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엘라가 ‘그믐’의 주인으로서 두 번째 그믐날을 맞이할 무렵은 더위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 가을의 초입에 막 들어서던 때였다.

 

 

“한 계절은 더 보내야 올 것 같기도 하네.”

 

 

미르엘라는 어젯밤을 회상하며 말했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야간 순찰 돌던 신성 기사와 함께 귀가하게 된 경험을 교훈 삼아, 명확히 ‘그믐’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 행인은 그믐밤에 ‘그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쳤건만. 첫 번째 그믐날에 못 보았던 낯선 악마들이 기웃거렸을 뿐, 역시 이번에도 인간 손님은 없었다. 하기야 원생 악마들이 아무리 교묘하게 말을 퍼트린다 하더라도, 수상쩍은 상대와 제 간절한 목표를 두고 거래하리라 쉽사리 마음먹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 터였다.

 

물론 미르엘라는 딱히 그들이 오기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비록 모든 중요한 갈림길의 결정자가 인간이란 이유로 애써 악마의 꾐을 막지 않을 만큼 이상한 윤리관을 지녔을지언정, 막상 제 가게에서 예비 범죄자가 나온다니 마냥 기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년 이맘때면 슬슬 바빠질 테고…….”

 

 

미르엘라는 상념을 떨쳐내며 리칸과 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앞으로 일 년 안으로 악마의 기운이 가장 짙은 마인들이 태어나기 시작한단다. 그리고 악마의 기운이 짙다는 건 그 피가 그만큼 진하게 섞였다는 뜻이다. 즉 악마와의 촌수가 가깝다.

 

리칸이 말하길, 인간 사이에서 애까지 보는 악마는 대개 원생 악마이다. 생겨난 지 얼마 안 되어 호기심이 충만한. 그런데 원생들은 힘이 부족하여 스스로 마계의 문을 열지 못하다 보니 마왕이 깨어나지 않는 동안에는 그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자면, 지금 이렇게 마왕이 버젓이 깨어 있어 마계가 활짝 열린 시대에는 악마의 기운이 가장 짙은 마인이 새롭게 탄생한다는 이야기다.

 

미르엘라는 비웃듯 짧게 헛숨을 뱉었다. 그가 마인을 보호하게 될 것이라는 뮈엘의 말은 이런 의미였으리라.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게 아니라 자연히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 것이라고.

 

그다지 친하지 않은 인간들에게 지킬 의리 따위는 없다. 하지만 미르엘라 역시 세상에 연고 없이 난 아이였으며 결국 누군가의 도움을 딛고 살아왔다.

 

스스로 원하여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본인 결정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하는 어른들이라면 덜컥 돕겠노라 마음먹지 않을 테지만, 어리고 약한 것들까지 쉽게 외면할 정도로 매몰차진 못했다. 타인의 관심 덕택에 거두어져 생을 이어온 사람으로서 더더욱.

 

놀랍게도 마왕은 도리를 아는 사람이었다. 선택적으로나마.

 

 

“후원자 노릇을 해야 할까? 그건 너무 수상하겠지? 어떻게 생각해?”

 

 

악마의 아이를 밴 인간은 뮈엘을 시켜서 찾을 수 있다. 시간이 걸리긴 하겠으나.

 

인간의 아이를 밴 악마는 굳이 찾지 않아도 된다. 그런 악마는 애초부터 없으니까. 물론 여성형의 악마가 임신을 하는 게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은데 어차피 열 달은커녕 열흘도 채 못 버티고 몸속을 비운단다. 필요에 따라 껍데기를 바꾸는 과정에서 사라지기도 하고.

 

 

“네. 개인적으로 연락을 취해 후원하는 건 수상쩍습니다.”

“차라리 보육원을 하나 짓는 게 어때요? 이 시국에 뭣도 모르고 애를 신전 보육원 앞에 갖다버리면 어떡해요.”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내가 공식적으로 나서기엔 좀 눈에 띄는 것 같아서.”

 

 

어지간하면 마계의 지배자인 자신의 흔적이 세상에 남지 않기를 바랐다.

 

미르엘라는 인간답지 않은 초월적인 요행에 기대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방식을 원했다. 마왕으로서의 은퇴, 즉 그의 사후도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다니케 씨가 있잖습니까. 그를 내세우세요.”

“아, 그러면 되는구나.”

 

 

표정이 환해진 미르엘라가 손뼉을 쳤다. 바로 이럴 때 부유한 마인 인맥을 써먹어야 했다.

 

물론 다니케한테 지원금까지 내놓으라 할 만큼 염치를 팔아먹진 않았기에 그간의 만물점 매상으로 해결하자는 결론이 나왔다. 마침 데이안 덕택으로 얼마 전부터 큰손처럼 보이는 자들이 야금야금 매출을 올려주고 있었다.

 

 

“근데 애를 버리지 않고 직접 키우는 사람도 있지 않나?”

 

 

다니케에게 간략한 계획을 미리 설명하려 편지를 작성하던 미르엘라가 멈칫했다.

