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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4월 3일. 벚꽃은 피었으나 아직 찬 바람이 부는 시기.

고등학생이 되기까지만 해도,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전혀 몰랐다. 자신의 인생에 농구라는 공놀이가 선뜻 들어오게 되리라곤. 열다섯살이 되기 전의 사쿠라기 하나미치란: 꿈도 미래도 없이 살던 불량소년이었다. 폭력의 선동가였다. 모두가 내놓은 문제아였다. 저주받은 빨간머리였다. 흑과 백의 머리칼 속 요괴같은 붉은색. 해동중학교의 빨간머리가 떴다는 말은 카나가와현 주민에게는 지진 경보나 마찬가지.

그랬던 문제아의 입에서 튀어 나온 한마디.

"저 놈한테만큼은 지고 싶지 않아."

짙은 연지색으로 흐드러진 왕벚나무 아래에서 벌어진 새빨간 방백. 목격자는 네명이다.

"언젠가는 꼭 뛰어넘고 말테다!"

사쿠라기 하나미치의 인생에 처음으로 꺾어보고 싶단 누군가가 나오다. 통칭 1학년 10반의 그놈. 여우 새끼. 멀끔하니 예쁘게 생긴 얼굴. 백짓장처럼 하얀 피부. 흑요석보다 검은 머리카락. 중학 농구부 에이스. 아마도 고등학교에서도 에이스일 인물. 하나미치보다는 조금 작지만 상당히 큰 키. 녀석의 걸음이 닿는 곳마다 갈라지는 인파의 떼. 자연스럽게 놈을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 루카와 카에데라는 그 이름. 그리고. 사쿠라기가 내린 두 사람 관계의 정의: 연적.

무릇 방백에는 목격자가 있는 법. 그저 알은체 하지 않을 뿐. 사쿠라기 군단은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으며 사쿠라기를 동정한다. 츄의 입에서 나오면 안 될 말이 나온다. 바보같은 하나미치, 안 됐어. 하루코짱은 루카와를 좋아하는걸.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이 말을 들었다면, 츄는 이마에 큼직한 혹을 달고 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것이다. 군단의 시선에서 하나미치와 하루코 관계는 이미 51번째의 고백 대상, 그리고 51번째의 거절 대상이다. 좋아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아직 제대로 된 고백을 안 하고 있다는 점이, 군단 입장에서는 제일 가는 개그포인트다.

언젠가는 사쿠라기가 이 모든 감정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것이다.



관계의 시작은 분명히 연적이라는 단어로부터 파생됐다. 사쿠라기가 좋아하는 하루코. 하루코가 좋아하는 루카와. 단방향 화살표들의 향연. 작대기의 맨 끝, 사랑의 먹이사슬 종착점은 바로 루카와 카에데. 

그렇다면 종착점, 루카와 카에데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농구다.

여기서 열다섯살 사쿠라기 소년은 생각하게 된다. 농구를 잘 하게 되면, 하루코가 나를 좋아해줄 거야. 농구를 잘 하게 되면, 루카와도 꺾을 수 있어. 루카와를 꺾으면, 하루코가 나를 좋아해줄거야. 하루코와 교제하게 될 거야. 

즉, 농구를 잘 하게 되면 하루코의 사랑을 얻을 수 있으며 루카와도 놀려줄 수 있다.

머릿속 서류에 결론을 내고 도장까지 찍었다. 사랑이란 놈의 효과는 무시무시했다. 오로지 사랑으로 말미암아 농구를 시작하게 된 소년. 소년에게 더는 두려움은 없다. 공포도 없다. 그저 하루코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시작했다. 농구부에는 하루코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 이름, 루카와 카에데가 있다. 루카와 카에데라는 인물은,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바라는 농구 그 모든 것을 가졌다. 깔끔한 슛 폼. 승부를 향한 집착. 괴물같은 스킬. 노력의 절정. 에이스라는 이름표까지.

루카와를 목표로 했다. 점점 사쿠라기의 시각이 루카와와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지향점을 닮아갔다. 코트 위를 더 넓게 바라보는 시야각. 상대 선수의 빈틈을 뚫어내는 방법. 삼점슛을 던지는 요령. 농구라는 스포츠에 진심이 된 것 까지. 전심전력. 새로운 인생의 목표가 생기자, 사쿠라기는 거칠 것이 없어졌다. 루카와에게만큼은 절대 지고 싶지 않아. 미국에 가겠다는 루카와의 말을 듣자, 사쿠라기의 머릿속에서도 새로운 지향점이 생겼다. 미국에 입성하기.

