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체콥은 바위에 걸터 앉아 젖은 흙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 위로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두피를 흐르는 차가운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커크는 그들의 작은 동굴을 라이터로 훅 훑었다. 몇 번이나 했던 짓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행동을 반복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가랑비들이 산을 적시고 있었다.

  “가자.”

  커크가 그렇게 말했다.

  “좋아요.”

  체콥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일절의 움직임도 없이 그저 젖은 흙바닥과 짙은 회색 하늘만 바라보았다. 몇 번이고 커크가 반복해 말했고 체콥이 반복해 대답했지만 그들이 그 동굴을 떠나는 일은 없었다. 한참 시간이 흘렀다. 커크의 비싼 라이터가 딸깍거리는 소리만 낼뿐 불꽃을 피우지 못했다. 커크가 츳하며 혀를 찰 때였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체콥이 비스듬하게 고개를 틀며 커크에게 물었다.

  “우리 무얼 기다리나요?”

  커크는 체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들간에 침묵이 돌았다. 침묵동안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고 빗줄기가 굵어졌다. 각각 고개를 돌려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말이 없던 커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작은 움직임이였지만 그 소리는 곁에 있는 체콥에게 선명히 들렸다.

  “신?”

  그 말에 체콥이 노골적인 웃음을 띠우며 ‘신이요?’하고 되물었다. 그는 기분이 나빠 보였다. 자신보다 몇 살이나 어린놈의 신경질어린 웃음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커크는 그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체콥에게 ‘우리 뭘 기다리는거야?’하고 물었더라면, 또 그가 ‘신이요.’하고 대답했더라면. 분명 커크 또한 저딴 미소를 띄우고 그를 바라봤을 터였다. 하지만 커크는 자신의 대답을 돌이킬 생각이 없었음으로 싱긋 웃어주며 ‘그래.’하고 말했을 뿐.   그뿐이었다.


  #01

  ‘NCC-1701. 기체 점검 이상 없다. 착륙 허가.’

  ‘여기는 NCC-1701. 기체 점검 이상 없습니다. 착륙 허가 바랍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여년전 항공사에 전설적으로 남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당시샌프란시스코로 향하던 비행기에 테러 집단들이 덜컥 들어섰다. 그들은 총기를 난사하며 승객들을 위협했고 이내에 조종실로 처들어와 기장과 부기장의 머리에 총을 들이밀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 9.11 테러의 잔상이 스쳐지나갔다. 비행기는 북미 대륙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살기로 가득찬 조종실안에서 기장이 붙잡은 조종간은 말없이 움직였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의 공항에 비행기를 처박길 바랐다. 비행기 안에 있는 사람은 물론 공항 모든 사람들이 죽어나갈게 뻔했다. 부기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앞에서 벌어질 참상에 앞이 까마득해졌다.

  그때 누군가 자신의 손끝을 툭 쳤다. 부기장은 눈을 떠 옆을 바라보았다. 기장이 그를 보고 눈을 찡긋했다. 그는 마이크를 잡아내렸다. 운행도중 난기류를 만났으니 승객 모두가 착석하고 안전벨트를 매달라는 공지였다. 그는 공지가 끝나자마자 조종간을 앞으로 틀었고 비행기가 급격하게 하늘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벨트 없이 총을 휘두르며 어슬렁거리던 테러범들이 뒤쪽으로 뒤집어졌다.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솟구쳤다.

  「NCC-1701. 2번 활주로 착륙 대기」

  ‘NCC-1701. 2번 활주로로 착륙 대기합니다.’

  곡예를 하듯 솟아오르고 내리 꽂던 비행기의 움직임이 갑자기 둔해졌다. 부기장은 아득한 정신을 안고 옆을 바라보았다. 기장의 머리에서 피가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다. 부기장은 조종간을 붙잡았다. 그리고 안정적으로 운행을 시작했다. 축처져 있는 기장의 몸은 움직일 줄 몰랐다. 뒤에 자빠져 있던 테러범들은 욕설을 내지르며 부기장을 위협했다. 테러범들은 겁먹고 있었다. 그들은 기장을 죽일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비록 이 비행기로 인해 모두가 죽게된더라도 이런 식으로 죽일 생각은 없었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두근거리던 그의 심장이 뚝 고동을 멈췄다. 머리로 차가운 기운이 몰려드는 것 같았다. 그때 그의 헤드폰으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객실에서 승무원과 승객 몇이 테러범을 제압했다는 이야기였다. 테러범 자체가 몇 없었다. 비행기가 사납게 운행될 동안 객실에 있던 테러범들도 뒤집어졌고 그들이 정신 못차리는 틈새에 총기를 압수한 듯싶었다. 훈련이 적응되어있는 승무원들은 승객들을 대피 시키겠다는 침착한 말과 함께 통신을 끊었다. 부기장은 소식을 듣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종실의 테러범들은 여전히 사납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곧바로 운행하라고 윽박질렀다. 그는 아무말 없이 비행기를 운행했다. 그리고 승객들이 좀더 안전하게 대피 할 수 있도록 차츰 차츰 비행기의 고도를 낮춰갔다. 푸르른 바다가 가깝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승객들이 모두 대피하기 전에 테러범들이 객실의 상황을 알아냈다.