 

 

“그럼 대신 돌봐준다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루 종일 돈도 안 벌고 아이만 보진 못할 겁니다. 가족이 따로 있다면 모르지만 어차피 그런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할 테고요.”

 

 

그리하여 수정된 미르엘라의 구상은 대충 다음과 같다.

 

수도 라쿠스는 그나마 형편이 나은 국민들이 많으며 중앙 신전의 보육원뿐만 아니라 사설 보육원도 더러 있으니, 일시적으로 아이를 돌봐주는 기관을 차려 마인을 최대한 모집한다. 물론 신전 또는 사설 보육원에 버려질 마인이 있다면 이쪽으로 빼돌려 키우도록 하며 그들을 돌볼 인력은 리칸과 류가 자란 공동체에서 차출한다.

 

마음 같아선 타 도시에도 여럿 설립하고 싶다만 그렇게까지 운영할 비용은 이듬해가 되어도 정당하게 모으긴 무리일 듯싶어 이 사안은 잠시 보류한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마저 다 쓴 편지는 류가 부치고 돌아왔다.

 

 

“역시 마왕님이 있는 시대는 좋네요…….”

 

 

조악하기 짝이 없는 계획뿐인데도 류와 리칸은 긍정적이었다.

 

미르엘라는 이쯤에야 왜 마인들이 악마는 싫어하면서 악마의 왕은 미워하지 않는지 비로소 이해했다. 오로지 마왕만이 마인의 정체를 알고도 꺼리지 않으며 또한 그들을 적게나마 돕는다는 까닭이다.

 

그러한 마왕의 공백이 그동안 지나치게 길었다. 미르엘라는 전대 마왕이 죽고 이십 년 뒤에 자각을 마쳤는데 심지어 전대 마왕은 예순이 넘어서야 겨우 마왕으로서 군림하다가 일흔일곱에 사망했다. 지난 백 년간 마계의 권좌가 공석이었던 기간이 훨씬 긴 셈이다.

 

악마의 계약자, 소위 방락자와 마인은 신성 의식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단지 악마와의 연결성, 그 악한 기운만을 탐지하는 것이기에.

 

그런데 대부분의 마인은 악마와의 계약은 고사하고 악마를 만난 적도 없다. 자신이 마인인 줄 모르는 마인들은 운 나쁘게 신성 의식에 걸릴 수도 있고, 자신이 마인임을 아는 사람들은 언제 잘못 걸릴까 두려워해야만 한다.

 

더군다나 마인은 방락자와 본질적으로 다르므로 정화 의식의 효과를 볼 수 없다. 물론 방락자들이 정화 의식을 통해 악마와의 연결성을 끊어낸다고 하여도 이미 악마에게 팔아버린 것을 돌려받을 수는 없기에 그 이전과 똑같이 살아가지 못한다. 그렇지만 마인들이야 이미 그렇게 타고난 핏줄을 정화하고 말 것도 없잖은가.

 

그런고로 신성력은 마인의 핏줄에 끊임없이 반응할 터다. 그들의 생명이 다하기 전까지.

 

 

“제가 그자의 청혼을 거절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인간이었으니까요.”

 

 

리칸이 이제 아무런 미련이 없는 것처럼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마인은 결혼을 잘 안 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령 하더라도 애를 안 낳으려 한다고.

 

그 피가 이어지니까. 악마의 기운이 티끌처럼 남아 대물림되니까.

 

 

“저 같은 마인들이 정체를 숨긴 채 인간을 만나 계속 자식을 낳다 보면 자기가 마인인 줄도 모르고 억울하게 잡혀가는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인들만의 공동체를 꾸리고 그 안에서 삶을 이어나가곤 한다. 물론 전부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란다.

 

 

“아주 먼 옛날엔 마인 사냥이 성행했대요. 역사에선 지워졌다지만…….”

 

 

옆에서 류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축 처진 눈썹이 애달파 보인다.

 

 

“저희처럼 모여 사는 마인들끼리는 알음알음 구전되는 이야기예요.”

 

 

부득이하게 원결교와 관련된 역사에 빠삭한 미르엘라조차 마인이라는 개념 자체를 마왕이 되고 나서야 처음 들어보았다. 애당초 악마가 이렇게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오직 추측만 무성할 뿐 명백한 근거에 의해 증명된 지식으로 전해지지는 않았다. 따라서 역사에서 지워졌다는 이야기는 확실히 그럴싸했다.

 

사냥이라는 행위는 우연한 발견이 아닌 의도된 수색으로부터 이어지는 살생이다. 아무리 악을 척결하려는 목적이었다손 할지언정, 선량한 신의 교리를 내세우는 인간들치고도 썩 떳떳하지 못했던 모양이라 삭제한 게 아닐까.

 

과연 역사를 지우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미르엘라는 곧 관심을 거두었다. 솔직히 강하게 책임감을 느끼지도 않고 그냥 눈앞에 있는 문제만 딱 밑바닥의 도리로써 꾸역꾸역 처리할 뿐이었다. 보육원이고 뭐고, 어차피 남의 이름 빌려서 돈만 보탤 참이다. 실무도 전부 남 시켜서 할 예정이며 몸소 무언가 열정적으로 행동할 생각은 없다.

