대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처럼 보이는 매형을 보며 쟈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쉽게 한숨을 쉰 리드가 주섬주섬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러다가 또 딴 데 정신이 팔릴 수가 있었으므로 쟈니는 팔짱을 낀 채 매형의 모습을 주시했다.

“지금 연구하는 게 그거에요? 아이언 우먼네의 위치 추적기?”

현재 어벤져스를 가장 뜨겁게 달구고 있는 소문은 다른 세계에서 온 스티브 로저스에 대한 것이다. 캡틴에 대한 정보는 원래부터 인기가 있는데다가, 무려 여자 토니와 결혼까지 했다는 전적 때문에 그에 대한 이슈는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운 좋게 처음부터 그의 등장을 관찰했던 쟈니 역시 그의 향방에 흥미가 있었다. 본디 가십에 흥미가 많았던 쟈니는 지구-3490에 대한 이야기들을 신나게 떠벌리고 다니다 수에게 걸려 단단히 혼이 나기까지 했으면서도 그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못했다.

“아이언 우먼 네라고 부르는 건 그만해. 그 세계에는 멀쩡하게 지구-3490이라는 이름이 있어.”

“하지만 네 자리나 되는 딱딱한 숫자 보다는 아이언 우먼 네라고 하는 게 더 임팩트 있잖아요. 기억하기도 쉽고.”

리드는 고작 네 자리 밖에 안 되는 숫자가 어떻게 아홉 글자나 되는 두 개의 단어보다 더 기억하기 힘든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납득할만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일찌감치 포기해 버렸다.

“아이언 우먼 네라고 부르는 게 싫으면, 미스 판타스틱 네라고 불러요? 아니면 인빈시블 맨네?”

하지만 그가 포기했다고 해서 상대까지 같은 배려를 해주는 것은 아니다. 리드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굴다 입을 다물자, 갑자기 짓궂은 표정이 된 쟈니가 놀리듯이 물어왔다. 리드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모르는 척 하지 말아요, 매형. 지구-3490을 관찰했으니 알 거 아니에요. 그 세계에는 아이언 우먼이 아니라 미스, 아니 미즈 판타스틱도 있는 세계라는 걸.”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쟈니? 그런 이야긴 금시초문인데.”

소문이 소문을 낳는 법이다. 기가 막힐 만큼 부정확한 정보에 리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멋대로 떠드는 소문이 도대체 어디까지 부푼 것일까? 하지만 쟈니는 왠지 자신만만해 보였다. 평소의 자신만만을 넘어 거의 건방지기까지 한 그 태도는 무슨 확신이라도 하고 있는 양 단호했다.

“예이. 왜 그러세요. 아이언 우먼의 남편 분께서 이실직고 하셨다니까요? 그 세계에는 리드 리쳐드가 아니라 리넷 리쳐드 박사가, 수 스톰이 아니라 셰인 스톰과 산다던데요? 우리 누나라면 굉장한 미남일 것 같은데 여자 매형이라. 으. 상상이 안가네. 다른 걸 다 떠나 그 새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로그처럼 그렇게 되는 건가?”

리드의 얼굴에다 로그의 머리스타일을 덧씌운 괴악한 상상을 떠올리고는, 혼자 호들갑을 떨며 팔뚝을 문지르는 쟈니를 리드는 돌연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지구-3490의 자신이 여자라고? 아니, 그럴 리 없다. 리드는 확신했다. 그 세계의 그는 분명 남자였다. 그도 남자지만 수 역시 남자였기에 그 기억은 더욱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리드는 자신이 동성애자 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기에 깊은 충격을 받았고, 이 사실을 쟈니가 알게 되면 평생 놀림 받을 게 뻔 하기 때문에 소스라쳤다. 그 때문에 토니에 대한 정보는 기록하면서도 자신에 대한 정보는 남몰래 묻어 버렸던 리드였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설마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아니, 그 세계의 나는 분명 남자였어. 리넷 리쳐드라고? 내가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세계가 분명 있긴 했지만 거긴 지구-3490이 아니야. 그곳은 오히려-.”

혼잣말처럼 거기까지 말하던 리드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었다. 그는 얼어붙은 시선으로 쟈니를 바라보다가, 책상위의 회로도를 내려다보았다. 확대경으로 확대시켜놓은 정교한 홀로그램이 그의 눈앞에 선명히 다가들었다.

