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도착해서 민현이의 얼굴을 보고 다니엘을 부탁했던 것 까진 기억이 난다. 온몸이 극심한 고통을 넘어서 병원에 도착할 때쯤엔 이미 감각이 없었다. 그냥 다니엘과 지금 떨어지면 오랜 이별이 될 것만 같은 생각뿐이었다. 마지막 힘까지 겨우 짜내 민현에게 다니엘을 부탁하고는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후론 어땠는지 모른다. 심장이 몇 번이나 멈추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고 하는데 눈을 떠보니 그날의 상처는 거의 다 나았을 만큼 시간이 흘러 있었다. 반년 가까이 누워 지낸 덕에 근육도 말라버려 뼈에 껍데기만 붙어있는 모습으로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고 움직임도 힘이 들었다. 

차츰 적응을 하고 반가운 얼굴들이 눈에 보이고 자신을 위해 펑펑 울어주는 사람들의 틈에서도 한편으론 마음속에 허전함이 있었다.

자신을 반기는 얼굴들 속에 아무리 찾아봐도 다니엘이 없었다. 어찌 된 것일까? 다니엘은 왜 여기에 있지 않는 것일까?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이제는 멀리 보내고 싶지 않은데 정말 자신이 누워있는 사이 멀리 미국으로 떠나버린 것일까? 정말 미국으로 갔다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행히도 한국에 있다고 했다. 민현이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줘 나중에 다니엘과 함께 살고자 했던 그곳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너무나도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내일 다니엘 오라고 할까? 이제 너 깨어났으니 사실대로 말하면..."

"아니... 하지 마.. 조금만 더 있다가 내가 직접 갈 수 있을 때 가자."

"왜~ 그러려면 좀 더 있어야 할 텐데?"

"아직은 걱정 많이 할 거야."




고집을 부렸다. 아직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 그때 직접 찾아가야지. 내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우리 집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말아야지. 나도 너를 사랑하고 있노라 말해야지.






소화 기능이 회복되고 몸에 조금씩 살이 올랐다. 다치기 전부터 원채 마른 체구여서 원상복귀되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걸어서 움직이는 것은 힘들지만 이제는 제법 오래 앉아있을 만큼 어지러움증도 사라졌다. 

아직은 아니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했다. 시간만 지나면 다시 예전처럼 전투를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몸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고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멀쩡하게 다니엘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힘든 재활운동을 하루하루하면서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 같지 않게 더디게 회복되는 몸에 조급함이 느껴졌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너무 보고 싶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그동안 20년을 모르고 살아왔는데 고작 몇 개월 보지 않았다고 마음이 이렇게 불안할 수 있을까. 

건강하게 찾아가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욕심이었다. 그 욕심만 없었더라면 벌써 그를 만났을 텐데 괜한 오기를 부렸나 후회가 됐다. 참지 못해 속마음을 결국 내뱉어 버렸다.  





"민현아..."

-어 왜? 무슨 일 있어? 나 지금 별장에 와있어

"나... 거기 가고 싶다."






가는 길이 길게만 느껴졌다. 어제 그곳에 있는 민현에게 의사를 표시하고 어제는 너무 늦어 오늘 함께 가자는 바람에 설렘에 밤새 잠 한숨 자지 못했다.

아직은 장거리 이동은 무리라며 윤 박사가 극구 말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냥 뒷좌석에 앉아서만 가는데 무슨 상관이람. 힘들면 쉬어쉬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만나면 어떤 말부터 해야 할까 하는 것이었다. 정말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는 새색시 같은 기분이었다. 얼굴이나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


그날 망가진 폐기능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 호흡이 힘들어 중간중간 쉬었다가 가는 바람에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언제 도착할지 몰라 눈이 빠져라 기다릴까 봐 다니엘에게는 성우가 간다는 말을 일부러 하지 않았는데 역시 다니엘은 별장을 비운듯했다. 아마 또 옛 추억을 더듬으며 동네 어귀를 걷느라 정신이 팔려 있을 것이었다. 

장거리 이동이 무리였는지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은 성우에게 잘 됐다며 올 때까지 쉬면서 기다리자고 했지만 되려 자신이 다니엘을 찾아 나서겠다고 고집을 부려왔다. 그만큼 간절하게 보고 싶었다.

원두막쯤 지났을 때 자신이 마을을 보존하고자 했던 행동을 잠깐 후회를 해봤다. 포장이 되지 않아 자갈이 박혀 울퉁불퉁하고 좁은 길에 휠체어가 더 이상 지나갈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아직은 걸을 수가 없었다. 원두막까지 휠체어를 밀어주던 진영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다니엘을 찾아오겠노라 자리를 비우고 성우는 잠시 노을 지는 들녘을 바라보며 옛 추억에 잠겼다.





"어린 시절 이곳에 있으면 동네 주인 없는 강아지가 찾아오곤 했습니다. 형과 저는 밥을 조금 남겨와 이곳에서 그 강아지에게 밥을 주곤 했었지요."

"다니엘... 왔구나..."




