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택운x차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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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oodNnnn



전화벨이 울렸다. 거실이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멤버들은 모두 거실에 모여 자질구레한 일들을 하고 있었다. 운동이니 음악 감상이니 따위의 소소한 것들. 활동도 끝난 지금, 방에 틀여 박혀도, 반대로 밖을 싸돌아다녀도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을 텐데, 이렇게 굳이 모여 있는 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도 불안하기 때문이겠지. 손이 닿는 곳에 체온이, 그리고 살아 있는 소음이 있어야 안심이 되는 것일 테다. 그 마음을 손에 잡힐 듯 훤하게 알 수 있는 건, 저도 그렇기 때문이다. 학연은 느리게 전화를 받았다.

 

 

“네, 네. 지금 바로 갈게요”

 

 

용건은 역시나 회사의 호출이었다. 애써 모르는 척 딴청을 피우던 멤버들의 시선이 학연에게 꽂혔다.

 

 

"갔다 올게"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목소리 끝이 조금 떨린 것 같았는데 눈치 챘을까.

 

예상했던 호출이었고 앞으로 들을 말도 뻔했다. 이제 회사가 너희들을 지원해주긴 힘들 것 같다 따위의 말들이겠지. 아무리 부드럽게 설탕물을 발라도 결국 본론은 회사에서 나가라는 난도질 아니겠는가. 나가든가, 아니면 스폰을 받든가. 학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떡해야 하지. 가수를 그만두면 군대나 가야 할까. 신발을 고쳐 신으며 그런 생각을 한다.

 

다녀오세요.

그런데 저를 배웅하는 막내의 눈이 초연함을 가득 담고 잔뜩 가라앉아있었다.

쟤는 지금 겨우 스무 살인데.

 

이를 악물었지만

이를 악물어봤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서, 결국 패잔병처럼 어깨를 늘어트린 채 잔뜩 몸을 굽힐 수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회사로 들어가 대표실에 노크를 하면서 무릎을 꿇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을 열고 대표님을 보자마자 바짓가랑이를 잡고 싹싹 빌자고. 제발 한번만 더 믿어달라고, 돈이 모자라면 밤무대든 뭐든 돌겠다고.

어떻게 울어야 더 불쌍해 보일까 고민하며 방에 들어서는데, 생각과는 달리 대표님은 잔뜩 흥분한 채로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학연은 문고리를 잡은 채 눈만 끔벅이고 있었다.

 

 

"학연군 왔어???"

 

 

대표님은 그런 학연의 팔을 잡아 끌며 통통한 손으로 연신 등이며 어깨를 잔뜩 쓰다듬는다. 의아함을 가득 담은 눈으로 고개만 가만히 앞을 응시하자, 역시나 잔뜩 신난 이사님이 학연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스폰 받기로 했다며! 잘 생각했어. 학연아!”

 

 

대체 무슨 말이지? 학연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런 학연의 상태를 눈치 채지 못한 건지, 대표님과 이사님은 신이 나서 횡설수설 말을 쏟아냈다. 말의 홍수에 빙글-머리가 돌았다. 어지러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단어는 ‘스폰서’ 그것뿐이었다.

 

 

“스폰이 대박 쩔긴 하네. 그 회사 알지?? CM유통회사. 거기서 새로 자회사를 설립하는데 그게 아이돌 레이블쪽을 염두에 두고 있었나봐. 아니 근데 솔직히 관심 안가지고 있었거든? 그 대기업이 우리 같은 중소도 아닌 망해가는 회사에 왜 관심을 가지겠냐. 시발, 근데 오늘 그쪽에서 컨택이 왔다. 우리 회사 인수하겠다고!! 이야 이게 무슨 복권당첨도 아니고. 아니지, 아니지 복권당첨보다 더 대박이지!! 야, 너 스폰서 정말 잘 물었다!”