“……아무래도 점심은 못 먹을 것 같다. 수에게 부탁해서 샌드위치를 좀 가져다주겠어?”

“네? 매형. 무슨 소리세요? 누나한테 그 말을 전하면 나까지 덩달아 혼날 거예요!”

매형의 느닷없는 배신에 깜짝 놀란 쟈니가 항변했다.

“스티브의 신상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전해줘. 그러면 양해할 거야.”

“스티브요? 어떤 스티브요? 설마 우리 세계 스티브요? 무슨 일인데요, 혹시-”

“쟈니!”

“알았어요. 알겠다구요!”

리드가 저렇게 엄격하게 말할 땐 정말로 큰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농담할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재빨리 깨달은 쟈니는 서둘러 수에게로 돌아갔다. 리드 박사는 침중한 얼굴로 회로도를 내려다 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속았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내가 얼마나 시간을 까먹은 거지? 사흘? 나흘? 초조해진 리드 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원 스코프를 켜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다시금 리넷 박사가 살고 있는 세상을 확인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는 다른 세상의 자신에게 완전히 놀아난 거나 다름없었다.

  


- 자네 내게 키스할 수 있나?

옅은 웃음기까지 어린 음성이 귓전을 맴돌았다. 어둑한 불빛 속에서 뒤틀리던 하얀 입매. 가늘게 접힌 눈꼬리에 담긴 것은 서늘한 조롱기였다.

- 아니면, 그러고 싶다고 생각 해 본 적은 있어?

그는 유혹하듯 몸을 기울이며 속삭여왔다. 가까이 다가선 그의 몸에서 낯선 체취가 풍겼다. 그의 육체에 선명히 묻어 있는 다른 수컷의 자취. 그가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젖은 광택이 도드라졌다. 어두운 불빛에 광채가 드러날 때마다 스티브의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에 보았던 광경이 하나도 빠짐없이 재생됐다.

기억은 마치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선명했다. 두 사람 사이를 오고가던 은밀한 미소, 자신과는 한 번도 나눠 본 적이 없던 의미심장한 시선들. 쾌락 속에 뒤엉켰던 두 개의 몸, 그 사이에서 흩어지던 연약한 신음까지도 모두 다. 

타인의 육체적 교감을 남몰래 지켜보는 것은 그가 받아온 모든 교육에 위배되는 행위다. 허나 스티브는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그의 가장 친한 친구를 욕망했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친구가 남자의 욕망을 거절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두 사람이 서로 뒤엉켜 있는 모습은 스티브가 이제껏 보아온 그 어떤 것보다도 음란하고 배덕적인 광경이었다. 스티브는 그러한 광경을 꿈에서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이거 미치겠군.’

스티브는 자신이 또 어젯밤으로 돌아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심 신음을 삼켰다. 업무시간인데도 도무지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에 집중하려고 아무리 노력 해봐도 조금만 정신이 흐트러지면 모든 게 제자리다. 그는 집착이라도 하듯 계속해서 같은 장면을 되새겼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는 걸까? 원인을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를 끈질기게 괴롭혀댔다. 마치 갈고리처럼 날카로운 것이 내장을 직접적으로 긁어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스티브는 그런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어 답답했다. 어제 일은 냉정하게 말해 토니의 사생활일 뿐이다. 토니가 불장난을 벌이고 있는 상대가 다른 세계에서 온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토니가 지적했던 대로, 토니와 그 남자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되든 그 때문에 그들의 관계가 변할 리 없다. 그들은 누구도 떼놓을 수 없는 친구이자 파트너가 아닌가. 서로 다른 대의와 이념으로도, 심지어는 죽음조차도 그들의 우정을 갈라놓진 못했었다.

허나, 그러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가 느끼는 기이한 흉통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것은 어린 시절 그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공복감과도 닮아 있었다. 펜을 내려놓은 그는 몸을 뒤로 젖히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내면이 기어이 육체에까지 영향을 끼친 모양이다. 좀처럼 지치지 않은 강인한 육신에서 피곤함이 느껴졌다.