여우 네녀석에게는 지지 않을거야.

지지 않겠다는 이유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영 공부와는 관계가 멀던 인물이 책상 앞에 앉자 다들 난리가 났다. 새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소문이 전교에 파다하게 퍼졌다. 빨간 야차가 공부를 시작했다는 소문. 과목은 오직 영어. 다른 수업시간에도 활짝 펼쳐진 영어책. 수학 시간에도 국어 시간에도.

원래 인간은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면 탈이 난다. 공부를 시작한 건 좋았는데, 어느새 누워 잠들어버린 사쿠라기가 있다. 교실 뒷편 열린 문으로 짙은 그림자가 쏟아졌다. 탁탁탁, 책상 위를 두드리는 손가락 마디뼈 소리.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입가의 침을 닦으며 부스스 일어났다. 깨운 사람은 목표이자 라이벌, 루카와 카에데.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까만 눈동자가 하나미치의 회색 눈동자를 바라본다.

"야, 멍청이."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벌떡 일어나 주먹을 휘둘렀다. 닿진 않았다. 그저 옆을 스쳤을 뿐.

"뭐야, 여우놈아!"

"겨우 이거로 공부가 되겠냐?"

책상 위로 하나미치가 처음 보는 영어책이 쏟아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루카와 카에데의 손에 들려있던 것이다. 혼잡했던 교실의 소음이 사그라들었다. 하나미치는 고개를 들어 라이벌의 얼굴을 확인했다. 고요하고 청아한 얼굴. 표정에서는 아무 감정도 잡히지 않는다. 

"미국에 가고 싶다고? 그렇다면 죽을 때까지 따라와라. 멍청아. 요새 내가 보는 책이다."

여우의 발걸음은 빠르게 복도 밖으로 사라졌다. 하나미치는 책 한 권을 들어 살펴보았다. 독약이라도 묻은 듯이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예상과는 달리, 겉표지에 지문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책이다.

이 사건은 얼마 뒤 일파만파 전교에 퍼진다: 그 유명한 루카와가 그 유명한 사쿠라기를 찾아가서 책을 선물했다. 농구부의 두 유명인. 걸핏하면 서로 주먹을 내지르고 발로 걷어찬다는, 농구부 1학년 환상의 콤비가.

"이 여우놈이 날 뭘로 보고. 내가 이 책 한 권조차 못 뗄 것 같아?"

책을 손에 쥐고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괴성을 질렀다. 언젠간 꼭 네놈을 뛰어넘고 말거라며. 그 시절만 해도 사쿠라기는 아무것도 몰랐다. 평생의 라이벌이자 목표. 호적수.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변모가 있을 것이라고는.




태웅백호 / 루하나 流花 

ever after

~ 탱백 전력 : 평생의 라이벌 ~




한 번, 두 번, 세 번. 번쩍이는 플래시 빛에 눈이 부셔왔다. 한때 누구보다 거한이었던 노인은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러지 마세요! 몸 쪼그리시면 안 돼요!"

닫힌 문 안쪽에서 벼락처럼 터지는 목소리. 조심스레 노인은 등을 폈다. 다시금 자세를 처음처럼 다잡는다. 다시 찍을게요! 다시 한번, 두번. 가로 4미터, 세로 4미터, 방의 높이는 아마 2미터 하고도 절반. 각진 실내에 천둥처럼 흰 빛이 퍼진다. 노인은 조용히 벽의 어딘가를 응시했다. 얌전하게. 

나이가 들며 노인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1) 차분해졌다: 몸도, 성격도, 행동도. 

2) 세월을 피하지 못하여 쪼그라든 키: 그래봤자 여전히 181센티였다. 

3) 분홍색으로 세어버린 머리카락: 노인의 유전형질은 조금 특이한 것이라서 남들처럼 머리가 하얗게 세지 않는다. 

4) 탄력을 잃고 주름이 잡힌 피부: 이건 노화를 겪는 모든 이에게 오는 현상이니까 이상하진 않다. 

5) 달리는 기차보다 커다랬던 목소리가 낮아진 것: 소리를 지르기에 기력이 쇠했다. 

6) 어린 시절에 비하면 년간 읽는 책의 권수가 늘어난 점: 스스로는 나름 독서애호가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머릿속에 꽉 들어찬 많은 한자 나부랭이. 

문이 열리며 방사선실 안에서 젊은 남자가 걸어나왔다.

"촬영 끝났어요. 고생하셨습니다."

