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초에 포스타입에 게재한 연성으로, 소장본 마왕이야기 회지에 두 번째로 실린 단편입니다. 소장본에 실린 교정/퇴고가 끝난 버전으로 재업로드합니다. 소장본 표지디자인 타르프님(tarf_design)

※은밀한 모략가에 대해 3부 기준의 설정을 하였습니다.


※주의 요소: 고어, 폭력성, 잔인함, 식인 소재, 종교적 부분을 흥미 본위로 발췌함

열람하는 데 많은 주의를 요합니다. 수위를 위해 잔인한 장면들을 모두 조절하고 자세한 묘사 없이 넘어갔지만 근본적으로 소재에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은 읽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글에 나오는 모든 인물과 설정과 이야기는 허구이며, 실제의 종교와 전혀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흥미 본위로 쓰여진 소설일 뿐 일체의 혐오적/모독적인 의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수많은 시도를 실패하고 나서 김독자는 알았다.

우리는, 이 세계를 극복할 수 없다.

그래서 김독자는 신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경배하라





섹스가 인간관계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섹스까지 하고도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상대는 김독자가 처음이었다. 적어도 유중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애인을 자처하기에는 둘은 통상적인 사랑이라 불릴 수 없는 감정을 지니고 있었는데 특히 유중혁보다는 김독자가 조금 더 그러하였다. 유중혁의 사랑은, 전우애와,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사랑이 조금씩 뒤섞인, 그래도 다소 보편적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감정들의 총집합이었다. 단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쉬이 드러낼 수가 없어 뒤엉켜 명백히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사랑이라고 부르기 모호한 다른 감정들―분노, 답답함 등이 순서를 모르고 조금씩 스며 나오는 그런 덩어리들. 그러나 김독자의 사랑은 유중혁의 것보다 조금 더 기묘했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려고 했는데, 그 자세가 마치 연인을 위한 헌신이라기보단 신이 인간을 향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세계를 구성하는 듯한 모양새라 꺼림칙했다. 김독자는 오만했으며 아집에 잡혀 있었고 맹목적이었으며 제멋대로였다. 유중혁과 다르게 김독자는 자신에게 에로스나 필리아적 욕망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사랑하면서도 유중혁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지는 않는 듯 굴었고, 김독자는 자신이 유중혁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유중혁이 믿어주길 바랐으나 유중혁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절대로 믿지 않았다. 비인간적인 아가페만이 그 모순 사이를 꾸역꾸역 채워갔다. 그것은 단순히 김독자의 관계욕과 성욕의 부족에서 기인한 결과가 아니었다. 김독자 개인이 소유한 비틀린 모든 역사의 결과였다. 적어도 김독자는 이 세계의 결結을 보기 전까지는 정상적인 사랑을 할 수 없어 보였으며, 이 세계의 결結을 보고 나서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을 듯이 굴었다.

유중혁이 불안해하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김독자는 이 세계에서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방식의, 철저히 단방향적 사랑을 유중혁에게 하려 들었으나 심지어는 그럴 그릇이 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김독자는 아주 평범한, 어느 회사의 계약직이었던 웹소설 읽기가 취미였던 인간이었을 뿐이었고 그릇에 넘치게 부어지는 감정과 집착은 본인을 찢고 나올 만큼 거대했다. 위화감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직선적이고 단순한 질투가 아닌, 한 바퀴 두 겹을 넘어 꼬인 희생적인 사랑과 그 밑에 감추어진 집착적인 강박들은 종종 주변인들을 소름 끼치게 했다. 그래서 맨 처음 김독자가 종교에 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 유중혁은 조금 안심했다. 차라리 종교에라도 마음을 맡겨서 김독자의 이상하게 돌아가는 정신이 안정된다면 그게 훨씬 나았다.


멸망 이후 세계에선 온갖 종교가 생겨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신과 어감이 비스무리한 것이면 무엇이든 섬기고 보았다. 유료화 이후 죽음이 만연하여 생과 사의 경계가 없어진 세상이라 그럴까, 이전의 종교가 의미 없어진 세상에서 새로운 종교들이 도처에 득세했다. 스타스트림 그 자체를 섬긴다고 주장은 하나 파고들어 보면 자기들이 무엇을 섬기는지조차 정확히 모르는 종교도 있었고, 유명한 성좌들을 섬기면서 더 강한 성좌에게 그리스 식으로 제사를 드리려는 이들도 있었다. 지니고 있으면 시나리오에 실패하지 않게 해준다든지 스킬이 빠르게 오른다든지 하는 식으로, 실제 아이템으로서의 옵션은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물건이 부적의 역할을 하는 민간신앙도 횡행했다. 어디 사당에 가서 빌고 오면 누구의 가호를 받는다더라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중 소수의 이야기는 따라 하면 정말로 아이템을 획득하거나 성좌의 코인 후원을 불러일으켰으니 아주 완벽히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상상과 비현실이 현실이 되어버린 유료화 시대 이후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의 염원과 실제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기존의 종교는 죽어버린 세상에서 오컬트의 이름을 가졌던 것들이 시스템을 빌미로 허상에서 실재로 자리를 옮겼고, 그러고도 남은 자리는 새로운 '신앙'들이 채웠다.


시나리오를 깨어가던 김독자가 그 신앙들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처음은 아니었다.

구원교 사건 이후로 종종 김독자는 민간에서 득세하는 여러 가지 종교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구원교 때 고생을 해 본 바론 그에 대해 알아두는 것이 불필요한 일이 아니었기에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으며, 그때까지도 김독자가 종교에 대해 가진 관심은 지극히 평범한 범주였다. 이를테면 어디에서 어떤 사이비 집단이 일어나서 서울 어느 구역을 장악했다더라, 부산 쪽에서는 어린아이를 죽여서 공물로 바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이는 사실상 테러 분야에 가까운 뉴스거리라, 분명히 알아둬야 할 필요가 있었고 통제가 필요했다. 그랬기에 이 세계에서도 종교에 대한 소식들은 꽤 무겁고 필수적이었다.

멸망한 이후라 그런지 사람들이 신앙에 바치는 것들도 더 괴기하고 충격적이었다. 구원교는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멸살법의 서술에서, 회귀를 많이 반복한 유중혁의 시점에서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에 자세히 나오지 않았었을 뿐 각지에서 기이한 믿음은 끝도 없이 탄생했다. 시나리오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더라도 곳곳에서 크고 작은 살해와 폭력을 일으키는 신앙이 다양하게 생겨났다가, 다시 사라지길 반복했다.

세상도 다 망해가는 마당에 왜 다들 보이지도 않는 신을 더 믿으려 그러나 몰라, 딱 보면 모르냐? 이 세계에 신 같은 거 존재 안 하는 거.

한수영이 투덜거렸지만 정작 본인도 인과관계는 잘 알고 있었다. 죽음이 만연하고 기존의 세상 논리가 뒤집힌, 이런 혼란한 때일수록 맹신에 빠지기 쉬운 법이었다. 종교는―작가로서 그 본인도, 아포칼립스 이야기를 쓰면서 몇 번이고 등장시켰던 소재였다. 사람의 상상력은 생각보다 훨씬 진부했고 세상의 돌아가는 꼴은 예견된 바 그대로였으니 한수영이 쓴 소설 내의 광신들은 툭하면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뻔히 알면서도 한수영을 비롯한 이들은 그런 사람들의 광기들을 꺼림칙해했다. 자고로 무언가를 믿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불편한 일이다. 세상에 믿을 것이 없어 자기 자신만을 믿으려 애쓰는 이들에겐 더욱더 그러했다.


적어도 한수영은 그랬고, 그렇지 못한 김독자는 종교에 대해 더 공부하고 있었다.


멸망한 서울이었지만 아직도 곳곳에는 도서관 같은 곳이 남아있긴 했다. 종종 김독자는 시나리오를 깨기도 바쁜 시간 사이사이를 쪼개어 부지런히 도서관에 들렀다.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서 보면 정말 뜬금없는 종교의 기원 같은 책을 읽고 있었다. 흥미를 느꼈던 동료 몇이 어깨너머로 책을 훔쳐보았으나 워낙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고 글씨가 작아서 그런지 금세 뒷걸음질 치기 마련이었다. 김독자는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그런 고리타분하고 어려워 보이는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김독자는 특히 다채로운 종교와 신앙의 유래에 대해서 자료를 찾기 시작했는데, 유명한 세계 3대 종교에 대해서는 물론이요 원시 신앙, 민간 신앙에 대해서도 꼼꼼했다. 이쯤 되면 그 읽는 책들도 단순한 서적이라기보단 고대의 기록 같은 수준까지 도달했다. 처음에는 김독자가 무슨 새로운 종교라도 믿어서 마음의 평화를 찾겠지 싶어 놔뒀던 유중혁은 얼마 안 가 더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김독자가 잠도 자지 않고 밤을 새워서라도 그런 책들을 탐독하는 날들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김독자의 평소 행태를 보면 종교를 믿을 리는 없는 성정이었지만, 정서적인 상태가 근본적으로 무너져있다는 것을 ‘읽어서’ 아는 유중혁으로서는 불안하기도 했다. 김독자가 허상에 기대게 놔둘 것이냐, 말 것이냐.