 

다만 소망할 따름이었다. 적어도 그가 살아 숨 쉬는 한, 마인들이 단지 악마의 핏줄을 타고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온한 처사를 겪지 않기를.

 

이윽고 모든 것은 악한 세계의 주인이 바라는 대로 되리라.

 

 

“그것만으로도 고마워할 사람이 많을걸요.”

 

 

짙푸른 바다색 머리의 마인은 이렇게 말했으나 미르엘라는 무심히 글쎄, 하고는 말았다. 감사를 받는다면 기만이 아닐까 싶었다.

 

 

“그나저나 다음 주말에 전시회는 누구랑 가시나요?”

“누구랑 가냐니.”

 

 

미르엘라가 무슨 그런 질문이 다 있느냐는 듯 황당한 얼굴로 류를 돌아봤다. 그에 류가 더 당황하여 볼을 긁적였다.

 

 

“아니, 뭐, 그 신성 기사나…… 하다못해 저번에 따로 만나신 휘온 씨를 데려가실 줄 알았는데요…….”

“내가 그 사람들을 왜 데려가.”

 

 

재차 어이없어하며 흘러나오는 시큰둥한 대답.

 

이들이 말하는 전시회는 언제인가 데이안이 추천해주었던 튜헨 화백의 전시회다. 다음 주부터 디알브의 화랑에서 열린다. 어째서 르웰리아나 힐그란드처럼 번화한 동네를 놔두고 굳이 이 수도 변두리까지 와서 개최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여하간 마침 가깝기도 하니 돈 내고 가볼 심산이었는데 얼마 전에 운 좋게 입장권을 얻었다. 데이안의 소개로 ‘그믐’에 온 버금귀족이 웃돈 얹듯 주었더랬다. 너무 싼값에 귀한 골동품을 얻어 오히려 미안하다면서. 백작씩이나 되어서 직접 발품 들여 물건을 구하는 모습을 보면 어지간한 애호가 그 이상인 듯싶었다.

 

데이안이 뷰던 공작의 둘째 아들이라는 사실도 그 수집가 손님에게서 들었다. 그 손님이 뷰던 공작가의 방계라 데이안과 종종 교류를 나눈다나.

 

데이안이 귀한 집 자제일 줄은 옛적에 짐작했으나 막상 그 추측을 확인받자 신기하긴 했다. 진실 공방은 일단 뒷전으로 하고, 말로만 듣던 최초의 인간들의 후손 아니던가.

 

아이모르, 로챠, 뷰던, 히얀델, 루체드, 뤼휴르, 레윈, 바그윅, 예니츠, 시아즈, 티르뒬, 다론.

 

이 열둘이 라카이튼을 제외한 태초의 인간들이다. 방계로 갈라진 가문이나 공훈을 세워 세습 또는 종신 작위를 얻은 버금귀족보다 위에 있되, 황실의 라카이튼보다는 아래에 있는 으뜸귀족의 시조.

 

데이안 뷰던. 단연 고귀한 핏줄이다. 더구나 혼외자가 아닌 적자. 만일 데이안이 신성 기사가 아니었더라면 평민인 미르엘라로서는 말 한 번 섞을 기회가 없었으리라.

 

그렇다고 이 마계의 주인이 고작 그따위에 감지덕지할 만큼 감수성 짙은 인간은 또 아닌지라, 선물에 대한 감사 인사만 하고 백작 손님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뭐, 그 기사님 덕에 입장권을 얻었으니 빈말이라도 전해야 바람직하긴 한데.”

 

 

이미 당한 바가 있잖은가. 미르엘라는 더 이상 데이안의 기사도를 얕보지 않았다. 시간만 맞으면 같이 가주겠다고 해버릴지도 모른다. 그건 사양이었다. 물론 예의 바르고 말이 잘 통해서 친분을 다져도 나쁘진 않겠다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하르카인은 놀리는 재미가 있었는데. 미르엘라가 무심코 생각했다. 데이안은 그런 맛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입가가 올라간다.

 

장난으로 그 유년시절의 도움을 보답 받으러 오라 하긴 했으나 정말 보름이 훌쩍 넘도록 코빼기도 안 비추는 게, 참으로 ‘하르카인’스러운 행동 양식이라 웃기기까지 했다.

 

 

“어쨌든 너희만 데리고 갈 거야.”

 

 

덩치 큰 기사님을 놀릴 장난질이야 앞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어차피 현 세대의 신성 기사단은 미르엘라가 죽기 전까지 이번 임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엾게도. 여기저기서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는 어린 악마들 덕분에 바빠질 일만 남은 셈이다. 이제껏 명예를 누리며 나름대로 한가롭게 살아왔으니 이 정도 각오는 해두었어야 했다.

 

악마의 주인이 짓궂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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