가벼운 목례. 노인은 긴 지팡이를 짚고 문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병원의 냄새는 아무리 맡아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을 때마다 불편해지는 호흡. 입안도 괜시리 깔깔하다. 누가 남긴 질병의 부스러기가 옷자락에 스며든다. '개도 병원에서는 못 살거야. 개들이 코가 얼마나 좋은데, 이런 데에서 버티겠어? 못 버티지.' 언젠가 노인이 가장 친한 친구에게 했던 말이었다. 답답한 장소를 벗어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겨울은 끝났다. 날씨가 적당히 따스해서 노인은 기분이 좋았다. 잘 구획된 실버타운 내의 단지를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지나쳤다. 인도는 가지가 다듬어진 옅은 신록과 점점이 피어난 분홍색 가로수 길. 며칠만 지나면 벚꽃이 개화한다. 연노란색 페인트가 발린 낮은 주택이 다닥다닥 몰려있는 꼴이 꼭 바위에 붙은 따개비같다. 인도를 걷는 노인의 옆으로 새까만 밴 한대가 선회하며 지나갔다. 타운을 반으로 가르는 검은 도로에는 오고가는 차량이 그리 많지 않았다. 길고 튼실한 차체. 자신도 모르게 노인은 차의 본넷트를 훑어보았다.

'에스컬레이드랑 비슷하게 생겼네.'

노인은 과거에 캐딜락 에스컬레이드를 탔었다. 밴의 뒷꽁무니까지 보니 알겠다. 차종이 달랐다. 또 꽁지에서 검은 매연을 토해내지도 않는다. 완벽한 전기차. 국제 협약으로 배기가스를 배출하는 석유 차량이 사라진지 오래인데도 노인은 환상처럼 과거의 애마를 본다. 탑승자는 아마 외부인은 아닐거다. 요새는 워낙 세상이 좋아졌다. 운전수가 없어도 된다. 최신 내비게이터와 인공지능을 탑재한 자동차는 혼자서도 움직인다. 타운 내 대부분의 차량은 손님이 아니라, 타운 내에 필요한 물품 선적용이다. 

젊은 시절 길을 걸으면, 사람들은 그를 보고 수군거렸다. 여기서는 아무도 수군대지 않는다. 하얀 가운과 파란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은 다정하게 인사한다. 이름을 외치고 손을 흔들어준다. 실버타운 내의 다른 노인들은 노인을 이렇게 부른다: 분홍머리 거인. 욕설이나 비난의 어조는 아니다. 애정이다. 다 늙어가는 사이간의 기묘한 우정 내지는 동지애. 그래서 편한데, 가끔은 아무도 자신에게 손가락질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인은 참을 수 없는 어색함을 느낀다.

처음 실버타운을 알아볼 때 노인이 내세웠던 조건은 단 하나였다: 농구장의 설치 여부.

고령화시대에 다양한 개성의 실버타운이 존재했지만, 오로지 농구장 단 하나만을 보고 노인은 이 장소를 골랐다. 자신이 뼈를 묻을 장소. 마지막 이사지. 

그가 배정받은 집보다는 조금 멀리 떨어져있지만, 낮게 굽이진 언덕을 오르면 작은 농구장이 나온다. 말랑한 진갈색 우레탄 바닥. 노인에게 맞춰진 농구 골대. 일반 정규 골대가 아니다. 과거에 쓰였던, 소학교용 미니바스 골대다. 10대와 20대, 한창 현역 농구선수로서 활동하던 시절 노인은 가볍게 점프해서 정규 골대에도 덩크슛을 꽂곤 했다. 지금은 다 지나간 일이 되었다. 타운 내 농구장에 설치된 어린이용 골대는 정규 골대보다 약 40센티가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덩크슛을 쏘지 못한다.

어느덧 노인의 세 발이 농구코트 앞에 도착했다. 코트는 텅 비어 있었다. 

오래 걸어서인지 무릎이, 허리가 아파왔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노인은 오랜 기억 속으로 다이빙을 했다. 현재가 매끄럽게 과거로 바뀐다. 예순 살, 쉰 살, 마흔 살, 서른 살, 스무 살. 그리고 열다섯. 침잠할수록 그는 점점 젊어진다. 귓가에 관중의 환호성이 들렸다. 곳곳에서 새하얗게 터지는 스포트라이트. 과거의 영광. 추억. 애정. 기억이 노인을 적신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노인은 과거에 젖고 사랑에 절었다.



