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서문백흑설오(西門白黑雪獒)



 저 멀리서 기차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 덜컹거리는 소리는 점점 커져 마치 소음 같아졌다가 이곳을 지나치는지 금세 멀어지고 만다.

 다시금 고요해진 공기 위로 누군가가 발을 내딛는다.

 검은색 운동화는 흙과 자갈을 밟으며 터벅터벅 걸어와 돌로 만들어진 작은 탑 앞에 멈춰 섰다.

 주변에는 꽃과 사진, 편지, 인형들이 가득하다 못해 쌓일 대로 쌓여있었지만, 딱히 지저분해 보이지는 않았다.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으니.

 잘 보이도록 푸른색의 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내려놓고는 잠시간 그 앞에 서서 상대를 추모한다.

 충분히 오랜 시간이 지나 발걸음을 때려다가, 멈칫하고는 다시 탑 앞에 선다.

 조금 더 추모의 시간을 갖고는, 간신히 몸을 돌려 넓게 펼쳐진 공터를 바라봤다.

 "분명 이곳이라 했는데..."

 약간의 잡초가 돋아나 있긴 해도 그저 흙과 자갈, 작은 파편들이 대부분이다. 

 무릎을 꿇고, 지면 위에 손가락을 올려 몇 번 꾹꾹 눌려본다.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사라졌어."

 미련이 남은 듯 몇 번 더 지면을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인다.

 "수정이 녹았을 때, 함께 녹은 건가. 너무 늦어버렸네."

 한숨을 푹 쉬고는 팔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위로 향했다. 손바닥에는 초록색의 육각형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한 번 주먹을 쥐었다가 펴자 어느새 문양은 사라지고 작은 거북이가 한 마리 생겨 있었다.

 그 작은 거북이의 등껍질은 특이하게도 두 겹에, 6가지의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모형 같아 보였지만,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 거북이는 자신을 올려두고 있는 손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아야. 날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건 잘 알지만 일은 해야지. 궁으로 돌아가야 하거든."

 꽤 따끔한지 더 이상 손가락을 물지 못하도록 손을 쫙 펴면서 툴툴거린 후,

 등껍질의 여러 색 중 파란색 부분 위에 손을 올리고는 돌탑으로 고개를 돌린다.

 "진즉에 찾아뵀어야 했는데...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청라님."

 그 말과 함께, 설오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한 달 뒤.

 2187년 5월 봄. 71대 청룡 사망 14개월 후.

 현재.



 청룡궁과 버스로 여섯 정류장 정도 떨어져 있는 지역의 한 한옥 카페에는 여느 때처럼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흔한 컨셉과 디자인의 카페였지만, 넓고 쾌적한 공간과 훌륭한 음료의 맛이 손님이 끊이지 않게 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은 수호신 소환 허가 구역이라는 점이었다.

 그 덕분에 자리마다 칸막이를 설치해 구역이 나뉘어 있고, 수호신을 소환해둘 수 있도록 방석이나 화분도 제공되어 있었다.

 창가 쪽 좌석 3번 구역에서 자신의 하얀 개를 소환해 놓은 채로, 잔뜩 집중한 설오는 안경을 쓰고 수첩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그때, 설오의 맞은 편에 누군가가 앉으며 인사한다.

 "안녕."

 설오가 고개를 들자, 볼이 조금 부어있고 입가에 상처가 있는 묘가 미소짓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본 설오가 충격받아 안경을 벗으며 뭐라 말하려는데,

 "너... 또..."

 묘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설오의 말을 끊고 묻는다.

 "어제 흑설오가 전화를 받더니, 백설오가 앉아있네?"

 그 질문에 살짝 얼굴을 찌푸린 설오가 수첩을 턱 덮어버렸다.

 "다행히 네가 온다는 건 기록 해 놨더라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너 또 맞았어?"

 "여기 카페 좋다. 내 고양이도 소환해도 돼?"

 "소환해도 돼. 근데 너 류호한테 맞았냐고."

