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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저 귀찮은 두드림 정도였다. 작게 짜증이 일었지만 모처럼의 단잠을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순영이 꿈쩍 않고 버티자 마침내 괴롭힘이 멈췄고, 그는 안심하고 수마에 몸을 맡겼다.

헬기에 실려 멕시코 국경까지 끌려갔다 오늘 새벽에야 귀환했다. 나흘 밤낮을 쫄쫄 굶으며 흙구덩이를 뒹굴고 밤을 샜다. 집까지 돌아갈 엄두도 못 내고 사무실 낡은 소파에 그대로 쓰러져 잠든 게 몇시간 전이다.

막 잠에 빠져들려던 순간 깡! 소리와 함께 끔찍한 냉기와 통증이 매복처럼 이마를 덮쳤다. 누구....대체, 어떤 새끼야!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 앉은 순영이 옆구리에 챈 총신을 더듬으며 눈을 부라렸다.

허공에 발포하기 직전에 눈앞에 나타난 음료 캔이 경망스레 흔들렸다. 각성 성분이 듬뿍 들어간 고카페인 음료는 모든 팀원의 온고잉 애용템이다. 평소라면 반색할 그것을 아귀처럼 빼앗은 순영이 그대로 벽에 집어 던졌다. 퍽 터진 캔이 벽과 바닥을 엉망으로 적셨다. 나다 새끼야. 눈 하나 깜짝 않은 지훈이 구두코 끝에 튄 음료 두어 방울을 문질러 닦았다.

"큰 건 들어왔는데 쳐 자느라 받기 싫음 다른애 주고."
"얼마짜린데?"

금액 적으면 가만 안 두겠다는 공갈을 섞어 묻자 말없이 손끝 의뢰문서를 팔랑팔랑 흔든다. 심드렁하니 훑던 순영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잽싸게 종이를 낚아챈다. 이런 껀수를 놔두고 날 거기까지 보내? 그러기 있어? 잠기운이 싹 달아난 순영이 꽥 소리를 지르더니 빼앗길 새라 신줏단지처럼 종이를 양손으로 꼭 쥐고 한 줄 한 줄 읽기 시작한다.

그들이 몸담은 S.VT는 대외적으로는 소수정예 보안업체를 표방하고 있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원하는 대로. 고리타분한 사훈을 보며 감동했던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지켜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돈만 주면 어떤 놈이든 요람에서 무덤까지 빠르고, 신속하게  보내(?)드리는게 이 회사의 주 업무란 사실을. 주요고객은 명예가 돈보다 중요한 고위 관직자나 돈과 모럴이 썩어나는 부자들이었다.

몇 없는 동양계 현장 요원인 순영은 출신이나 지랄 맞은 성질머리로도 유명했지만 자다가도 돈이라면 벌떡 일어나는 수전노로 가장 악명을 떨쳤다. 뉴욕에 내 집 마련 할 수 있다 권쑨영!! 아자아자 개천의 용!! 취했다 하면 어김없이 고래고래 외치는 한국어 술주정은 팀 내 모든 국적의 사람들이 알 정도로 유명했다. 눈을 부릅뜨고 읽던 순영이 의뢰 내용에 어? 박 터지는 소리를 낸다.

"애 하나 꼬여내는데 왜 이렇게 많이 줘"
"너 제대로 읽기는 했어?"
"봤지....중요한 것만."

선수금이랑 수당. 업무와 타겟. 명쾌한 대답에 지훈이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아싸!!!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지른 순영이 이거 내꺼다! 아무한테도 주지 마! 으름장을 놓으며 수북한 서류철을 뒤적이기 시작한다. 무언가 말하려던 지훈의 입이 달싹이다 다물린다. 뭐.... 알아서 하겠지. 자료는 다 줬으니까.

상쾌한 얼굴로 기지개를 켠 순영이 콧노래를 부르며 이중으로 된 봉투를 큰 봉투에서 꺼냈다. 고객이 고객들이다 보니 비밀 유지를 위해 상세한 작전의 내용이나 타겟의 프로필은 의뢰를 맡기 전까지는 철저히 비밀로 한다. 봉투 앞에 붙은 보안 어쩌구 유지서와 본인이 임무를 담당한다는 계약서에 사인을 휘갈긴 순영이 지훈에게 날리듯 종이들을 건네고 이중 봉투를 다시 뜯었다.

한 거물 대부호가 바캉스 와중에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그는 유일한 직계혈육인 손주가 대학을 졸업한 이후 유언장을 공개하라는 마지막 말만 남긴 채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주변 친척들의 입막음으로 손주 도련님은 아직 사고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상태다. 그의 졸업은 고작 몇 주 남았고 평소 손주를 애지중지하던 대부호의 태도대로라면 모든 유산은 그에게 백 퍼센트 상속될 것이 뻔하다.

의뢰인들은 대부호의 먼 친척들이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영감을 걱정하는 척 하면서 뒷구멍으로는 한명씩, 두명씩 몰래몰래 의뢰를 넣은 모양이다. 엮어놓자 도합 열 명이 넘었다. 사람은 달라도 내용은 하나같이 동일했다. 도련님의 졸업 전에 부호의 유언장을 빼돌릴 것. 빼돌리는 것에 실패하면 도련님이 유산상속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도록 만들 것. 돌려 말했지만 졸업을 못 하도록 만들라는 소리다. 다리가 부러지던 다른 곳이 고장이 나던지 혹은 졸업은커녕 제 할아버지를 앞지른 불효의 유령이 되든 간에.

의뢰 명은 Golden rain, 타겟의 이름은 Danae.
허세로운 그의 고객들은 지저분한 의뢰 중에도 고전 인용으로 고상을 떨었다.

외손자의 손에 죽임을 당하리라는 예언을 받은 아버지 왕에 의해 청동으로 만든 탑에 갇힌 공주 다나에. 기어이 황금비로 변해 탑에 스며들어 공주를 꼬인 망나니 신의 이야기. 결국 왕은 그가 할아버지인지 몰랐던 손주의 손에 죽었다. 그가 공주를 가두지 않았다면 황금비가 내렸을까? 손주가 그를 몰라보고 죽이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피도 안 마른 어린애 유산 떨어먹겠단 개소리를 정성스럽게도 한다."

불과 반년 전 낡아빠진 월셋집의 침수를 겪은 후, 비라면 치가 떨리는 순영이 혀를 찼다.

황금으로 만든 비라니 단어 자체는 유혹적이긴 했다. 의뢰의 성공이 비처럼 쏟아지는 부를 가져다주기를. 순영은 서류철이 애인이라도 되는듯 쪽 입을 맞추고 보스턴백에 소중하게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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