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정 3품 이상의 고관들이 모여 주요 현안을 논의하는 ‘조회朝會’가 예정된 날이다. 

조회는 정기적으로 달에 네 번, 개정전改正殿(*황제가 집무를 보는 정전)에서 거행된다. 그러나 예법에 따라 국상 기간엔 황제의 자리를 공석으로 비우게 되어있어, 그동안의 현안 보고는 동연전(*황태자의 처소)에서 약식으로 치러왔다. 이제 국상도 끝났고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으니 조회도 정식으로 재개할 때였다.


탐스러운 모란이 가득한 병풍 앞 어좌는 아직 비어있으나 그 외의 빈자리는 없었다. 옥좌의 좌측은 정책을 심의하는 중서문하성 관리들이, 우측은 정책을 집행하는 상서성 관리들이 빠짐없이 채우고 있었다.



" ... ... "



오른편 선두에 앉아있는 자는 상서성의 장, 상서령尙書令 한 령이다.

그녀는 선황, 연제의 오랜 친우였으며 천라 유일의 공작위를 수여받은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재위동안 강력한 황권을 행사했던 연제마저 그녀를 자신의 왼팔이라 칭하면서도 끊임없이 견제했을 정도이니, 명실공히 실세 중의 실세랄 만 했다.

무심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는 령은 좀처럼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를 갑옷처럼 두르고 있었다.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는 설과는 전혀 다른 인상이었다. 모자母子 사이에 닮은 것이라곤 선명한 인상의 이목구비 정도가 전부였다.



" ... ... "



한편, 왼편 선두에 앉아있는 자는 중서문하성의 장, 중서령中書令 민주영이다.

개국 공신의 가문에서 태어난 그녀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정치에 두각을 드러냈다. 한 령이 국시에 급제하여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던 때, 주영은 이미 인정받는 중직重職의 관리였으니 시작만 따지자면 한참 차이가 나는 셈이다.

그러나 틈은 금세 메워졌다.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양상으로 관직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령이 요직 중의 요직만 골라 밟으며 빠르게 승직하는 동안 주영은 제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지방직과 중앙직을 가리지 않았다. 하여 마침내 현재에 이르렀다.

선황, 연제의 최측근이었던 령에 비하자면 가문의 힘이 약하나 경험이 많고 시야가 넓은 것이 그녀의 장점이었다.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임에도 살벌한 정치판의 일선을 달려온 만큼 시선만큼은 예리하게 빛났다.



“ 황제 폐하 납시오!”



미천한 신들이 하늘 그물망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영원을 누리소서! 영원을 누리소서! 영원을 누리소서! 영원을 누리소서!

영원을 누리소서! 영원을 누리소서! 영원을 누리소서! 영원을 누리소서!



황제의 등장에 관리들 모두가 약속한 듯 입을 모았다. 머리를 조아린 신료들의 시선이 화려하게 세공된 황제의 비단 신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들 사이를 지나는 예의 걸음은 느긋하고 차분했다.

조금의 발소리도 나지 않는 황궁 답보踏步는 지독한 예법 교육의 결과였다. 황자에서 태자로, 다시 황태자로. 예의 신분이 고귀해지고 재능이 빛을 발할수록 책잡힐 일 또한 많아졌다. 부황父皇, 연제는 하다못해 그의 걸음걸이마저 완벽하길 바랐다. 수많은 예법을 체득하는 과정은 힘들고 고되었으나 결과적으론 젊은 황제 특유의 분위기를 만드는데 한몫했다. 별다르지 않은 손짓조차 남달리 우아했으므로.

어좌에 앉은 예는 그야말로 청천靑天이 선택한 황제였다. 하다못해 홍채마저 황실의 색을 타고 태어났으니 하늘이 점찍은 황제가 달리 누가 있단 말인가. 용포도, 면류관도, 심지어 어좌 뒤 병풍의 모란조차 본래 그의 것인 양 잘 어울렸다.



“ 빈자리가 없는 것을 보니 짐의 즉위에 불만은 없는 모양이야.”



느슨히 건넨 첫인사는 농이라 해도 살벌한 구석이 있었다. 예의 시선이 삼삼오오 모여 앉은 신하들을 느리게 훑었다. 배부른 포식자와 닮아있는 눈빛에 심약한 관리들 몇이 조용히 침을 삼켰다.



“ 귀비는 들라.”



황명은 갑작스러웠으나 귀비는 기다렸다는 듯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말을 맞춰둔 모양이었다. 즉위식에선 먼 거리 탓에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확실히 보였다. 송 청. 황제의 동려이자 극악무도한 반역자, 그가 맞았다.

