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에는 왕자님이 있다.




"교내에 깊숙이 자리 잡은 차별을 뿌리 뽑겠다는 공약을 지키기 위하여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에게만 제공되던 기숙사, 도서관 및 여러 편의 시설을 학교 모든 학생들에게 공평히 개방하겠습니다. 알파, 베타, 오메가가 차별 없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는 학생회가 되겠습니다. 이상으로 32대 학생회장 정재현이었습니다."

지성과,





(이게 학생회장 선거 포스터였음 안 뽑히는 게 이상)

미모를 겸비한...

이 시대의 엄친아. 우성 알파 중의 우성 알파. 정재현.





1학기 첫 학생회 공식 발표가 끝나고 학생회장이 강단에서 내려왔다. 처음엔 조용히 학생회장을 바라보기만 하던 아이들이 하나둘 그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학생회장, 그러니까 정재현은 자기 반이 있는 줄로 돌아가려다 길이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그게 화날 법도 한데 얘는...



"재현 선배.. 너무 잘생겼어요. 연예인같아...."

"하하. 감사합니다."

귀찮은 기색 없이 오히려 웃음으로 아이들에게 화답했다. 꺄아아-. 환호성이 그 뒤를 따랐다.

와.. 저 정도는 되어야 왕자님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거구나.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후광이라는 단어가 실존하는 것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정재현을 우러러봤다. 인간이냐.









"우성 알파가 다 정재현 같으면 인생 살만하겠다."

"내말이. 그런데 이번에 학교 시설 모든 학생들한테 개방한다고 해놓고 베타는 수영장이랑 체육관 못 이용하게 해놨더라.. 역시 베타는 아직인가.."

"우리는 기숙사도 제일 구린 데잖아. 몇 년 동안 안 쓰던 건물이래. 그래도 기숙사 들어가는 게 어딘가 싶긴 하지만.. 매달 교통비 나가는 걸로 집에서 얼마나 눈치 보였다고."

"그니까. 여기 학비도 개비싼데."

점심시간, 베타 친구들과 오늘 있었던 학생회 발표를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는 입에 밥을 한가득 넣고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다. 이 고등학교에 입학만 하면 이번 생은 편히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공부만 미친 듯이 팠는데 들어오니 더 높은 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라 함은 베타를 칭하는 말이다. 

알파랑 오메가는 딱히 걱정할게 있나. 알파는 사회적 지위를 가졌고 오메가는 인맥이 빵빵하잖아. 베타는... 안 그래도 요즘 인구수가 급격히 줄어드는데 사회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저 귀찮은 짐 덩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 왜냐하면 말이다.


그냥 별로... 쓸모 없으니까.



지구상에 존재하는 돈의 3분의 2는 우성 알파에게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역사 시간에 졸아서(알파의 대단한 업적이 반 이상, 오메가의 인권 운동이 나머지를 차지하는 책을 베타인 내가 왜 공부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대놓고 잤음) 그들이 어떻게 이런 영향력을 가지게 된 건지 자세히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냥 아주 옛날부터 우성 알파들은 먹이사슬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집단이었다. 모든 집단 중 가장 좋은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명석한 두뇌와 수려한 외모, 화려한 언변을 자랑한다고 들었다. 실제로 친해진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으나, 인터넷에 우성 알파를 치면 그렇게 나오더라.

아무튼 이 우성 알파들이 독식하는 세상에서 우성 오메가들이 들고 일어난 거다.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세대 때는 오메가들이 알파에게 멸시당하고 핍박받던 존재라던데 지금은 그런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요즘 그러면 그냥 바로 잡혀가지. 우성 오메가들 권력이 얼마나 세졌는데.

2차 성징에서 우성 알파로 발현될 확률이 우성 오메가에게 달렸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고 세상은 뒤집혔다. 그게 한.. 70여 년 전이었던가. 한창 우성 오메가들의 인권 운동이 활발하던 때 발표된 연구라 정계며 연예계며 난리도 아니었다고 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세상의 질서가 차즘 정리되었다.

그 질서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는 우성알파(존나개쎔) > 그 밑에 우성오메가(개쎔) > 그다음은 열성 알파(쎔)와 열성 오메가(쎔).