한참을 고민하던 유중혁은 결국 지나가는 말처럼 김독자에게 충고했다.


이 세상에서 종교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구원교를 물리쳐놓고도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건가?

의미 없는 짓은 그만두라는 간접적 메세지였다. 솔직히 말해서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것보다는 옆에 실재하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에게 조금 더 기대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김독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그 무엇보다도 쓸모가 있지.

쓸모, 라니? 미묘한 단어였다. 그제야 유중혁은 김독자가 종교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마음의 정서적 안정을 위한 의미 있는 사상 체계가 아니라,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하나의 방식을 말하듯 그 단어를 발음하고 있었다. 총이 쓸모가 있지. 단검이 좋지. 설화가 있으면 좋겠지, 같은 투이다. 누구보다도 김독자다운 태도이긴 했으나, 그게 영 찝찝한 감각을 둘러메고 있다.

그럴 시간에 설화나 하나 더 얻어내고 쉬는 게…….

김독자는 읽던 책을 덮더니, 유중혁에게로 고개를 돌려 눈을 맞췄다.

중혁아, 나는 지금 종교에 대해서 공부하는 게 아니라, 가짜 설화를 만들어내는 인간들에 관해 공부하는 거야.

가짜 설화?

거짓 설화에 대해서 기억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더라도 사람들이 믿기 시작하면 그 이야기는 힘을 가지고, 이야기가 전부인 이 스타스트림에서는 그런 힘이 실재가 돼. 그러니까…아주 많은 사람이, 나를 믿어 내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면 나는 더 강력한 설화를 갖게 되는 거지. 종교가 바로 그런 거라고. 이 세계에서 종교의 유용성은 무궁무진해.

듣고 보니 아예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럼 김독자는 지금까지 설화 창조에 대한 실마리를 찾으려고 종교에 대해서 공부한 건가? 어떻게 보면 다행이기도 하고 아닌 이야기이기도 했다. 적어도 광신을 가지는 것보단 시나리오 클리어를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는 말이 더 유중혁이 듣기엔 좋았다. 실마리를 찾아도 좀 몸은 챙겨가면서 찾지, 싶었으나 일단 유중혁은 잠자코 듣기로 했다.

가장 강력한 설화를 많이 가진 이들이 누구일 것 같아?

유중혁은 잠시 생각했다.

성좌들 말인가?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달라. 유료화 이전 세계에서도 말이야. 그냥 평범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이야기를, 신화를, 전설을, 설화를 많이 가진 존재가 누구겠냐고. 그냥 인간?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들?

유중혁은 고개를 들었다. 김독자가 스산하게 웃었다.

대대손손 사람들 사이에 길이길이 기억될 이야기들은 누구의 것이겠어? 그런 신화는 어디에 속하겠어?

유중혁은 생각하다가, 이내 정답을 이야기했다. 그건…….


…신이지.


맞아. 그러니까 신은 가장 강력한 설화들의 보유자란 얘기지. 종교는 그들을 거짓 설화로 뒷받침할 수 있고.

그게 그렇게 되는군.

유중혁은 관성적으로 대답했다.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이미 존재하는 성좌들의 상당수가 올림푸스를 비롯하여 다양한 문화권에서 떠받들어지는 신의 집합이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는 당연한 얘기였다. 뒤집어 말하자면 신이 아니고 인간인 두 사람에게 있어서 의미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유중혁은 도무지 김독자의 머릿속을 상상할 수 없었다. 김독자가 무언가 자신을 위해서, 시나리오 클리어를 위해서 또 허튼 생각을 하며 이상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만은 잘 알겠는데 그 그림이 무엇인지 윤곽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럼 너도 그런 거짓 설화를 만들어내기라도 할거라는 얘긴가?

비슷해.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중혁은 미간을 좁히고 김독자의 말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대충 맑고 하얗다는 건 알겠는데 여전히 짚이지 않는 그의 속처럼, 김독자의 얼굴은 흐릿하기만 했다.

신에 대한 신앙은, 믿음이지. 누군가가 다른 무언가를 간절히 믿은 결과야. 사람을 믿기도 하고 어떤 전설이나 기적을 믿기도 하는데, 사실 결국 모든 신앙은 '이야기'를 믿는 거야. 그 사람, 혹은 신, 혹은 어떤 세계의 이야기. 그 사람이, 혹은 신이, 어떤 일을 했거나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무엇을 진행하였고, 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더라. 그런 이야기를 보편적인 규칙으로 적용하고 세상의 진리이자 자기 삶에 준행할 기준으로 만드는 거지. 존재하지 않더라도, 사실과 다르더라도 사람들 속에서 하나의 가치관적 맥락으로 굳어진 이야기에 대해 숭배하면 그게 신앙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그 말을 할 때 김독자의 표정이 어땠는지, 유중혁은 정확히 보지 못했다.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서 조금 흘려듣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신을 믿듯이 '믿으면', 나에게도 신들이 보유한 급의 설화가 생긴다는 거지. 그리고 그게 생각보다 쉽다는 거야.

사람들이 널 신처럼 믿게 한다? 전혀 쉬워 보이지 않는데.

아니, 쉬워.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면 되는 거야. 사람들은 늘 자기의 꿈을 실현해 줄 존재를 바라왔고, 언제나 기댈 것을 찾고 있는 걸? 그 신이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고 얼마나 올바른지의 문제가 아니야. 그냥 자기와 이해관계가 맞는 사상과 신이면 선택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믿음을 얻는다는 건, 성좌들에게 최대한 많은 코인 후원을 받으려고 애쓰는 것과 크게 원리가 다르지 않아. 그냥 신도들의 비위를 맞춰서 많은 '신앙'을 얻어내면 끝이야.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이쯤 되어 유중혁은 김독자의 탁상공론에 맞춰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불편하여 자리를 뜨고 싶었고, 그조차 안 된다면 김독자를 껴안은 후 허튼 생각은 그만두고 다른 일이나 하러 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 돌이켜보면 그 모든 이야기가 그토록 불편했던 것은, 그 사이에 깃든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그런 탁상공론을 가지고도 어쩌면, 김독자라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을 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직감은 당시 이미 유중혁의 머리 뒤를 채워가고 있었다.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해,

유중혁은 그 순간 김독자가 웃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미지메이킹부터 시작해야지.






김독자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마왕화를 전혀 풀지 않았다. 뿔과 날개는 마치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라는 듯 김독자의 몸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이내 불규칙적이던 액세서리는 신체 일부로 고정되었다. 처음에는 김독자 스스로도 조금 불편해했으나, 몇 날 며칠이 지나자 모든 것이 익숙해졌다. 종종 동료들이 부대끼다 말고 날개깃이 날린다거나 뿔에 어깨가 스쳤다거나 하는 불편을 호소했지만, 김독자는 가볍게 사과만 하고 넘겼다. 얼마 안 있어 모두가 김독자의 뿔과 날개에 익숙해졌다. 마왕화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는 것이 김독자의 몸에 어떤 변화를 일궈낼지 아무도 몰랐지만, 당장에 아픈 것은 아니었고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붙잡고 풀려고 해봤자 타인이 억지로 중단시킬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었다.

아무도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사람들은 김독자가 괜한 가오를 잡는다고 생각했다. 멋으로 내고 다니는 거 아니냐는 말이었다. 다른 소수의 사람들은 김독자가 좀 더 전투적인 태세를 갖췄다고 느꼈다. 어찌 되었든 마왕화가 가지고 있는 위엄이 있고, 또 마왕화 상태에서 펼칠 수 있는 공세가 따로 있으므로, 돋은 작은 뿔과 펼쳐진 검은 날개가 상시 전투 자세를 취하듯 보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김독자가 예측하는 다음 시나리오가, 그렇게까지 마왕화를 취해놓고 대비해야 할 만큼 언제 어디서 시작될지 모르는 급작스러운 종류라고 예상하는 사람도 많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니 사람은 김독자가 마왕화를 풀 수 없는 저주나 병이나 히든 시나리오에라도 걸려있나 의심했다. 그 어떤 사람은 바로 유중혁이었다.

결국, 풀풀 날리는 깃털과 볼 때마다 거슬리는 뿔을 참지 못하고 유중혁은 김독자를 불러냈다.

혹시 네가 마왕화를 풀 수 없는 이유라도 있다면 당장 말해라.

그러나 대답은 간단했다.

나 풀 수 있는데?

