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남자식x여장룬옆집남자식x여장룬


하루의 절반이 지났음을 알리듯, 뜨거운 태양이 머리 높이 떠 있다. 하지만 어느 집 창문에는 두꺼운 커튼이 쳐져있어, 뜨거운 햇빛을 완벽히 차단하고 있다. 어두운 집 안, 이불과 한 몸이 되어 달콤한 휴일을 즐기고 있는 일훈은,

"위이이잉ㅡ"

밖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소음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아있는 상태다. 씨발, 누가 이사를 이렇게 주말 대낮부터 해. 귓구녕 터지면 책임질 거냐? 결국 잠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에 상스러운 욕설을 마구 내뱉으며 이불을 걷어찼다. 이 개같은 짜증남을 담배와 함께 태워버리자.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복도로 나오자, 한 남자와 마주한다.

"엇, 안녕하세요!"

아무 말 없이 벽에 기대어 허공으로 담배연기를 후우, 하고 내뱉는다.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자, 남자가 대화를 이어간다.

"아, 저 오늘 이사 왔어요. 이제 이웃인데 친하게 지내요."

생글생글 서글서글 웃는 게, 참 싹싹하다. 어르신들에게 한 예쁨 받을 성격. 그렇지만 당신은 나의 미움을 사버렸어. 일훈은 담배꽁초를 밖으로 튕겨 버리고,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남자를 무시한 채 집으로 들어간다.

"…뭐야? 저 사람."

허탈한 현식의 목소리만 복도에 덩그러니 울린다.

 

***

 

회식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자신의 주장이 묵살 당하며 1, 2, 3차도 모자라 갈 때 까지 가버리는, 망나니같은 자리는 좋아하지 않다. 새로 들어간 회사라, 막내라는 이유로 빠지지도 못하고. 결국, 머리에 상추와 깻잎을 꽂거나, 맨 발로 상 위에 올라가 최신유행 힙합댄스를 추는 등, 화려한 흑역사를 제조한 후에야 풀려났다. 취한 연기에는 도가 텄지. 이럴 땐 술에 강한 게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는다. 벌써 12시네. 바지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찾는 도중, 맞은편에서 덜컹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끼익 열린다. 옆집이면 저번에 그 싸가지 없는 옆집사람인가.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흑색 단발머리, 쇄골과 어깨가 파여 있는 하얀 블라우스, 까만 미니스커트와 운동화를 신고 있는 사람. 이목구비가 놀랍도록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는 여자의 외모에 현식은 깜짝 놀라 눈과 입이 벌어진다.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빤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여자는 현식을 본채 만 채 휙 가버린다.

..뭐야, 사람 무시하는 건 저쪽 동네 특기인가. 쩝. 시야에서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현식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씻고 침대에 벌렁 눕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하도 빤히 봤던 탓에 얼굴은 확실히 기억이 난다. 잘 생각해보니, 저번에 그 사람이랑 진짜 닮기는 했다. 누나 분 완전 내 취향. 아, 여동생일수도 있겠지? 여튼. 내일부터 친해져야겠다. 홀로 굳게 다짐한 현식은 잠에 든다.

 

***

 

띵동- 띵동-

집에 없나? 현식은 몇 번 더 벨을 꾹꾹 눌렀고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늘어진 추리닝과 헐렁한 반바지차림의 일훈이 문 틈 사이로 고개만 빼꼼 내밀어 현식을 올려다보았다. 많이 네츄럴한 그 모습에 조금 당황했지만, 영업용 스마일을 장착한 채 그에게 곱게 포장된 시루떡을 내밀었다.

"이사 온지 좀 됐는데 이제야 드리네요. 식구 분들이랑 같이 나눠드세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하면서도 기웃기웃, 일훈의 등 너머로 집 안 살피지만, 워낙 틈이 좁아 잘 보이지는 않는다. 떡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일훈은 떡 받아들고 귀찮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일훈의 눈은, 더 할 말이 있는지 물어보고 있었다. 어, 분명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 사람도 눈 진짜 예쁘다. 그저 속으로 감탄하고 있자, 일훈은 고개를 갸웃한다. 곧, 탁-하고 닫히는 소리에 정신을 번쩍 차린다. 크흠…. 다음엔 꼭 여동생인지 누나인지 알아내야겠다.