그리고 저 지구 땅끝 아래쯤 베타가 있겠지.

이렇게 세상은 알파와 오메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알파와 오메가가 아니면 쓸모없는 존재나 다름없고 실제로도 베타는 꽤나 쓸모없다.(좌절)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베타가 오래 잠들기로 기네스에 오른 세르게이 슈미트(오하이오주, 94세) 씨니 말이다. 기록이 1364시간 24분 32초라고 들었다. 그 정도면 거의 잠시 죽었다 깨어났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나?

아무튼 참... 쓸모없다. 쓸모없어.





"여주야. 너도 기숙사 등록할 거지?"

"해야지. 난 시내버스도 아니고 시외버스 타고 다니니까 교통비 매달 장난 아니었거든. 다음달 부터는 엄마가 급식도 점심만 먹으라고 했었는데.... 진짜 다행이다."

"우리 밥 먹고 기숙사 신청하러 가자."

"기숙사 신청해야 돼?"

"어. 베타만 학생회에 와서 직접 신청하래."

"헐...."

존나 차별.

아까 차별 없는 학교 어쩌고저쩌고 장황한 내용으로 연설하던 학생회장이 급격히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따지고 보면 걔도 잘못한 게 없지. 우성 알파가 이 베타들의 삶을 얼마나 이해하겠느냔 말이다. 그리고 전교에 베타가 고작 5명뿐이라 직접 찾아가서 신청하는 게 딱히 번거로울 것도 없고...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아무튼 베타로 살아가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자격지심을 터득하게 되는 거 같다.







밥을 다 먹고 학생회실로 가는 와중에 친구 두 명이 선생님에게 붙잡혔다. 화장실에서 막 나온 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애들을 찾았는데 도착한 문자에 '여주야. 우리 선생님이 심부름 시켰어. 너 먼저 가ㅠㅠ'라고 적혀있었다.

학생회실 한 번도 가본적 없는데... 떨리는 마음으로 다른 건물에 있는 학생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우성 알파랑 우성 오메가들이 수업 듣는 교실이 있는 건물인데 최근에 지어져서 다른 건물이랑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다. 엘리베이터까지 있으니까 말 다했지. 난 바로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학생도 이용할 수 있긴 한데 베타니까 괜히 별것도 아닌 거에 눈치 보게 되는 거 같다. 아... 베타가 뭐길래...



"계세요...?"

건물 맨 꼭대기에 위치한 학생회실에 도착했다. 7층을 걸어 올라오니까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손등으로 땀을 닦으며 다시 한 번 더 노크했는데 아무도 대답이 없다. 내가 잘못 왔나?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었나? 기숙사 꼭 신청해야 하는데... 스스로의 정보를 의심하는데 안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일단 마지막으로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안에서 응답이 없으면 가는 게 정상인데 나에게 기숙사라는 건 내 저녁과 교통비, 그러니까 나의 학창시절이 걸린 아주 중요한 문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급해졌다.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는...



"걔네는 정도를 몰라. 역겨운 새끼들."

창밖을 바라보며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기숙사 쓰게 해주니까 이제는 통학버스도 이용하게 해달래. 하나를 해주면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하나를 더 바래. 이런데 어떻게 잘해주겠어? 구질구질 한 것도 정도껏 해야지."

학생회장이 있었다.


들리는 말에 귀를 의심했다. 저럴 애가 아닌데.. 쌍둥이인가? 그 짧은 시간에 혼자 드라마 각본까지 완성했다. 그런데 나는 정재현이랑 같은 반을 해보기는커녕 말조차 섞어본 적이 없으니 저럴애가 아니라고 충격받는 게 더 이상하긴 했다. 그동안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들에게 당하던 멸시를 떠올리며 역시 우성들은 어쩔 수 없구나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당당하게 '나 기숙사 신청하러 왔다. 이 우성 알파야.'라고 외치느냐, 그냥 쫄아서 뒤돌아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내 쫄보 근성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후자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학교 계속 다니려면 이까짓 자존심 고이 접어 숨겨두는 게 더 현명한 거겠지. 씁쓸함에 입맛을 다시고 조용히 문고리를 잡는데. 아니. 정재현이.