그러더니 주변을 좀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김독자는 마왕화를 풀었다. 날개가 줄어들더니 어느새 날개뼈 속으로 다시 쑥 들어가고, 뿔도 작아지는가 싶더니 다시 작고 단단하게 뭉쳐 두개골 속으로 파고들듯 사라졌다. 그리고는 얄밉게도, 김독자의 몸은 쏙 하고 유중혁의 품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태연하게 제 몸 안을 파고드는 연인을 내려다보며 유중혁은 헛웃음을 지었다. 마왕화를 푸는 데에는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고, 김독자는 언제든지 그 상태를 없앨 수 있었다. 그럼 지금까지는 대체 왜?

내가 저번에 말하지 않았냐, 이미지메이킹 한다고?

유중혁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가오를 잡는다 파'의 추측이 어느 정도 맞는 모양이었다. 유중혁은 어이가 없어서 인상을 썼다. 김독자를 껴안아 두른 팔과 어깨를 잡은 양손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소꿉놀이라도 하자는 건가? 그렇게 마왕인 척 한다 해서 네가 마왕이 아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나도 그걸 잘 알고 있다.

무슨 소리야, 중혁아, 나 진짜 마왕 맞잖아.

김독자는 정색했다. 유중혁도 김독자가 마왕인 사실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구원의 마왕이라는 그 별난 수식어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수식과 지위가 김독자의 종種까지 결정한다는 건 와닿지 않았다. 무엇보다, 유중혁의 품 안에 느껴지는 김독자의 팔과, 허리의 모든 감촉은 선연히 인간의 것이었다.

…하지만 너는 인간이잖나?

스타스트림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김독자는 분명히 마왕이 맞았고 그걸 부정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김독자를 보며 네가 마왕이니 아니니 하는 것은, 회귀를 3회차나 한 유중혁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웠다. 어느 날 단짝 친구가 대기업의 회장이 되었다며 눈앞에 그를 불러와서 얘가 회장님이라 생각하려면 누구라도 어색할 것이다. 그런 마당에 인간을 보고 마왕이라고 칭하는 것은 난이도가 더했다. 김독자는 근본적으로 인간이었으며 김독자가 마왕이 되었든 성좌가 되었든 그 사실은 유중혁의 마음속에서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았다고 유중혁은 생각했다. 머릿속에 붙박인 것들은 과학적인 사실을 논하기보단 철학적인 명제에 가까웠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사랑하는 인간이었고 동료들이 사랑하는 인간이었다. 그 명제에서, 김독자는 유중혁이 사랑하는 '마왕'이었다라는 식으로 말을 바꿔 넣기는 쉽지 않다. 문득 유중혁의 마음속으로, 현 상황에서 김독자의 '인간성'이라는 것이 어디까지 훼손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인간이었던 시절은 지났지.

그런 유중혁에게 김독자의 작은 중얼거림은 너무나도 이상하게 들렸다. 정말로 자신이 인간이 아니게 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났다는 투였다. 인간이 할 소리가 아니다. 스타스트림 세게에서 마왕이 되었다면, 그는 더이상 인간이 아니어야 하는가? 유중혁이든 김독자든 가진 힘의 크기만 따지자면 이미 인외의 범주에 속하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김독자가 계속해서 인간성―성격의 문제가 아닌 속성의 문제로―을 지닌 존재길 바라는 것은 사치일까. 유중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묘한 상상에 사로잡혔다.

그렇다고 해서…너는 정말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왕이 될 생각인가?

아니, 마왕은 그래도 어감이 좀 나쁘잖아?

그럼?

돌이켜보면 참 어린아이 장난 같은 말들이었다. 그러나 김독자는 태연했다.


나는 신이 될 거야.


어느 날부터 김독자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믿을 만한' 존재로 소개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말 한마디로 시작되었다.

나를 믿지?

사람을 구하고 나서 속삭이는 아주 작은 말들.

네가 힘들 때면, 구원의 마왕을 생각해. 내가 하늘에서 널 내려다보고 있을 테니까.

네가 어디에 있든 내가 꼭 구해줄게, 같은, 실제로 명백하게 불가능한 범주가 아니라, 아주 두루뭉술하게 사람이 마음에 품을 수 있는 말들. 얼핏 들으면 감상적이고 대책 없는 삼류 소설 같은 문구들이었다. 구체적이지 않고 실효성도 없었다. 대체로 유료화된 지구에서 아등바등 살아온 십대들이나, 어린 시절부터 지나치게 위험에 노출되어 정서가 불안정하게 자라가고 있던 어린아이들에게는 이 싸구려 신파가 잘 먹혔다.

그보다 좀 더 나이를 먹은 사람들은 조금 사고방식이 달랐다. 팍팍한 삶에 지쳐서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대수롭잖게 들으며, 그러든가, 하면서 넘겼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구원의 마왕은 동네 시정잡배들보다 못한 선전 문구를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다녔는데, 이를테면 힘들 것 같은 상황에선 구원의 마왕의 이름을 대라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패왕이나 구원의 마왕을 사칭하는 이들은 많이 있었으니, 별다를 것도 없어 보였으나 이번엔 장본인이 승인했다는 점에서 상황이 조금 달랐다.

구원의 마왕에게 직접 허락을 받은 이들은 그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조금 더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이들은 구원의 마왕이라는 칭호를 입에 달고 살면서 스스로를 그의 추종자로 자칭하였다. 일단 구원의 마왕의 휘하에 있으면 다른 이들이 쉽게 건드리지 않을 거라는 계산 하였다. 실제로 그렇다고 해서 김독자가 늘상 그들의 편을 들어주거나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진 않겠지만, 피상적인 지위는 실재적인 힘을 가졌다. 명분 하나만으로도 강자의 편에 서 있다는 안도감이 플라시보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실제로도 구원의 마왕의 이름을 대고 나니 굳이 강자의 추종자를 건드리려는 사람들은 없었다. 크게 복잡한 원한 관계가 없는 어중이떠중이 정도는 쫓아낼 수 있는 위력을 가진 이름이었다.

게다가 구원의 마왕은 타인이 보기에 너무나도 상징적인 존재였다. 인간의 몸으로 성좌가 된 보기 드문 이였고, 다른 인간들에게 제법 호의적이었다. 무자비하게 사람을 지배하거나 통제하려 들지 않았다. 지금껏 김독자가 취해왔던 행적이 다시 들춰지고 분석되면서 그가 사람들을 올바르게 대한 이야기도 다수 재평가되었다. 여태껏 서울의 화신들이 불가능한 시나리오를 깨 온 것도 그의 주도 덕분이었으며, 남의 목숨을 귀히 여기지 않는 패왕을 달래서 사람들을 지키게 만든 것도 그라더라. 어느 정도는 진실이라서 일일이 반박하기도 어려운 사실들이 입에서 입을 타고 넘어가며 구설수를 만들었다.

생겨날 법한 당위가 넘치는 구설수들 위에, 김독자의 실제 행동이 위력을 얹었다. 김독자는 고의로 '구원의 마왕'을 연호하고 추종하는 이들의 문제를 몇 번 해결해 주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에서 구해주고, 가난한 이들에게 코인을 물 쓰듯 뿌렸다. 소문은 입에서 입을 타고 넘어가며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 소식 들었어? 구원의 마왕이 신대방에서 어떤 사람들 도와준 거. 그 사람들 전부 구원의 마왕 추종자래. 저번에 하남시에 구원의 마왕을 연호하던 사람들한테 코인이 엄청나게 떨어졌다는데. 성좌 구원의 마왕이 직접 후원했대. 에이, 그거 사실이야? 그런 헛소문 함부로 입에 담다가 죽는 거 아니야? 아니야. 구원의 마왕 본인이 좋아한다는데. 무슨 함정 아니고? 아니, 그 이름만 믿으면 된다더라? 야 생각해봐. 애초에 그 성좌 이름부터가 구원이잖아. 왜 하필 그런 수식언이 붙었겠어? 뭔가 도울 만한 그릇이니까 그런 수식언을 가졌겠지.

사람들의 이야기에 살이 붙으면 붙을수록 이야기의 형태는 근본 없는 호감으로 변모했다. 살기 어려운 세상에선 그런 영웅적 미담 같은 건 남의 이야기로 치부할 줄 알았는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기적의 출현에 목말라 있었나 보다. 그들은 구원자를 찾았고 구원의 마왕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꿈을 꾸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다른 종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구원의 마왕을 추종하는 자들은 힘을 얻어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



동료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김독자 컴퍼니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은 김독자의 그 모든 행적을 국회의원이 선거 전에 사람들에게 잘해주는 것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였다. 조금은 꺼림칙해 했고 진의를 의심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선거가 있길래 그래요? 정희원이 물었으나 김독자는 싱긋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미 김독자로부터 대강의 이야기를 들은 유중혁의 속만 불안했다.

네가 지금 하는 일들이 잘하고 있는 건지, 네 생각이 실제로 가능한 건지조차 잘 모르겠군, 나는…….

할 수 있어.

김독자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 사고뭉치가 그렇게 딱 잘라서 해낼 수 있다고 하니까 그게 더 불안했다. 유중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종교라도 만들어낼 셈인가?