후궁이지만 어떠한 꾸밈도 없는 수수한 차림의 청이 예에게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예쁘장한 얼굴이긴 하나 사내와 여인이 어찌 같겠는가. 아무리 보아도 후궁으론 보이지 않았다. 어찌 이런 자를 정 1품 귀비로 들이셨단 말인가.



“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정히 사내를, 그것도 반역자를 후궁으로 삼으실 것입니까.”



겁 없는 발언이었다. 그를 민망할 정도로 빤히 보던 예가 눈을 휘어 웃었다.



“ 짐의 귀비가 들었는데 어찌 그리 흉악한 말부터 늘어놓지?”

“ 귀비의 고운 귀가 더러워졌지 않아.”



미소가 고인 낯이 희게 빛났다. 제 아비는 험악한 얼굴로 겁을 주더니 이 아들은 우아한 낯으로 넋을 빼놓는다. 포악한 언사조차 우미優美한 외양에 쉽게 가려지니 이것이 선황 연제가 황태자를 아주 어릴 때부터 타국과의 외교에 귀히 쓴 이유일 것이다.

예는 청의 손을 끌어와, 달래듯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손이 닿았을 뿐인데 생리적 불쾌감으로 손가락 끝을 잘게 떠는 모양이 우스웠다. 예는 타박하듯 그의 손을 힘주어 그러쥐었다.



” 하여, 그대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니 내 귀비에게 인사도 하지 않나? “



귀비마마를 뵈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홍복을 누리소서! 홍복을 누리소서!


그제야 목소리를 모아 외친다. 원하는 것을 이룬 예는 미련 없이 손을 놓았다. 아주 잠깐 잡혀있었을 뿐인데 손등이 발갛게 부어올랐다. 옷자락을 정리하는 척하며 긴 소매로 손을 가린 청이 이번에도 예의 기색부터 살폈다. 동려(*황가 자제들의 또래 친구)로 자란 이들의 오랜 습관이었다.

예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무표정에서 미약한 불쾌함이 느껴졌으나 그뿐이었다. 청이 걱정하던 감정적 대응은 없었다.



“ 승은을 입은 자를 후궁으로 두지 않고 무엇으로 둘까.”

“ 내명부와 조정은 분리되어있으니 선을 넘지 말라. 귀비를 부른 것은 오늘 짐이 공표할 초칙 때문이니.”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단숨에 소강 되었다. 황제가 초칙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즉위 후 최초의 황명, 초칙은 신료들의 찬반과 무관하게 강행된다. 이는 새로운 황제의 황권 강화를 위해 이어져 온 천라의 오랜 전통이다. 이번 대 황제 역시도 당연히 초칙을 공표할 권한이 있었다. 다만 그 범위에 제한이 없어 어떤 명이 내려질는지 심히 걱정이었다. 초칙은 후궁 한 명의 첩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 새 시대가 열렸으니 오화五華 역시 새롭게 임명한다. 이것이 짐의 초칙이야.”



오화는 황제의 최측근 인사人士 다섯을 말하며 초칙과 마찬가지로 막 즉위한 황제의 황권 강화를 위해 만들어진 제도다. 황제와 비슷한 연배의 귀족 관리들로 구성되는 오화는 몇 가지 특별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품계와 무관한 조회 참여다. 정 3품 이상의 당상관들로 제한된 참석의 최소 조건을 무시하고, 오화만큼은 그보다 낮은 품계의 관리일지라도 조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안건이 조회에서 정해지므로 황제의 편이 다섯이나 더 있다는 것은 이미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천라의 역대 황제들 모두가 그들의 첫 조회에서 오화를 임명·공포했다. 물론 초칙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오화 임명은 너무나 당연하여 굳이 초칙으로 삼을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러나 이번 대 황제의 경우엔 사정이 달랐다.



“ 한가 공가 한 설. 일화一華(*오화의 수장)로 임명한다.”



모두가 예상했던 이름이 가장 먼저 불렸다. 이부시랑 한 설. 다섯 명의 동려 중 황제와 함께한 시간이 가장 길기도 하거니와 문무 어느 쪽도 동배를 압도하는 실력자다. 검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 천라의 성검으로 불리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책략과 권모술수에 능한 지략가이니 긴히 쓰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원칙대로라면 설은 오화가 될 수 없는 자다.

오화 제도는 그 뿌리가 오래된 만큼 몇 번이나 수정되어왔다. 하여 현재에 이르러서는 특정 가문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전대 오화의 가문에서 다시금 오화를 뽑는 것을 금하고 있다. 설의 모친인 상서령, 한 령은 선황 연제의 오화 중 한 명이었다. 하여 굳이 초칙을 사용하는 것이다.

