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베스! 맥베스! 맥베스! 맥더프를 경계하라. 파이프의 영주를 경계하란말이다. 

맥베스! 맥베스! 맥베스! 잔인하고, 대담하고, 과감해야 하느니라. 인간의 힘 같은 것은 웃어넘길 것. 여자의 배 속에서 나온 자는 누구도 맥베스를 해칠 수 없느니라. 

사자같은 기개를 가지고 떳떳하게 행세하라. 누가 분개를 하든, 누가 애를 태우든, 어디서 반역자가 나타나든 개의치 마라. 맥베스는 결코 정복되지 않을 것이다. 버넘 숲이 던시네인의 언덕까지 다가오지 않는 한!







11.


Good morning-. dum dum dum-.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익숙하고도 질색인 소리. 아침을 알리는 알람 소리에 석진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아으으……."


일어나기 싫다. 오늘이 월요일이 아니라면 좋을 텐데. 


"아……, 피곤해……."


평소보다 아침이 어두운 탓일까. 잠이 쉬이 깨질 않는다. 그래서 석진은 다음 알림이 울릴 때까지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리기로 결정했다. 그나저나 창밖이 정말 어둡네. 아침인데도 이렇게 컴컴한 걸 보면, 오늘 비라도 오는 걸까? 


'근데 나 우산 있나? 저번에 하나 찢어졌는데…….'


그렇게 의식이 다시금 가라앉는다. 곧 잠에 들 것처럼 생각과 꿈이 뒤섞이는 찰나, 누군가 석진을 흔들어 깨웠다.


"석진 씨. 일어나요."


깜짝. 석진은 정말 화들짝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크게 놀랐는지, 석진의 동공이 잔뜩 줄어든 게 보일 정도.


"아, 놀랐어요?"


석진을 깨운 이는 다름 아닌 태형이었는데, 그는 오늘 같이 흐린 날에도 해바라기처럼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석진은 태형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그야 너무 놀랐으니까. 


'아아, 맞다. 나 이제 혼자 사는 거 아니지.'


석진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얼마나 놀랐는지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린다. 석진이 베개를 끌어안으며 얼굴을 묻고 말했다.


"죄송해요, 자꾸 놀래서."

"아직도 적응 중?"

"그게 그렇네요."


석진이 베개에서 빼꼼,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 귀여워. 태형은 석진을 향해 한번 웃어 보이고는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건넸다. 태형이 말했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에요, 선배님"

"오늘 날씨 너무 좋던데."

"……흐리지 않나요?"


호로록. 석진이 갓 내린 커피를 목으로 넘기며 물었다. 그러자 태형이 소리 내어 웃는다. 태형은 계속해서 웃으며 창문에 설치된 두꺼운 천을 흔들흔들. 석진에게 보란 듯이 흔들어댔다.


"커튼."

"아."

"암막커튼을 걷어야죠."

"아 그렇지, 암막커튼."


그래. 이 방 커튼은 암막커튼이었지. 태형이 커튼을 걷자, 방 안 가득 쏟아지는 햇빛에 석진은 푸스스 웃었다. 바보 같아. 석진은 다시 한번 커피를 목으로 넘긴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떼어야겠어요."

"뭘?"

"커튼 말이에요."

"왜, 너무 어두워서?"

"꼭 밤 같으니까 일어날 수가 없잖아요."


석진이 곤란한 듯 웃자 태형이 말했다.


"내가 깨우러 오면 되는데."

"으음……, 그것도 나름대로 좋지만 부작용이 생기면 어떡해요."

"어떤 부작용?"

"선배님의 '일어나'라는 말이 듣기 싫어지면 어쩌냐는 말이죠."

"『유리 동물원』의 '톰'처럼?"

"그래요."


석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톰의 대사를 담백하게 읊었다.


"「매번 어머니가 그 듣기 싫은 '일어나렴! 일어나!' 하고 소리 지르실 때마다, 난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합니다. '죽은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아, 나의 '일어나'라는 소리가 싫어지면 그건 곤란하죠."

"그러니까요."

"그럼 이렇게 해야겠다. 일어나라는 말 대신, 이 두꺼운 커튼을 걷을게요. 그리고 오늘처럼 커피를 건네고, 좋은 아침이란 말을 전할게요."

"그럼 괜찮을 것 같아요."


태형이 석진의 부스스한 앞머리를 만져주며 웃자, 석진도 따라 웃었다. 호록, 호록, 호록. 그렇게 세 번정도 커피를 넘긴 석진은 시계를 보더니 커피잔을 내려 놓았다.