"내년부터는 베타들 입학 못하게 막아버릴까 생각하는 중이야. 어차피 아빠 표 얻는데 베타들 딱히 필요하지도 않고... 걔들 인구 수도 얼마 없는데 투표 해 봤자 얼마나 영향력 있겠어. 그렇지?"

입학을 막아버리겠다고. 그나마 베타가 공부해서 갈 수 있는 고등학교가 여기였는데... 다른 곳은 예전에 베타 입학을 막아버려서 우리가 갈 곳이라고는 베타들만 다닐 수 있는 고등학교가 전부였다. 베타들만 다니는 고등학교라는 말의 뜻은 시설과 교육이 최상의 수준으로 구리다는 거다. 신입생들이 대학 가는 걸 애초에 포기하고 입학하니 말 다했지.



"아, 안돼! 우리 동생도 여기 들어오려고 공부 열심히 하고 있단 말이야!!"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소리 질러 버렸다. 정재현이 말을 멈춘다. 전화를 끊고 천천히 뒤돌아서




"....."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아...."

"무슨 일이야?"

정재현이 웃는다. 아까 베타를 오질나게 씹어대던 건 다른 인격이라도 되는 듯 변함없이 반듯한 학생회장의 모습으로 돌아와 넋 나간 얼굴로 서있는 날 불렀다. 여기서 잘잘못을 따지면 노크만 하고 들어와버린 나보다 이중인격처럼 다른 집단 차별이나 하는 정재현의 잘못이 더 큰데도 나는 경찰에게 잡힌 범죄자의 모습으로 정재현 앞에 서있었다. 손은 덜덜 떨리고, 시선을 방향을 잃었고 숨은 목구멍에서 막혀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 했다. 나는 죄인이오. 금방이라도 정재현 앞에서 무릎을 꿇을 기세였다.


"저.. 잘못 들어 왔.. 그냥 가보겠 습.."

"가긴 어딜 가."

"......"

"이리 와."

눈을 한번 꽉 감았다 뜨면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까. 악몽이길 바라며 감은 눈을 떴지만, 정재현은 그대로 있었다. 왠지 신난 듯한 얼굴로 날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베타?"

"ㄴ..네.."

"학년은?"

"삼..삼학.."

"누나네."

"......"

"이름."

"유...여주 입니다."

"반말 써요. 누나."

"아....."

"저 2학년이잖아요."

반말 쓰면 화낼 거 같은데?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저었다.


"아, 아닙니다."

"난 너한테 반말 쓸 건데."

"아... 네..."

"불만 없어?"

"네..."

고개를 순순히 끄덕였다. 정재현이 웃는다. 나는.. 존나 스스로를 우습게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는 거 같다. 이건 우성 알파와 베타간의 서열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임에도 난 결국 먹이사슬 가장 밑으로 내려가는 걸 선택했다. 모든 베타 분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크흡..



"장난이에요."

"....네?"

"선배한테 반말 쓰는 후배가 어딨어요."

"....."

"놀랐어요? 미안해요. 놀라게 할 의도는 아니었는데...."

아니.. 너는 존나.. 알고 있어. 내가 이미 너한테 한껏 쫄아서 벌벌 떨고 있는 걸 두 눈으로 보고 있잖아!! 넌 모르지 않아!! 다 알고 있는데 일부러 그러는 거야!! 왜냐면 너네 우성 알파들은 그런 종족이니까!!!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속마음으로 열변을 토하면 뭐하나.. 난 이미 권력 앞에 머리를 조아린 한 마리 순한 양일뿐인걸. 허리까지 숙이며 반말 쓰지 않아줘서 고맙다고 대답했다. 유여주. 그냥 죽었으면.


"기숙사 신청하러 왔어요?"

"네...."

"이름이랑 학번만 적으면 돼요."

"아... 네.... 기숙사비는..."

"베타는 기숙사비 없어요."

"아.. 네?"

놀라서 정재현을 똑바로 쳐다봤다. 여전히 친절한 웃음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왠지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 겁먹은 표정에 살짝 코웃음을 치더니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어깨를 잡는다.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베타는 대부분 가난하니까."

"......"

"학교에서 배려 차원으로."

"......"

"무료로 제공해주는 거예요."