  ‘NCC-1701. 착륙 준비 완료’

  ‘NCC-1701. 착륙 준비됐습니다.’

  그들 중 몇이 객실로 뛰어들어갔고 총성과 비명이 울려퍼졌다. 부기장의 헤드폰으로 인원의 4/3이 대피했으며 남은 대부분은 승무원이라는 소식이 울렸다. 부기장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기다렸다. 여전히 밖에서는 총성이 울렸고 비명이 울렸다. 테러범이 죽은 건지, 아니면 승객이나 승무원이 죽은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1분이 천금같이 느껴졌다. 가까운 곳에 작은 섬들과 선박들이 노니는 부두가 보였다. 마침내 그의 귀에 ‘모든 승객이 대피했습니다.’라는 말이 들렸다. 그리고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45도 각도로 조종간을 고정했다. 바다에서 허우적거릴 승객들에게서 벗어난 안정권이었다. 비행기가 점차 아래로 처박히기 시작했다. 당장 조종간을 들어올리라는 테러범들의 협박에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들의 총알이 부기장의 어깨를 뚫었다. 그러나 그는 비명을 지를 지언정 조종간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내와 아들이 안전하게 대피했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거대한 비행기는 엄청난 소음과 함께 바다 한가운데 처박혔다.

  「NCC-1701. 착륙 허가」

  ‘NCC-1701. 착륙 허가 합니다.’

테러범, 승객과 승무원을 포함한 사상자는 12명. 이중 테러범 9명 전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머지 3명중 승객 한명이었으며 둘은 승무원이었다. 보고서에 기록된 바 목숨을 잃은 승객은 다른 승무원들과 함께 다른 승객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몸싸움을 하다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그리고 승무원 둘중 하나는 비행기 추락 이전에 사망한 기장이었으며 또 하나는 마지막까지 조종간을 놓지 않은 부기장, 조지 S. 커크였다.

  ‘착륙준비합니다.’

  ‘로저.’

  ‘플랩을 내립니다.’

  ‘로저.’

  ‘랜딩기어 내립니다.’

  누군가는 이 이야기가 전설이라고 칭해지기엔 지나친 영웅주의에 입각되었다고 평했고, 또 누군가는 그저 한 남자의 인생이라고 칭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전설이라고 말했다. 어차피 이런 이야기는 좋게든 혹은 나쁘게든 사람들 입에 오르는 이야기였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대단한 이야기였지만, 사실 대단하단 이유만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남겨진 흔적이란 것은 무섭도록 여파가 큰 법이었다. 그리고 이 경우에 조지 S. 커크의 흔적은 제임스 T. 커크였다. 두사람이 원하든 원치 않든 어쨌든간에 현실을 그랬다.

  ‘승객 여러분,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춘 다음, 안전벨트 신호가 꺼질 때까지 안전벨트를 풀지 마십시오. 긴 여행을 함께 해주신 승객 여러분들게 감사드립니다. 남겨둔 짐이 없는지 확인하시고 차례대로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저희 스타 항공은 더욱 안전하고 편안하게 여러분들을 모실 것을 약속드립니다. 기장 제임스 T. 커크였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커크가 무전기를 내려 놓으며 씨익 웃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췄다. 곁에서 자신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던 술루는 ‘수고하셨습니다.’하고 나지막히 말했다. 슬쩍 드러나는 술루의 밀빛 목덜미를 보며 커크는 ‘으응~’하고 대충 중얼거렸다. 어깨가 꽤 아픈지 한참이나 자신의 어깨를 주물거리던 술루를 보며 커크는 (여성 승무원들에게 귀에 딱지 앉도록 사랑스럽다 표현되는) 파란눈을 빛냈다. 그리고 술루의 목덜미 깃을 슬쩍 잡아내며 ‘피부 관리받아? 엄청 부드러워보이네?’하고 말했다. 그말에 술루가 무표정하게 하하 웃으며 ‘그럴돈 있으면 화분이나 사겠어요.’하고 말했다. 취미라곤 화분에 모종심기 밖에 없는 심심한 남자를 보며 커크는 김빠진 얼굴을 했다. 그러나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제임스 T. 커크는 자신의 안쪽 주머니에 있는 야구 경기 티켓을 생각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어보이며 술루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에 조종실 문이 턱 열렸다.