 설오가 정색한 채로 단호하게 물었지만, 묘는 그저 손을 한 번 휘저어 자신의 고양이를 소환한다. 고양이가 설오의 개 등 위로 올라가 털썩 앉아버리는 걸 보면서 묘가 웃음을 터뜨렸다.

 "은 묘."

 하지만 설오는 여전히 굳은 표정이다. 묘가 대답할 때까진 절대 굴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불편한 주제인지, 대답하기 싫은 듯 한참을 머뭇거리던 묘가 결국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봐야겠지."

 "또 터무니없는 이유지? 묘, 항상 똑같이 말하지만, 우리는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어."

 "항상 똑같이 대답한다만, 필요 없어."

 묘가 피식 웃었다. 설오는 그런 묘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본다.

 전혀 연결점이 없을 것 같았지만, 둘은 사실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묘가 백호보다 빨리 고등학교를 졸업해 정식 신관 자격증을 따야 한다는 이유로 일찍 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이었다.

 오래 알고 지낸 만큼 서로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설오가 묻는다.

 "최근에는 백호가 백호궁에서 지내서 류호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면서?"

 "글쎄, 요즘의 백호는 정신 상태가 말이 아니라서... 그래서 내가 맞은 걸 보고는 강제 휴가를 내린 거야. '너를 지켜줄 경황이 없으니, 피해라도 있으라'는 의미겠지."

 "묘. 아직도 백호가 원망스러워?"

 "조금은."

 씁쓸함이 담긴 대답 다음엔 잠깐의 정적. 묘는 곧장 말을 잇는다.

 ".... 하지만 절규하면서 우는 모습을 보니까 불쌍하기도 하더라. 그렇게 자주 향나무를 목격했음에도 최근까지 절대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자신을 속이고 있었으니까."

 "재현이 범인임을 알고 난 후로 아직도 울고 있는 거야?"

 직원이 가져온 곡물 음료를 받으며 묘가 설오의 질문에 답했다. 직원이 들을까 걱정되는지 조금 작아진 목소리다.

 "요즘엔 가끔씩. 정확히는 재현이 아니라 류호 때문이겠지. 그래, 전화로 듣긴 했다만... 자세히 설명해봐. 호찬에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라고?"


 설오가 기차 사건과 호찬의 수정에 대해 모두 설명하자, 묘가 뒷목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여전히 청라님의 생각은 잘 모르겠네."

 설오도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그래. 아니면 우리가 너무 늦은 거 아닐까. 얼음이 녹기 전에 알았다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몰라."

 "글쎄. 기차 사건의 범인을 일찍 밝혀냈다 해도 잘해봐야 재현만 처벌하는 거고, 류호는 언제든지 빠져나갈 수 있어."

 "재현이라도 처벌받게 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내 손으로 직접 처형하고 싶으니까."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려는 듯 이를 아득거리며 설오가 말했지만, 묘는 그저 고개를 젓는다.

 "증거가 없잖아. 청라님께서 얼려놓은 대지도 모두 녹아있었다면서? 지면에 쇠가 깃들어 있는 거? 그건 증거가 될 수 없어. 백호가 대지 그 자체인데 쇠가 깃들어 있는 게 이상할 거 없다고 우길 거야."

 "호찬이가 직접 겪은 일이잖아."

 "하지만 아직 이 세계는 류호의 말을 더 믿지. 류호가 호찬이의 어깨에 손 한 번 올리고 '제가 지나간 시간을 봤더니 그런 기억은 없더랍니다'하면 모두가 믿을걸. 청룡이 거짓말했고, 그걸 재현에게 뒤집어씌우는 거라고. 아님 백호가 꿈속에서 봤다고 할까? 그것만큼 가장 신빙성 없는 말도 없을뿐더러, 슬프지만 백호는 꿈으로 보는 과거의 시간을 원하는 때로 고르지도 못하지."

 더 이상 부정할 단어도 생각나지 않는지, 설오는 그저 한숨만 푹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솔직히 청룡 버겁다고 도망친 어린 청룡보다 류호의 거짓 연기가 더 먹히겠네."