그리고 웃는다. 어깨에 올려진 손도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아까 전화통화로 베타가 구질구질하다며 까던 거보다 지금이 더 상처였다. 버스비조차 내기 어려운 가정형편에 두손들고 환영해도 모자랄 판에 자존심 상해서 눈물까지 고였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어떠한 불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가보겠다는 의미었다. 빨개진 눈으로 뒤도는데 정재현이 날 또 붙잡는다.



"오늘 있었던 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요. 누나."

"......"

"그게 서로에게도 좋을 거 같아요. 그렇죠?"



















"여주야.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선생님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온 친구들이 하루 종일 책상에 엎드려있는 나를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흔들었다. 나는 그저 고개만 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기숙사 신청은 했어?"

끄덕끄덕.

"학생회실에서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걔들 다 우성 알파니까... 너도 모르게 차별 당했나 싶어서..."

......절레절레.

아까 있었던 일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고개를 들기 전에 눈물자국이 조금 남아있는 얼굴을 빠르게 손등으로 닦아냈다. 얼굴을 들고 친구들을 마주 봤다.


"너네 베타만 기숙사 공짜로 제공되는 거 알았어?"

"응. 완전 개이득이지. 정재현이 학생회장 되고 많이 바뀌는 거 같아."

"너네는 좋아? 우리 기숙사도 제일 구린데 가둬놓고... 그런데 공짜로 제공해주는 걸로 생색이나 내고."

"생색을 냈어...? 난 잘 모르겠던데. 그리고 아무리 정재현이라도 공짜로 기숙사 쓰는 베타들 다른 애들이랑 같은 시설 이용하게 하는 건 힘들지 않았을까."

"왜? 정재현이 뭔데."

"걔네 아빠가 이 학교 다 지원해주잖아. 이사장보다 더 파워 세다던데... 그래서 선생들도 정재현한테 설설긴대."

"헐....."

"정재현 아빠 이번에 정계 진출 하잖아. 그거 때문에 학교에 엄청 신경 쓰나 봐. 정재현도 그 이유 때문에 학생회장 나온 거래. 원래 그런 거 엄청 싫어한다더라."

듣다 보니 더 화가 난다. 아까 쫄아서 설설 기기만 하던 나 자신이 짜증 나기까지 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거기서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정재현 아냐? 그렇게 당당하게 차별 발언을 해놓고! 그것도 학생회장이!


"야. 아까 정재현이 어떻게 했는 줄 알아?"

도저히 못 참겠다. 일이 커지든 말든 친구들에게라도 이 억울함을 풀어야겠다. 분노에 찬 얼굴로 앞에 앉아 있는 친구를 불렀다. 응?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눈이 커진다. 왜 그러지. 운거 많이 티 나나?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만지는데...



"정재현이 어떻게 했는데요?"

지금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뒤통수에서 들려왔다.








난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고, 정재현은 나를 보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 하고. 주변에 있던 열성 오메가와 베타 애들도 덩달아 놀라 잠시 반이 조용해졌다가, 이내 환호성이 터졌다. 짜증나. 이중인격자. 나는 씩씩대며, 하지만 표정은 한껏 쫄아 사색이 된 채로 정재현을 쳐다봤다.


"아까 기숙사 이야기 말인데. 1동에 자리가 하나 남거든요. 관리하는 선생님이 학생회장 재량으로 빈 방 채워도 된다고 하셔서요."

얘가 왜... 이러지.


"누나가 4동에 있는 거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 같아서... 제가 옮겨드리려고 하는데. 괜찮으세요?"

우리 학교 기숙사는 1동에서 4동까지 총 네 건물이 있다. 1동은 제일 좋은 건물이고 숫자가 커질수록 건물이 구려진다.  원래 1,2동만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가 썼는데 이번에 몇 년 동안 방치해둔 3,4동도 열린 거였다. 그래도 3동은 그나마 살만하지. 4동은...  이번에 베타들이 강제로 들어가게 된 4동은 학교 안에 있는 건물 중 역대급으로 썩어빠진 건물이라 할 수 있겠다. 오래되기도 엄청 오래됐고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외관을 자랑하고 있으며 심지어 1,2,3동과 다르게 학교 구석탱이인 산 바로 앞에 위치해 밤마다 지네며 벌레며 난리도 아니라고 들었다. 이렇게 기숙사마저도 계급으로 나누어진다. 모두들 1동에 사는 우성 알파들을 우러러보고 부러워했다. 1동은 다른 애들이 아무리 들어가고 싶어도, 심지어 우성 오메가들조차 들어가지 못하는 일종에 '관리자 외 출입 금지'와 같은 구역이나 다름없었다. 거길 무슨 생각으로 날 넣으려는...