  ‘술루씨 수고하셨어요! 어서 준비하세요. 스팍 기장님께서는 벌써 내려가셨어요.’

  햇살처럼 환한 얼굴에 커크가 못지 않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체콥, 자네 눈엔 내가 코딱지처럼 보이나? 그래서 안보이나?’

  ‘앗, 기장님 죄송해요. 딱 코딱지처럼 보였어요. 기장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준비하셔서 어서 내려오세요.’

  체콥이 천사같은 미소를 지으며 재촉했다. 커크는 알고 있다. 저 재촉은 술루만을 향한 것이다. 커크는 꼬맹이의 오만방자함에 어이없어 하며 모자를 눌러 쓰고 자켓을 둘렀다. 소매의 금색 줄 네 개를 쫙쫙 펴고 술루에게 말을 건네려고 했다. 야구 티켓에 대한 연장선이었다. 그러나 이미 부조종석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통로쪽에서 재잘거리는 체콥의 목소리가 들렸다. 커크는 숨기지 않고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악독한 것.

  전설의 부기장 조지 S. 커크, 아니 그의 위치는 부기장이었지만 그는 기장으로 남았다. 정정해서 말하자면 전설의 기장 조지 S. 커크. 그의 아들 제임스 T. 커크는 그가 일했던 그 자리 그대로 그의 일을 물려 받고 있었다. 총명한 기장으로 또 훌륭한 리더로 파일럿의 세계를 누리고 다녔다. 물론 우여곡절도 있었다. 커크가 크리스토퍼 파이크 이사(당시는 기장이었다.)의 제안으로 파일럿 교육을 받게 되면서 많은 교육생들이 그를 질투했다. 명백히 따져서 그는 낙하산이었다. 그가 전설이라는 사내의 아들이긴 했지만 그건 또다른 이야기였다. 커크는 망나니였다. 꽐라가 되도록 처마시는 것은 일상이었고 툭하면 주먹질을 해댔다. 그런 그가 파일럿 교육을 받게 되었으니 왈가왈부 말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그는 여태동안의 시선들이 무색하도록 뛰어난 융통성과 실력을 보이며 종국엔 최연소 기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항공사에서 최고의 비행기로 일컬어지는 NCC-1701의 기장 자리를 차지했다. 커크와 긴 시간을 함께한 공항 내(內) 의료센터의 본즈조차도 상상치 못한 결과였다.

  그가 최연소 함장의 자리를 거머쥐고 승승장구 하고 있긴 했지만 그에게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젊은이에게 적용되는 것처럼 그는 넘은 산보다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오늘이야 술루 부기장과 함께 했지만 커크의 본 멤버는 보통 스팍이었다. 그 웃긴 바가지머리께서는 어찌나 이성적이던지 커크가 뭔 말만하면 ‘비이성적입니다.’, ‘논리적이지 못합니다.’, ‘설득력없는 근거입니다.’ 하면서 커크를 열받게 만들었다. 물론 그가 나쁜 파트너란 사실은 아니었다. 그는 좋은 파트너였다. 그러니 그도 부기장을 넘어 기장이 되지 않았는가. 커크 못지 않게 스팍의 나이도 어렸고 비록 최연소 타이틀은 아니었지만 그도 이르게 함장의 자리를 차지했다. 파트너쉽에 문제는 있었지만 그래도 커크는 나름 스팍과의 자신의 호흡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욕해놓고 이렇게 마무리하기 민망하긴 하다마는.) 그런 것 외에도 커크에겐 문제가 많았다. 여전히 그를 미워하는 세력이 많았다. 커크가 잠시 빈틈을 보인다면 들개처럼 치고 들어올게 뻔했다. 뭐, 하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았다. 원체 커크는 적을 만들고 곁에두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커크가 빈틈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빈틈으로 자신을 공격하게 마냥 놔두는 타입은 아니었다. 상대가 들개라면 이쪽은 늑대니 못싸울 것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문제는 이런게 아니었다. 직장 내의 암투, 파트너쉽, 승무원 관리, 조종, 건강. 이런게 아니었다. 명백히 따지자면 커크의 앞에 가장 크게 놓인 산은. 그러니까 그 산은.


