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은 마을에 호리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다. 호리는 갈색 머리칼에 쳐진 갈색 눈, 그와 대비되게 치켜 올라간 짙은 눈썹, 또래보다 조금 작은 키를 가진 평범한 아이였고, 항상 모자가 달린 빨간 망토를 입고 다녀서 마을 사람들한테서 ‘빨간 모자’ 혹은 ‘빨간 망토’로 불리곤 했다.

정작 호리 자신은 붉은색보다는 푸른색을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사람들은 망토 안의 언밸런스한 푸른 셔츠보다는 강렬한 붉은색만 보며 ‘호리는 붉은색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몇몇 사람들은 그 망토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어보곤 했는데 돌아오는 건 '그런 게 있어...' 하는 아리송한 대답 뿐이었다.

호리는 아담한 집에서 혼자 살았는데 가족은 깊은 숲속에 사는 세오라는 고모 뿐이었다. 호리가 어느 정도로 자라자 세오는 이제 혼자 살 나이가 되었다며 붉은 망토와 편지만 남기고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 따로 살았다. 편지에는 마을 사람들의 심부름을 하며 지내라는 것과 항상 붉은 망토를 입고 다니라는 협박에 가까운 말이 담겨있었다. 처음에는 어이없어 했지만 이미 그런 고모에게 익숙해져 있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덤덤하게 지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아프니 병문안을 오라는 편지가 왔다. 호리는 순간 거짓말인가, 생각했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말을 어기면 안되기에 체념하고 무슨 짐을 챙길지 생각했다. 이전에도 간간이 세오의 심부름을 하곤 했지만, 그때는 숲 입구 근처에 있는 바구니에 담아놓는 식이었기에 숲 안쪽까지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호리가 마을 사람들에게 숲속에 다녀온다고 말하자 반응이 엄청 다양했다.

“괜찮으면 숲속에 뭐가 있는지 기록해서 나중에 알려주세요. 간단히라도 좋으니까요. 나중에 책을 만들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고모 보러 가는 거야? 별일 이네 집까지 부르고. 그 위험한 곳에서 살다니 역시 세오는 세오인가 싶지만...”

“우와 깊은 숲 안에 간다고? 거기 엄청 무서운 늑대가 산대!”

“세오 만나면 괴상한 선물 좀 그만 보내라고 해....”




호리는 우려와 신기함, 혹은 부탁들이 섞인 말들을 뒤로 하고 짐을 챙겼다.

고모를 위한 음식들, 생필품, 잡다한 약 같은 것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파란 셔츠를 입고 그 위에 빨간 망토를 둘렀다.

“아 정말 너무 새빨갛다니까... 이왕이면 파란색으로 해주지.”

차마 직접 할 수는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길을 나섰다.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뒤로 하고 걷고 걸어 숲 입구에 도착했다. 마을 근처에 있는 나무와는 다른, 상당히 크고 위압적인 나무들 아래로 푸른 잔디 사이에 흙빛의 길이 있었다.

'그나저나 숲에서 빨간색이라니, 날 잡아먹으라고 온 몸으로 소리치는 셈 아닌가?'

숲 속은 생각 외로 꽤나 고요했다. 간간이 들리는 새 소리와 나뭇잎이 사그락사그락 거리는 소리 정도, 사람이 만드는 소리가 전혀 없는 공간이란 건 꽤나 쾌적하고 평온한 느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점점 숲 안쪽으로 들어가자 어디선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풀을 흔드는 소리가 아닌 인공적인, 일정한 듯 불규칙한 게 마치 누군가 숨어서 걷는 것 같은 느낌.

사람이라고는 고모라는 인간밖에 없을 텐데, 마을에서 들었던 소문들이 머리 속에 울렸지만 고개를 흔들어 날리고는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뒤에서 옆으로, 앞으로. 망토의 모자는 시야를 꽤나 협소하게 해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갑자기 움직이면 자극이 될까 싶어 태연하게 걸었다. 하지만 익숙해지려고 하면 다시 보다 큰 소리가 나서 가끔은 결국 풀숲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라오는 것도, 유도하는 것도 아닌 묘한 움직임과 소리.