그것도 만들 거지만 최종 목적이 그거인 건 아니야. 이야기가 풍부하지 않은 신앙은 껍데기일 뿐이지. 종교의 형태가 세워지면, 그 다음엔 으레 신이 가질 만한 극적인 이야기를 만들 차례야. 곧 우리의 힘이 될 수 있는 거짓 설화들 말이야. 이를테면 태어나면서부터 바로 걷고, 일어나, 말할 수 있었다든가. 천 리 밖의 사람을 쏘아 맞히는 내기에 승리했다든가. 자신의 화신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 죽었다가, 3일 후에 부활한다든지. 모두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시나리오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는 운명적인 등장 씬 같은 것.

신이 되기를 원하는 자가 말하는 것치곤 죄다 잡스러운 복제품이었다. 어디선가 다들 한 번 정도 들어봤을 법한 흔한 신화들에, 실현 가능성도 작았으며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이야기는 어떻게 퍼뜨릴 건가?

모두가 알다시피 어쭙잖은 시나리오는 성좌들의 매서운 눈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

진짜로 그런 일을 벌이거나, 소문만 만들어내도 되겠지. 어릴 때의 무용담이라든가.

너는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것 같군. 네 나이가 벌써 스물여덟인데 어릴 때 이야기를 지어낸다고 누가 믿나?

야, 사람들은 생각보다 바보야. 예수는 아주 미천한 곳에서 태어나서 서른까지 역사에 기록될 만한 특별한 업적도 없이 자랐어, 알아? 그 말인즉슨 그보다 서너 살은 더 어린 내 지금도 늦지 않았단 거야.

유중혁은 이제는 김독자의 태연스러움이 조금 소름 끼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있잖아, 사실 사람은 생각보다 단순한 생물이라서 별거 아니어도 좋으면 금방 껌벅 넘어간다니까. 사실은 이런 이야기들을 굳이 만들어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어. 눈앞에서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사람들은 알아서 나를 믿기 시작할 테니까. 숭배가 시작되면 설화는 절로 자라나. '구원의 마왕'은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내기에 참 적절한 수식언이지, 아니야?

그래 뭐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김독자는 유료화된 지구에 있는 거의 모든 화신과 겨루어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한 축에 속했으며, 사람들에게 보이기에 꽤 멋들어진 스킬이나 속이기에 유용한 특성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김독자의 일부 특성이 조금만 더 강력했어도 그는 충분히, 자신이 반신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판타지 소설 속 세계에서 이야기하는 반신이니 뭐니 하는 것은 실제의 '종교'나 '신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들은 그냥 어떤 영웅이나 인외를 의미했다. 사람들이 진심으로 믿고 안식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신앙의 대상이 되려면 조금 더 다른 것이 될 계기가 필요했다.

김독자는 끊임없이 고민했으며, 유중혁은 그 모든 것이 탐탁지 않았다.


이 세계는 시나리오와 개연성과 설화가 지배하는 세계지. 거짓 설화를 기억해? 아무리 거짓 설화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믿고 생성하다 보면 그 거짓도 진짜와 같은 힘을 가진단 말이야. 누가 그것을 무너뜨리려고 억지로 파헤치지만 않으면, 그 이야기를 믿는 모든 사람을 뒤엎을 만큼 정면으로 큰 힘을 가지고 폭로해버리지만 않으면 종교는 무너지지 않아. 결국 아무리 이야기하고 이야기해도 자기가 믿기로 결정한 것을 끝까지 믿기로 하는 사람은 늘 어디에나 남아있으니까.



그리고 상황은 정말 김독자의 말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소문은 점점 몸집을 비대하게 키우며 주변의 모든 것들을 잡아먹었다. 예를 들어, '구원의 마왕'의 추종자와 관련된 사건이 있었던 장소의 모든 역사는 마왕의 것으로 변모했다. 그 지역에서 다른 화신이 베푼 선행도 마치 구원의 마왕이 그랬다는 듯 퍼지는 식이었다. 추종자들 중 일부는 직접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여 그런 일을 하였으나, 나머지는 죄다 자신들이 '믿는' 행위 자체에 심취하여 자발적으로 이야기를 부풀려냈다.

내가 그의 이름값을 쓰고 있는 게 허튼일이 아니라니까?

각지에서 구원의 마왕 이야기가 들렸고 구원의 마왕은 신출귀몰한 구원자가 되었다. 모든 이야기가 실제는 아니었으나 그중에 진담이 몇 개 섞여 있는 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본격적으로 판이 커지고 거의 모든 사람이 구원의 마왕이라는 이름과 그 행적을 똑똑히 기억하게 되자, 김독자는 본격적으로 자리에 나섰다. 그렇게 추종자들과 사람들 사이에선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이번 주 토요일 저녁, 서울 광화문에 구원의 마왕을 외치며 모이면 코인을 준다는 것이다.

소문의 출처와 진위가 불분명했으나 사람들은 광화문으로 갈 채비를 했다. 그런 소문이 진짜가 아닐 거라고 해도 모두가 휩쓸리면 에이 설마, 나도 혹시? 하는 게 사람 마음이었다. 적어도 만약 소문이 사실이었을 시 나 혼자 코인을 못 받는 억울하고 분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겨우 거주지를 나섰다. 그래 밑져야 본전이지. 안 그래도 살기 팍팍한 세상에 이런 이벤트라도 벌이는 괴짜가 진짜로 있을지 누가 알아?





그리고 정말 하늘에서 코인이 떨어졌다.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먼저는 한 번 무작위로 떨어지고, 그다음부터는 구원의 마왕이라는 수식언을 더 크게 외치는 자들에게 돈주머니가 날아갔다. 김독자 같이 코인을 어마어마하게 가진 이가 그 이름만 입에 담으면 돈을 준다. 맨 처음 사람들은 환호했으며, 직후에는 눈이 시뻘게져서 달려들고, 나중에는 왜 나한테는 코인을 안 주느냐고 항의했다. 순식간에 피를 튀기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코인을 줍기 위해 서로를 밀치고 밟고 때리고 물어뜯었다. 김독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들의 변화를 '내려다보다가' 싸움이 격화되는 결정적인 순간에 휙, 날개를 펼치며 격을 발산했다.

그만.

별다른 힘이 없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격에 압도되어 뒤로 몇 발짝 밀려났다. 서로를 상처입히던 무리조차 한순간에 행동을 멈췄다. 힘을 최대로 발산하는 김독자 앞에서 몇몇은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기어이 무릎을 꿇었다. 김독자는, 이미 일반적인 인간의 규격을 벗어나 있었고 이 유료화 세계에서 살아남은 대다수 사람들과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힘의 소유자였다. 그날 그 광화문 광장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평소에는 조용히 시나리오에 해당하지 않게 살며 목숨만 부지하려고 애쓰던, 민간인에 가까운 이들도 많이 나온 터라 더더욱 힘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모두의 손바닥에서, 등에서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그제야 사람들은 눈앞에 서서 코인을 뿌린 자가 얼마든지 자신들을 개미 밟아 죽이듯 쉽게 죽일 수 있는 거대한 존재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했고, 그 거대한 존재 앞에서 난장을 부린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느꼈다.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김독자의 눈치를 보았다. 행여나 그의 심기를 거슬렀을까 봐, 그가 다른 강자들처럼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할까 봐 긴장했다. 구원의 마왕은 아주 친절하다던데, 하고 퍼졌던 소문을 되씹으며 위안 삼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 혼란 속에서도 제법 감격한 눈으로 흔들림 없이 구원의 마왕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 그들은 구원의 마왕의 추종자들이었다.

내가 '왜' 여러분에게 코인을 주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사람들은, 최악의 것을 상상했다. 멸망 이후에 여러 가지 자원이나 코인을 인질로 잡고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었기 때문이었다. 돈을 달라거나, 몸을 달라거나, 일해 달라거나, 누구를 죽이라거나, 무엇을 가져오라거나. 요구할 수 있는 건 끝도 없이 많았다. 몇몇 사람들은 성급하게 판단하여 벌써 싸울 자세를 취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시나리오에서 살아남길 바랍니다. 그렇기에 저는 여러분을 전폭적으로 도울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을 돕기 전에 여러분이 저에게 주셔야 할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김독자의 다음 말이 나오기도 전에 실망하였고, 에이 그럼 그렇지, 역시 속셈이 있었어, 하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자리를 곧바로 떠나지 않고 기다린 것은 순전히 그 다음 말이 이어지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포칼립스 세계에서도 죽지 않고 여태 건재한 호기심의 탓도 있었다. 그러나 다음 말이 나오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예측한 것과 전혀 다른 것을 김독자가 요구했기 때문이다.


저는 여러분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

반신반의하는 술렁임과 웅성임이 사람들 사이에서 커져갔다.