 

현식은 한 가지 난관에 부딪힌다. 일단 저 옆집 사람이랑 친해져야하는데 도통 얼굴을 언제 볼 수 있는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출퇴근 하는 것 같지는 않고. 백수인가? 도무지 알 길이 없어서 그냥 무작정 찾아가 보기로 한다. 지금 집에 있겠지? 벨을 누르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어, 저번에 본 그 여자다. 반가움에 인사를 하려는데,

"안녕하ㅅ.."

인사도 다 끝나기 전에 굉음을 내며 문이 도로 닫혔다. 어? 어? 당황한 현식은 빠르게 똑똑똑똑 노크한다.

"저기, 저기요? 저 저번에 옆집 이사 온 사람이에요. 저번에 얼굴 봤는데 기억나요?"

문 너머로 들릴 만큼 충분히 크게 말을 이어갔지만, 상대는 계속해서 묵묵부답이었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그쪽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현식은 아쉽지만, 더 재촉했다가는 반감을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돌린다.

씨발, 저 놈 언제 꺼지냐.. 일훈은 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입술을 깨문다. 더 늦으면 완전 지각인데. 자신의 초조함을 읽은 건지,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끝으로 멀어지는 발걸음에 살금살금 밖으로 나온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꽤 비싸 보이는 깔끔한 검정색 클러치에서 립스틱을 꺼내 톡, 뚜껑을 연다. 밑 손잡이 부분을 돌리자 비비드한 빨간색의 스틱이 쑤욱 올라온다. 스윽스윽. 립 라인을 따라 립스틱을 덧바르던 입술에선 중저음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존나 놀래라. 들킬 뻔 했네."


이 분내 나는 여장을 계속 하는 이유는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집 근처에 큰 번화가가 있는데, 그곳에는 없는 게 없다 싶을 정도로 술집, 밥집, 노래방 등등 여러 업소들이 즐비해 있다. 그리고 언제나 화려함에는 이면, 어두운 면이 존재하는 법. 일훈은 그 어두운 면 일부에 몸을 담그고 있다.

"어이~ 누나! 진짜 거거 달려있는거 맞어어-?"

"아하하, 오빠가 직접 확인 해 보면 되지~?"

"으하하! 어디보자~"

술에 잔뜩 취한 남자가 일훈의 엉덩이를 콱 잡아 주물럭거린다. 씨발. 애써 미소를 유지하고 있자, 엉덩이에 있던 손이 일훈의 치마 밑으로 들어가 앞뒤로 크게 쓰다듬는다. 일훈은 놀란 나머지, 그 남자의 손을 내친다.

"어어? 니가 감히 나를 쳐? 이 쌰아앙-"

인상을 확 찌푸리더니, 다짜고짜 주먹을 들고 달려드는 남자에, 일훈은 팔로 막아 방어한다. 아, 제발 신이시여. 다행히 그가 일훈을 때리기도 전에 매니저와 다른 직원에 의해 끌려 나갔지만.

"괜찮아, 일훈아?"

"후우.. 뭐, 한두 번도 아니고. 괜찮아, 난.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일훈은 오히려 미안하다며 웃어보였지만, 등 뒤로 숨긴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 위험할 수 도 있으니 내일은 쉬라는 매니저의 말에 예상에 없던 휴일을 보내고 있다. 언제 나처럼 편한 추리닝차림으로 복도에 나와 담배를 태우고 있는데, 중국집 배달아저씨가 철가방을 손에 들고 복도를 서성인다. 옆집이 시킨 건가 싶었지만, 배달원의 발걸음은 일훈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000호 맞으시죠? 배달입니다~"

"..네? 저 안 시켰는데요?"

