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에는 꼼작 없이 연차를 썼다. 연습까지 빠져야 한다는 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시즌이 끝난 직후인 만큼 다들 이해해주는 분위기였다. 우시지마와 항상 다녔던 병원에 운 좋게 진료예약까지 성공했다. 진료 시간이 되기 전에 집 근처 식당에서 적당히 점심을 먹는 동안 카게야마가 조금 풀이 죽은 기색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거기까진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토비오 쨩?”


하지만 병원에 도착한 순간부터 눈에 띄게 움츠러든 카게야마의 모습에, 끝내 오이카와가 의아한 목소리로 상대를 불렀다. 결국 주차장부터 머뭇거리는 발걸음을 간신히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럼에도 카게야마는 내내 땅바닥을 바라보다가, 병원 입구에 들어서고 나서는 맞잡은 손마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지나가는 사람들마저 힐끔힐끔 카게야마를 바라볼 정도였다. 얌전히 옆에서 걷고 있던 우시지마도 카게야마를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 리셉션을 방문하기에 앞서 오이카와가 먼저 발걸음을 멈췄다.


“오늘은 아픈 건 전혀 없으니까 괜찮을 거야. 너무 긴장하지 마.”


물론 카게야마 또래의 아이들은 충분히 병원을 무서워할 만했다. 덩치에 비해 실제 나이가 어리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더욱. 하지만 그래 봐야 오늘의 방문 목적은 건강 검진과 예방접종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긴장을 풀라는 의미에서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찰나,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카게야마가 거세게 오이카와의 손을 쳐냈다.


“아….”


그 우발적인 행동에 자신조차 놀란 모양인지 카게야마가 일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옷자락을 쥔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강하게 밀쳐져 나간 손이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어색하게 허공을 배회했다.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는 카게야마의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오이카와는 이 위화감이 서릴 정도로 과한 긴장의 정체를 알아챘다. 카게야마가 귀를 자른 건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확신 또한.


단이는 동네 병원에서 이루어질 정도로 작은 규모의 수술이 아니다. 수술 시간은 짧을지 몰라도 이후의 회복을 생각하면 며칠, 혹은 몇 주의 입원은 필수적으로 따라왔다. 그 모든 상황을 생각하면 카게야마가 병원에 가지고 있을 트라우마도 짐작이 갔다.


이 순간만큼은 착잡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카게야마가 아직 땅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일 정도였다. 순식간에 어색한 침묵이 세 사람을 둘러쌌다. 이윽고 오이카와가 아직 옷을 붙잡고 있는 카게야마의 오른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토비오.”


나지막한 목소리에 그제야 카게야마가 조심스럽게 시선을 올렸다. 온갖 종류의 두려움이 서려 있는 눈동자가 안쓰러웠다. 아마도 장소에 대한 공포와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한 질책 때문일 터였다.


“오늘 네가 원하지 않는 건 절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어쩌면 이런 상대의 신뢰를 얻기란 정말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카게야마의 믿음이 절실했다. 이렇게 귀를 바싹 곤두세우고, 잔뜩 경계하는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이윽고 카게야마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상대가 조심스럽게 제 손가락으로 고리를 걸었다. 그제야 간신히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맞닿은 체온은 여전히 따듯했다.


“자, 우리 약속한 거야.”

“…네.”


부디 이 작은 약속이 자신을 믿을 수 있는 한 걸음이 되어주기를. 그렇게 마주 걸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웃어주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카게야마는 더 이상 몸을 떨지 않았다.


“그럼 나는 혼자서 진료를 보는 쪽이 낫겠군.”

“괜찮겠어?”

“딱히 안 될 이유가 있나.”


우시지마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항상 같이 오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우시지마의 말마따나 안 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어차피 항상 오던 병원이기도 하고. 카게야마의 검진에 걸릴 시간을 고려하면 이쪽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진료 끝나면 전화해.”

“알겠다.”


우시지마를 먼저 보내고 나서야 리셉션으로 향했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까만큼 덜덜 떨지는 않았다. 그대로 진료를 받다가는 하마터면 수인 학대범으로 오해받을 뻔했으니 오이카와로서는 사뭇 다행이었다.


“환복하시고 3층 검사실로 가세요.”