"아, 기숙사비는 당연히 없어요. 베타니까."

"......"

"나중에 저녁 먹고 학생회실 한 번 더 와주세요. 현관 출입 카드 드릴게요."

그 말을 남기고 유유히 떠나갔다.










정재현이 우리 반에 찾아온 이후 나는 부풀려진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복도에서도.


"야. 쟤가 그 베타야?"

"어. 재현이가 1동에 넣어줬대. 쟤가 왜 베타 차별하냐면서 학생회실에서 깽판을 쳤다더라."

"와.. 나는 기숙사 공짜로 쓰게 해주면 고마워서 춤도 추겠다."

"진짜 존나 뻔뻔해."




화장실에서도.

"쟤가 그 유여주야?"

"응. 야. 쳐다보지 마. 우리가 쳐다보면 열성 오메가들이 차별한다고 난리 피울지도 모르잖아."

"무서워서 살겠나. 계급 차별은 자기가 다 만들면서."




매점.

"매점 와서 빵 사 먹을 돈은 있고 기숙사비 낼 돈은 없고? 심지어 1동에 가는 주제에."

"야. 왜 그래. 듣겠어."

"듣던지 말던지. 우성 오메가들한테 밀리는 것도 서러운데 이제는 베타야? 난 왜 열성 알파로 태어나서 씨발. 나도 베타로 태어나서 우성 알파랑 엮이면 소원이 없겠네."




심지어 반에 도착해서 마저.

'유여주. 평소에 착한척하더니 뒤에서 그렇게 앙큼한 짓 하고 다닐 줄 몰랐다. 너 베타 맞아? 베타들 보통 얼빵하지 않나.. 아무튼 주제를 알아. 너 때문에 다른 베타 애들도 다 괴롭힘당하고 있으니까 사과나 해.'


빨간 펜으로 적혀진 쪽지를 내려다보는데 손이 덜덜 떨렸다. 평생을 존재감 없이 조용히 살아왔는데, 내 가장 큰 꿈이라고는 그저 장학금 받고 대학에 가는 게 전부였는데. 난 그렇게 알파와 오메가로 태어나면 모두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가지려고 아등바등 살고 있는데 대체 내가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정재현의 본모습을 봐서? 그걸 친구들에게 말하려고 해서? 아니. 말했다 쳐. 내 말을 누가 믿어줘!! 나는 베타고!! 지는 우성 알파면서!!!!!









저녁 시간이 되기도 전에 학생회실로 뛰었다. 숨을 씨근거리며 (그래도 노크는 함) 문을 벌컥 열었고, 정재현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반겼다.



"일찍 오셨네요."

그리고 나는 준비해 온, 욕


이아니라



"학생회장님... 죄송합니다.. 저 기숙사 4동으로 다시 옮겨주세요. 제발요. 네?"

눈물 젖은 사과를 그의 앞에 꺼내놓았다. 정재현은 일말의 당황한 기색도 없이 이 상황이 정말 재밌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웃어 보였다. 저.. 저...

사과를 할 마음은 정말 요만큼도 없었다. 주변에서 아무리 욕을 들어도 그냥 서럽고 화나는 감정이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 때문에 다른 베타 애들까지 괴롭힘당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도저히 가만 있을수가 없었다. 우리 학교에 나 포함 베타라고는 5명이 전부인데 전교생한테 따돌림당하는 걸 어떻게 보고만 있겠는가. 그래서 정재현한테 찾아왔다.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4동으로 옮겨달라고 빌었다. 정말 빌었다. 두 손을 모아 지그재그로 비벼대고 있었으니까. 도토리 까는 다람쥐가 따로 없었다.


우성알파(씹새)님아... 제발요...