"에? 그래요?"

일훈의 대답에, 배달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옆집 초인종을 누른다. 곧 현식이 나왔지만, 현식 또한 자신이 주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개를 내저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쪽지와 호수를 번갈아보는 배달원에게 일훈은 용기 있게 말을 꺼낸다.

"..아저씨, 거기 안에 뭐 들었어요?"

"짬짜탕세트요. 그런데 정말 두 분 다 아니세요? 여기 맞는데.."

"저기, 그거 그럼 제가.."

"제가 사도될까요!!"

일훈이 손을 슬며시 들며 말을 꺼냈지만, 옆집 사람이 더 빨랐다. 짜장면 먹고 싶은데. 현식은 자신을 째려보는 일훈의 눈치 보더니 입모양으로

‘같이 먹을래요?’

아니, 짜장면은 한 그릇일거 아냐. 일훈은 그의 입모양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배달원에게 시선을 돌린다.

"아저씨, 제가 살ㄱ,"

"아뇨! 제가 먼저 산다고 했어요!"

"하하, 참.. 어떻게 해야.."

계속해서 말을 끊는 현식이 어이가 없는 일훈과, 무슨 이유에서인지 필사적인 현식. 그 사이에 껴 있는 배달원은 곤란한 표정으로 철가방만 내려다본다.

'Rrrrrr-'

"여보세요? 아, 네. 네. 아 0동 000호가 아니라 그 옆 동 이시라고요? 네네 갑니다~"

"……."

"……."

짬짜탕은 원래 주인을 찾아 떠나버렸고, 복도에는 현식과 일훈이 어색하게 남겨졌다. 에이씨, 짜장면 먹고 싶었는데. 일훈은 한숨을 푹 쉬고 머리 벅벅 긁으면서 걸음을 돌리지만, 저기요! 하며 자신을 부르는 현식에 대답 없이 뒤돌아본다.

"아직 점심 안 드셨으면 같이 먹을까요?"

"..괜찮아요."

난 짜장면이 먹고 싶단 말이다. 속으로 생각하며 대충 둘러대고 들어가려는데, 현식은 다시 일훈을 붙잡는다.

"저!! 저 자취해서 요리 잘해요! 어, 그, 된장찌개 좋아하세요? 된장찌개 싫으시면 김치찌개도 잘하는데.."

된장찌개라.. 일훈은 서울에 올라와 혼자 살면서 끼니는 대체로 사먹거나 하기 때문에, 집밥을 먹어본지 꽤 된 참이다. 모락모락 흰쌀밥에 된장찌개랑 집반찬들 맛있겠다. 생각하니 배가 더 고파져 마른침을 꼴깍 삼킨다. 현식은 갈등하는 일훈을 눈치 채고, 문을 조금 더 열어 보인다.

"그렇게 서있지 마시고, 일단 들어오세요."

이렇게까지 권유하는데 굳이 뺄 이유도 없고, 식비도 굳히겠다 싶어서 일단 들어간다.

"그럼 실례합니다.."

일훈이 들어가고, 현식이 뒤따라 들어와서 널려있던 옷가지를 치운다. 소파에 앉아 있으라는 말에 멀뚱 앉아 있자, 마실게 이거밖에 없다면서 콜라를 내민다. 일훈은 고맙다며 고개를 꾸벅, 꼴깍꼴깍 마신다.

한편 부엌에 들어온 현식은 냉장고를 열어보고 고민에 빠진다. 일단 어떻게 잡긴 했는데, 해주겠다던 된장찌개 재료가 하나도 없네. 어떡하지. 현식은 손톱을 깨작거리다가 결국 일훈에게 사실대로 고한다.

"저.. 제가 된장찌개 재료가 있는 줄 알았는데.. 없,"

여기까지 말하자 일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현식은 놀란 마음에, 급하게 달려와 일훈의 어깨를 눌러 도로 앉힌다.