하지만 간호사의 설명을 듣고 옷을 갈아입을 때는 다시 카게야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이카와는 이건 단지 엑스레이 촬영을 위한 것일 뿐이며, 오늘은 고작 해봐야 피를 뽑는 게 가장 아플 거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오이카와의 설명을 납득한 모양인지 카게야마는 완전히 풀리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후로는 큰 문제는 없었다. 다소 어색해 보일 정도로 굳어있을 뿐 카게야마는 군말 없이 건강 검진을 받았다. 여러 자잘한 검사가 계속되며 스스로도 별것 없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마지막으로 의사와 면담할 즈음에는 카게야마도 꽤 위풍당당하게 진료실로 들어섰다.


“오늘은 새로운 분과 함께 오셨네요.”


카게야마가 먼저 들어오고 이내 오이카와가 따라가자 나이 지긋한 의사가 인자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 보니 우시지마가 처음 건강 검진을 받았을 때도 이 선생님을 통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이후로도 꾸준히 방문하고, 대형종 수인이 워낙 드물다 보니 이제는 서로 얼굴을 외울 정도였다.


“어디 보자, 카게야마 토비오 군. 도베르만 수인이네요?”

“…네.”

“나이는 네 살 반이고…. 종을 감안해도 키가 상당히 크네요. 발육 상태도 아주 좋고요.”


의사의 부드러운 말투에 오이카와는 알게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나마 괜찮아 보이던 카게야마가 의사를 보자마자 다시 얼어붙은 탓이었다. 카게야마의 인적사항을 꼼꼼히 살피던 의사가 이내 안경을 올렸다.


“이전에 가졌던 질병도 없고…. 자세한 건 검진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일단 발달 상태는 좋네요. 귀만 조금 봐도 될까요?”


의사의 말에 일순간 카게야마가 눈에 띄게 얼어붙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역시 편한 주제는 아닌 탓이었다. 오이카와는 그런 카게야마의 어깨를 부드럽게 툭툭 쳤다. 괜찮을 거야, 토비오 쨩. 그렇게 카게야마의 긴장을 풀어주는 동안 의사는 조용히 카게야마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카게야마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의사가 귀를 살피기 시작했다.


“음, 특별히 문제는 없어 보이네요. 아주 깨끗합니다. 본인이 관리를 잘 하고 있나 보네요.”

“그런가요?”

“네, 이렇게 바짝 서 있는 형태의 귀는 이물질이 들어가기 쉬우니까 특히 신경을 써주셔야 하고요. 아무래도 물이 들어가기가 쉬워요. 이미 본인이 잘 하는 것 같지만요.”


의사의 설명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라면 귀가 접혀 이물질이나 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지만, 끝이 잘려나간 카게야마의 경우 그마저도 온전히 본인의 몫으로 돌아갔다. 귀가 접히면 접힌 대로 이런저런 질병의 위험이 증가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부담이 크진 않았을 터였다.


다행히도 의사는 부러 카게야마의 단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그의 섬세한 배려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의 입에서 직접적으로 단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낄 카게야마의 심정은 오이카와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검진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2주 정도 걸리고요. 항상 그랬듯 집으로 직접 배송될 겁니다. 그리고 또…. 예방접종 내역을 확인하고 싶다고요.”

“네.”


의사가 다시 안경을 올리고 컴퓨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상적으로 출생신고가 되어있다면 수인의 예방접종은 모두 기록이 남아있을 터였다. 이따금 수인과 관련된 시스템은 사람보다도 더 깐깐했다.


아무래도 급하게 결정된 일이었던 만큼 하나마키로부터 모든 정보를 받을 수는 없었다. 그 날 인감을 가지고 가지 않았던 탓에―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인감을 챙겨갈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직 처리해야 할 서류도 남아있었다. 하지만 누락된 것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정보가 바로 예방접종이었다. 혹시라도 아직 접종이 다 되지 않았으면 어떡하지. 혼자 불안에 떠는 오이카와와 달리 기록을 살피던 의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필수 예방접종은 모두 접종이 된 거로 확인이 되네요.”

“아, 다행이네요.”


이미 카게야마에게 단이를 강행한 시점에서, 오이카와가 이전 보호자들에게 가지는 신뢰도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대형종이라면 3세 이전에 끝났어야 할 필수 예방접종이 끝나지 않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최악의 경우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달에 심장사상충 예방접종만 하시면 됩니다. 와카토시 군과 함께 오시면 될 것 같네요. 이건 꼭 매년 해야 하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그제야 처음으로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어제부터 내내 신경 쓰여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그제야 카게야마도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윽고 의사가 다시 카게야마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특유의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좋은 보호자를 만나서 다행이구나, 토비오 군.”