  #02

  “사랑같은게 아니잖아요.”

  “뭐? 사랑이 아니야? 요놈새끼 말하는 꼬라지 한번 봐라?”

  빗줄기가 굵어진다했더니 이제는 마냥 굵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퍼붓기 시작했다. 비가 퍼붓는 소리는 귀가 웅웅하도록 울렸다. 안에서 뒹굴던 마른 잎사귀를 모아 피웠던 불이 위태하게 흔들렸다. 커크의 ‘신에 대한 기다림’ 후에 잠시 적막이 흘렀었지만 그건 길지 않았다. 체콥의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거세졌다. 커크는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에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지만 장난질 한다고 라이터 기름을 다 써버린 덕에 주머니속 담배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커크가 입을 쩝쩝거리고 있을때 열을 참지 모한 체콥이 툭하니 말을 뱉었다. 밑도 끝도 없이 ‘사랑은 아니잖아요?’라는 이야기였다. 커크도 켕기는게 있으니 웬만한 이야기에는 참아갔겠지만 이 이야기는 순순히 넘어 갈 수가 없었다.

  “네놈이 하면 사랑이고 다른놈이 하면 불륜이냐?”

  “이럴때 쓰는말 아니거든요?”

  “어차피 뜻은 일맥상통하거든요?”

  커크가 빈정거리듯이 고개를 흔들거리며 체콥의 말투를 따라했다. 체콥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우물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훽 돌려버렸다. 커크도 기분 좋지만은 않았다. 동네 꼬맹이 울린듯한 기분이지 않은가. 하지만 커크는 외적인 부분과 그 외적인 부분으로 초래하는 감정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그건 술루에 대한 스스로를 인정했을때 내린 결론이였다.

  커크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었다. 염소마냥 밍밍한 맛을 느끼고 있을때 무언가 휙 던져졌다. 손안에 빨간색 싸구려 라이터가 놓여 있었다. 여전히 새침하게 뒤돌고 있는 등짝을 보며 커크는 라이터를 켰다.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피어올랐다.


  #03

  커크는 아마 술루의 그런 점이 좋았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얌전하면서 자기 할말은 다 한다거나, 주제에 담배 피는 손목이 섹시하다거나, 단정하게 목 끝까지맨 타이라던가.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물론 그런 부분들도 좋긴 했다만.) 제임스 T. 커크라는 사람이 지독하게 솔직하단 점을 생각해보면 그가 술루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생각보다 예측하기 쉬운 것이었다. 커크가 그를 본격적으로 좋아하게 된 것은 체콥이 술루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잠깐, 이 말에는 세가지의 오해 소지가 있었다.

  1번, 제임스 T. 커크는 체콥을 사랑한다. 그래서 그의 연애사업을 방해하려든다.

  답 : 물론 부하 직원으로서 아끼는 바지만 커크는 체콥을 성적인 대상으로 사랑하진 않았다. 오히려 현재 그와는 사랑의 라이벌이나 마찬가지였다.

  2번, 제임스 T. 커크는 짝 있는(혹 생기려는)상대만 골라 사귀려는 호색한이다.

  답 : 커크가 호색한인 면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그가 짝있는 상대만 골라 사귀는 파렴치한 인간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사내 연애를 옹호하며 때론 사랑의 큐피트를 자처하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3번, 제임스 T. 커크는 상황을 장난으로 생각할 뿐 진심은 없다..

  답 : 놀랍겠지만 천하의 바람둥이 제임스 T. 커크는 술루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상 끝.

  생각해보면 첫사랑과의 연애도 이렇진 않았었다. 물론 그 당시의 풋풋한 감정과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것에 설레이긴 했었지만 이렇지는 않았다. 명백하게 따지자면 커크는 짝사랑을 하고 있었고, 이건 그의 인생에 있어 처음 있는 대박사건이었다. 한참 본인의 감정을 무시하며 ‘아니야, 내가 남자를 좋아할리 없잖아. 이건 그냥 솜뭉치 같은 꼬맹이가 하도 미스터 술루가 좋아요! 미스터 술루 최고에요! 하고 외치고 다녀서 그런거야. 아니야 이럴리 없어.’하고 변명하고 있을 당시, 그래도 그는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정비실에서 죽치고 앉아 있는 스코티에게 조언을 청했다. -그의 절친한 동료이자 ‘무려’ 연애까지 하고 있는 스팍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한 것은 커크와 스팍 모두에게 슬픈 이야기였다.- 비록 상대의 실명과 그가 남자라는 사실을 알리진 못했지만 스코티는 이 이야기를 아주 침착하게 들어 주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에 그는 아주 침착하게 휴대폰을 들고 전화 했다.

