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약하게 틀어야 더 빨리 데워진다고 했다.

샤워기가 졸졸 소리를 내며 물을 떨어뜨리기 시작한다. 허리를 펴 곧게 선 나는 거울 속의 맨 몸에 눈길을 둔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가슴팍이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몸을 조금씩 비틀어보자면 빛을 받는 각도가 바뀌며 쇄골과 갈비뼈가 짙은 그림자와 함께 모습을 보인다. 어제보다 더, 어제는 그제보다 더, 그제는 그끄저께보다 더, 왠지 툭 건들면 바스러질 것만 같은 뼈들이 선명해지고 있다. 가슴 아래를 쓸어 만지자면 오돌토돌 닭살이 돋은, 건조한 피부 아래로 더욱 건조한 그것들이 느껴진다. 피하지방은 녹아내린 지 오래, 그래서인지 이번 겨울은 유독 추위를 심하게 타게 되었다. 이렇게 몸을 만지고 의미 없는 생각으로 머리를 채우는 동안 물은 알맞은 온도로 달아오른다. 나는 욕조 안으로 발을 내디뎌 천천히 물줄기 속으로 들어간다. 뜨거운 물이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와 등허리로 떨어진다. 미약한 통증에 몸이 움찔거린다. 따끔. 또 따끔. 어깻죽지가 안쪽으로 말려든다.

 샤워를 마치고 나면 머리카락을 모아 쥐고 물기를 짜낸다. 양손에 힘을 주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나면 두피를 감싸오는 묵직함이 사라지고 욕조와 양손에는 물기와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남는다. 나는 손을 털어 욕조 안으로 머리카락을 떨어뜨리고 샤워기로 욕조 전체를 씻어낸다. 자연스레 수챗구멍 속에 쌓인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집어 올린다. 축축하고 냄새나는-사실, 냄새를 맡아본 적은 없다-, 제멋대로 엉킨 머리카락 뭉치는 내 관심 밖의 대상이다. 조금이라도 더럽고 찝찝한 느낌이 드는 것이라면 치를 떠는 나는 언제나 머리카락을 곧바로 변기에 던져넣고 물비누로 손을 벅벅 씻어내곤 했다. 하지만 왠지 오늘은 그 더러운 물체를 얼굴에 가까이 대고 관찰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물이 뚝 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 머릿속을 휙 스쳐 지나간다. 아니, 기어간다. 바퀴벌레가, 아주 빠르게, 소름 끼치는 미세한 발소리를 흘리며, 기어간다.

바퀴벌레는 인간의 각질과 머리카락을 먹는다.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단백질(이 아닐까?). 그들은 제 몸보다 몇 배는 긴 먹이를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마음껏 먹어 치울 테다. 만인의 공포의 대상. 공공의 적. 이러한 명성을 얻게 된 비결에는 그들의 징그러운 생김새가 꽤 큰 몫을 차지하고 있겠다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재빠른 움직임, 상상 이상의 번식력, 그리고 위기 상황에 놓이면 순간적으로 치솟는 그들의 아이큐-수치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들이 받쳐줌으로써 비로소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놀라운 능력들의 원천은 무엇인가 하니, 밝은 전구가 탁, 켜지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카락!

그들이 인간을 벌벌 떨게 만드는 힘의 비결은 머리카락임에 틀림이 없다. 나는 세기의 발견을 해낸 물리학자라도 된 듯 가슴이 벅차올랐다. 왜 사람들은 이 굉장한 사실을 깨닫지 못 했을까. 아니, 노력조차 하지 않은 것이겠지. 바퀴벌레를 혐오스러워하니까!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겠냐는 얄팍한 변명이나 늘어놓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나와 같은 생명체로서, 이 지구 위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료로서, 그리고 경외의 대상으로서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것의 뿌리를 찾아냈다. 이 얼마나 이성적이고 영민한가.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해 실실거리던 차에, 어느새 거울에 부옇게 서린 김이 사라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내 내 표정은 촛농과 같이 녹아내린다.

물에 젖은 나는 이십여분 전의 모습보다 더 초라하기 짝이 없다. 눅눅하게 목을 타고 어깨까지 눌러붙은 머리카락과 툭 튀어나온 쇄골, 빈약한 가슴 아래 비쳐 보이는 갈비뼈, 그나마 살이 붙어있는, 작은 흉터가 숨어있는 배까지. 반질반질한 등껍질에 멋지게 휘어져 움직이는 더듬이를 지닌 그들이 나를 본다면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비웃음을 터뜨릴 정도로 볼품 없다. 생기없는 눈은 더욱 음울한 기운을 내뿜고 겨우 삼켜낸 눈물은 코를 통해 내려와 훌쩍이는 소리를 내며 비참함을 더한다. 내 인생이 얼마나 가치 없고 한심한지 되짚어보려던 찰나, 손에 들린 머리카락이 물방울을 툭, 떨어뜨리며 내 시선을 빼앗는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군. 입을 굳게 닫고 우물거릴 수록 올라오는 것은 물비린내 뿐, 질감이 조금 익숙지 않지만 그것은 좋게 말하면 신선하다고 할 수 있겠다, 고 생각했다. 온몸의 물기가 마를 때까지 입을 열심히 놀려보았으나 머리카락은 끊어지지 않고 점점 엉키어만 간다. 슬슬 턱이 아파온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입안의 검은 덩어리를 꿀꺽 삼킨다. 그리고는 괜히 쩝, 하고 입맛을 다셔본다. 식도가 열심히 움직이며 머리카락을 아래로 아래로 내려보내는 것이 느껴진다. 이물감이 사라지자 나는 평소와 같이 옷을 주워 입고 욕실을 말끔히 정리한 뒤 콧노래를 부르며 욕실에서 퇴장한다.

투둑. 

온 힘을 다해 빗을 내려 당기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반곱슬인 머리카락이 남들보다 두 배는 많은 나는 머리를 빗을 때마다 있으나 마나 한 팔근육을 쥐어짜내야 했다. 손을 놀릴 수록 입에서는 간간이 얕은 신음이 튀어나오고, 두 볼은 석류 두 알을 박아놓은 듯 붉게 달아오른다. 몇 차례 씨름을 벌이고 나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둥실둥실 떠올라 한껏 부푼 머리가 거울 속에 비친다.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에 걸고 빗솔 사이로 뒤엉켜있는 머리카락을 잡아 뜯는다. 이 작업은 빗이 새 상품처럼 보일 때까지 계속된다. 마지막 한 올까지 긁어낸 나는 손바닥에 놓인 머리카락과 반쯤 열린 커튼을 번갈아 쳐다본다. 나는 어두운 방 안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머릿속을 가득 채운 빠른 비트의 록 음악에 맞춰 고개를 까딱인다. 부루튼 입술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양 입가에 침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정전기가 일어나 정수리 위에 부유하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저들끼리 얽히며 마치 더듬이와 같은 모양을 띤다. 우물우물우물우물.

꿀꺽.


짧은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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