 

 

사실 자회사설립이니 레이블이니 하는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다. 뭐, 뭘 물어? 무슨 착오가 있는 거 아니냐고 말하려던 순간, 뒤통수가 서늘해지는 기분에 입을 다물었다. 하나 있지. 평소와 달랐던, 일상에서의 이탈(離脫)이.

 

 

"너희 그만두지 않아도 돼! 거기서 너희를 되게 좋게 봤나봐. 한 번 더 지원해주겠대!"

 

 

 

학연은 무너지듯 주저앉아 머리를 짚었다. 설마, 싶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짚이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몇 년 동안 연예계를 구르며 생긴 촉이란 게 있었다. 그것이 선명하게 하나를 가리켰다. 어제, 그 남자.

 

 

그 때 어디선가 작게 구두소리가 났다. 주저앉아 있는 학연 앞에 인기척이 난다싶었던 찰나, 학연의 어깨에 둔탁한 손길이 느껴졌고, 뒤이어 거칠게 몸이 잡아 일으켜졌다.

 

당황감에 흐려진 시야로 고급스러운 양복 재킷이 보인다. 섬세한 손을 떠받치는 남자다운 팔목에 채워진 시계는 롤렉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갗을 타고 전해지는 익숙한 온도의 체온.

 

 

"우리 회사 인수하신 분이다. 인사드려 학연아"

 

 

눈을 마주치면 어디선가 봤던 얼굴이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학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였다.

어깨에 고개를 묻고 힘껏 들이쉬고 내쉬던 숨소리가 떠올랐다. 정욕을 숨기지 않고 오롯이 드러내던 표정까지도. 같은 사람이 맞나? 순간 다른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 열정적이던 얼굴이 한껏 서늘한 기운을 풍기며 입을 비틀어 올리고 있는 게 너무도 낯 설어서.

 

 

"정택운입니다"

 

 

얼떨결에 내민 손을 잡자 강하게 움켜쥐어왔다. 아프게 부여 잡힌 손에 닿는 체온은 저 눈빛과 달리 너무 뜨거워서, 학연은 인정했다.

이 남자가 어제 그 남자가 맞는다는 걸. 데일 것처럼 뜨거운 온기를 지녔던 남자

 

 

"…차학연입니다"

 

 

떨리는 입을 겨우 달싹여 자기소개를 했다. 여기서 이렇게 만난 건 우연일까 인연일까.

 

 

"알고 있어요"

"네..?"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아니면 악연일까.

 

택운은 선전포고처럼 말을 내뱉고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차가운 미소를 보면서 학연은 담담하게 인정했다. 이게 우연이든 인연이든 악연이든 이 남자와 어떻게든 얽히게 될 것이라는 걸. 아니, 이미 얽혀버렸다는 것을.

제 힘으로는 떼어 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지독하게.

 

 

*

 

 

"잠깐 학연씨랑 둘이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택운의 말 한마디에 굽실거리며 방을 나서는 대표님과 이사님의 모습이 낯설었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저렇게 뻘뻘 땀을 흘리면서 설설 기는 사람이었다고?

 

학연은 작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에 있는 옅은 흉터자국이 만져진다. 같이 술을 마시다가 얼큰하게 취했던 대표님이 술잔을 집어던져서 생긴 상처였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기에 술에서 깬 후엔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사과하긴 했지만.

 

 

-그래도 솔직히 너희 망한 건 사실이잖아…내가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갑자기 화가 나서…쨌든 다치게 한건 미안하다-

 

 

아니, 애초에 그게 사과가 맞긴 했었나.

 

 

"앞으로 모두 네 앞에서 저렇게 행동할거야"

 

 

택운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문을 바라보던 학연의 시선이 택운을 향해 옮겨지고, 공중에서 시선이 얽혔다.

 

 

"무슨 소리에요?"