집마다 안드로이드 한 대가 주어졌다. 목적은 입주자 외로움 방지용도란다. 보호자이기도 하단다. 사람 모양의 하얀 안드로이드는 몸뚱이만 사람같다. 머리는 둥근 계란형이다. 눈도 코도 입도 아무것도 없는 밋밋한 반투명 창. 창 밑에 작게 숨겨진 동그란 까만 점은 카메라 렌즈. 안드로이드는 감정을 느낌표, 물음표, 애꾸눈 등으로 얼굴에 표시한다.

안드로이드를 부대끼고 사는 입주자들은 안드로이드에 대한 다양한 소회를 갖고 있다: 철창이 달리지 않은 타운 내 교도관. 친한 친구. 스파이. 간호사. 애인. 가정부.

모든 이들이 주변을 다 떠나버린 상황에서, 안드로이드는 노인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친구이자 말벗.

노인이 집 문을 열자 안드로이드가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오늘의 기분은 어떻습니까?"

"몰라."

현관에 지팡이를 세웠다. 신발을 벗었다. 조금 굽어진 등으로 노인은 실내로 들어섰다. 통창이 탁 트여 내부가 밝다. 환경은 꽤 좋은 편이다. 그의 남은 생을 살아낼 장소로 부족하지 않았다.

"오늘은 농구를 하셨습니까?"

"농구는 팀 스포츠야. 다섯명이 안 되는데 어떻게 농구를 하냐."

"정규 시합은 아니어도 1 대 1이 가능합니다."

"…아무도 없더라."

세면대 앞에서 거품을 내고 손을 씻었다. 고개를 들었다. 거울에 비친 분홍빛 머리에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빨간 머리는 하얗게 셀 수가 없다. 남과 같이 흰색이 되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한, 별종. 외출 후 노인에게 남은 것은 약간의 피로감, 지독한 외로움, 그리고 허기. 부엌으로 들어서는 노인의 등에 대고 안드로이드가 말했다.

"저녁 식사는 오후 여섯시입니다. 지금 시각은 오후 네시 오십분입니다."

"알고 있어."

작은 우유팩 한 곽을 들고 노인이 마루로 걸어왔다. 안드로이드는 삐걱대고 몸을 뒤틀며 뒤를 따랐다. 기술이 발전했지만 사람처럼 매끄럽게 걷는 로봇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직까지는. 

앓는 소리와 함께 노인이 소파에 주저앉았다. 안드로이드는 여전히 옆에 있었다. 강아지처럼 주인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닌다. 그렇게 설계되었다. 노인은 안드로이드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그 정도의 힘은 남아 있었다. 찍, 종이 뜯기는 소리. 노인의 입 속으로 우유가 넘어갔다. 리드미컬하게 목젖이 움직였다. 아직 넘어가지 않은 태양광이 둘의 움직임을 비추었다. 안드로이드에게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썹의 각도가 직선이 아닌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입의 각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높은 확률로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당신을 즐겁게 해드릴까요? 당신이 즐거워지는 주제는 농구, 친구, 음식입니다. 이 중 하나를 선택하시면 이야기를 꺼내겠습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사람의 기분을 파악한다. 그래서 안드로이드다. 완벽하게 설계된 지성의 창조물. 심지어 인간도 대체하는.

가끔 노인은 판판한 안드로이드의 면상으로부터 두려움을 읽었다. 두려움의 주인은 노인 그 자신이다. 반들대며 빛나는 안드로이드의 외피는 거울처럼 노인을 비춰냈다. 

"그거 말고 다른 할 말은 없냐? 내 가족이라던가."

"당신의 삶에서 가족은 전기와 후기로 나뉩니다. 전기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후기의 가족 이야기를 꺼낼 경우, 당신은 95.8퍼센트의 확률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아니면 내 라이벌이라던가?"

안면부 표시창에는 미동도 없다. 한쪽 눈만 떠 있다.

"당신은 95.8퍼센트의 확률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라이벌에 대해 들으시겠습니까?"

"그러면 첫사랑 이야기."

안드로이드의 얼굴에 표시되는, 회전하는 모래시계. 기계 내부에서 웅웅대는 소리가 났다.

"당신은 첫사랑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긴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중학시절 3년간 쉰 명의 여성에게 교제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그 중에 첫사랑이 포함되어 있나요?"

순간 노인은 막막해졌다. 누가 첫사랑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첫사랑이라고 정의내릴 존재가 까마득했다. 너무 오래 전의 사건. 혹은 뇌리에 남을 정도로 강렬하지 않았던 인상. 또는 순간의 알량한 감정기복이었던 탓이리라.