불쑥 말소리가 들려왔다. 노을에 등을 지고 있어 얼굴은 알아볼 수 없어도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것 같다. 두근거려오며 반응하는 심장이 저 사람이 누군지 알려왔다. 숨이 막힌다. 너무 기뻐서 너무 행복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먼 길 오시느라 힘드셨지요?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

"괜찮아.. 잘... 지냈어?"

"형 기다리느라 잘 못지냈습니다. "

"미안하다. 너무 늦었지?"

"괜찮습니다. 이제라도 오셨으니 됐습니다."




점점 가까이 오니 몇 개월 전 상처투성이의 얼굴은 어디 가고 멀끔한 얼굴이 보인다. 휠체어에 앉아 올려다보니 오늘따라 다니엘이 부쩍 커 보였다. 언제나 자신의 품 안에 두고자 했던 나의 아이. 먼 길을 돌고 돌아 이제야 자신의 앞에 섰다.




"이곳은 제가 어린 시절 지냈던 곳입니다. 일부러 이 추억을 간직하고자 오랜 세월을 누군가가 지켜내고 있었던 듯하더군요. 좀 더 둘러보시겠습니까?"

"아니... 아직 휠체어 신세라 더 이상은 어려워"

"업히시겠습니까?"




맞닿은 그의 등이 따뜻했다. 사고 이후 길게 흉이 져버리고 늘 욱신대던 상처에 온기가 퍼져오는듯했다.


우리 의건이 정말 잘 컸구나. 등이 아주 넓고 편해. 이제 형이 우리 의건이 한테 기댈 수 있겠어.


다니엘의 등에 업혀 동네 어귀를 이곳저곳 산책하다 보니 자꾸만 잠이 왔다. 다니엘의 등이 편안하기도 했지만 아직은 무리하게 움직이는 것이 힘이 들었던지 장거리 이동에 성우는 지쳐버렸다. 어제부터 설렘에 잠도 못 자고 이렇게 다니엘의 곁으로 왔는데 오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자꾸만 감겨오는 두 눈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졸리시지요?"

"아니. 괜찮아."

"졸리면 주무셔도 됩니다. 별장에 도착하면 깨워드리겠습니다. "

"졸리지 않아"

"네.. 그럼 지루하실 테니 재미난 얘기해드릴까요? 이쪽으로 가면 작은 구멍가게가 나오지요. 맛있는 과자들이 널려있는데도 먹지 못해 항상 침만 흘리며 구경만 하다 돌아가곤 했습니다. 저쪽은 작은 언덕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뛰며 구르고 먼지투성이가 되어 놀았지요. 항상 제 옆에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말씀드렸지요? 커서 신부 삼고 싶었던 사람.. 여자가 아니고 남자입니다. 어릴 적에는 남자, 여자 그런 것도 신경 안 썼습니다. 그냥 좋으니 결혼하고 싶고 결혼하면 신부라길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보육원에 살 때 함께 했던 형인데 그때 체구는 저랑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더 작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여자아이처럼 뽀얀 얼굴에 참 예쁘게 생겼었지요. 형 주무십니까?"

"............"

"........그리고...우리형은.......................... 어릴적에도 예뻤지만 성인이 된 지금의 모습도 참 예쁩니다. "






다니엘의 온기를 느끼며 조곤조곤 목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려는 찰나 자고 있냐는 질문을 해왔다. 과거 자신과 다니엘의 이야기를 다니엘의 입으로 듣는 게 좋았다. 좀 더 듣고 싶은 것 반 졸린 것 반. 

아직 자고 있지 않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장기간 멈춰있던 신체기능들이 그리 쉽게 회복되지는 않는지라 생각을 한 것을 입 밖으로 내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걸 모르는 다니엘은 성우가 잠이 들어버렸다고 생각하고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내 뱉었다. 


의미심장한 현재진행형의 말을 들은 성우는 잠이 전부 달아난 것은 당연했다. 형은 성인이 된 지금의 모습도 참 예쁘다니. 누굴? 그건 어떤 뜻일까. 심장이 갑작스레 너무 빠르게 뛰어 상처가 욱신거렸다.





"졸린 거 용케도 많이 참았네. 우리 형"






이건 심장이 터질려는 걸까 멈추려는 걸까 숨을 쉬고 있는 걸까 숨이 안 쉬어지는 걸까 머릿속 회로가 온통 마비되어 뒤죽박죽 되어버린 것 같았다. 

저 말을 기억한다. 다니엘을 다시 만났던 첫날. 그 꿈에서도 다시 한번 되새겼던 말이었다.





졸린 거 용케도 많이 참았네 강의건...

졸린 거 용케도 많이 참았네 우리형...






왈칵 눈물이 난다. 


어차피 등 뒤니까 조금은 울어도 되겠지. 

밤이 찾아와 어둠이 눈물을 가려주겠지. 

오늘 한 번쯤은 마음 놓고 울어봐도 되겠지.






End.





선물 Beautiful Never 약속해요 애인(愛人) 그냥 너라서 감기 밤의 가스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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