 "호찬이는 어때? 정신을 잃고 나서 3일 후에 깨어났었다고?"

 이 주제가 나온 김에 묻고 싶었었는지 걱정과 궁금함이 섞인 묘의 질문에 설오는 자신의 수첩과 안경을 가방 안에 넣으며 말한다.

 "그래. 호찬이는... 아니다. 직접 봐봐. 어차피 너 훈련하러 온 거잖아."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얼른 나가자며 묘에게 고갯짓했다.




 청룡궁 훈련장.


 "안녕하세요. 청룡님."

 "네! 안녕하세요."

 묘가 고개 숙이며 하는 인사를 호찬은 꽤 밝게 받아준다. 훈련을 위해서인지 간편한 운동복을 입고서 양손으로 검을 꼭 쥔 채로 긴장해 있긴 해도 옅은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그런 호찬을 당황한 시선으로 보던 묘가,

 "청룡님. 오늘은 묘... 아니, 백호 직속 신관님도 왔으니 훈련 시간을 늘리겠습니다."

 설오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호찬은 힘차게 대답하면서 자신의 검을 더욱 꽉 잡았다.

 "네!"

 "그럼 저와 고양이 신관님이 먼저 훈련 겸 간단한 대련을 해 보일 테니, 저희의 자세와 공격, 방어, 반격하는 법을 잘 구분하며 봐두십시오."

 "네!!"

 여전히 웃으면서 호찬이 대답하기에 묘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설오를 따라 훈련장 가운데로 걸어왔다.



 자신의 검을 꺼내며 대련을 준비하는 설오를 보며, 묘가 속삭이듯 묻는다.

 "억지로.. 밝은 척을 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괜찮아진 거야?"

 "반은 억지고, 반은 괜찮은 거. 흑조인과 백야인의 혼혈이라 그런지 너무 감정이 유약해. 쉽게 웃고, 울고 화내고 좌절하고.. 그거에 비해 타인을 너무 신경 쓰는 건 또 혼혈이 아닌 거 같단 말이지. 흑조든 백야든 자기중심적인 게 그들의 최고이자 최악의 특성인데. 하여튼 그거 때문인지 우리가 걱정할까봐 억지로 웃으면서도, 감정 변화가 빨라서 괜찮아하기도 해."

 "좀 알아듣기 쉽게 줄여봐."

 "조울증 같은 거라 생각해."

 "아, 그래."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라도 배우겠다고 강후의 검술 훈련에 따라오는 것 같은데, 사실 저 '청룡의 검'은 장식용이야. 아직 한 번도 못 뽑아봤어. 준비 운동만 시켜도 저질 체력이라 헉헉거리거든."

 "양친 중 한 분이 축구 선수라 하지 않았나?"

 묘가 질문을 하며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자, 설오가 미간을 찌푸리며 검을 들고 자세를 취했다.

 "검 좀 들어라. 훈련 시작 좀 하게. 그리고 호찬이는 입양아라니까. 체육이 제일 싫고, 자긴 모형 제작자가 꿈이었대."

 설오의 말에 자신의 단검 한 쌍을 꺼내며 묘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흑조나 백야인은 예술 재능을 갖고 태어나는 경우가 많으니 놀라울 건 없고. 좋아, 시작해."

 "그 말만 기다렸어."

 히죽이는 웃음과 함께, 설오가 검을 들고 돌진한다. 묘도 양손으로 단검을 강하게 잡고는 자세를 취했다.


 몇 번이나 검이 부딪히며, 설오는 빠르게 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오늘의 설오는 검술이 꽤 일정하고 단순했다. 강후와 호찬에게 보여주고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문인지 묘도 방어하고, 반격하는 게 어렵지 않아 보였다.

 다만, 반복되는 패턴 때문에 조금 지루해진 설오가 일부러 묘의 사거리 안에 들어오면서 묻는다.

 "우리 또 모일 건데, 이번에는 올 거야?"

 "..... 이번에는 못 가. 류호의 감시가 더 심해졌거든."