"그러면 첫키스 이야기?"

안드로이드 전면 표시창의 표시가 눈동자로 바뀌었다. 

"당신의 첫키스 상대는 루카와 카에데였습니다."

침묵.

"이야기를 재생할까요? 기록을 재생하시는 것을 원하십니까, 사건을 재구성하여 줄글 형태로 만들기를 원하십니까?"

또 침묵. 노인은 숨을 죽였다.

파리 날갯짓같은 잉잉 소리. 안드로이드의 몸이 공명했다. 스피커처럼. 흰 외피 안에서 하나미치의 과거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라이벌에게 졌다는 건 진짜 찝찝한 기분이지 뭐야. 미국 진출에 있어서 내가 졌어. 그 여우 자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미국으로 가버렸으니까. 뭐, 그 시절 나한텐 장학금도 없었고 자비도 없었어. 당시 친척 어르신이 월에 생활비만 조금씩 지원해 주셨으니 어쩔 수 없었지. 바로 여우를 따라서 미국까지 가는건 어려웠어. 하지만 이 천재님은 오사카의 대학에 입학했어. 천재니까. 영감님이 연결해줬긴 한데, 이 몸이니까 가능했지. 학자금이 장학금으로 충당돼서, 학비 걱정을 안 해도 되는게 좋았어. 영감님…다시 쓰러지셨을 때 못 찾아뵌게 죄송해. 투병하다가 결국 나 대학교 3학년 때에 돌아가셨다고. 아무튼, 어디나 천재를 알아보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라니까. 나중엔 농구 열심히 하라고 스폰서도 생겼다고. 근데 1학년 때는 술만 마셨던 것 같다. 아닌가? 운동도 열심히 했나? 이 천재님이 못하는 건 없으니까, 농구도 열심히 하고, 술도 열심히 마시고, 이곳저곳 놀러 다녔던 거 같아. 소개팅도 처음 해봤던 것 같아. 여우 놈이 가끔 아무 말도 안 적은 엽서를 보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텐데. 처음에는 자랑하나 싶었어. 미국의 황무지 사진 보내고, 무슨 타워랍시고 높은 빌딩 사진 보내고. 체, 아무리 봐도 도쿄타워가 더 나은데. 미국 대학 2부 리그로 올라갔다고 사진 보내고, 1부 리그로 올라갔을 때에도 사진 보내고. 그러고보니까 첫 키스를 여우에게 빼앗긴건 지금 떠올려도 열받는다. 첫키스 만큼은 다른 사람이랑 했었어야 됐는데. 대학 1학년 여름이었을걸? 여우놈이 방학이랍시고 귀국을 해놓고는 갑, 갑자기 이 천재님의 입술을…으윽 젠장맞을! 거기 어디였는지 알아? 하네다 공항이었다고! 심심해서 놈이 귀국하는 걸 보러 나갔을 뿐인데 그게 뭐냐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쳐다봤는지 너는 몰라! 그 시절엔 동성끼리는 결혼할 수 없었어. 모두 이상하게 바라봤다고. 아무리 천재님이어도 그렇게 시선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고! 근데 진짜 짜증났던 건…입술이 정말 부드러웠어…이 천재의 인생에 이런 시련이 또 있을까 생각했지…그때였나봐. 내가 이 놈에게 말려든게.

-기록 재생이 종료되었습니다.




짝짝.

불단 앞에서는 박수를 두 번 친다. 

깨끗하고 현대화된 타운 주택에 어울리지 않는 진갈색의 장롱 문이 열려 있었다. 위패 몇 개, 탁상액자, 작은 단지 몇 개. 그 외 자잘한 물건들. 불이 꺼져가는 향초에서 까맣게 식은 재가 뚝 떨어졌다. 노인은 손때 묻은 위패를 바라봤다. 정확하게는 위패에 박힌 이름을. 불단 가운데에는 큰 사진이 놓여 있다. 입가와 눈 근처에 주름이 지고, 머리가 하얗게 센 또 다른 노인. 짙은 속눈썹, 똑바로 놓인 콧대, 눈꺼풀 사이에서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 나이가 들었음에도 여전히 미남임을 알 수 있다. 등 뒤에서 조용하게 발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은 두려웠다. 감정을 추스를 틈조차 주지 않는 기계가.

"혼자 있고 싶어."

"저는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지 않았습니다."

자제심이 사라져갔다. 그래도 노인 역시 나이가 들긴 했다. 예전이었다면, 이미 안드로이드는 부서지고 없었다.