목적지까지 반쯤 넘게 왔을까, 갈림길 앞에서 풀숲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갑자기 고요해진 분위기가 괜히 불안해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소리가 나던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하지만 나무와 덤불 사이에는 짙은 초록빛의 어둠뿐,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을 때, 집과의 반대편 길에 서 있는 커다란 형체가 보였다. ...동물? 아니, 아니다. 내리쬐는 햇빛을 한껏 받고 있으면서 정작 그를 모두 흡수하듯 어두운 망토를 두른 '무언가'였다. 분명 이제껏 자신 앞을 걷던 것은 작은 동물이든, 사람이든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뚝 떨어진 것처럼 이질적으로 공간을 차지 하는 저 이는 이곳에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그 '인물'은 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보는 듯하더니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곳은 소문이 무성한 깊은 숲이고, 정체를 제대로 알 수도 없는 저 낯선 존재를 따라가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정신을 차렸을 땐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느린 듯 빠르게 걸어가는 움직임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망토 자락이, 마치 따라오는 지 확인하는 것처럼 간간이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그럼에도 빛과 그림자와 각도로 인해 아슬아슬하게 보이지 않는 얼굴과 그늘 아래로 보이는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그 전체를 보고 싶다고 욕망하게 했다.

낯선 공간과 낯선 존재, 낯선 감정은 홀리듯이 호리를 이끌었다. 문득 옆에서 난 소리에 고개를 돌리다, 조금 멀어진 인영을 보고 저도 모르게 다급해져 다시 걸음을 뗐다. 잠시 걸음이 꼬여 넘어질 뻔했을 때, 바구니가 속의 물건이 조금 쏟아졌다. 바보 같긴. 작게 내뱉으며 주워 담던 중, 물건 위로 드리워진 호리의 그림자 위로 또 하나의 그림자가 겹쳤다.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시야에 들어온 흰 손. 부드러운 듯 단단해 보이는 긴 손가락이 느릿하게 사과를 집어 들어 호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를 따라 위로 향했다.

그리고 처음 마주한 것은 장난기가 묻은 호선의 입술. 짙은 밤하늘 같은 검은색인 듯 선명하게 푸른 빛이 감도는 큼직한 망토는 충실하게도 얼굴 위에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 음영으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이목구비가 일순간 호흡을 멎게끔 했다. 아마 호리에게 있어서 무언가를 보고 정신과 호흡이 오롯이 멈춘 첫 순간이었을 것이다.

왠지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원망스럽고, 그늘진 얼굴이 애를 타게 한다고 스치듯이 생각했다. 몸을 휘감은 짙푸른 망토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선명한 푸른 눈이 어둠 속에서 살짝 빛났다. 거기에 위험한 기운이 감돈다고 느낀 것은 그의 착각이었을까. 눈이 조금 커지며 호리 특유의 삼백안이 두드러졌다. 그 눈을 마주하던 존재는 눈을 살짝 휘더니 호리의 손에 꽃을 하나 쥐여 주고는 빛 속으로 걸어가 사라졌다.

늘상 고요하던 호리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마치 사방에서 햇살이 비추는 곳에 던져진 느낌. 저 앞을 제외한 곳은 따지자면 어두운 곳이었는데도, 어째서 그런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불현듯 몸을 감싸고 있는 붉은 망토에서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자신의 것이 낯선 이와 반대되기라도 하는 듯 선명한 붉은 색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내 망토가 볼을 서늘하게 스치자, 열감이 느껴지는 것은 호리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혼란스러운 것은 둘째치고, 저 이가 가져간 사과는 되찾아 와야 할 터였다. 한 개쯤 도둑맞은 셈 치고 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지만 자신의 고모가 답지 않게 목록으로 지정한 것이었기에 찾는 노력이라도 해야 했다. 어쩌면 다 핑계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미 쫓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졌을 수도 있어도, 쫓아갔다- 라는 말이라도 해야 하니까. 라고 되뇌며 걸음을 옮겼다. 방금 전 받은 꽃을 조심스럽게 바구니에 넣는 것은 잊지 않으면서.

