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는 꽃봉오리를 맺었다. 여기저기 꺾꽂이라며 심은 귀스타브가 무참하게 잘라버린 가지들도 뿌리를 내렸는지 무사히 봉오리를 몇 개 맺고있었다. 귀스타브는 성당 계단에 걸터앉아 장미 덤불과 그 뒤의 하얀 성모상을 바라보고있었다. 플라망이 빨리 대화를 끝내면 좋겠다. 귀스타브는 멍하게 생각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내가 무슨 소리를, 미쳤지! 올리비에 플라망은 그를 찾아온 쥘 투레 경감과 대화중이었다. 잘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귀스타브는 왠지 지루했다. 


“그런데 저쪽은 누구야?”

“아, 새로 고용한 정원사. 그런데 사실 정원은 돌볼 줄 모른대.”

“그런데 왜 고용을 했어?”
“주님께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게 자신을 돕는 일이라고 했으니까!”

“신부 답다. 다 컸구나, 플라망!”


쥘 투레가 미소지었다. 울면서 성당 안뜰을 맨발로 돌아다녔던 게 어제같은데. 쥘이 말했다. 플라망은 툴툴거렸다. 좀 잊어! 그건 내 세 살 때 일이라고. 둘은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형제같은 사이였다. 성당 앞에 버려진 아기 플라망을 위해 집에서 염소젖을 짜다 준 이가 쥘 투레의 부모님이었다. 플라망은 성격 탓인지 친구도 별로 없었다. 쥘은 늘 플라망을 걱정하곤 했다. 신부가 되겠다고 했을 때에도 그는 동생처럼 걱정해주었다. 다행히 이렇게 훌륭한 성직자가 되어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라 가진 것 없는 이들을 걱정하는 사람으로 자랐구나. 쥘은 새삼 따스한 손길로 플라망의 어깨를 두드렸다. 친구도 생기고, 장하다! 플라망이 다시 툴툴거렸다. 친구 아냐!


“뭐야, 놀지말고 일 해!”

“다 했어. 돈이나 내 놔!”


플라망이 괜히 귀스타브에게 소리쳤다. 귀스타브도 지지 않고 외쳤다. 쥘 투레가 다시 미소지었다. 친구 맞네! 그가 차를 한모금 마셨다. 플라망에게 친구가 생겼다니 다행이야! 그때의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쥘 투레는 태평한 사람이었다.




“귀스타브…. 혹시 뤽 못 보았니?”


뤽의 어머니였다. 땅거미가 내려앉고있었다. 어두운 다리 밑이 한층 더 어둠과 물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이렇게 늦게, 아무 말 없이 안들어올 애가 아닌데…. 뤽의 어머니는 어깨에 두른 숄을 꾹 잡고있었다. 찾아올게요, 걱정 마세요. 귀스타브가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았다. 제가 찾아올게요. 귀스타브는 뤽의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다시 다리 위로 올라갔다. 아직도 쓸데없는 생각으로 돈을 벌러 갔을 것이었다. 뤽, 이 머저리! 귀스타브는 뤽이 차라리 술에 취해 어디서 자고있기를 바랬다. 뤽은 그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멍청하고 착한 놈이었다. 그리고 그를 가장 좋아해주는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동포들을 포함해서-은 귀스타브의 외모에 쉽게 다가왔다가 그의 까칠한 면모에 진절머리를 내었다. 뤽은 늘 그런 점에 상처받은 눈을 했다가도 어느새 와서 장난을 쳤다. 그런 점이 귀스타브에게 큰 위안이었다. 절대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어! 오~ 이게 누구야, 정원사가 된 내 친구 귀스타브 아냐!”

“뤽!”


다리 건너편에서 뤽이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었다. 귀스타브는 반가움과 분노가 뒤섞인 채 뤽에게 달려갔다. 이 멍청아! 귀스타브가 소리쳤다. 술냄새가 났다. 싸구려 연초 냄새. 귀스타브가 뤽의 오른쪽 겨드랑이쪽으로 손을 넣어 그를 부축했다. 고맙다, 고마워. 역시 친구가 최고야. 뤽이 혀 꼬부라진 발음으로 웃었다. 너, 술만 깨면 보자. 너희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알아? 귀스타브는 이제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의 단계를 지나 이 자식, 아주 혼을 단단히 내야 해! 의 단계에 접해있었다. 귀스타브는 아주 혼쭐을 내주겠다고 다짐하며 뤽을 다시 고쳐 붙들었다. 어두운 가스등이 틱틱거리는 소리를 내며 켜졌다. 귀스타브가 문득 뤽 쪽을 돌아보았다. 뤽 머리쪽에 검붉은 것이 말라붙어있었다. 귀스타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뤽?”