안드로이드의 시선이 불단으로 향했다.

"루카와 카에데, 향년 81세를 일기로-"

"조용히 해."

사람 모양의 기계가 덜걱거렸다. 안드로이드가 집마다 놓인 가장 큰 목적은 첫 번째, 노인의 고독사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로 인해 파생하는 몇 가지 문제들: 조용히 입을 닥치지 않는다, 항상 떠든다, 주인의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하지 않는다, 본 목적과 상충되는 주인의 명령을 듣게 되면 어딘가가 조금 고장나는 것 같다.

"루카와 카에데. 검색 결과: 사쿠라기 하나미치 음성 기록 139건, 뉴스 및 신문 기사 9999건 이상. 추가로 검색하시겠습니까? 기본 검색에서 인덱스는 검색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결과 중 총 9999위까지 제공됩니다. 과거의 인덱스에 접근하는 일에는 최대 몇 초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노인은 손으로 향초에 남은 잔불을 껐다. 이럴 때는 안드로이드가 전혀 삶에 도움이 되질 않았다. 밀려오는 감정에 얻어맞아 피떡이 될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안드로이드는. 

"사건을 재구성하여 줄글 형태로 만들기를 원하십니까?"

노인은 잘 만들어진 집 안에 갇힌 신세였다.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기계는 다시 기록을 재생했다. 피할 공간은 화장실 뿐이었다. 유일하게 폐쇄된 구역. 노인은 욕조에 물을 틀었다. 프라이버시를 위해 안드로이드는 화장실 안까지는 들어오지 못했다. 거주자가 바닥에 쓰러진다 하더라도. 떨리는 손끝으로 옷가지를 벗어내리고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물이 끝까지 차오르지 못한 욕조 안에 주저 앉았다. 닫힌 문 밖에서 안드로이드의 소음이 들려왔다.

"루카와 카에데, 1974년 1월 1일 도쿄 태생. 가족은 양친, 누나 두 명, 배우자 한 명입니다. 농구를 시작한 시기는 유치원생 시절입니다. 소학교 2학년에 처음으로 참여한 미니바스에서 농구선수로서의 재능이 부각됐습니다. 중학시절에는 팀의 주장이었습니다. 중학 시절 혼자 50점 이상을 득점한 경기가 유명합니다. 온라인에서 해당 경기의 320p화질 영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쇼호쿠 고교 농구부의 공동 주장이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고교 농구 신인왕 수상,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폭발적인 활약으로 윈터컵에서 준결승전에 진출,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의 인터하이에서 전국 MVP를 수상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을 마친 뒤 미국의 NCAA 디비전 3부 리그로 유학, 1년이 되지 않는 기간 내 디비전 2부 리그로 진출했습니다. 대학 3년, 디비전 1부에 입성을 마쳤으나-"

노인은 손으로 귀를 막았다.




오전 7시. 정적을 깨고 요란한 알림벨이 울렸다.

노인은 벌떡 일어나 사지를 쭉 뻗었다. 머리맡의 시계를 껐다. 충전대 위에 놓였던 안드로이드의 얼굴 부근에서 초록불이 들어왔다. 기계는 사용자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기민하게 캐치한다. 안드로이드가 노인의 이부자리 옆으로 걸어왔다. 뒤뚱대면서.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늘의 날짜는 2060년 4월 1일입니다. 4월 1일은 전세계 문화권의 만우절이며, 당신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조금 꼬여버린 노인의 심사. 만우절을 운운하는 안드로이드의 음절이 "처음부터 니 인생은 다 거짓말이란다"처럼 해석됐다.

"만우절이라고? 살아있는게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네."

노구를 일으키자 안드로이드의 몸뚱이에서 작은 막대기가 튀어나왔다. 곧 안드로이드가 탁탁대며 이불의 먼지를 털기 시작했다.

생일은 그렇게 즐거운 날이 아니었다. 적어도 팔십년이 넘게 살아온 노인의 인생에서는. 양친은 어린 시절 사망했다. 집에서 생일 축하 받기는 요원했다. 날짜는 하필이면 방학의 마지막날이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이 그의 생일을 축하하려 모였다가도 다음날의 개학을 걱정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생일을 축하해 주는 이가 많아졌다. 친구, 연인, 같은 팀원, 매니저, 지도 학생, 옆집 사람, 자주 방문하는 가게 주인. 그랬던 지인들도 하나 둘씩 떠났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생일 축하를 받지 못한지는 벌써 삼 년도 넘었다.