곧이어 빛으로 나섰을 때, 빛이 사라지고 보인 건 환한 꽃밭이었다. 그리고 밝은 꽃들 사이에 서 있는 짙푸른 망토의 인영. 밝은 빛의 꽃들 가운데서 강렬하게 전해지는 존재감. 조금씩 그에 다가가던 중, 일순간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호리의 시야로 붉은 색이 일렁였다. 붉은 망토가 호리의 눈을 가리다가, 가리지 않다가 하던 저편으로 푸른빛이 어른거렸다. 방금 전까진 보이지 않던 무엇이 분명했다.

잠시후 눈에 들어온 것은 검푸른 인영이 아닌 분명하게 푸른... 늑대였다. 의심할 여지조차 없이 으레 귀가 있던 곳에는 머리칼만이 있고 그 위에 인간의 것이 아닌 털 뭉치가 있었다. 그리 칭하기엔 꽤나 결 좋은 귀였지만. 당장 보이진 않지만, 아마 뒤로는 늑대의 꼬리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인간의 모습을 한 늑대, 모순적이게도 그렇게 정의내릴 수 밖에 없었다. 호리가 조금씩 다가가면 다가갈 수록 푸른빛은 재차 선명해졌고, 그가 늑대라는 사실 또한 뚜렷해졌다.

"......"

"안녕, 공주님."

평생 들을 일이 없을 법한 말을 들은 후 호리에게 반사적으로 든 생각은 자신이 왜 공주님인가 하는 불퉁한 생각이었지만 순식간에 순응했다. 순응, 이라고 해야 할지. 그저 눈앞의 낯설고 현실감 없는 존재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으니까. 왠지 그 역설적인 상황이 호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수긍하게 했다. 물론 빠른 수긍과 빠른 대답은 별개의 것이었지만.

"공주님은 내가 보이지 않아?"

호리는 눈앞에서 휘적이는 하얀 손을 보고서야 흠칫하고는 입을 열었다. 어째서 반말인데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자문하며.

"잘 보이는데... 요. 엄청."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도망가지 않길래, 안 보이는 줄 알았어."

"도망은, 당신이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요?"

보란듯이 손에 쥐고 있는 붉은 사과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자연스레 말을 놓는데도 기분이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푸른 늑대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더니 사과를 만지작만지작 거리며 호리가 잡지 못하게 조금 높이 들었다.

"이 사과 때문에 날 따라온 거야, 호리?"

"그렇지, 병문안 때문에 가져온 건데 그걸 가져가 버리니... 뭐?"

"병문안 때문에 온 거구나, 이 깊은 숲에. 병문안이라면 꽃도 좋지 않겠어?"

"그건 그렇, 아니 이름은 어떻게 안 건데?"

"음- 그건 난 모르는 게 없는 이 숲의 무서운 맹수니까? 아니, 그렇게 볼 것까진 없잖아."

호리는 말을 하면 할 수록 저만 말리는 기분이 들어 포기하고는 바구니의 꽃에 눈을 돌렸다.

"특별히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데."

"그래도 있어서 나쁠 건 없을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왜냐면, 너도 내가 아까 준 꽃을 소중히 바구니에 넣어뒀으니까?"

"딱히 소중하게... 보관하지는 않았는데."

"그럼 버릴 거야?"

"이왕 받은 거니까 버리기는-"

"그래, 그런 거야."

어디서든 늘 야무지다는 말을 듣는 호리였지만, 어째서인지 본인이 생각해도 반 박자 늦게 머리가 돌아가는 듯했다. 아무래도 살면서 처음 보는 풍경과 모습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라고 짐짓 결론 내려두었다.