나를 초칙으로 삼겠다는 건 이런 맥락이었군.

청은 다시금 눈앞의 젊은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상한 태도로 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 나패(*천라의 호패)의 흑동백黑冬柏(*한가의 인장. 검은 동백꽃)에 자모란紫牧丹(*황가의 인장. 보라색 모란)을 겸한다.”



천라의 백성이라면 신분 고하와 상관없이 누구나 고유의 패를 지닌다. 평민의 패는 평범한 나무 패찰에 이름자와 태어난 해, 거주지역을 새겼고, 귀족의 패는 가문의 색을 덧씌운 상아 패찰에 가문의 봉작과 성씨, 인장, 관직 등을 추가로 새겼다.

황제의 오화로 임명된 자들은 여기에 추가로 황가의 인장, 모란을 새긴다. 황제를 포함한 황실의 구성원은 나패가 필요치 않으니, 나패에 모란을 새길 수 있는 사람은 공신이나 전대, 혹은 현 오화 정도다. 그들에겐 대단한 영광인 셈이다.



“ 가가 후가 가 율. 이화로 임명한다.”

“ 가가 후가 가 윤. 삼화로 임명한다. ”

“ 두 사람의 백목련白木蓮(*가가의 인장. 흰 목련)에 자모란을 겸한다.”



여기서 또 한 번 초칙의 위력이 발휘되었다. 오화 다섯 명은 본래 각자 다른 가문 출신이어야 한다. 따라서 한 가문에서 태어난 남매, 율과 윤 두 사람 모두를 오화로 임명하는 것은 원칙적으론 불가했다.

상황이 이즈음 되자 모든 이들이 눈치 챌 수밖에 없었다. 예는 그의 동려였던 이들 모두를 오화로 임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 짐의 동려, 요련에게 주酒씨 성을 하사하여 그녀를 주가酒家의 가주로 삼는다. 가문의 문양은 장미薔薇, 색은 홍색紅色으로 하며 작위는 남으로 한다.”



요련은 천라 제일 상단의 주인이었던 부친이 국가에 공을 세운 보답으로 동려 임명을 받았다. 보통의 동려는 저들이 모시는 황족의 나이가 열 살이 되기 전 간택되는데 요련은 예가 열다섯이던 해 동려로 임명되었으니 매우 특별한 경우였다.

현재 서른이 된 요련은 상단을 이어받아 그 규모를 더욱 키우고 있었다. 천라를 쥐고 흔들 수 있는 부富를 지녔음에도 출신 탓에 저평가되던 그녀가 그럴듯한 작위마저 하사받은 것이다.



“ 주가 남가 주요련. 사화로 임명한다. 나패의 홍장미에 자모란을 겸한다.”



오랜 시간 준비한 것처럼 막힘없는 명이었다. 즉위 후 한 번뿐인 초칙을 공표하면서도 긴장은커녕 지나치게 여상하던 황제가, 문득 눈을 휘었다.



“ 마지막으로 짐의 귀비.”

“ 예, 폐하.”



마침내 지금의 황명이야말로 개국 이래 없었던 일이 될 터였다. 청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아 가지런히 모은 손등 위로 머리를 조아렸다.



“ 그대는 하늘의 귀비이니 나패가 무의미해. 그러나 그대의 성품이 온유하고 지조와 절개가 있는 고로 국화(*멸문한 송가의 인장)가 잘 어울리니 동려 시절 썼던 나패를 돌려주지. 청색이던 것을 황실의 색인 자색으로 변경해 자색 국화 옆 모란을 새기는 것이 좋겠어.”



파격에 가까운 애정이었다. 지금의 황제는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적 사고가 불가능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감이 좋은 몇 사람은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선황 연제 또한 지금과 같은 기만에 능했으므로.

황제는 송청에 대한 성총을 지극히 부각하고 있다. 사실 황제가 초칙으로 언급한 다섯 명의 최측근 모두가 평범하지 않은 인사였으므로 사사로이 시비를 가리자면 얼마든지 지탄받을 수 있는 임명이었다. 이를 초칙으로 해결함과 동시에 화제성을 모조리 청, 한 명에게로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 감읍하나이다.”

“ 그대를 향한 짐의 총애에 비할 바가 아니니 그만 일어나라.”



흐르는 상황이 기묘했다. 이를 지켜보던 관리들은 어떻게 운을 떼야 할지 몰라 어영부영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는 사람은 중서령 민주영이었다. 이들 중 정치 경험이 가장 풍부하고 연치가 높은 것이 주영이었으므로 모두가 그녀에게 기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을 주영이 어찌 모르겠는가.



“ 폐하. 신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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