‘본즈? 본즈. 놀라지 말고 내 말 들어봐. 커크가 짝사랑을 한데!’

  전화 너머로 ‘옘병!’하는 비명과 함께 당장 의료실로 데려오라는 소란이 들렸다. 손발을 푸다닥 거리며 즐거워하는 스코티를 바라보며 커크는 씁쓸한 얼굴로 주변의 –스코티가 심히 아끼고 사랑하는- 프라 모델들을 한방에 처부셨다. 그리고 처절한 비명소리를 남기고 기관실을 떠났다.

  그 뒤로 이 상황을 심히 즐겨하는 본즈와 스코티가 일부러 술자리를 만들며 사랑 상담을 해주겠다 했지만 사실 커크로선 별로 납득되지 않는 모임이었다. 기계성애자와 이혼경력자에게 무슨 사랑상담이란 말인가. 둘에게 상담할 바엔 차라리 스팍에게 상담하는 것이 나을 판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평소에 보이지 않던 환상 호흡을 보이며 커크를 술집으로 끌고 나왔고 어떤 여자를 ‘짝’사랑하게 된거냐고 독촉했다. 커크는 커크대로 심란해져서 연거푸 술을 마셨고 알콜의 힘 때문인지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얌전하고 그러면서 똑 부러져서 좋고. 침착하고 웃는 얼굴이 예쁘고. 나름 상냥하고. 커크의 끝없는 팔불출에 스코티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거 말고 네가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을 것 아니냐.’

  그 말에 게슴츠레 눈을 뜬 커크가 말했다. ‘다른 남자가 좋아해서?’ 스코티와 본즈가 잠시 멈칫하면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커크는 그들이 자신을 향해 이런 몰상식한 새끼를 봤나!하며 벼타작하듯이 몰아 붙일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둘은 그러지 않고 잠시 고개를 끄덕할 뿐이었다.

  '그런게 있지. 다른 사람이 좋아한다는 그 사람 괜히 예뻐 보이고 매력 있어 보이는 그런거.’

  ‘남의 여자 예뻐 보인다는게 그런거 아니겠냐. 좋은건 아니지만 이해는 가네.’

  그래? 커크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물었고 두 사람은 그 말에 답해 주다가 어느세 본인들의 과거 여행을 시작했다. 언제나 뻔하게 나오는 본즈의 전처 이야기와, 전혀 매치는 안 되지만 스코티는 남이 가지고 내가 못가진 기계 부속품일수록 더 가지고 싶어진다는 이야기는 분위기를 타고 뜨거워졌다. 그 말들을 듣고 있자니 자기변명이 되는 듯 해서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셋 다 얼큰하게 취해서 서로에게 삿댓질을 하며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간간히 스팍에 대한 욕설이 나오기도 했지만 술만 마시면 흔하게 나오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특별할 것도 없었다. 한참 우후라가 스팍과 사귀는 이유는 지구평화를 위해서란 주제로 떠들던 본즈는 뻘건 홍조를 달고서 책상을 쾅쾅 내리쳤다.

  ‘구로니깐,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드가냐 이고롼마리지?’

  ‘옳쏘! 옳쏘!’

  스코티가 홍당무처럼 변한 얼굴로 연호했다.

  ‘그 좌식도 미인하고 사귀는뒈 우리 기장이 오때서! 우리 줴임쑤 T. 커꾸 올마나 머시있쏘?! 머리 좀 쿠지만, 머리 커서 좌알쌩긴 올굴 자알 보이쥐!’

  ‘옳쏘! 옳쏘!’

  ‘가꿈 정신 나간짓 해소 구롷지 추진력도 있쥐!’

  ‘두우우말 하면 좐소리쥐!’

  두 사람의 칭찬 아닌 칭찬에 기분 좋아진 커크가 딸꾹 거리며 베시시 웃었다. 얌전하게 몸을 흔들거리며 웃는 커크를 향해 스코티와 본즈가 덥썩 어깨 동무를 하며 ‘저질러 버려!’하고 소리 질렀다.

  ‘다른 쉐끼가 조아하믄 오때?! 네에가, 네에에가 조아하믄 장땡이지! 네가 온제부터 구론고 따졌따고 구루냐?!’