쓱싹쓱싹 소리가 날 정도로 손을 비벼대는데 얼굴에 웃음기를 지운 우성 알파 새끼가 턱을 매만지며 인상을 썼다. 고민하고 있는 걸까.. 기대하려는 찰나.


"안돼요."

"네?"

"이미 방도 다 배정했고... 누나 한 명 옮긴다고 전산작업 다시 할 수는 없잖아요?"

"......"

"들어오면 좋을 거예요. 다른 동이랑 다르게 모든 방이 1인실이거든요. 샤워시설도 각 방마다 있고, 청소랑 빨래도 용역업체에서 따로 해줘요. 조식도 굉장히 맛있어요. 헬스장이랑 수영장, 다른 시설도 출입카드만 있으면 자유롭게 쓸 수 있어요. 아, 당연히 누나는 이 모든 게. 무료에요."

잠시 멍했다. 정재현은 안 가보냐는 눈빛으로 날 빤히 바라봤다. 이렇게 갈 수는 없다. 내가 사과도 얼마나 비굴하게 했는데.


"아... 그래도 난 베타인데 1동 쓰는 건 좀.. 그렇다고 생각해서..."

하지만 나는 갈수록 비굴해졌다. 정재현이 웃는다.


"다른 알파들이 괴롭힐까 봐 그래요? 걱정 마요. 제가 잘 말해둘게요."

아니. 그게 더 무서운데?


"아.. 아니.. 저.."

"혹시라도 누가 괴롭히면 저 불러요. 도와줄게요."

"....왜?"

"왜냐면.. 누나가 괴롭힘당하는 게 아마 저 때문일 거 같아서."

"......"

"아까 교실에 찾아간 건 다른 볼일이 있어서에요. 우연히 누나를 봤고.. 반가워서 인사라도 하려는데 누나가."

"그건 진짜 미안. 내가 너랑 아까 낮에 있었던 일 말 안 하기로 했는데.. 진짜. 미안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만 알아줘. 응?"

"저도 누나 괴롭힘당하게 할 의도는 없었어요. 애들이 이야기를 부풀려서 소문낼 줄이야.. 걔들은 원래 그런 식으로밖에 머리가 안 돌아가는 종족이긴 하지만."

은연중에 정재현이 우성 알파 이외에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항상 저렇게 남들을 자기 발 밑에 두고 깔보는 걸까. 단둘이 마주 보고 있는 이 상황이 돌연 섬뜩하게 다가왔다. 내가 여기 온 목적도 잊고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가보겠다며 뒤도는데 정재현이 내 손목을 붙든다.


"누나 향수 뿌려요?"

"네? 아, 아니! 베타는 그런 거 뿌리면 안.."

"그치. 베타는 향수 뿌리면 안 되잖아. 그런데 왜."

베타는 향수를 뿌리는 게 법적으로 금지되어있다. 매시간 서로의 페로몬에 노출되어있는 알파와 오메가들의 건강을 위해서였다. 베타까지 향수를 뿌리고 다니면 그들이 얼마나 힘들겠냐며 말이다. 이 얼마나 웃긴 일인가. 향수 뿌릴 자유조차 없다는 것이.

정재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허공에 시선을 둔 채로 맹수에게 잡힌 초식동물처럼 힘없이 딸려갔다. 허리를 살짝 숙여서 내 귓가에 머문다. 숨결이 간지럽게 귓불에 닿았다.


"방에서 네 냄새가 나."

"....."

"오메가 아냐. 너."

2차 성징으로 베타에서 오메가나 알파가 되는 확률은 집에서 키우던 개에게 갑자기 날개가 생겨 새처럼 허공을 날아다니는 걸 목격하는 것과 비슷했다. 불가능이라 이 말씀이다. 베타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베타로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 엄마도 베타 아빠도 베타 동생도 베타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외삼촌, 고모,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모두 베타인 걸.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오메가일 수 있겠어. 말도 안 되는 논리에 잡아먹혔다. 말을 잃고 멍하니 있는데 내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넘긴다.


"샴푸 냄새네."

"....."

"오랜만이다. 샴푸 냄새나는 사람."

내일부터는 비누로 머리를 한 번 감아보도록 하자.