성인이 되고 오래도록 한 명이었던 가족은 무뚝뚝한 성격의 소유자. 그에게서 다정한 말이나 넘쳐나는 선물은 받아본 적 없다. 단지 곁에 있어줬다. 손을 잡거나 어깨를 끌어안고서. 노인이 바랐던 유일한 선물이었기에 상관 없었다. 절친한 친구가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했을 때에도 그는 노인의 옆자리를 지켜줬다. 어깨를 눈물로 적시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그게 그 남자가 보여주는 사랑의 형태였다.

지금은 곁에 아무도 없다. 수다를 떨 친구도, 온기를 나눠줄 반려자도.

안방을 빠져나가는 노인의 등 뒤에 안드로이드가 외쳤다.

"우울감 수치가 높아보입니다. 정신병리의학과 전문의와의 예약을 주선할 수 있습니다."

노인은 세면대로 향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한다. 세수 후에는 아침 식사를 한다. 아침 식사 후에는 양치를 한다. 이후, 옷을 갈아입고 사회활동을 하러 바깥으로 나선다. 처음 입주할 때 정해놓은 루틴. 그 루틴에서 벗어나는 순간, 안드로이드는 경고음을 울린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고 판단한다. 가령 통증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던가 하는 가상의 상황을 떠올리고 걱정한다. 노인이 말했다.

"주변인들이 다 세상을 떠나고 혼자 살아남았는데 축하를 받아야 되나?"

"대화 주제 중에서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기피사항입니다. 당신이 즐거워지는 주제는 농구, 친구, 음식입니다. 어제는 가족, 라이벌, 첫키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손이 닫힌 냉장고 문을 향해 내뻗어졌다. 물병을 꺼내며 노인은 누군가를 때리듯이 내뱉었다.

"그럼 라이벌에 대한 이야기나 꺼내보던지."

안드로이드가 떠벌대기 시작했다.

"라이벌은 대립 또는 선의의 경쟁을 하는 사이를 일컫습니다. 자신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경쟁자를 뜻합니다. 예로부터 각 분야의 유명인에게는 대체로 라이벌이 존재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며 한 명으로 존재하는 것보다는 서로를 빛내고 돋굴 수 있는 타인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한 시대에 나올 수 있는 불세출의 천재는 한 명이고, 이는 라이벌 관계에서도 다른 한쪽이 조금 더 뒤처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철학에서 제일 유명한 라이벌 관계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당신의 과거 직업이자 당신이 좋아하는 농구계에서 제일 유명한 라이벌 관계는 마이클 조던과 코비 브라이언트입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라이벌은 루카와 카에데입니다. '종생의 라이벌'이라고 언론에서 붙여준 별명이 당신과 루카와 카에데의 관계를 정의합니다. 당신은 은퇴 이후 루카와 카에데와 결혼식을 올렸으며 동반자 관계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언론에서는 이후 당신의 라이벌 관계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종생의 라이벌, 루카와 카에데.

처음 언론은 둘을 콤비로 정의했다: 함께할 때 가장 폭발적인 시너지를 발휘하는 관계라고. 둘이 다른 팀에서 뛰기 시작했을 때부터 라이벌이라는 단어로 정의됐다.

라이벌 관계에서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패배했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이길 수가 없는 상대였다. 농구는 루카와가 먼저 시작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하나미치는 1대 1로 루카와를 꺾을 수가 없었다. 무서운 속도로 성장한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최대 속도로 달리는 하나미치의 앞에는 항상 루카와의 등이 보였다. 놓치기 싫었다. 지는 것도 싫었다. 죽어라고 따라갔다. 

놓여있는 목표를 보고 따라가는 거니까 쉬울거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누군가의 뒤를 좇는건 쉽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미국 생활이 제일 가는 고통이었다. 루카와 역시 미국에서 힘들게 버텨냈고, 사쿠라기는 대학 마지막 해에 1년을 견디고 다시 국내로 들어와야 했다. 입국하던 날, 자신이 얼마나 가련하게 느껴졌는지 사쿠라기는 똑똑히 기억했다. 

하나미치는 자신이 이겨봤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부터 마음 한구석에 패배자의 감성이 배어있었는지도. 어쩌면 진심으로 루카와를 이길 생각이 없었는지도. 그저 삶의 러닝트랙을 같이 달릴 상대방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미치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은 사이, 전부 루카와가 한 발자국씩 앞서 있었다. 먼저 그를 향해 몸을 틀었다. 먼저 손을 내밀어줬다. 먼저 어깨를 빌려줬다. 두 사람 사이에서 고백은 루카와가 먼저 했다. 첫키스도 루카와가 먼저 했다. 하나미치를 끌어당긴 사람은 루카와였다. 먼저 용기를 내어 살림을 합치자고 한 것도 루카와였다. 심지어는 반짝이는 금반지와 한 장의 서류를 내민 것도, 루카와였으니. 