"그래서 당신은, 늑대예요?"

"역시 그래 보이나? 눈썰미가 좋은 걸."

뻔히 늑대 귀와 꼬리를 드러내놓고 그런 말을 하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어이없다는 얼굴 하지 마. 어떤 사람은 눈치를 못 채더라고."

"엄청 둔한 사람이네."

뭐가 그리 웃기는지 눈을 한껏 휘며 웃는 모습이 반짝이는 듯해서 호리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아마 주변에 있는 꽃들이 햇볕을 받고 빛나는 모양이라고 열심히 생각하면서.

"근데 왜 나를 부른 거야."

무심코 다른 생각을 하다 뱉은 말이 스스로도 바보 같아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그렇다고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지만.

"부른 거 같았어?"

"불렀다기 보다는... 주의를 끌었다 쪽에 가까운 것 같았지만 말이야."

"흠 어떨까. 역시 네가 귀여워서?"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고."

"숲속에 오면서 그런 새빨간 망토를 입고 오다니, 당연히 눈길이 갈 수밖에 없잖아? 그렇게 강렬한 색에 시선을 빼앗겨서 다가가 보니... 그 안에 귀여운 갈색 다람쥐가 있었지."

"누가, 다람쥐라는-"

일순간 마주 서 있던 푸른 빛이 눈앞으로 훅 다가와 숨을 멈췄다.

"그래도 역시 조심하는 게 좋아. 그런 색은, 숲속에서 특히 더 눈에 띄니까."

호리는 망토 위로 어깨를 잡은 손이 제법 커서, 눈앞의 존재가 새삼 맹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쇄골의 파인 부분에 손가락을 얹는 듯하더니, 말을 하며 점점 목으로 이동하는 게 점차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나 같은 맹수가, 널 잡아먹을지도... 모르잖아?"

귓가에 다가와서는 위협적인 말을 남기고 멀어지는 모습은 반대로 태연하고 장난스러웠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웃는 눈이 으레 알던 맹수의 것과 같아서 잠시 멍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호리는 잠시간 굳어있다가 반사적으로 눈앞의 늑대에게 박치기를 했다.

"억-?!"

"...일단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라서."

호리는 불시에 박치기를 당한 푸른 늑대가 찡한 코를 붙잡고 있는 모습은 애써 무시한 채 망토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뭐, 제압은 가능할 거 같네.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힘은 센 편이라."

그러자 푸른 늑대는 아픔은 잊은 듯이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치 범 앞에서 위세를 자랑하는 하룻강아지를 보는 듯한 못 말리겠다는 웃음이었다. 호리는 자신이 발끈 화를 내기도 전에 갑자기 시야가 높아졌음을 자각했다.

"그런 건, 맹수도 마찬가지야 호리."

호리는 옆 구리께에서 느껴지는 커다란 손과 훌쩍 높아진 시야에 자신이 어린애마냥 가볍게 들렸음을 자각했다. 놀라기는커녕 시야를 가득 채운 푸른 늑대의 얼굴이 빛을 한껏 받고 있어서, 아래에서 보는 그늘진 얼굴과 위에서 내려다보는 얼굴은 또 다르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호리는 얼굴을 환히 빛낸 채로 온전히 자신만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눈앞의 '맹수'가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직접 봤다면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깨달았겠지만 말이다.


문득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자각한 호리는 슬슬 고모네로 가지 않으면 엄청 귀찮아질 것임을 직감했다. 둔한 사람이라 불러놓고 까먹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눈앞의 광경이 비현실적이더라도, 이 한 때의 꿈이 계속되지 않음을 알았다. 땅으로 무사히 내려온 호리가 머뭇거리며 자신을 흘깃거리자 늑대는 씩 웃으며 주변의 꽃을 꺾기만 하다 자연스레 한송이 꽃을 귓가에 끼워줄 뿐이었다.

"잘 어울리네 호리."