- 국장님. 보안회선 342번으로 리쳐드 박사의 전화가 들어와 있습니다. 연결해 드릴까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번잡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고 있던 스티브의 귓전에 낭랑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퍼뜩 정신을 차린 스티브는 허리를 세우고 보안회선을 연결했다. 데스크의 맞은편에 펼쳐진 광활한 스크린에 친구의 얼굴이 떴다. 스티브는 평온한 표정 아래 혼란을 감추고 친구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 리드. 그동안 잘 지냈나?”

화면에 떠오른 미스터 판타스틱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지? 본성은 온화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누구보다도 냉철할 수 있는 남자가 바로 리드 리쳐드다. 그런 친구가 유례없이 진중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스티브의 얼굴에서도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스티브가 의문이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리드 박사는 인사도 없이 바로 용건을 털어놓았다.

- 자네에게 상의할 문제가 있네.

그렇게 서두를 뗀 리드는, 어떤 완충제도 없이 곧바로 자신의 용건을 털어놓았다. 그의 말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스티브의 어깨는 점점 더 뻣뻣이 굳어 갔다.

 

 

그 시각, 업무에 몰두하지 못하는 사람은 단지 스티브뿐만이 아니었다.

토니는 푹신한 중역용 의자에 허리를 묻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늘 잡혀 있던 일정 대부분을 취소한 탓에 페퍼는 엄청나게 화를 냈지만, 그녀의 폭풍 같은 분노조차도 바닥까지 가라앉은 토니를 움직이진 못했다.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혹시 어젯밤의 일로 스티브가 무언가를 눈치 채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보인 노골적인 광경을 감안해본다면 걱정을 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그를 안절부절 못하게 했던 초조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사그라졌다. 대신 자리를 차지한 것은 기이할 정도의 무력감과 짙은 허탈감이다. 토니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러면 그렇지.’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스티브는 그를 인지하지 않았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그런 마음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독히 그다운 일인데도 불구하고 심장이 아팠다.

높게 솟은 마천루 사이로 노을이 깔리기 시작했다. 짙은 황금빛의 잔영이 닫힌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들어오기 시작했을 때야 비로소 그는 자신의 마음을 직시할 수 있었다. 어쩌면 오늘 하루 종일, 그가 걱정하고 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도 그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깨달을 수 없을 거라는 것. 요행을 바랐던 게 잘못이었다. 직접적인 고백을 할 용기도 없는 주제에 뜻하지 않은 행운을 바랐으니 이런 결과를 맞을 수밖에.

토니는 쓰라린 가슴을 자조적인 미소로 감추었다. 새삼스럽다는 듯 상처를 받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이런 일 따위, 별 거 아니다. 어차피 늘 있던 일 아닌가. 스티브의 행동 하나 하나에 일희일비하고 사소한 일로 어이없을 만큼 희망에 부풀어 있다가 순식간에 추락하는 것. 이런 건 그에게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거다. 스티브에 대한 감정을 내려놓지 못하는 한, 이 좌절은 마치 형벌처럼 영원히 그의 발자국을 따라 다닐게 뻔했다.

그러나 그가 단념이라는 태도를 배우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련 또한 끈질겼다. 익숙한 상흔 위에 또 하나의 상처가 덧 그였지만 아픔은 처음인 양 예리했다.

“내 생각을 하고 있는 거면 고맙겠지만 그건 아니겠지? 그 사람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건가?”

자신의 내면에 침잠해 있던 토니는, 머리 위에서 들리는 음성에 놀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책상 앞에 익숙한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스티브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스티븐이다. 그는 청바지에 셔츠라는 러프한 차림새로 책상에 기대 서 있었다. 늘 올백으로 넘기곤 하는 앞머리를 풀기 없이 늘어트렸기에 평상시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모습이었다.

반쯤 넋이 나가 있던 토니는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방비한 상태를 고스란히 내보였다는 수치심 때문에 귓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스티븐, 이게 무슨-?”

노크도 없이 들어온 그에게 항의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돌연 머리를 스치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말을 맺지 못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시계를 확인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벌써 일곱시 반이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창밖을 내다보니 어스름하던 노을도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방금 전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에겐 취소하지 않은 약속이 하나 있었다. 스티븐과 저녁 여섯시에 만나기로 했던 사적인 약속이 바로 그것이다. 헌데 벌써 한 시간 반이나 늦고 말았다. 상대에게 어떤 식의 언질도 주지 않은 채. 일반적인 데이트 상대였으면 벌써 따귀가 날아왔을 상황이다.