"지금부터 네가 만날 사람들이 너한테 굽실거릴 거라는 뜻이지"

"…저는 그런 걸 바라진 않아요"

"네가 바라지 않더라도 그렇게 될거야"

"왜요?"

"그게 내가 바라는 거니까"

 

 

택운은 천천히 학연에게 다가왔다. 시선은 진득하게 학연을 응시한 채로.

뱀 같아. 그 눈을 바라보면서 학연은 멍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네가 바라는 것을 이루면 자연히 딸려오는 것이기도 하고"

"…내가 바라는 게 뭔데요?"

"글쎄. 아마 가수로써의 성공?"

"그럼 그쪽이 바라는 건 뭔데요"

"너"

 

 

차학연, 너.

택운은 낮게 속삭였다. 어느새 볼을 부여잡은 손이 차가웠다. 아니 뜨거운 건가. 어지러운 머리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다.

학연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린다. 나른하게 퍼지는 미성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어제 우리 잤죠? 그쪽이 스폰서에요? 그래서 저랑 잔거에요?"

"그래서 잤다기엔 내가 좀 억울한데. 먼저 유혹한건 차학연, 너야"

“대답을 해주세요. 그쪽이 스폰서냐구요”

“그쪽이 아니라 정택운. 그리고 내가 스폰서냐고 물으면 맞아. 그래서 내가 대가를 들고 왔잖아?”

“대가요?”

“회사 인수. 어젯밤에 대한 대가야. 모자라진 않지?”

“…왜 저에요?”

 

 

택운은 느리게 학연을 향해 다가온다. 이제 어느덧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아오는 게 느껴진다. 피할 수가 없었다. 마치 뱀이 단단히 저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미끈거리는 입술이 서서히 제 입술을 향해 내려온다. 학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택운은 당장이라도 입을 맞출 것처럼 입술을 내리곤, 천천히 속살인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네가 그걸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지”

"…제가 거절한다면요?"

"그건 정답이 아니야. 넌 거절 못해. 이미 어제 승낙했으니까"

"…술에 취해서 한 말이었잖아요"

"그래서 거절한다고?"

 

 

택운은 더 가까이 학연의 허리를 잡아 당겨왔다. 바짝 붙은 택운의 품 안에선 청량한 시트러스 향이 났다. 독한 향수를 뿌릴 것 같은 사람인데,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더 잘 어울려서, 학연은 그저 눈을 감았다. 향에 취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운은 여전히 학연의 입가에 입술을 가까이 댄 채로 속삭이듯 말했다. 택운이 입을 벌렸다 다물 때마다 느껴지는 진동이 마음을 간질인다.

 

 

"난 당장 널 육개월 안에 국민 아이돌로 만들 수 있어"

"…"

"가수로써 가장 높은 곳. 한번 가볼 생각 없어?"

 

 

가장 절망적일 때 나타나 달콤한 과실을 손에 쥐어주는 이 남자는 천사일까 악마일까.

 

 

“조금만,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줘요”

“…”

“이건 너무 갑작스러워요. 내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게 해줘요. 부탁이에요”

“난 늘 네 부탁이란 소리에 약해”

“네? 그게 무슨…”

“한 달. 그 이상은 못 줘. 그동안 계속 고민해 봐”

 

 

대신, 그동안 네 이 작은 머릿속을 오직 나로만 채우는 거야.

 

그리고 그대로 택운은 입을 맞춰왔다. 차가울 것이라 생각한 입술은 생각보다 더 따뜻했다. 기대고 싶어질 정도로 기분 좋은 온도. 학연은 손을 뻗어 택운의 어깨에 손을 감았다.

 

 

“그동안 경험해봐.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세상을”

 

 

그러면 어차피 넌 나에게 올 수 밖에 없을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택운은 더 깊게 학연을 고쳐 안고 다시금 입술을 맞대왔다. 더 짙어지는 키스를 빠듯하게 받아내며 학연 또한 택운의 어깨를 더 강하게 감싸 안았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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