순간 호리는 얼굴에 열이 오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멍하니 오늘 햇살이 뜨거운가 하고 생각하다 여유롭게 웃는 눈앞의 늑대를 피해 다른 곳에 눈을 두며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호리, 얼굴 색이 망토처럼 됐어. 병문안을 가는 게 아니라 받아야겠는데?"

"더워서 그런 것 뿐이야."

더운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었기에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쩐지 자신만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호리 또한 예쁘게 피어난 꽃을 한송이 꺾어 들었다. 똑같이 귓가에 꽂아주는 건 너무 간지러운 행동인 것 같아서 결국 망토 안쪽에 있는 셔츠 주머니에 꽂았다. 늑대는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다시 웃을 뿐이었다.

호리는 붉어진 얼굴을 망토로 가리는 것처럼 꽃으로 바구니를 채우기 시작했다. 꽃을 채우던 손이 어느새 두 쌍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이내 바구니는 천 대신 꽃을 덮개 삼아 가득 차게 되었다. 예상보다 더 화사해진 호리의 시선은 조금 미묘해졌지만 말이다.

"그럼 이제 안녕이야 호리. 즐거웠어."

"......안녕."

산뜻하게 건네받은 인사에 순순히 답은 했지만, 호리는 선선히 떠나지 못하고 잠시간 늑대를 바라봤다. 그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이 늑대를 살짝 웃었다.

"아마도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

"날 믿어 호리. 그럼 안녕."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지더니 볼에 짧은 온기를 남기고 떠나갔다. 온기를 남긴 것이 상대의 입술이라는 것을 자각한 순간 꽃밭에 서 있는 것은 온전한 빨간 망토가 되었다.

"아하하- 다음에 날 만나면 카시마라고 불러-!"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겨우 이름을 알려준 푸른 늑대, 그러니까 카시마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빨간색이 된 빨간 망토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빠르게 고모 집으로 향했다.


똑똑-

"들어와."

노크에 답을 하는 세오의 목소리는 아프다는 말과는 달리 엄청 쌩쌩했고, 두런두런 들리는 말소리를 보니 혼자도 아닌 것 같았다. 거칠게 문을 쾅 열자 아니나 다를까 아픈 기색은 찾아볼 수 없는 세오가 침대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을 뿐이었다. 보이는 풍경이 거기까지였다면 그저 흔한 일상이었을 텐데, 침대 옆에 앉아 햇빛을 즐기고 있는 푸른 늑대가 이질적인 풍경을 만들어냈다.

"왔냐."

"......"

"왔어, 호리?"

"넌 왜 익숙하게 인사를 하고 있어."

"하하- 아까 만났어."

"그러냐. 소개할 수고를 덜었네."

"저 사람, 아니 늑대랑 아는 사이야?"

"뭐, 친구라고 할 수 있지."

"그렇지 친구지."

아니 근데 왜 말을 안 했-"

"안 물어봤잖아?"

"그런 말도 안 되는 대답을... 그나저나 엄청 멀쩡하잖아! 왜 오라고 한 거야!"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온 거 아니었냐? 재밌는 친구가 생겼으니까 너랑 인사나 하라고."

"난 여기 오기 전에 돌아다니다가 널 봤지."

소란스럽게 얘기하고 있는 눈앞의 풍경이 비현실적이면서도 너무나 생생해서, 아까의 시간이 몽롱한 한 때의 꿈 같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우습다고 느낀 호리였다.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안도하는 자기 생각은 절대 들키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하면서 불퉁하게 불만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그러다 호리는 한 때의 동화 같았던 시간이 현실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며 웃어버렸고, 카시마는 처음으로 보는 호리의 무방비한 모습에 놀란 듯하면서도 이내 마주 웃어주었다. 그림 같은 풍경을 보며 호리는 생각했다.


앞으로는 숲에 자주 오게 되겠다고. 무섭고도 아름다운 늑대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알릴 이 빨간 망토를 입고.

망초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