내가 어디에 정신을 빼놓고 있었던 거지? 어이가 없어진 토니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 기막힌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웃는 낯을 한 채로 스티븐이 그를 들여다보았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노크는 확실히 했어. 그 전에 비서를 통해 전화 연결을 시도하기도 했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된 줄은 몰랐어, 스티븐. 연락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괜찮아. 당신은 늘 그랬으니까.”

그의 대답에 토니는 쓰게 웃었다. 스티븐은 그립다는 듯이 말했지만, 실제로 그가 그리워하는 상대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다. 이 얼마나 삐뚤어지고 유리된 관계인가?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하나로 엮일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잃은 그나,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하는 자신이나 상대에게 닿을 수 없는 처지인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으니까.

“모처럼의 카르멘이었는데 지금은 들어가지도 못하겠는 걸. 사과의 의미로 저녁을 사지.”

데이트인지 관광인지 모호하긴 하지만 어쨌든, 오늘 저녁의 계획은 오페라 관람이었다. 급하게 구했기 때문에 본래 가격보다 두 배 이상을 얹어줘야 했던 특등석 티켓이 휴지조각이 된 것을 깨달은 토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보다 스티븐이 빨랐다. 그는 토니보다 먼저 재킷을 집어 들고 그에게 옷을 입혀 주었다.

자비스 같군. 평범한 남자들이었다면 이런 상황을 당혹해 했겠지만, 어려서부터 집사의 손에서 커 온 토니는 아무런 위화감 없이 그에게서 재킷을 받아 입었다. 그 모습이 되려 재미있었던지, 빙그레 미소를 떠올린 스티븐이 토니의 뒷덜미에 짧게 입맞춤을 했다. 다정하다 못해 친근하기까지 한 스킨십에 토니의 몸이 흠칫 굳었다. 잠시 그의 기색을 살피던 스티븐은 토니가 거절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자 다시 한 번 입술을 갖다 댔다. 이번에 그의 입술이 닿은 곳은 목덜미가 아니라 귓불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귓불을 이 끝으로 살짝 깨물었다가 사과라도 하듯 혀끝으로 부드럽게 핥아 내렸다. 행위는 나른했지만 분명한 욕망을 담고 있었다. 은은한 전율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단추를 잠구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싼 두 팔이 토니의 몸을 바짝 끌어안았다. 자신을 갈구하는 단단한 몸에 사로잡힌 토니는 완전히 밀착된 몸 위로 상대의 갈증을 고스란히 느꼈다.

“끝까지 책임지지도 않을 거면서 길들일 생각인가? 무책임한 남자로군.”

스티븐의 유혹은 노골적이 아니라 더 치명적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조금씩 젖어드는 자신을 느낀 토니는 당장이라도 상대의 목을 끌어안고 싶은 기분을 내리누르며 퉁명스럽게 비아냥거렸다. 그 말을 들은 스티븐이 낮게 웃었다.

“책임질 생각은 아직도 충분히 있어. 따라오지 않겠다고 한 건 당신이잖아.”

“세상 전체를 버리고 남자 하나를 따라가라고? 내가 그렇게 낭만적인 타입으로 보이나?”

“원한다면 내가 대신 세상이 되어 줄 수도 있어. 자네를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해.”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의 진의가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듯한 남자의 집념에 토니는 고소를 머금었다. 흔들지 마. 토니는 그의 가슴에 말없이 등을 기대며 생각했다. 당신이 그러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지쳤어.

“저녁 메뉴로 스시는 어때? 내가 잘 아는 주방장이 있는데, 그 사람 칼솜씨는 정말 대단하거든.”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리자 스티븐이 한쪽 눈썹을 휘어 올리며 토니를 내려다보았다.

“잠깐. 왜 내가 벌 받아야 하는 거지? 잘못한 사람은 당신 아닌가?”

“누가 벌을 준대? 사죄의 의미로 보기 드문 진미를 선사하겠다는 거잖아.”