기숙사에 들어오고 친하던 베타 애들마저 나를 모른체한다. 한동안 나 때문에 다른 애들에게 괴롭힘당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졸지에 외톨이가 되어 수업도 혼자 듣고, 밥도 혼자 먹고, 등하교도 혼자 한다. 유일하게 혼자가 아닐 때가 있는데. 바로.


정재현이 내 방에 찾아올 때다.



"내 방에 좀 오지 마."

"넌 오라고 하면 안 오잖아."

"당연한 거 아냐? 가기 싫으니까!"

"왜 싫어?"

"엄마가 우성 알파랑 놀지 말랬어."

정재현이 목까지 뒤로 젖혀가며 웃는다. 이게 자기한테는 그저 재밌는 놀이에 불과한가. 나는 왕따가 돼서 매일매일 지옥 같은 학창시절을 보내는 중인데.



"왜 싫지. 우성 알파랑 놀면 좋을걸."

"......"

"너 대학 가고 싶댔잖아. 나랑 친하게 지내면 그거 되게 쉬워."

"......"

"인생 쉽게 살아볼래?"

내 뺨을 만지는 손길을 멍하니 받고만 있다가 뒤늦게 인식하고 거칠게 치워냈다. 정재현은 굴하지 않고 날 자꾸만 흔들어놓았다.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대사를 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얼마나 줄 건데요? 나 돈 좋아해요.

정재현이 다가온다. 꼼짝 못 하고 서있다가 뒤늦게 뒷걸음질 쳤다. 내 방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온 사방이 위험 천지였다.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벽에 등이 닿았다.


"난 네가 오메가라고 생각해."

"아니라고 몇 번을...!"

"내가 맡아 본 향기 중에서 네꺼가 제일 좋아."

정재현은 미쳤다.

그리고 나는 미치겠다.


"나 베타야. 너네가 싫어하는 베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알아. 너 베타인 거."

"..뭐?"

"오메가인데 알파랑 놀기 싫다는 거 말이 안 되는 거지. 심지어 난."

"....."

"우성 알파인데."

"....."

"그런데 네가 베타면 그럴 만도 해. 우성 알파랑 엮여본 적도 없을 테고 이게 얼마나 좋은지 실감이 안 날 걸."

"....."

"그러니까. 우리 한 번 제대로 엮여볼까?"

이 관계에서 제일 문제는 충분히 밀어낼 수 있음에도 적극적으로 피하지 않는 나였다. 여지를 한없이 주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넋 나가 고개를 끄덕일뻔한 적도 있었다. 어릴 때 엄마가 우성 알파랑 엮이지 말라고 했었는데 그 말을 이제야 이해할 거 같다.


잘못 걸려도.. 한참 잘못 걸렸어.









"난 너랑 놀고 싶어."

키스할 것처럼 가까이 다가와놓고 하는 행동은 손목을 잡는 거였다. 그리고 그걸 허공에 살짝 흔드는 것이다. 떼쓰고 있었다. 내가 정재현과 엮이면서 알게 된 우성 알파의 가장 큰 능력은, 사람 마음을 어떻게 쥐고 흔드는지 너무 잘 안다는 거였다. 그리고 난...

그걸 뿌리칠 능력이 없었다. 왜냐면 난, 베타니까.

긍정도 부정도 못하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정재현이 틈을 놓치지 않고 다가온다. 가까워지는 얼굴에 눈을 꼭 감았다가 귓가에 닿는 숨결에 느리게 눈을 떴다.


"내일은 내 방으로 와."

"......"

"기다릴게."

뺨을 살짝 쓰다듬더니 붙어있던 몸을 뗀다. 얼빠진 내 얼굴을 잠깐 감상하고 그대로 뒤돌았다.

정재현이 방을 나가고서도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 했다. 뒤늦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고민에 빠졌다. 정재현. 좋지. 우성 알파에, 잘생기고, 지금도 주변 애들이 모두 날 부러워하지 않던가. 그런데, 그러다가 너무 깊게 빠져버리면? 그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벌써부터 후유증에 시달리는 기분이었다. 이미 빠져버린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난 우성 알파한테 정말 단단히... 잘못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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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는 베타가 맞습니다 저는 오메가버스세계관에서 알파x베타 구도가 젤 좋더라구욯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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