네. 믿음이요. 여러분이 저에게 신앙을 가져주시면 됩니다. 돈이나 다른 아이템 같은 것은 일절 필요하지 않아요. 이미 구원의 마왕에게는 그런 것이 차고 넘치니까요. 여러분은 어떤 방식으로든, 저를 도울 수조차 없습니다. 단지, 여러분은 저를……믿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허튼소리라고 치부했고, 누군가는 낭만적인 거짓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멸망 이후의 세상에 익숙해졌으며 구원의 마왕의 위상이 어떤지 오래간 들어온 사람 대부분은 계산기를 두드렸다.

다른 건 바라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제가 여러분을 구원하리라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저는 족합니다.

계산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여러분이 절 믿는다면, 저는 여러분을 도울 것입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믿음은 공짜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잠시 침묵이 돌았다. 김독자는 생긋 웃으면서 고개를 까딱였다. 그 움직임에 맞춰서 미묘하게 움직이는 날개나, 달린 뿔, 새하얀 피부, 이 험난한 세상에서도 흠집 하나 없이 완벽하게 순백색을 유지하는 코트까지, 김독자의 모든 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그런 자가 비현실적인 형태로 비현실적인 말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 게 뭐지?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이죠.

김독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거짓 같은 진담이었다.


광화문 모임 이후에도 구원의 마왕이 주는 도움, 힘, 코인은 건재했다. 점차 더 많은 사람이 구원의 마왕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추종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갔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구원의 마왕은 조금 더 노골적으로 '믿음이 좋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집중하였다. 사람들은 앞다투어서 구원의 마왕 추종자의 대열 첫 번째에 서려고 애를 썼다. 어찌 보면 참으로 괜찮은 선순환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구원의 마왕에게 집중적인 후원을 받은 열렬한 추종자들은 이전보다 힘을 얻고 마찬가지로 다른 추종자들을 돕기 시작했다. 이유는 구원의 마왕이 그러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조건은 단 한 가지, 구원의 마왕을 '믿는' 사람이기만 하면 됐다. 믿기만 하면 그 친절을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더욱더 열심히 마왕을 믿으려고 했다.

그러나 구원의 마왕은 아주 자비로워서, 아주 가끔은 이벤트처럼 '믿음이 적은' 자들의 위기에 손길을 내밀어 주기도 했다. 어디서부터 그런 단어가 튀어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추종자들 중 구원의 마왕과 가장 많이 접촉한 자로부터였을 것이다. 그 자가 맨 처음 그 단어를 쓰기 시작하자 사람들도 모두 다 그 단어를 따라 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마왕의 손길을, '축복'이라 불렀다.


사태가 그쯤 되자 유중혁은 김독자의 말을 인정하기로 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바보였다. 아니, 애초에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였으며, 어설픈 맹신에 휩쓸리는 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비인간적인 건지도 몰랐다.


김독자의 추종자들은 남을 도왔고, 힘을 합쳐 시나리오를 깨어갔고, 코인을 나누어 공동체처럼 생활하기도 했으며, 서로 봉사하고, 공동으로 어린아이를 기르기도 했고, 그리고 아주 가끔 구원의 마왕의 위대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들은 일절 남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았다. 단지 가끔 구원의 마왕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마왕을 믿기를 권유하며, 목적이 분명한 도움을 주었을 뿐이었다. 받은 사람으로서도 아주 나쁜 일은 아니었다. 구원의 마왕 이야기를 조금 들어주기만 해도 아이템이나 코인이 떨어지는데 마다할 일이 있겠는가? 구원의 마왕교는 결코 나쁜 일을 한 적이 없었다. 구원의 마왕의 원칙은 항상 철저해서, 함부로 타인을 죽이지 않고, 정의를 수호하고, 선을 지향하고, 남을 돕고 봉사하며 양보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이 모든 지향점이 멸망 이후에 일어났던 하고많은 종교와는 달랐다. 그들은 순진한 선의 이상향을 그대로 이 아포칼립스에 실현해냈으며, 실제로 구원의 마왕이 가진 힘과 재력이 영향력을 끼쳤기에 그 모든 것을 실재하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 조금 조악하고 모조품 같더라도 그들의 에덴동산은 겉보기에 제법 잘 돌아갔다.

입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처음 소식을 듣고 추종자들 사이에 끼어 떡고물이라도 얻어볼까 기웃대는 이들도 많았다. 몇몇은 이득만 취하고 달아나길 성공하기도 했으나 대개는 실패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구원의 마왕을 진심으로 '믿지' 않았고 그저 공동체에 껴있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믿음이라는 게 일견 소꿉놀이 같아 보였어도,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진지했다. 특히 추종자들 안에 오래 있던 사람일수록, 고위층에 속하는 사람들일수록 더 그랬다. 그들은 구원의 마왕을 진심으로 믿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상냥히 달래며 믿기를 종용했고 그래도 넘어가지 않거나 누군가가 구원의 마왕을 모독하면 진심으로 화를 냈다. 그들이 누리고 공유하는 것이 계속되기 위해선 구원의 마왕 역시 이 세상에서 진짜여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서로의 순수성을 증명하기 위해, 보다 순수한 믿음인지를 확인하는 작업 역시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 모든 검열은 추종자들 사이에서 자체적으로 이루어졌다. 구원의 마왕에 대해 충성할수록 고위층 추종자들에게도 자연스레 깍듯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공동체에 끼어들어 가본 사람들은 주변인들의 끊임없는 강요 아닌 강요에 점차 세뇌되어 갔고, 어느새 진심으로 구원의 마왕을 믿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내부에서 지켜지는 규율들이 다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었으며 선해 보였으므로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보였다. 하루하루 생존이 위험하고 가족조차 믿을 수 없던 세상에서 구원의 마왕 하나 믿어서 거대한 그룹에 속하고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면, 손해를 볼 게 없는 장사였다.

그런 식으로 구원의 마왕을 '섬기는' 추종자들은 늘어만 갔다.


김독자는 알고 있는 멸살법의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의 열렬한 추종자들이 단기간 내에 수월한 레벨업을 하도록 도울 수 있었으므로, 그들 그룹의 성장은 빨랐다. 추종자들은 자신이 구원의 마왕에게서 전달받은 고급 정보들을 '진리'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진리는 아주 일부의 상위 계층―그들은 결코 상위나 계층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그것은 김독자에 대한 신앙의 크기로 판가름하는 계층이 맞았다―만이 공유하는 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상위의 추종자들을 따라 구원의 마왕에 대해 더 알고자 하고 열심히 믿으려 애쓰는 이들 역시 진리의 일부를 공유받았고, 다시 그 밑의 열렬한 애쓰는 이들이 또 그 일부의 일부 진리를 공유받았다.

믿음은, 계급제였다.

김독자는 마치 기업 총수가 자신이 후원하는 고아원에 방문하듯 구원의 마왕을 섬기는 모임에 얼굴을 내비쳤다. 잊지 않고 계속 들르긴 했지만 절대 주기적이진 않았다. 예측하지 못할 때 가야만 그들이 조금 더 감동한다는 이유였다. 그리고는 거기서 어떤 '진리'를 설파하고 온다. 자신의 추종자 중 열렬한 자들에게만 멸살법에 나온 정보를 조금 주고, 나머지 다른 사람에게는 되도 않는 위로되는 말을 해주는 정도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그런 게 아주 잘 통하는 모양이었다.



몇 번째였나 김독자가 그곳에 갔다 온 직후 유중혁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하듯 말을 내뱉었다.

김독자, 미쳤군.

중혁아 내가 왜? 내가 뭐 잘못하고 있어?

사람이 신이 된다는 소리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은 당연히 잘못이다.

김독자는 눈을 껌벅였다. 그러더니 유중혁을 빤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그게, 뭐, 나빠?

'나쁘냐' 는 말에는 유중혁도 할 말이 없었다. 기실 유중혁을 비롯한 모든 동료가 김독자의 행동에 대해 뭐라고 지적은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었다. 김독자를 '섬기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도 아니며 이 세상에서 하나의 생존방식을 이루는 긍정적인 공동체였기 때문이었다. 김독자 하나만의 문제라면 몰라도 이미 그 종교에는 너무 많은 사람의 삶과 이해관계가 얽혀있었다. 속으로는 이상함을 느낀 사람들이라도, 그래 네가 거기서 안정감을 찾으면 됐지 하고 그들에게 그들의 종교를 부정하는 이야기를 해주기를 포기했다. 한 번은 정희원이 김독자를 붙잡고 진지하게 그 사람들을 해체시키라고, 이러는 것은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화를 낸 적이 있었다. 김독자는 침착하게 이야기했다.

희원씨, 스킬 한 번 발동시켜 볼래요? 스타스트림이 나를 악으로 규정하는지 아닌지. 희원씨는 절대 저를 단죄할 수 없을걸요. 내 추종자들이 만들어내는 선순환을 봐요. 내가 메시아인지 아닌지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모이지 않던 사람들이 모이고 서로 돕지 않던 사람들이 서로를 돕고 행복하지 않던 사람들이 나 덕분에 행복해하잖아요? 그게 뭐가 나쁘죠?