“익히지도 않은 날생선을 먹일 거라며? 거기에 덧붙여 짭짤한 맛이 나는 검은 종이까지. 그거 알아? 미국인에게 그걸 강제로 먹이는 건 인권유린이야. 적어도 전범 재판소는 그렇게 판결했었다고.”

“……이럴 때마다 자네가 2차 대전 출신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없어. 짭짤한 맛이 나는 검은 종이라니, 그건 설마 김을 말하는 거야?”

언뜻 기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찰나간의 일인지라 정확히 무슨 느낌인지는 알 수 없었다. 토니가 아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스티븐도 지지 않겠다는 듯 그를 마주 보았다. 이 촌스러운 인간. 토니는 낮게 혀를 차며 마음속에 떠올렸던 일본식 레스토랑의 이름을 조용히 지웠다. 좀 낫다고 해봤자 거기서 거긴가 보다. 하긴, 스티브 로저스란 인간의 본성이 어디 갈 리 있겠는가.

“그럼 뭐가 좋겠어? 스테이크? 햄버거?”

“말만 하면 뭐든 먹게 해줄 건가?”

“물론이지. 하지만 내가 먹고 싶다던가 하는 유치한 농담을 하면, 식당까지만 데려다주고 밥값은 자네한테 내게 하겠어.”

정말 그런 농담을 할 생각이었던지 스티브의 얼굴에서 시무룩한 기색이 드러났다. 혼잣말인양 내가 돈만 있었어도 어쩌고 하는 걸로 보아 밥값 낼 돈만 있었다면 기어코 그 소리를 했을 건가 보다. 못 말리겠군. 고개를 절래절래 저은 토니는 문 쪽으로 향했다. 꼬리를 늘어트린 강아지 같은 태도로 스티븐이 그 뒤를 따라 왔다.

“자네가 누군가와 입맛이 같다면 좋아할만한 곳이 있어. 여긴 스테이크가 맛있는데 미디움 웰던까지도 괜찮게 하는 정말 드문 곳이라서-.”

거기까지 말하던 토니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익스트리미스에서 이상한 기척이 감지됐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어떤 것이 움직였다. 익스트리미스 덕에 생각만으로 세상 모든 기계와 디지털 정보에 접속할 수 있게 된 그이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신경을 예리하게 곤두세운 그는 감각을 확장시켜 사방을 훑었다. 허나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계의 작동원리는 커녕 위치조차 제대로 잡기 힘들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사방을 둘러보던 그의 시선에 스티븐에게로 가서 멎었다. 토니와 마찬가지로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스티븐이 그를 바라보았다.

“……스티븐?”

그의 한 손은 여전히 토니의 허리에 닿아 있었지만, 다른 손은 자기 귓전을 향해 있었다. 토니는 그가 리시버를 낀 것처럼 귀의 연골을 누르고 있는 것을 예리하게 알아보았다. 저게 뭐지? 이성보다 앞선 본능이 그에게 위험을 알렸다.

“그게 뭔가, 스티븐? 자네 귀에 뭐가 있는 거지?”

“장담대로 리쳐드 박사는 매우 유능하군. 지나치게 유능해. 예상대로라면 적어도 일주일의 여유는 생겼어야 하는데 이제 겨우 닷새째야. 원래도 촉박하던 시간이 형편없이 짧아졌어.”

스티븐이 서글프게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순한 표정임에도 오싹함을 느낀 토니가 뒷걸음질 치려고 했지만 스티븐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악력으로 움켜쥔 스티븐이 토니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 당겼다.

“-너 누구야?”

“다시 한 번 묻지. 정말 나와 함께 가지 않겠나? 방금 했던 말은 빈말이 아니야. 나는 자네를 위해서라면 정말 뭐든지 할 수 있어.”

“이런 제길.”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황급히 갑옷을 불러 들였던 토니는, 순간 강한 전기 충격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귀에 강한 이명이 일면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뇌가 진탕된 것처럼 얼얼했고 근육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굳어 들어갔다. 그가 고통스럽게 경련을 일으키자 스티븐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쉬이. 애쓰지마 토니. 전자기 펄스(EMP) 장치를 가동했어. 잘못하면 뇌에 손상이 갈 거야. 당신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아.”