"제, 제가 다음에 꼭 찌개 해드릴게요. 오늘은 일단 아까 그, 중국집 시킬까요?"

뭐야, 왜 못 일어나게 해? 일훈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진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려는데 또 어깨를 꾹 눌러서 소파에 앉히는 현식.

"미안해요, 진짜로. 제가 중국집 살 테니까 드시고 가세요, 네?"

"..그러세요, 그럼."

일훈은 대답 하며 다시 일어났지만, 다시 외부 압력에 의해 엉덩이와 소파가 재회한다. 세 번째다.

"금방 시킬 테니까, 제발 앉아계세요.."

"..저,"

현식은 자꾸만 어딘가에 가려는 일훈에, 울상인 표정으로 애원한다. 곧 굳어있는 표정의 일훈이 입을 열자 현식은 잔뜩 긴장한다. 많이 화난건가? 어떡하지?

"화장실좀 쓸게요."

이 쪽 맞죠? 일훈은 빠르게 일어나서 쪼르르 화장실로 들어갔고, 그제야 현식은 아- 작게 탄성을 내뱉는다. 그래, 화장실좀 가겠다는데 자꾸 앉혔으니까 짜증나겠지. 아, 또 점수 깎였어. 현식은 뒷머리를 헝클이고 중국집에 번호를 꾹꾹 누른다. 짬짜탕하나 갖다 주세요.

 

배달음식이 도착하고 둘은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 일훈은 당연히 짜장면을 가져가려는데, 어? 현식도 짜장면에 텁 손을 올렸다. 둘은 당황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짬뽕 드시고 싶으신 거 아니었어요?"

일훈은 고개를 갸웃한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이 나지?

"..아뇨, 매운 거 못 먹어서요."

"아.. 그러시구나. 그럼 짜장면 드세요. 원래 저 짬뽕 먹고 싶었거든요~ 하하.."

일훈이 짜장면을 비비고 있자 현식이 탕수육 소스를 뜯으며 묻는다. 혹시 부먹이세요? 아뇨, 찍먹이에요. 와, 저두요! 일훈은 별 말없이 냠냠 먹으며 현식이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정도였지만, 현식은 짧은 대화만으로도 그를 알아갈 수 있다는 점이, 그저 좋을 뿐이다.

"아 맞다. 저희 아직 이름도 서로 모르네요."

"..그러게요."

"26살 임현식입니다. 잘 부탁해요."

"..정일훈이에요."

"일훈씨구나-"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일훈은 정들 것 같은 눈웃음을 피해 애써 음식에만 시선을 고정한다. 서로의 그릇이 점점 바닥을 보이고, 일훈은 마지막 남은 탕수육 조각을 입에 쏙 넣는다.

"참, 일훈씨 위아래로 형제 있나요? 형이나, 누나나.."

"..누나 있어요."

"아아~ 누나분~!"

내가 누나 있는 거가 저 사람이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일훈은 후식으로 콜라까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잘 먹었어요. 현식은 딱 식사만 하고 일어나는 일훈에게서 아쉬움을 느끼지만, 오늘은 건진 게 많으니 그냥 보내주기로 한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종종 이렇게 같이 밥 먹어요, 일훈씨! 다음엔 꼭 된장찌개 해드릴게요!"

현식은 일훈을 향해 손을 흔들고, 일훈은 고개를 까딱하는 거로 인사를 대신한다.

 

***

 

일 때려치고 싶다. 이런 건 아무리 입어도 적응 안 된단 말이지. 일훈은 짧은치마를 쭉쭉 잡아당기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곧 '1층입니다.' 친절하게 알려주는 엘리베이터 누나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

내리기 위해 고개를 탁 들었을 때 보인 건, 옆집 사람이었다. 헉. 일훈은 당황함에 재빨리 고개를 푹 숙였다.