안드로이드의 평탄한 기계음성이 하나미치의 어딘가를 난도질했다. 무릇 라이벌은 비슷해야 한다. 언론에서 라이벌이라는 단어로 묶여 불리는 동안, 하나미치는 항상 심장 한구석이 총부리에 겨냥된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얘를 이겨본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아."

불단을 향해 하나미치가 몸을 돌렸다. 불단 중앙에 놓인 큼직한 액자. 그 안에 박힌 흰 머리의 노인. 하나미치가 시선을 주위로 돌린다. 불단 근처의 벽가에 사진과 액자가 잔뜩 내걸렸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거머쥐던 열일곱 살의 하나미치. 대학 농구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던 열여덟 살의 하나미치. 스물두 살, 집 우편함에 날아온 한통의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들고 무작정 날아갔던 미국에서의 하나미치. 스물 네 살, 실업리그 신인상을 수상한 사쿠라기 하나미치. 서른, 막 출범한 프로리그에 입성한 하나미치. 그리고 루카와 카에데. 농구공을 들고 있는 열한 살의 루카와 카에데. 중학 리그에서 상을 탔던 열네 살의 루카와 카에데. 미국 대학 리그에서 날아다니던 스무살의 루카와 카에데. 스물 여섯 살, 아시아 최초로 NBA에 입성했던 루카와 카에데. 스물 여덟 살, 부상으로 한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짚고 선 루카와 카에데. 서른, 풍선이 화려하게 달라붙은 바 안에서 친구들과 함께 파티를 즐기던 루카와와 하나미치. 어깨동무를 한 루카와와 하나미치. 손에 커피잔을 들고 카페에 앉아있는 루카와와 하나미치. 마흔, 지도자로서의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 루카와와 하나미치. 쉰, 단풍잎이 만발한 가을산의 입구에서 손을 잡고 선 루카와와 하나미치.

시선을 돌려봤다. 불단 옆에 작은 코발트색 접시 하나. 반짝이는 원형의 물체 한 쌍이 올려져 있었다. 같은 크기, 같은 모양. 그러나 노화로 살이 빠지고 피부에 주름이 잡히자, 손가락에 맞지 않게 커져버린 링. 이제 하나미치는 그 반지를 끼지 못한다. 

불단 앞으로 다가갔다. 수많은 과거의 루카와 카에데가 하나미치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어느 사진이건 루카와는 대체로 무표정했다. 그러나 관찰력이 좋다면, 나이를 조금씩 먹을수록 늘어가는 잔주름과 함께 풀어지는 루카와의 감정을 알게 된다. 

"나, 네 삶에서 괜찮은 라이벌이었냐? 이 몸이 천재인 것과 별개로, 라이벌로서는 어땠냐? 좀 말해봐라, 여우야."

손을 뻗었다. 어떤 사진이든 상관 없었다. 과거의 루카와 카에데의 기록 하나를 붙잡은 채, 하나미치는 조용하게 속삭였다.

"카에데. 그래도 난 행복했다."

종생의 라이벌, 루카와 카에데. 하나미치는 여전히 라이벌 관계에서만큼은 자신이 패배했다고 느낀다. 루카와를 향해 뻗은 손가락 끝에 잘게 경련이 일었다. 창문 너머로 아침 햇살의 광휘가 쏟아졌다. 분홍으로 물든 머리칼과 이마를 태양이 적셨다. 안드로이드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높은 확률의 눈물. 안드로이드의 머리에 불이 들어왔다. 기계음이 텅 빈 집안을 채운다. 

"당신이 루카와 카에데를 생각하며 눈물 흘릴 확률이 95.8퍼센트에서 96퍼센트로 상승하였습니다."

나이가 들면 현명해진다고들 한다. 여든 넘게 살아온 인생. 그러나 먼저 간 사람이 승리한 것인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승리한 것인지, 하나미치는 알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 평생의 라이벌 관계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상상력이 빈곤한 타입이라 그런지 평생이란 단어를 보는 순간 이런 내용 말곤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전력은 칠팔년전 모 장르에서 해보고 진짜 오랫만에 참여해봐서 어색하네요. 단문이고 오탈자도...많을 텐데 너그러이 읽어주십사.

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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