그 말을 들은 카게야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얼굴이 붉어지는 건 오이카와의 몫이었다. 이런저런 입에 발린 말에는 면역이 되어있지만, 이 의사의 말만큼은 진심임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이윽고 의사를 보며 머뭇거리던 카게야마가 일순간 작게 웃었다.


“네.”


그건 비록 작지만, 분명 카게야마의 진심으로부터 비롯된 미소였다. 그 웃음을 마주한 순간 오이카와는 할 말을 잃은 채 눈을 크게 떴다. 고작 어제 만난 사이라고 할지라도, 카게야마의 웃음이 가지는 의미는 사뭇 달랐다. 이윽고 의사가 여전히 인자한 미소와 함께 카게야마의 어깨를 도닥여주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다음 달에 다시 올게요.”

“네. 토비오 군도 다시 봅시다.”


인사를 하고 나서 다시 카게야마의 손을 잡고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홀가분한 마음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카게야마도 긴장이 풀린 모양인지 맞닿은 손에 아까만큼 힘이 실려 있지는 않았다.


“고생했어, 토비오 쨩.”


그 말에 카게야마는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미묘하게 부끄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보아, 그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쩐지 조금이나마 더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이카와 없이 혼자 진료를 보는 건 처음이던가. 우시지마는 그 사실을 진료를 기다리면서야 깨달았다. 사방팔방에 보호자 손을 잡고 온 소형종 수인들 틈에서 자신이 꽤 눈에 띈다는 사실은 물론 자각하지 못했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살피는데 제 신경을 곤두세우고 싶지 않았으므로.


다른 소형종 수인들이라면 모를까, 우시지마는 진료를 혼자 보는 것 정도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물론 진료 뿐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전반적인 사회생활 자체가 우시지마에게는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오이카와와 동행하기를 선호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단순히 오이카와와 함께 있고 싶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역시,


“…저 사람은 보호자가 없는 걸까?”


주변에서의 수군거림이 아무리 우시지마라고 할지라도 꽤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수인이 혼자 돌아다니면 으레 따라붙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그래도 우시지마는 성체가 될 때까지 보호자 없이 자랐던 탓에 이런 주변의 반응에도 꽤 익숙했다. 애초에 신경 쓸 필요가 없기도 하고.


“우시지마 와카토시 씨.”


한참이 지나서야 들려온 간호사의 부름에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한눈에 보기에도 큰 덩치에 주변의 이목이 쏠렸다. 우시지마는 그런 시선을 무시한 채 간호사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혼자 오셨네요?”

“네. 오이카와가 다른 일로 바빠서.”

“하긴, 와카토시 씨라면 진료 혼자 보는 거야 부담스러운 일도 아니니까요.”


물론 종종 우시지마의 진료를 봐주는 의사는 바깥사람들과는 완전히 반응이 달랐다. 그제야 조금 마음이 풀어지며 귀가 다시 늘어졌다. 그런 우시지마를 바라보면 의사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아, 꼬리 때문에 오신 건가요?”

“어쩌다 보니 어제 다른 대형견 수인에게 물려서요.”


아이고, 하는 추임새와 함께 의사가 짧게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누군가에 의해 병원에 오는 일 자체가 처음이었다.


“세상에 와카토시 씨한테 덤비는 수인이 있다는 게 놀라운데요.”

“아직은 어린 녀석이라서 이해는 합니다.”


이유는 물론 간단했다. 우시지마는 대형종 수인 중에서도 특히 덩치가 큰 편이었다. 일반 대형견보다 더 덩치가 큰 맹수 계열의 수인도 보통 우시지마보다는 키가 작을 정도였으니. 성인 남자치고 체격이 큰 편인 오이카와조차도 우시지마를 처음 만났을 때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던 기억이 생생했다.


“하긴, 어릴 때는 그럴 수 있죠. 일단 좀 봅시다.”


이윽고 의사가 조심스럽게 우시지마의 꼬리에 감긴 붕대를 풀어냈다. 어제 자기 전 치료를 한 번 더 했던 덕에 피가 많이 묻어있지는 않았다. 꼬리털이 긴 탓에 의사가 털을 파헤치고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다행히 상처가 깊진 않네요.”