"저기..! 아,"

현식은 저도 모르게, 제 곁을 스쳐 지나가는 일훈의 팔을 붙잡았다가 화들짝 놀라서 떨어진다. 이 새끼 팔은 왜 잡고 난리야? 아프잖아. 일훈은 욱씬거리는 팔을 손으로 감싸 안고, 고개를 숙인 채로 인상을 팍 찡그려 현식을 째려본다. 현식은 자신을 째려보는 그녀의 얼굴에 누군가가 겹쳐 보여 잠시 넋을 놓았다. 그리곤, 아차 싶었지만 그녀는 이미 저만치 도망가 버리고 난 후였다. 나 정말 이상한사람으로 찍힌 거 아닌가.. 나중에 일훈씨에게 잘 말해달라고 해야겠다.

 

***

 

현식과 일훈이 이웃사촌(?)이 된지 꽤 시간이 지난 후다. 일훈은, 현식에 대한 첫인상은 좋지 않았지만, 워낙 싹싹하게 잘 챙겨주는 그의 모습에 이미 마음을 연 상태이다. 절대 된장찌개나 김치찌개가 맛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정보를 알아냈는데, 현식은 지금 일훈에 대해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사실이다. 저번에 누나가 있다고 알려줬더니, 멍청하게도 자신의 여장한 모습을 제 누나로 알고 있다는 거다.

처음엔 일훈도 그가 착각을 하던지, 말던지. 그닥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 들어, 만날 때 마다 계속 ‘누나’에 대해 정보를 캐묻거나 소개 시켜달라고 하는데 왠지 모를 짜증이 든다. 그래, 어쩐지. 왜 떡 주나 했네. 일훈은 냉장고에 한 구석에서 꽁꽁 열려져 있을 시루떡을 떠올렸다.

“일훈씨, 누나분 애인 있어요? 누나분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애인은 없고.. 나이는 현식씨 보다는 많은데, 누나가 연하는 안 좋아해요. 여태껏 다 연상 사귀던데.”

일훈은 자신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을 잘 해주면서도, 절대 연락처만은 알려주지 않아,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소개도 시켜주지 않고, 의사소통도 그를 통해서만. 현식은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로 그에게 부탁한다.

“일훈씨. 일훈씨 누나분, 한 번만 제대로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딱 한번이면 돼요.”

"……."

“그럼 더 이상 귀찮게 안할게요.”

일훈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어요. 그럼 누나한테 잘 한번 말해볼게요. 참고로 누나가 말이 별로 없을 거예요. 조금 아파서..”

현식은 고개를 세게 끄덕인다. 만날 수 만 있다면야. 그리고 그날 밤, 일훈에게서 약속장소와 시간이 적힌 문자가 날아왔다.

 

***

 

드디어 일훈의 누나를 만나기로 한 오늘이다. 지금까지 이름도 모르고 있다는 게 참. 오늘 만나서 직접 물어봐야지. 말 하는걸 꺼려한다 했지만 이름정도는 알려주시겠지? 현식은 입사 첫날에 입었던, 제일 아끼는 슈트와 명품 시계를 차고 집을 나선다. 옆집에 살기는 하지만, 굳이 만나기로 한 카페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자, 곧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보인다. 단정한 단발머리에 하얀 얼굴, 진한 눈매와 선분홍색 입술. 오늘은 카디건에 청바지 입으셨네.

또각또각, 굽소리를 내며 다가가 그의 앞에 앉았고, 긴장한 현식은 아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어.. 오늘 날씨 참 어, 따사롭네요. 덥거나, 오는데 오래 걸리진 않으셨어요? 아, 바로 집 앞이지. 그, 제 이름은 임현식 이라고 합니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그쪽 이름도 알 수 있을까요?”

이름을 물었더니 그녀가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인다. 현식은 그의 눈치를 보고 잽싸게 화제를 전환한다.

“아, 그.. 연하는 별로라고 하셨는데 제가 정말 연하느낌 안 나게 잘 할 수 있어요. 저 정말 그, 쪽..이랑 좋은 관계로 나아가고 싶어서 그런데 저 싫으시면 지금 나가셔도 괜찮고.. 아, 이게 아닌데..”