실제로 구원의 마왕을 섬기는 종교는 점점 더 위세가 커지고 있었다. 또한 자원과 봉사, 지원도 끊이질 않았다. 후원이 짭짤했다. 개미 떼만 한 사람들이 모여 일개 성좌 하나인 김독자를 섬기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을, 성좌들이 너무나도 재미있어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종교가 생겨나고 순탄하게 커가는 과정들은 제법 볼 만한 유희 거리였고, 성좌들은 쉽게 코인을 후원했다. 이제 공동체의 사람들은 그런 종교 활동 중에 후원받는 코인조차도 구원의 마왕이 주신 은혜라고 일컫기 시작했다. 아니 코인을 후원해 준 건 난데 왜 그게 마왕 덕이래, 몇몇 성좌들은 가끔 불쾌해하긴 했으나 그것마저도 성좌들에게는 하나의 유흥이자 관전 포인트이기도 했다. 인간들의 맹신이 탄생하고 돌처럼 굳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바야흐로 전 스타스트림 채널에 유례가 없던, '종교' 컨텐츠가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미친 소용돌이 속에서 김독자는 단 한 번도 정희원의 기준으로 단죄할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

성좌들은 김독자를 악으로 규정짓지 않았다.


그럼 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지? 굳이 이렇게까지 거짓을 전파해야 하나?

유중혁의 말에 김독자는 팔짱을 꼈다.

중혁아,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이러는 것 같아? 이제 뒤로 갈수록 시나리오는 우리의 능력으로 깨기 힘들어져. 방법이 없어. 비약적으로 강해지는 것 외에는 할 방법이 없다고. 그리고 우리는 한계에 다다랐어. 나는 그냥 신들이 소유한 급의 설화를 얻기 위해 일종의 책략을 부리는 것뿐이야.

끔찍하군. 네 방법은 책략이라고 부르기도 아깝다. 네가 하는 일은 거의 중상모략이지.

중상은 없으니까 그냥 모략이야. 아니, 내 일이 모략이라고 부를 정도야? 나는 거짓말을 했을 뿐이지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있진 않거든. 그러니 모략도 아니지.

아니, 남의 인생 진리로 거짓을 믿게 하는 건 분명히 해로운 일이다.

하지만 김독자는 한사코 남을 해롭게 한 일은 없었다.

유중혁, 긍정적으로 생각해봐.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원과 물자가 풍족하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투자하여 나를 따르고, 다른 사람을 도와줘. 내 종교는 누구를 해치는 게 목적이 아니야. 오히려 추종자들 내에서 가난한 사람을 돕고 힘든 사람과 함께하는 분위기가 엄청 당연시되고 있다고. 사람을 돕는 게 뭐가 나빠?

그 모든 기반이 거짓이지 않나!

거짓을 믿어도 그 거짓 신념으로 인해 선행을 베풀 수 있다면, 거짓을 믿지 않는 것보다 나은 거지. 중혁아, 위선도 선이야.

유중혁은 화를 내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식으로는 설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한참 동안 화난 눈으로 김독자를 내려다보다가 자리를 떠 버렸다. 무언가 잘못되긴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는데 그걸 어디서부터 집어내야 할지 감도 안 왔다. 후에 유중혁은 이때의 대화를 여기서 끝낸 것을 지독히도 후회하는데, 그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대화의 초점을 전혀 잘못 잡았다는 점이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하는 일이 거짓이거나 기만이라는 점에서 죄를 물으면 안 되었다. 유중혁이 집중해야 할 부분은 단 하나뿐이었다.



유중혁은, 그 종교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안 되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유중혁은 사라지는 김독자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야 했다.





구원의 마왕을 섬기는 종교가 커지고 커지다 못해 하나의 마을이 되고, 도시의 한구석을 메우게 될 때쯤이었다.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김독자의 모습은 점차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이내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변화였다. 이를테면 김독자의 몸이 조금 더 커졌다거나 손가락이 조금 더 길어졌다거나 하는 정도였다. 아저씨, 키 큰 거 같아요! 에이, 내가 나이가 몇인데 지금 키가 크냐. 그런 것치고 김독자의 키는 확실히 조금 늘어서, 유중혁보다 눈높이가 한참 아래에 있어야 할 게 조금 높아졌다.

김독자의 몸의 변화에 관해 제일 기민하게 반응한 건 단연 유중혁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김독자에 대한 주의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으나 둘이 자주 몸을 섞고 있는 관계였으니, 유중혁이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도 당연하다. 침대 위에 땀범벅이 되어 누운 채 유중혁이, 요즘 네가 뭔가 좀 다르다고 했을 때 김독자는 그게 뭐야, 어디서 보고 온 도발적인 대사 같은 거야? 같은 실없는 소리로 받아들였지만, 유중혁이 더 옳았다.

아니, 네 등 쪽 피부가 뭔가……딱딱해졌는데.

에엥. 피부 질환인가? 김독자는 심드렁하게 말하면서 돌아누웠다. 하지만 유중혁은 자신의 손에 와닿는 김독자의 피부 질감 자체가 달라졌다고 느꼈다. 불을 켜고 애인의 몸을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불을 켤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자니 김독자가 짜증을 낼 것 같았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존중하고자 가만히 있기로 하였고, 그래서 좀 시간이 지나자마자 바로 침대를 벗어나 날개를 펴고 뿔을 내미는 김독자를 보며 조금 짜증이 났다. 창문을 타고 넘어 들어온 달빛이 희미하게 김독자를 비추고 있었던 차였다. 시퍼런 조명 아래에서 검푸르게 빛나는 날개와 뿔의 윤곽은 굉장히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그걸 왜 또 벌써 꺼내나. 사람들이 보는 것도 아닌데.

맨날 꺼내고 다녀서 이젠 안 꺼내면 좀 허전해. 있는 게 원래 내 상태 같단 말이야.

…….

유중혁은 또다시 김독자가 지닌 인간성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김독자의 말은 무척이나 위험하게 들렸다.

그걸 꺼내고 다니니 효과는 좀 있던가?

장난 아니지. 대부분 일단 내 겉모습만 한 번 봐도 바로 납득한다니까. 아, 저게 우리가 섬기는 마왕이구나. 신이구나. 구원자구나.

유중혁은 단 한 번도 김독자가 구원자가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유중혁에게도 김독자는 절대적인 구원자였다. 유중혁 개인의 삶에서도, 세계 전체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하지만 김독자가 그 ‘구원자’라는 말을 할 때, 유중혁은 김독자가 까마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유중혁은 단 한 번도 김독자의 어떤 겉모습이나 외양을 보고 그가 자신의 구원자라고 느낀 적은 없었다. 유중혁은 늘 김독자를 알고 싶었으며, 구원자의 모습이 아닌 솔직하고 평범한 모습을 사랑했다. 또한, 그런 시시한 모습과 별개로 김독자를 자신의 구원자라고 분명히 여겨왔다. 유중혁이 들은 진실, 읽은 진실로는 김독자는 인간이었고, 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계약직 28세 남성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김독자는 김독자였고 대단한 마왕이나 메시아가 아니라 그저 유중혁을 구원한 김독자일 뿐이었다. 김독자는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유중혁이 전혀 모르는 김독자였다. 유중혁은 ‘그런’ 낯선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음을 깊게 느꼈다. 김독자가 절대 그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유중혁은 결국 성질을 부렸다.

존경을 독식하니 재밌긴 하던가?

다분히 비꼬는 의도가 가득한 말이었다. 김독자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있는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중혁아, 그거 내 거 아니야. 곧 네 것이 될 거야.

뭐라고?

유중혁은 되물었으나 김독자는 끝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네가 절대로 주인공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일은 없을 테니까.

유중혁은 김독자가 또 허튼 생각이라도 하면 죽여버리겠다는 생각을 하며 노려보았지만, 김독자는 어깨만 으쓱했다.

김독자.

어.

…사라지지 마라.

유중혁의 말에 김독자가 사뿐히 걸어서 침대로 다가왔다. 머리에는 뿔을 달고, 등에는 커다란 날개를 달고, 벗은 나신으로 서서 유중혁 쪽으로 상체를 굽히는 김독자는 정말 어떤 인외人外의 무엇 같아 보였다. 마왕은 대답 대신 입술을 부볐다. 유중혁은 인상을 썼다. 키스는 김독자가 대답하기 싫을 때 잘 써먹는 좋은 수단이었다. 이번에도 유중혁은 그 수단에 잠시 넘어가 주기로 했다.





별 소득 없이 그날의 대화를 무마하긴 했지만, 김독자의 몸의 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김독자 본인이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손가락이 기이하게 가늘고 길어졌으며 손가락 끝 피부는 닳고 흐려져 지문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직 티는 나지 않았지만 손톱과 머리카락도 조금 빨리 길고 있는 것 같았다. 김독자는 눈앞에 뜬 수많은 히든 시나리오 창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선택할지 가만히 생각했다. 멸망하기 전 지구에 문명이라는 게임이 있지 않았던가. 거기에서도 종교의 창시자 같은 업적은 있었다. 스타스트림에도 생각보다 이런 종류의 '업적'이 많이 준비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보상이 엄청난 히든 시나리오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다른 종교들이 흥하지 못한 이유는 보나 마나 하나였다.