“꿰맬 필요는 없는 겁니까?”

“네. 소독만 잘 해주고 한동안 조심하시면 금방 아물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렇게 덧붙인 말은 여느 때보다도 진심이었다. 만약 꿰매야 할 상처라면 꼼짝없이 꼬리털을 밀어야 할 판국이었으므로. 우시지마는 풍성한 제 꼬리털을 꽤 아꼈다. 오이카와가 그 꼬리를 좋아한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사실 대형견 수인에게 물렸는데 이 정도라면 굉장히 양호한 편이에요. 거의 물자마자 본인이 놀라서 바로 놓은 것 같네요.”

“그렇습니까.”


의사에 말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같은 대형견 수인인 만큼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기도 했다. 대형견 수인이 온 힘을 다해 무언가를 물어뜯으면 일단 꼬리가 이렇게 온전하게 붙어있을 수가 없었다. 어제 카게야마에게 화가 나기보단 안쓰러운 감정이 먼저였던 이유이기도 했다.


“단지 상대가 아직 예방접종을 하지 않았으면 2차 감염이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확인이 가능한가요?”

“같이 사는 사람이라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일단 소독하고 항생제만 처방해드릴 테니까, 혹시라도 예방접종이 완료되지 않았다면 다시 방문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예방접종이라면 분명 오이카와가 오늘 병원에서 확인하겠다고 했던 부분이었다. 상처의 면적이 크지 않았던 만큼 소독을 하는 데에도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처방전과 함께 진료실을 나올 무렵에는 슬슬 카게야마와 오이카와도 검진이 끝났을 법한 시간이었다. 검진 예약을 했던 두 사람과 달리 우시지마는 대기시간이 길었던 탓이다.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 길에 오이카와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은 길지 않았다. 전화를 받은 오이카와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바로 1층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로비로 나오기 무섭게 오이카와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곧장 보호자에게 향하던 발걸음이 일순간 멈칫했다. 오이카와의 품에 안겨있는 카게야마를 발견한 탓이었다. 오이카와는 사뭇 부드러운 미소로 무언가를 말하며 연신 카게야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어째선지 그 행동을 보는 건 생각보다도 기분이 이상했다.


당연히 오이카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오이카와가 우시지마를 기다리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인 걸까. 그제야 우시지마는 오이카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수인에게 이렇게 직접적인 호의를 베푸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생소했다. 무언가, 지금 이 상황이 그다지 마음의 들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어렴풋하게 직감할 뿐이었다.


자신은 지금 카게야마 토비오를 질투하고 있는 걸까? 어쩐지 곧장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이어가던 우시지마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봤자 3개월이다. 일시적인 인연이기에 오이카와는 지금 평소 자신을 대할 때보다 더 친절하게 상대를 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와카 쨩!”


그러는 사이 오이카와가 먼저 우시지마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이 이상 생각을 계속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단지 이제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에 스스로도 조금 놀랐을 뿐이었다. 자신을 발견한 카게야마가 다시 귀를 쫑긋거리는 것이 보였다.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하셔?”

“상처가 그다지 깊지 않다고 했다. 카게야마가 물자마자 놀라서 바로 놓은 것 같다고 하시더군.”

“다행이다. 토비오 쨩도 역시 놀랐던 거구나.”


그렇게 다시 카게야마의 머리를 쓰다듬는 오이카와를 보는 우시지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따지자면 자신도 오늘 칭찬받을 일을 하긴 했지만―엄밀히 말하면 오이카와를 배려해 혼자 진료를 받고 왔으므로―, 일단 이쪽은 성체고 저쪽은 청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고작 이런 일로 경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우시지마는 오이카와가 보기 전에 표정을 풀었다.


“와카 쨩도 고생했어.”


그 순간 오이카와가 활짝 웃으며 우시지마의 팔을 가볍게 다독였다. 우시지마가 서 있고 오이카와는 앉아있던 탓에 거기까지가 최선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 오이카와의 가벼운 행동만으로도 생경한 감정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지금까지 신경 쓰고 있던 것이 우스울 정도로.


“별거 아니다.”