일훈은 덜렁거리는 현식의 처음 보는 모습이 조금 귀엽게 느껴져 풋, 작게 웃어버린다. 그 웃음에 현식의 머리에선 뎅뎅뎅, 종이 울린다. 아, 첫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안 되겠다. 정말 이 사람만큼은 내거로 해야겠다. 현식은 자신의 번호가 적힌 명함을 내민다.

“이거 제 명함인데, 여기 밑에가 제 휴대폰 번호에요. 일훈씨 통해서말고, 직접 연락하고 싶어요. 안될까요..?”

현식의 물음에 일훈은 정색하고 고개를 내젓는다. 당연히 안 되지, 내가 정일훈인데. 현식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만 있어달라고 해, 어쩔 수 없이 대충 주머니에 구겨 넣는다. 그리고 곤란한 표정으로 손목시계를 힐끔 거린다.

“아, 맞아. 시간 얼마 없다고 하셨죠. 벌써 1시간이나 지났네요.”

끄덕끄덕.

“저희 그럼..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잠시 고민하다 느리게 끄덕.

“정말요? 와.. 저, 지금 진짜 너무 좋아요. 그럼 연락 기다릴게요!”

 

현식과 헤어지고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얇은 카디건임에도 불구하고, 무더운 여름의 햇빛은 사정없이 일훈을 내려친다. 아, 더워. 카디건을 벗자 드러난 민소매가, 일훈의 봉긋한 가짜 가슴을 강조한다.

“후우~, 거기 언니. 날도 더운데, 우리 어디 가서 시원하게, 응? 한 잔 할까?”

여린 어깨에 턱 하니 무게감이 들어서 봤더니, 알록달록한 색의 문신으로 뒤덮인 뚱뚱한 팔이 보였다. 하, 씨발. 어떤 새끼야.

“어머, 째려보니까 더 꼴린다. 나 섰어, 언니. 느껴져?”

다짜고짜 일훈의 손을 가져가 자신의 앞섬에 올려놓는 남자. 일훈은 빡침을 가라앉히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그리고 그에게 바싹 붙어 귓가에 속삭인다.

“잘 찾아왔네, 나 후장 뚫어주는 거 전문인데.”

응, 이제야 눈 좀 뜬 것 같네. 눈 감고 있는 줄? 여자인 줄 알았던지, 제 목소리에 눈이 동그랗게 되어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떨어진다. 자신을 삿대질 하며 저 멀리 도망가는 남자를 보며 머리를 어깨 뒤로 찰랑, 쓸어 넘겨 승리의 미소를 짓는다. 흥, 거시기도 좆만한 게, 누굴 건드려? 

 

***

 

“네, 여보세요?”

“현식씨 저에요. 오늘 누나 잘 만났어요?”

“아, 네네. 자리 만들어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다음에 술이라도 한 잔 사드려야겠다.”

“하하 뭘요.. 저 술 잘 못해요.”

“아아.. 그럼 김치찌개 먹으러 또 와요.”

“네에.. 아, 그, 저희 누나가 다음에 또 만나자고, 조만간 연락하겠대요. 현식씨 마음에 들었나 봐요, 잘 해봐요.”

“....”

“여보세요? 현식씨?”

“와아.. 일훈씨 정말 고마워요, 정말.”

“아이, 뭘요. 그럼 연락하라고 할게요.”

일훈은 전화를 끊고,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간다. 지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본인이 봐도 정말 예쁘긴 하다. 날 누나라고 단단히 믿고 있는 거 같으니, 단물만 좀 빨아먹다 버려야지. 거울 속 일훈의 입술에 호를 그리니, 새하얀 치아가 가지런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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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트위터에 풀었던 썰에 살을 붙여서 업로드해봅니당..! 없던 장면도 막 추가되어있고 그래요 ㅋㅎㅋㅎㅋㅎ


미카엘츠바사, 줄여서 미쯔입니다. 쓰고싶은 걸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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