“아, 들켰네…. 어머니한테 말하지 마. 붕대 좀 감아주라, 우리 친구잖아….”


귀스타브가 자리에 멈춰섰다. 뤽은 더이상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두번째였다.




귀스타브는 심란한 마음으로 꽃 모종을 심었다. 귀스타브가 결심을 굳히고 일어났다. 마침 플라망 신부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귀스타브가 목을 가다듬었다. 


“뭐야, 농땡이 피우지 마.”

“그, 부탁이 있는데.”

“뭐?”

“나 대신 다른 사람을 고용해 줄 순 없나? 믿을만한 친구고, 나보다 힘도 세서 일도 잘 할거야.”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난 의사라고. 정원사에는 영 어울리지 않아.”


플라망이 얼굴을 와작 구겼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면 보따리도 내놓으라 한다더니 딱 그짝이었다. 플라망이 뭐라고 하든 귀스타브는 아마 내일 다른 사람과 함께 올 것이었다. 몇 달 지내보니 이제 알 것 같았다. 싫어! 플라망이 단번에 말했다. 귀스타브가 간절하게 말했다. 제발. 불행한 이웃을 위해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신부님. 귀스타브의 말에 플라망이 살짝 누그러졌다. 귀스타브가 먼저 이런 말을 한 것도 처음이었거니와 얼마나 부탁할 데가 없으면 자신한테까지 이런 말을 하겠느냐 싶었다. 누군데. 플라망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귀스타브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일 데려올게. 정말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귀스타브가 멋쩍은듯이 미소지었다. 플라망은 처음 보는 미소였다.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 별과 달과 태양이 한번에 뜬 듯 하고, 물이 물고기 비늘처럼 빛났다. 갑자기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누군가 노래했다. 플라망이 눈을 다시 깜빡였다. 귀스타브는 그럼, 내일 다시 올테니까. 라며 그대로 뒤를 돌았다. 플라망은 갑자기 아쉬웠다. 


“밥 먹고 갈래?”

“싫어.”

“아니, 한번만. 우린 친구잖아.”

“우리가 왜 친구입니까, 신부님.”


귀스타브가 다시 등을 돌렸다. 플라망은 아쉬웠다.





“뤽.”


귀스타브는 새벽에 눈을 떴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뤽의 천막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않아 뤽이 천막에서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기어나왔다. 뤽이 귀스타브를 마주치고 어색하게 웃었다. 오, 내 친구. 무슨 일이야? 뤽이 천연덕스럽게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귀스타브는 대꾸하지 않고 뤽의 손에서 가방을 낚아챘다.


“안 돼!”

“이게 뭐야, 연장?”

“아니, 그건…. 이번에 건물 짓는 일을 해서! 그래서 갖고있던 거야!”

“너 거짓말 할 때 말 더듬는 버릇 있는거 알아?”


귀스타브는 한숨을 쉬었다.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뤽은 다시 부루퉁한 얼굴이 되었다. 너는 야매로라도 먹고 살 기술이 있으니까 그렇지. 난 할 수 있는게 이런 것 밖에 없단 말이야! 귀스타브는 화를 겨우겨우 눌러 참았다.


“따라와, 내가 너 일자리 구해 왔으니까 성실하게 일해.”

“뭐?”

“빨리 와!”


둘은 성당 마당에 들어섰다. 플라망은 영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귀스타브를 기다리고 있었다. 찬찬히 뜯어보니 예전에 능청맞게 빵을 얻어 간 그 집시였다. 귀스타브 옆에 있던 놈. 플라망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귀스타브는 어떻게든 좋은 인상을 줘야 한다며 뤽의 옷깃을 직접 정리까지 해 주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플라망이 귀스타브의 앞에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귀스타브가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신부님, 이쪽이 제가 말한 친구랍니다.”

“알아. 나도 눈 있어!”

“좀 우물쭈물하긴 하지만 일은 정말 성실히 잘 할 겁니다.”


귀스타브가 간절한 눈으로 플라망을 보았다. 플라망은 귀스타브가 신경쓰고 있는 뤽이라는 놈은 영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겠어. 귀스타브가 간절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플라망은 거만하게 말했다. 그래, 그럼 가서 일 해. 귀스타브가 다시 되물었다.


“뭐?”

“뭐가?”

“나 대신 일할 사람이라니까.”

“무슨 소리야, 네 조수지! 원래 정원사는 두 명 뽑으려고 했어.”

“뭐, 그럼 그동안 나 혼자,”

“생각보다 일을 잘 하더라고. 오늘도 열심히 일 해.”