그래, 어차피 3개월만 지나면 오이카와는 다시 우시지마가 독차지하게 될 터였다. 그사이 보호가 필요한 어린 수인에게 잠깐 품을 양보하는 것쯤이야, 내키진 않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따지자면 자신은 오이카와의 품에 안기는 것보단 안는 쪽이 취향이었으므로.


그제야 집에 가자는 말과 함께 오이카와가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카게야마가 내려오며 드디어 제 발로 땅을 짚었다. 그 행동이 반가워 일순간 꼬리를 흔들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가자.”


카게야마의 손을 잡은 오이카와가 자연스럽게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일순간 우시지마의 고개가 기울자, 오이카와가 얼른 잡으라는 듯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두 사람은 이전에도 밖에서 손을 잡고 다닌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오이카와의 행동은 충분히 반가웠기에 우시지마가 이내 오이카와의 손을 잡았다. 눈에 띄게 작은 카게야마와 달리 우시지마의 손이 오이카와의 손을 덮었다.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카레요!”

“토비오 쨩은 카레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다 큰 남자 둘과 중학생 남짓한 소년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은 분명 남들이 보긴 이상하겠지만, 그럼에도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저녁은 우시지마의 취향을 고려해 하이라이스가 되었다. 솔직히 오이카와의 입장에서는 카레라이스나 하이라이스나 별 다를 게 없는 음식이었지만, 두 사람의 입맛에는 확실히 다른 모양이었다. 어제와 정확히 표정이 반대가 된 두 사람을 보는 일도 사뭇 즐거웠다.


“내일부터 내가 회사에 출근하면 우시와카랑 있게 될 거야, 토비오.”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밥을 우적거리던 카게야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숟가락을 멈칫한 카게야마와 달리 우시지마는 여전히 덤덤하게 밥을 먹었다.


“그런 표정으로 바라봐도 어쩔 수 없어. 너희를 먹여 살리려면 오이카와 씨는 출근해야만 해.”

“운동선수도 출근을 하나요?”

“오프 시즌에만. 배구는 프로 리그가 아니라 실업 리그니까.”


카게야마가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말해봐야 프로 리그와 실업 리그의 차이를 카게야마는 잘 모를 터였다.


“그럼 언제 돌아오세요?”

“으음, 퇴근하면 연습도 해야 하니까…. 그래도 저녁 먹기 전에는 들어올 거야.”

“…그런가요.”


카게야마의 귀가 다시 축 처졌다. 기운이 빠진 상대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카게야마의 이런 반응을 보니 그래도 신뢰를 조금 얻은 걸까 싶어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시즌이 시작하면요?”

“그때 오이카와는 출근하지 않는다. 경기를 뛰어야 하니까.”

“그럼 그동안에도 우시지마 씨와 같이 집에 있나요?”

“그건 아니다. 난 오이카와의 공식 스케쥴에는 대부분 동행한다.”


날카로운 질문에 말문이 막힌 찰나 우시지마가 여전히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그때까지 카게야마와 같이 지낸다면, 이는 분명 고려해볼 문제였겠지만. 시즌이 시작하면 카게야마는 이미 새 보호자를 만난 뒤일 거라는 사실을, 오직 장본인만이 모르고 있었다.


“동행이요? 왜요?”

“오이카와를 경호하는 게 내 일이기 때문이다. 오이카와가 회사에 갈 때나 연습할 때까지 따라오는 걸 부담스러워해서, 오프 시즌에만 가지 않을 뿐이다.”

“경호?”

“쉽게 말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오이카와를 보호한다는 뜻이다.”


우시지마의 이야기를 듣는 카게야마가 다시 귀를 쫑긋 세웠다. 우시지마의 이야기가 꽤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때 카게야마는 여기에 없을 텐데. 카게야마는 몸을 바짝 세운 거로도 모자라 꼬리를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그럼 우시지마 씨가 오이카와 씨의 보호자인 건가요?”

“어떻게 보면 그렇군.”

“애한테 그럴듯하게 이상한 말 하지 마, 우시와카 쨩.”


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자니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이야기에 결국 오이카와가 입을 열었다. 누가 누구를 보호해? 우시지마가 오이카와를 경호하는 건 사실이지만, 보호자라는 칭호를 바꾸기에는 멀어도 한참 멀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죽기 살기로 돈을 버는데. 우시지마도 이번만큼은 반박하지 못하고 다시 얌전히 밥을 먹었다.