  ‘옳쏘! 옳쏘! 화악 고백해부려!’

  그 말들에 커크가 화색을 하며 ‘구롤까? 구롤까?’하고 물었다. 그 모습이 주정꾼들 눈에 제법 귀여워보였던지 두 사람은 거세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구뤠구뤠!하고 외쳤다. 그리고 그 순간에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스코티가 히히덕 거리며 맥주잔을 찾았다. 시원하게 맥주 한잔을 들이킨 후 입을 스윽 닦아내면서 말했다.

  ‘쑬루만 아니면 되지.’

  그 말에 본즈가 포복절도 하면서 넘어갈 듯 웃었다.

  ‘구뤠구뤠! 그 ‘미슷또 쑬루’만 아니면 되에에지! 체코비 아가야가 올마나 정썽아닌 정썽을 둘여놨는데! 쑬루 빼고는 체코비가 쑬루 쪼아하는거 모룰꺼다! 구론데에 쑬루를 빼가눈건 안되에에지. 우리 체코비 아가야가 오똔 아가야인데!’

  ‘아이돌이쥐!’

‘스타 항공의 아이돌!’

‘아이돌 만쉐!’

‘만쉐!’

  만세를 삼창하고 히히덕거리던 두 사람은 한참 서로를 찐하게 마주보고 웃다가 쿠당하고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테이블 아래로 안주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시뻘건 얼굴을 한 채로 골골 잘도 자는 두 사람을 보며 커크는 미소하나 없는 얼굴로 툭 말을 뱉었다.

  ‘옘병’


  #04

  이미 보고한 이야기지만 술루는 담배 피우는 것이 섹시했다. 틀에 매인 듯 딱딱하게 살아가는 듯한 남자가 하얀 셔츠 소매를 걷고 벽에 기대어 담배 피우는 모습은. 뭐랄까. 이런걸 갭이라고 하던가. 사실 술루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담배 냄새만 맡아도 쿨럭거리며 죽어갈 것 같은 남자가 파일럿들 중 가장 독한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금연한다 해놓고 점심시간만 되면 실실 웃으며 담배 한 개피를 빌리는 커크였지만 술루의 담배 만큼은 빌리지 않았다. 한번 빌렸다가 눈물이 쏙 빠지도록 기침 세례를 해야했다.

  왜 그렇게 독한 담배를 피우냐는 커크의 물음에 술루는 씨익 웃으며 ‘처음 배운 웠던 담배가 이거라서요.’라고 말했다. 그때 커크는 문득 이 남자의 섹스가 굉장히 야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체콥이 라이터를 가지고 다니는건 알고 있었다. 술루는 늘 싸구려 라이터를 가지고 다녔었다. 딱 체콥이 들고 다니는 것 같은 플라스틱 라이터. 쉽게 버릴 수 있는 것들.

  “술루씨는 이런 쪽으로 책임지는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요.”

커크의 말에 체콥은 이렇게 대답했다. 악담이라면 악담이겠지만 그건 악담이라기보단 하나의 슬픈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건 커크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는 손때묻은 지포 라이터보단 일회용 라이터를 좋아하고, 이름이 쓰여있는 머그잔보단 종이컵을 사용했으며, 파일럿들이 비싼 만연필을 꽂고 다니는 로비에서도 일회용 싸구려 펜을 들고 다녔다. 그는 품고 다니는 것들보단 잃어버려도 미련 없는 것들을 좋아했다. 그런 것들은 그를 게으른 사람으로 보이게 하기 충분했지만 실절적으로 그는 게으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누가 보더라도 명백했다. 결국은 기질의 차이였다. 이렇게 표현하자니 술루가 더 없이 나쁜 남자 같았다. 체콥은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커크와 똑같이 생긴 연기들이 유영하고 있었다.

  구부리고 있는 체콥의 등이 회색과 녹색 빛이 그늘져 있었다. 마른 등이 그대로 드러났고 물기에 젖은 곱슬 머리카락이 부드러워보였다. 비스듬하게 보이는 빨간 귀끝이 보였다. 소년같은 모습으로 어떻게 담배를 꼬나물고 있을까.

  “우린 뭘 기다리고 있는거냐?”

  커크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체콥이 했던 그대의 질문이었지만 그거보단 훨씬 오만방자했다. 체콥은 힐긋 시선만 던지고선 조각상마냥 자신의 자세를 고집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커크는 그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은 그를 따라 하늘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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