 자신의 단검이 닿는 곳까지 들어온 설오의 행동에 도리어 놀라 뒷걸음질치면서, 묘가 답한다. 검을 휘두르며 편히 대답하는 설오에 비해 조금 벅찬 목소리다.

 "나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이미 트집잡힐 행동 하는 거 아냐?"

 "류호는 지나간 시간을 보는 것밖에 못 해. 듣거나, 간섭하지는 못하지. 그러니 괜찮아. 그저 검술 훈련하는 거로 보일 테니."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을 막아내며 묘가 잠시 멈칫했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리고 류호의 능력이 약해졌어. 예전에는 몇 달 전의 '지나간 시간'도 읽는 것 같았는데, 요즘에는 하루나 이틀 정도의 지나간 시간만 읽는 것 같아. 어제 내 시간을 읽는 모습을 보면서 거의 확신했어."

 "그래도 조심해라. 항상 이유 없이 패악질을 부리니까."

 "그래도 너까지는 허용하는 것 같더라. 짐승의 유일한 짐승 친구."

 그 말에 설오는 살짝 몸을 뒤로 젖히며 자세를 바로잡았지만, 표정은 상당히 일그러져 있다. 너무 화가 나 헛웃음까지 나올 지경이다.

 "이야, 그 표현 욕 나오게 모욕적이네. 우리 둘 다 직속 신관이다?"

 "동시에 둘 다 흔해빠진 동물 수호신이지. 류호는 적루랑 사홍이 정도만 인정하는 것 같던데. 걔네는 희귀한 동물 수호신이라서...."

 "참으로 편견과 차별의 아이콘을 벗어나지 못하는군."

 짜증을 내며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설오 때문에 조금 버거워진 묘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설오의 패턴은 빠르고 불규칙적으로 바뀌었기에, 단검의 사거리 안에 있음에도 묘가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결국 깡 하는 소리와 함께 설오가 내리친 검에 단검을 놓쳐버리며 묘가 넘어져 버렸다.

 묘가 한숨을 푹 쉬면서 몸을 일으키려 하자, 설오가 손을 내밀었다.

 설오를 이기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하며, 묘가 그 손을 잡고 일어나며 묻는다.

 "청라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후회 많이 했어?"

 설오가 멈칫했다. 강하게 잡고 있던 손도 힘이 슬슬 빠지기 시작한다.

 ".... 아직도 하고 있어. 그날 나도 있었어야 했다고. 청라님께서 백호시로 출발하실 때의 느꼈던 불안한 감을 따랐어야 했는데."

 "하지만..."

 "청라님이 괜찮다 하셨지. 자신에게 직속 신관이 둘이나 붙어서 보좌할 필요가 없다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 한 명은 제대로 일하고 있자고."

 설오는 묘에게 등을 보이며 몸을 돌렸다. 그 때문인지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슬픔과 괴로움이 묻어나온다. 

 "그렇다고 세계의 평화를 지킨 것 같냐 묻는다면,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가속화되는 것 같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묘도 설오가 몸을 돌린 방향을 바라봤다.

 강후도 호찬도 긴장한 표정으로 검만 꽉 잡고 있다. 그러다 설오와 묘가 자신들을 향해 몸을 돌리자 대련이 끝났음을 안 호찬은 박수를 쳤지만 강후는 사색이 된다.

 다음 타자가 자신임을 깨달았기에.

 그런 강후를 향해 여기로 오라는 의미로 설오가 손짓하자, 묘가 자신의 단검을 검집에 넣으며 말했다.

 "아, 맞다. KIPE랑 다음 주에 만난다면서."

 "응. 현무궁에서 보기로 했어."

 "참고로 백호는 못 가."

 강후가 호찬에게 인사하고는 울상을 짓고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걸 보며 묘가 말하자,

 "알아. 호찬이도 못 가. 나만 가기로 했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설오도 말한다.

 그 말에, 서글픈 눈빛을 보내며 묘가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우리 둘 다 갈 길이 먼 사방신을 모시느라 고생이 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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