“아무튼 내가 없어도 둘이 잘 있을 수 있지? 와카 쨩, 토비오 너무 방치하지 말고.”

“방치한다는 건 어떤 걸 말하는 거지?”

“뭐…. 토비오만 홀로 내버려 둔다거나, 와카 쨩 혼자 쌩하니 운동하러 가버린다거나.”


그 말에 우시지마의 얼굴에 다시 의아함이 서렸다. 표정에 의문이 훤히 드러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그럼 내가 카게야마와 뭘 해야 하는 거지?”

“그건…….”


예상치 못한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보면 오이카와조차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애당초 살가운 성격도 아닌 둘이서 도대체 뭘 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을 헤집어도 마땅한 선택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뭐, 운동할 때 같이 간다거나….”


우시지마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도로록 굴렸다. 무언가 둘러댈 때의 습관 중 하나였다.


“아니면 카게야마가 하고 싶어 하는 걸 같이 해준다거나, 뭐 그런 것들 있잖아.”

“전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는데요.”

“그럼 지금부터 만들면 되겠네. 잘 됐다, 토비오 쨩. 이렇게 할 일이 생겼구나.”


부러 환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오이카와의 이런 미소는 상대의 말문을 틀어막기 위한 것임을 카게야마는 물론 알지 못했다. 이런 광경에 익숙한 우시자마만 옆에서 낮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럼 우시지마 씨는 평소에 뭘 하는 편인가요?”

“아무래도 운동에 들이는 시간이 가장 많다.”


짤막한 대답에 카게야마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둘이 운동을 하든 밖에서 뛰어놀든 상관은 없지만, 카게야마가 우시지마의 운동량을 따라가려면 힘들 텐데.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아무리 우시지마라고 해도 그럴까 싶어 일단은 담아두었다.


“저도 성체가 되면 오이카와 씨를 경호하면 되나요?”

“응? 아냐, 그런 건 신경 안 써도 돼. 경호는 우시와카 한 명으로도 충분하고.”


이어지는 질문에 하마터면 사레에 들릴 뻔했다. 나중의 이야기를 자꾸만 꺼내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했다. 의도치 않게 카게야마에게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든다는 점에서 더더욱.


“애초에 오이카와 씨처럼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 사람이 두 명씩이나 되는 대형종 수인과 함께 다니면, 위협을 받기는커녕 우리가 누군가에게 위협이 될걸.”


때문에 지금은 웃어넘기는 게 고작이었다. 곤란한 웃음과 함께 손을 휘휘 내젓자 카게야마의 고개가 다시 기울었다.


“실제로 와카 쨩이 모든 공식 석상에서 날 경호하기 시작한 이후로 여성 팬들이 내게 접근하는 거리가 30cm 이상 멀어졌어. 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긍정적인 일이다, 오이카와. 유명인사를 향한 위협은 장소와 상대의 성별에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

“와카 쨩의 그런 기사도 정신 아주 좋아. 우시와카의 보호자가 185cm 남짓한 훤칠하고 체격 좋은 운동선수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애초에 오이카와는 우선적으로 경호가 필요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는 것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처음부터 우시지마에게도 분명히 밝힌 부분이었지만, 우시지마의 강한 주장으로 지금까지 자신을 경호하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우시지마는 이런 부분에 대해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대형종 수인의 보호자는 대개 젊은 여성이라는 사실을 오이카와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성체가 된 카게야마까지? 모든 기사에 거대한 남자가 세 명씩이나 들어가 칙칙한 사진을 남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무튼 꼭 오이카와 씨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해도 괜찮아.”

“…그런가요?”

“응. 무언가를 바라고 토비오를 보호하는 건 아니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이 이상 제 업무에 충실한 사람이 늘어난다면 곤란할 지경이기도 하고. 뒷말은 일단 삼켜둔 채로 환하게 웃자 다행히 카게야마는 나름 납득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조금 더 오이카와 씨를 믿고 의지해도 괜찮아.”


그 말에 다시 카게야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기에, 상대의 놀란 반응에 괜스레 볼을 긁적였다. 이건 혼자 너무 분위기를 잡았나. 그렇게 하는 순간 카게야마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어쩌면 조금은 친해졌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다소 마음이 놓였다. 슬쩍 바라본 우시지마의 얼굴도 어제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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