이전의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몸을 사렸겠지.

다른 지도자들은 자신의 이득과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 범위 내에서만 자신들의 추종자들을 움직였다. 자기 친구나 가족까지는 버린다 쳐도 자기 자신의 안위까지 희생해가면서 히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여 종교의 위세를 늘리려는 자는 별로 없었다. 거의 다 군림만 하고 싶어 했던 가짜들일 테니까. 하지만,

제 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김독자는 두렵지 않았다.

김독자는 이 세계 이번 회차에서 시나리오의 결結을 보아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누구보다 강한 설화를 획득해야 했다. 아니, 생각해보면 이제 설화를 얻을 필요도 없었다.

설화는 이제 의미가 없다. 김독자가 정말로 신이 되면 될 일이었다.

김독자의 몸의 변화는 점점 더 가속도를 늘려갔다. 김독자는 유중혁과 관계하는 것을 알게 모르게 피했다. 이제는 정말 누구라도 김독자의 몸을 만지고 쓰다듬다 보면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시나리오가 급박하게 변해갈수록 좋은 핑곗거리가 생겨나서 다행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김독자의 몸은 앙상하게 말라갔다. 그리고 종종 혈관이 울룩불룩 튀어나오거나 뼈가 괴이한 형태로 구부러지길 반복했다. 원래부터 긴 팔에 긴 코트를 입고 있어 옷 바깥으로까진 티가 나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날개와 뿔은 눈에 띄게 커지고 있었다. 차츰차츰 자라났기에 계속 함께하던 이들에게는 큰 티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으나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김독자는 자신의 몸이 왜 변하는지 알고 있었다.


신은, 인간이 원하는 모습으로 빚어진다.

신은 인간이 원하고 기도하고 바라는 믿음의 형상대로 그려지니 어쩌면 그것은 구원의 마왕을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추악한지에 대한 방증이기도 했다. 종종 커다란 거울이 있는 곳에서 씻을 수 있게 되면, 김독자는 혼자 들어가 옷을 벗고 한참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데에 썼다. 이것이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이었구나. 앙상하게 말라 뼈의 골조만 남은 형편없는 육신에 거대하고 위풍당당한 날개, 불길하게 커다랗고 매끈하게 빛나는 구부러진 뿔, 눈빛만 형형하게 빛나는 얼굴. 그리고 예기치 못하게 여기저기 튀어나왔다가 들어오길 반복하는 살점들과 혈관. 딱딱하게 굳어지는 피부와 온몸에서 뱀처럼 돋는 비늘들.

사람들의 상상력이 어찌나 진부하고 잔인하고 다양한지, 김독자는 제 몸 위에서 그 모든 결과를 목도할 수 있었다. 각종 신화나 설화에 나올 법한 괴물의 형상이 김독자의 몸 주변을 에워싸고 천천히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그 모든 사람의 상상력이 하나의 집합체가 되어 실존하고 실재의 김독자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로,

믿음이 강력해졌다는 뜻이다.


때가 되었다.

구원의 마왕을 믿는 자들의 믿음이 스타스트림의 개연성을 충족하기 시작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가장 열렬한 추종자들은 단순히 본심을 숨기고 이득을 취하기 위해 그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공동체 내의 분위기에 감화되어서 자신들도 진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들 중에는 멸망하기 이전 세계에서 종교를 깊게 가졌던 사람들도 꽤 되었다. 그들은 익숙한 대로 추종하고 찬양하고 추앙하고 섬겼다. 그들이 만들어 낸 옛 종교들에서 쓰이던 단어―믿음, 축복, 신앙, 은혜 같은 것은 조금씩 변경만 되어 그들 공동체 안에서 그대로 쓰였고 그것은 열렬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감화되었다. 구원의 마왕은 그들을 부를 때마다 자신조차도 예상치 못한 엄청난 열기와 쏟아지는 신뢰에 자못 당황했다. 이 정도 광기라면 충분히 그 어떤 신화도 만들어낼 수 있을 법했다.

김독자는 그 어느 날 은밀하게, 자신의 가장 열렬한 추종자들을 불렀다. 그리고는 대뜸 질문했다.

여러분. 여러분은 저를 사랑하십니까?

앞뒤가 없는 질문이었다. 추종자들은 당황했지만 이내 곧 그렇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김독자가 다시 물었다. 저를 사랑해요? 또다시 추종자들은, 예, 예에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못 들은 모양이다 하는 순간, 또다시 구원의 마왕이 물었다.

저를 사랑하십니까?

세 번을 묻자 추종자들은 근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가장 열렬한 추종자로서 받는 시험인가 고민이 되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사람들은 우물거렸고 그 와중에 한 사람이 용기 있게 답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당신이 아십니다! 김독자가 그 대답에 웃었다.

그럼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겠네요.

김독자는 더는 괴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자신의 몸에 실제적 변화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멈추려면 기껏 만들어놓은 자신의 종교를 다시 박살 내야만 했다. 김독자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만 했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모든 것을 성공시켜서 확실한 힘을 얻어내야만 했다. 그들의 믿음을 그대로, 영원히 유지하면서 동시에 김독자가 영원히 신이 되어 살아남아 유중혁을 지원해야만 했다.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굳이 많지 않았다. 김독자는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절 믿으십니까?

예. 사람들이 대답했다. 김독자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다가 작게, 고마워요, 하고 맞받고는, 하나의 사실을 고백했다.

여러분, 제가 괴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놀라 숨을 들이켜는 것을 김독자는 보았다. 그들은 다시 혼란에 휩싸여 정적을 문 채로 서로를 곁눈질했다. 김독자는 곧이어 하나의 거짓도 고백했다.

당신들의 죄 때문에요.





김독자가 각종 민간 신앙과 원시 신앙들에 대해 열심히 탐독하고 있던 때였다. 유중혁은 한 번,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고 김독자는 태연하게도 끔찍한 이야기를 했다.

옛날 원시 부족들이 지내는 의식 중에는 죽은 사람의 살을 나눠먹는 게 있대. 먹으면 그 사람의 기억을 물려받게 된다고 믿는거야. 그 사람의 존재를, 영혼을.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나?

글쎄, 모르지…….

김독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확실히 남의 몸을 먹어서 기억을 물려받을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기억에는 강하게 남긴 하겠지. 내가 누구의 몸을 먹었구나 하는 건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경험이잖아. 그럼 아마 죽어서도 그 사람을 잊지 못할걸. 적어도 죽은 사람이 잊히지 않기 위해서는 최선의 방법이네.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아도 사람들은 죽은 이를 기억한다.

그러려나.

내 시체를 누군가 먹는다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하지만 중혁아,

대답하던 김독자의 눈빛에 설핏 욕망이 스치는 것을 유중혁은 기억했다. 유중혁은 당시에 그것이 무슨 욕망이었는지 구분할 수가 없어서 조금 의아했었다. 식인의 이야기를 하는데 욕망을 가질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때 당시에 김독자의,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있었음을 지금은 안다. 유감스럽게도 김독자는 굳이 그런 일이 없어도 유중혁이, 동료들이 김독자를 기억하고 그리워할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렇게라도 사람들의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된다면 짜릿할 것 같은데.

유중혁은 왜 그때에 내가 널 기억해주겠노라 이야기하지 않았는지를 후회하게 되었다.

그런 개죽음이 좋은가?

개죽음이라니. 중혁아, 스타스트림에선 죽어도 끝이 아니야, 알지?

종교를 찾더니 이제 내세라도 믿나 보군.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스타스트림은 개연성만 충족한다면 죽은 사람도 다시 살려내고, 죽은 사람을 다른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고. 내가 화신이 아닌 성좌가 되었듯이 죽음을 통해서도 사람은 다른 것으로 변하고 다른 존재로 되살아날 수도 있어.

그 당시의 대화를, 유중혁은 꿈에서 보고 있었다. 꿈 안에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유중혁과 김독자는 평화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유중혁은 뭐라고 말을 전달하려고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옆에서 괴물이 된 김독자가 유중혁을 붙잡고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어서였는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중혁아, 기억해.

…안 돼…….

내가 죽으면 신이 된다는 걸.





John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는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바쳐졌다고들 한다. 워낙 유명한 모티브라서 스타스트림의 시나리오에도 얼마든지 존재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는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이라고 흔히들 비유하는데, 보통 제사를 끝낸 제물은 제사를 지낸 이들이 나눠 먹게 된다. 그래서 ■■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며, 자신의 살이라고 상징을 부여했으며, 포도주를 나누어주며 이 역시 자신의 피라고 이야기했다. 이것이 성찬식의 유래이다. 이렇게, ■■는 죽음으로서 인간들의 죄를 사했으며, 그 죽음으로 온전해져서 비로소 가장 큰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내어, 그 이후로도 해당 종교는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인류의 꽤 많은 이들을 지배하는 '이야기'가 된다. 사람들은 그 신의 아들을 단 한 명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독생자獨生子라고 부른다.