귀스타브는 할 말을 잃었다. 잘 하면 둘 다 동시에 떼어놓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귀스타브는 안정적인 직장도 있었고, 믿음직한 조수도 있었고, 부유한 고용주도 있었다. 귀스타브의 인생에서 이렇게 모든 일이 잘 나가던 때가 있었을까. 귀스타브는 잠시 서 있다가 뤽을 잡아끌었다. 왜? 뭐가 왜야, 가지치는 법 알려줄테니까 따라 해. 


뤽은 총 2미터의 나무를 잘라낸 뒤 지쳐쓰러졌다. 귀스타브는 혀를 찼다. 엄살 부리지 마! 귀스타브가 매서운 교관처럼 그를 닥달했다. 뤽이 우는 소리를 내며 다시 가위를 잡았다. 힘들어, 힘들다니까! 귀스타브, 좀만 쉬면 안돼? 귀스타브가 고개를 저었다. 돈 받고 싶으면 일어나! 넌 아직 할 수 있어! 뤽이 다시 징징거렸다. 아냐, 난 못해! 난 환자야! 그 말에 귀스타브가 다가와 감아놓은 붕대를 들추고 상처를 보았다.


“나 아프다니까….”

“내 의사로서의 경력을 걸고 말하는데, 넌 괜찮아. 당장 일어나!”


뤽이 울상인 채로 다시 가지를 잘랐다. 귀스타브는 악마 교관이었다. 둘의 사이좋은 모습을 먼 발치에서 플라망이 바라보았다. 플라망은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그걸 왜 도와주고 앉았어! 어딜 봐도 귀스타브가 더 작고 말랐는데 지가 자를 것이지! 플라망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얼른 잘라버려야겠다.




귀스타브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연신 잘했다며 뤽의 등을 두드렸다. 뤽이 궁시렁거렸다. 이렇게 힘든 일이라니, 에릭 패거리 가면 아무것도 안해도 돈이 들어오는데. 귀스타브가 그런 뤽의 귀를 쭉 잡아당겼다. 가지 말라고 했지! 정당하고 안전하게 돈을 벌라고!


“젠장, 이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돈을 버는데!”

“제발, 뤽. 더이상 걱정하게 하지 마.”

“넌 의사 노릇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그렇지….”

“애초에 그 돈으로 다 뭐 하려고 그러는 거야?”

“가판대 하나 사서 대충 구슬같은 거 좀 팔아보려고. 너도 낄래?”


됐어, 그럼 더 성실하게 일이나 해. 귀스타브가 쏘아붙였다. 둘은 플라망에게 일당을 받았다. 플라망은 뤽 손에 돈을 쥐어주려다 멈칫했다. 뤽이 비굴한 표정으로 신부님,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라며 헤헤 웃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맘에 들지 않았다. 귀스타브의 친구라서 봐주는 거다. 난 귀스타브의 절친이니까! 플라망이 흥, 하며 돈주머니를 내려놓았다. 뤽이 신난 표정으로 귀스타브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고마워, 친구! 뤽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콧노래를 부르며 성당에서 멀어지는 뤽의 등을 보고 귀스타브가 드디어 안도한 표정으로 긴장을 풀었다. 플라망은 그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그가 다시 흥, 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고마워, 플라망.”

“흥, 당연… 어? 어어어?”

“뭐야.”

“고맙다고 했어?”

“그래.”

“왜 순순히 고맙다고 해? 뭐야, 당신 아파?”


플라망이 얼빠진 얼굴로 혹시 열이 있느냐고 물었다. 귀스타브가 황당한 표정으로 플라망을 보았다. 귀스타브가 대체 날 어떻게 보는 거냐고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플라망이 귀스타브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따듯하고 조금 거친 손바닥이었다. 성당에서 태우는 향 냄새가 났다. 귀스타브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이건 위험해. 뭐가 위험한 지 모르고 귀스타브가 생각했다. 플라망은 상대방의 굳은 반응에 잠시 내려다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갈색 눈이야. 악마는 갈색 눈을 갖고 있지. 플라망은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날씨는 오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조금씩 피어나는 장미 봉오리. 푸른 그림자가 둘의 머리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신의 눈도 가릴 만큼 무성한 이파리 사이로 귀스타브가 플라망의 입술에 닿았다. 둘다 숨을 죽였다. 누군가에게 들킬 지도 모른다는 경고음이 플라망의 머리에 울려퍼졌다. 귀스타브가 갑자기 그를 밀쳐냈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 귀스타브가 엉망이 된 얼굴로 뛰어나갔다. 장미 그늘 아래에 남은 것은 뜨거운 입술의 플라망 뿐이었다. 귀스타브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나갔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이유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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