토니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스티븐은 방금 전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태도로 그를 달래고 있었다. 하지만 토니는 더 이상 그의 다정한 태도를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있을 리 없다. 여태껏 자신을 감쪽같이 속여 왔던 존재를 어떻게 믿겠는가?

그는 키스라도 할 것처럼 다가오는 남자의 턱을 팔꿈치로 올려치고, 몸을 돌려 그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가 스티븐에게 어깨를 잡혔다. 슈퍼 솔져의 강력한 악력에 사로잡힐 뻔  한 것도 잠시, 허리를 낮추며 몸을 굴린 그는 낮은 다리 걸기로 그를 넘어트리고 뒤로 물러나 데스크를 짚었다.

뇌가 울려 다리가 휘청했다. 균형 잡기도 힘들 뿐더러 속은 뒤집어 질 것처럼 울렁였다. 떨리는 손으로 서둘러 뒤를 더듬었지만 그의 책상에는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이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가벼운 페이퍼 나이프와 만년필, 그리고 스타일러스 펜 정도가 전부다. 빌어먹을 사무전산화 같으니! 토니는 앞으로는 페퍼처럼 스테인레스로 된 장난감이라도 놔둬야겠다고 결심하며 페이퍼 나이프를 손에 들었다. 바닥에 나동그라졌던 스티븐은 툭툭 몸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니. 그러지 마.”

“이런, 젠장-,”

“토니.”

“네 정체가 뭐냐고 물었어! 넌 뭐야?”

리쳐드 박사는 분명 그를 인간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그가 뭘 알겠는가? 그는 저 자식이 자기 귀에 송신기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는데 말이다.

욕설을 간신히 참은 토니는 태연스레 접근하는 스티븐에게 이를 갈며 물었다. 스티븐은 토니가 손에 쥔 애처로운 무기 - 토니도 그게 우스울 정도로 처량한 자기위안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가 전혀 무섭지 않은 듯 그에게로 다가왔다.

“나는 스티브 로저스야, 토니. 자네가 의심하는 것과는 달리 본인 그 자체지.”

“자네가 캡틴 아메리카라고? 그 말을 믿으란 말인가?”

스티븐이 지나지게 가까이 다가서자, 경고하듯 나이프를 휘두르며 토니가 으르렁 거렸다. 그러나 스티븐은 시늉으로도 그 위협에서 피하지 않았다.

페이퍼 나이프가 스티븐의 콧잔등 위를 지나갔다. 잘못하면 눈을 찔렀을 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위치를 지나간 칼날에, 살이 베여 붉은 핏기가 내비친다. 스티븐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엄지손가락으로 핏물을 닦아 냈다. 놀랍게도 핏물이 닦인 자리에서 서서히 상처가 아무는 것이 보였다. 몇 몇 동료에게서 보아온 익숙하기 그지없는 재생 장면이다. 그 모습을 확인한 토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을 때, 스티븐은 엄지손가락에 묻은 핏방울을 핥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 이름으로 불렸을 때도 있긴 하지만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이 거의 안나. 2차 대전 이후로는 계속 캡틴 웨폰으로 불렸거든. 웨폰 X 실험에 참가했다가 살아남으니까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더군.”

스티븐의 손등에서 익숙한 세 개의 칼날이 튀어나왔다. 눈에 익은 아만타티움의 칼날이다. 토니는 그것을 보고서야 그가 왜 캡틴 웨폰이라고 불렸는지를 깨달았다. 이 세계의 스티브와는 달리 저 남자는 방패가 아니라 무기였다. 방어가 아니라 공격을 위해 재단 된 존재. 남자는 쓸쓸하게 토니를 바라보다 싱긋 미소 지었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들킨 것처럼 그의 낯엔 겸연쩍은 빛까지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스티브 로저스임을 더 이상 부정하지 마. 내게 잃어버렸던 진짜 이름을 돌려준 사람은 바로 당신이잖아.”

토니는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한 것은 놀라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현기증 때문이기도 했다. 이게 뭐-? 형광등을 끈 것처럼 갑자기 어두워지는 의식을 느끼며 토니는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가 바닥에 머리를 찧기 직전에 낚아챈 스티브는 인형처럼 늘어진 토니를 품에 안으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 to be...


가늘고 길게 덕질합니다

페이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