그 이야기는 순전히 신이 내려보낸 단 하나의 아들 독생자獨生子의 희생으로만 이루어진 이야기이다.


독생자獨生子 생명生을 버리고 죽으면서 비로소 온전히 힘을 얻고 이루어진 이야기.

 

독자獨子는 조용히, 자신의 추종자에게 속삭였다.


…그러니 이걸 앞으로는 성찬식이라고 불러.

 




그 어느 날, 그 조악한 가짜 에덴동산에서는 피냄새가 났다.

아주 소수의 가장 광적인 추종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파티였다. 모두가 김독자를 한 조각이라도 더 가지려고 애를 썼다.

신에게 경배하라

모두가 미친 것 같았다. 아니, 그들은 정말로 미쳐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죽어서 더는 코인도 아이템도 나오지 않지만,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주고 마음의 위안을 준 그 사내의 일부분이라도 가지고 싶어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고 물어뜯고 내동댕이치며 달려들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신에게 경배하라

피부에 이상하게 돋아난, 도저히 인간의 것이 아닌 비늘들을 비위 좋게 칼로 도려내고 기형적으로 구부러져 돋아난 뼈에서 살점을 발라내었다. 나중에 주변에 뜬소문처럼 돌아다닌 이야기로는 온 대지에 피가 가득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사건이 일어났다던 그 땅을 골고다Golgotha라고 불렀다.

또는 극소수는, 아겔다마Akeldama라고도 하였다.




유중혁은 미친 듯이 김독자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김독자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아주 이상한, 아주아주 이상한 이야기들이 '구원의 마왕교'에서 들려왔다. 유중혁은 곧바로 흑천마도를 쥐고 그들의 본거지로 쳐들어갔다. 유중혁은 가자마자 김독자를 찾아낼 수 있을 때까지 모든 것을 부수고 난장을 부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유중혁은 그곳에 찾아가자마자, 자신을 본 사람들의 첫 마디를 듣고 아연해졌다.



사도가 오셨다!



그는 거기서 구원의 마왕의 사도였으며, 구원의 마왕의 아들이자, 형이자, 아버지이자, 구원의 마왕 그 자체였다.

그는 내 아들이자 내 형이자, 아버지이자, 나입니다.

김독자는 매 설교마다 단 한 번도 빠짐 없이 그 이야기를 해 두었다. 대체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많은 사람이 질문했으나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태도가 더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 사도'가 유중혁임을, 김독자 사후에는 모두가 알게 되었다. 가장 고위층의 추종자들이 갖고 있는 진리가 그것이었다. 김독자는 준비성이 좋았다. 자신이 죽고 난 이후에는 구원의 마왕교에 많은 혼란이 올 것이라는 사실은 예상하는 바였다. 그러나 아주 다행히도 구원의 마왕교가 실제로 보고 믿을 수 있는, 살아있을 '사도'는 이 세상에 존재했으며, 그 위상에 걸맞게 매우 강했으며 누구라도 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패왕 유중혁은 신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존재이며 여러분이 섬기고 도와야 할 사람이고,

가장 시나리오를 주도적으로 깨어가던, 구원의 마왕의 절친한 친우 유중혁이 그 사도라면 누구라도 납득할 것이다. 권력욕에 눈이 먼 고위층 추종자들도, 그들 중 실제적인 '신앙'은 없으면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이들조차도 내부 사정에 일일이 간섭할 리 없는 유중혁을 얼굴마담처럼 세워놓는 것에 반대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김독자는 말을 이으면서 이 모든 것은 사기극이었지만,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은 진실이라 믿었다.

인류의 구원자입니다.

그래야만 했다.

인류의 구원자 유중혁이 나와 여러분을 이용하여,

거대한 진실의 신화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약간의 거짓은 있어도 괜찮았다.


반드시 결結을 볼 거니까.

 

그것은 단지 거짓말이 아니라 김독자의 소망이기도 했다.




그 멸망한 세계에서도 유료화 이전에 크리스트교를 믿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삼위일체의 개념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으며 김독자가 유중혁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이해했다. 추종자 중 고위층은 유중혁과 그의 동료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만한 방법을 고민하였고, 고민하여 추종자들 사이에서 노골적으로 코인 성금을 모았으며, 그 성금의 반 이상을 자기들이 횡령한 다음 나머지만을 김독자 컴퍼니로 보냈다. 이제는 김독자가 없는 김독자 컴퍼니에서 코인을 전달받은 유중혁은 할 말을 잃었다. 이제 김독자는 누가 뭐래도 한 종교를 창시한 자였고, 그 종교의 신이었다. 그리고 그 종교는 유중혁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구원의 마왕이 남기고 간 유산으로서, 메시아가 지목하고 간 인류의 구원자로서.



그렇게 김독자를 섬기는 종교는 온전해졌다.




김독자의 사후에도 구원의 마왕교는 커져가기만 했다. 김독자의 존재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다시 볼 수 없었으나, 도처에서 모두가 김독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확히는, 사람들은 인간이었던 김독자, 화신이었던 김독자, 성좌 김독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신'인 김독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들은 사실로도 이루어지고 아닌 것으로도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사실의 비중이 조금 더 높은 듯했으나 이내 거짓이 '김독자'의 많은 부분을 채웠다. 사람들은, 세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김독자에 대하여, 손가락 하나에 산을 뒤엎고 강을 묻은 김독자에 대하여, 수많은 인간을 구원하고 제물이 된 김독자에 대하여, 전지전능한 김독자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더 많은 사람이 김독자에 대해 이야기할수록, 김독자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퍼질수록, 신화가 계승되고 전승되고 유명해질수록 김독자는 유중혁이 모르는 무언가로 변모했다.



김독자는 신이 된 대신 김독자가 아니게 되어가고 있었다.

 


유중혁은 언제든지 자신이 그 종교를 부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독자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것은 자신이었고 유중혁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폭로해서라도 그런 신의 탄생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유중혁은 심지어 그 종교에서 지목받고 전폭적으로 지지받는 구원의 사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유중혁은 입을 열지 못했다. 이 모든 일이 김독자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버려가면서까지 이루어내려고 했던 결과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목적은 이루어지기 위해 소유자를 짓밟기도 하는 법이었다. 더불어 그 목적을 추구한 자를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랬다. 어쩌면 김독자가 정말로 신이 되었다면, 스타스트림의 어느 세계에서는 신이 된 김독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스타스트림의 어느 차원에서는 신으로 살아있는 김독자를 만날 수 있다면, 유중혁은 그 종교를 파괴해서는 안 되었다. 계속해서 그 종교로 인해 만들어지는 김독자의 거짓 설화를 놔두어서라도 신이 된 김독자의 존재를 긍정해야만 했다. 그래서 신으로라도 김독자를 살려야만 했다. 그래야 어느 날 다시 김독자를 만나보기라도 할 수 있었다. 그 모든 사실을 철저하게 마음속에 박아넣은 유중혁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도는 김독자의 ‘성스러운’ 이야기가 고막을 넘어 들어오면, 유중혁은 귀를 파내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어느 날부터인가, 유중혁은 밤하늘을 올려다봐도 별들 사이에서 김독자를 찾을 수 없었다. 이젠 그가 별이 아니라 정말로 신이 되어서인지도 몰랐다.

구원의 마왕은, 그렇게 전설처럼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다가, 기록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그 기록을 새 시대의 성서라고 불렀다.


성서는 알음알음 잘도 퍼져나갔다. 추종자들 사이에서 그것은 신격화되었다. 진짜 신이 죽어버리고 현실에서 자취를 감춘 상황에, 고위의 추종자들이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좋은 선택이었다.

종종 추종자들 사이에서는 '영이 되신 구원의 마왕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것이 정말 구원의 마왕이 준 계시인지 아닌지 알 도리는 없었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한결같아서 의외로 신뢰성이 높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았다.


구원의 마왕은 정말로 죽어 전지전능한 신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다.


추종자들은 그것을 믿었다. 드디어 우리의 구원의 마왕이 죽음을 겪고 부활하여 진정한 신이 된 것이다. 그 모든 죽음은 진정한 신으로 거듭나기 위한 시련이었을 뿐이다. 이야기는 퍼즐같이 잘 들어맞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끼워 맞춘 결론에 크게 만족했다. 신이 된 구원의 마왕의 존재는, 종종 이전의 사람이었던 시절을 가리기 위해서인지, 조금 더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인지 호칭이 바뀌기도 했다.

구원의 마왕을 부르는 새 호칭은, 이계의 신격이었다.



또는,











은밀한 모략가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골고다: 십자가에 예수가 못 박힌 언덕의 이름

*아겔다마: 히브리어로 '피 밭',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목매어 자살한 곳







결국 어디에 한눈을 팔아도 글쓰기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문의는 side_n_table@naver.com

밋뜨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