"아, 지금 욕실 사용해도 되나요?"

"당연하죠. 난 아까 다 씻었어요. 일일이 묻지 않아도 괜찮고."

"잘됐네요."


석진은 태형의 대답을 듣자마자, 수건을 챙겨 후다닥 욕실로 향했다. 어쩐지 갑자기 바빠 보이는 석진. 태형은 주인이 사라진 방에서 커피 마시며 생각했다. 


'하긴, 겨우 이틀째니까.'


석진이 제 오피스텔에서 같이 살기 시작한 건 고작해야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집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월요일. 태형은 집에서 인기척이 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던 석진의 모습을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혼자 살았다고 했으니, 인기척이 낯설만도 하다. 태형은 눈동자를 굴려 석진의 방을 살폈다. 

전체적으로 남색인 공간. 침대 이불도, 베개도, 커튼도. 그 사이로 화이트 가구가 적절히 배치된 이 방은 그야말로 모던의 극치였는데, 이건 모두 태형이 급히 부른 인테리어 업체의 결과물이었다. 그렇게 새로이 정리된 방은 석진의 맘에도 태형의 맘에도 꼭 들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맘에 드는 건, 이 방 주인이 석진이란 것이다.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공허했던 오피스텔이 잔뜩 채워지는 기분. 


"역시 잘한 것 같아."


태형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친구 집에 있는 것보다 여기가 훨씬 낫지. 여긴 내 집이고, 학교도 가깝고, 더 잘 챙겨줄 수 있으니까. 태형은 싱긋 웃으며 책상 위에 놓인 석진의 컵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달그락, 달그락. 부엌에선 가정부 아주머니가 아침상을 차리는 중이다. 태형이 말했다.


"죄송해요. 갑자기 두 명분 식사라니."

"괜찮아요. 한 명이나 두 명이나 똑같으니까."


아주머니는 세상 좋은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그 학생도 배우 할 건가 봐요?"

"맞아요. 한 달 뒤에 데뷔에요."

"어쩐지 인물이 훤하더라."

"인물보다도 재능이 훤해요."

"어이구, 태형 씨보다요?"

"비교도 못할 정도로요."


태형은 그렇게 말하며 팔불출처럼 웃었고, 낯설고도 보기 좋은 모습에 아주머니도 함께 웃었다. 그렇게 사람 좋은 웃음소리가 부엌을 채우고 있을 즈음, 욕실문이 달칵하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석진은 언제 옷까지 가져갔는지, 수증기가 흐르는 욕실 안에서 외출복을 입고 나왔다. 딱 봐도 보송보송해 보이는 얼굴. 

석진은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또 후다닥 제 방으로 돌아가더니, 곧장 가방을 등에 매고 나온다. 아니, 뭐가 저렇게 빨라? 숨도 안 쉬고 집을 나설듯한 석진의 모습에, 태형이 부엌에서 현관까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어어? 어디 가요?"

"……당연히 학교죠?"

"아침은?"


학교로 가겠단 석진의 말에 태형이 놀라 물었다. 그러자 돌아온 건 아침 식사를 예상치 못했다는 석진의 얼굴. 석진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앗……, 저 아침 안 먹는데?"


맞다. 그랬었지. 태형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잊은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괜히 없는 말을 지어낸다.


"괜찮아요. 아직 아침 준비 안 됐으니까."

"어이구, 어쩌나. 벌써 다 차려놨는데."


이심전심 실패. 각자 다른 말을 내뱉은 태형과 아주머니는 서로를 머쓱하게 쳐다볼 뿐이다.


"……."

"……."

"……."


순간 어색해진 세 명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힌다. 


'아침을 벌써 다 차려 놓으셨다니.'


석진은 눈동자를 굴려 식탁을 쳐다봤다. 따끈따끈한 아침밥이 2인분. 아, 어떡해. 새벽부터 준비하셨을 아주머니 모습이 떠오르자, 석진의 마음이 거세게 흔들린다. 


'하지만 지금 출발해야, 1교시 지각하지 않을 텐데…….' 


그렇다고 아주머니가 처음 차려준 아침밥을 거절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왜냐하면 날 위해 부러 2인분을 만드셨으니까. 게다가 이 와중에 떠오르는 할머니의 손짓이란.


[밥은 잘 먹고 다니지?]

"그럼, 밥이야 늘 먹지. 아침, 점심, 저녁까지 꼭꼭 먹으니까. 할머니야말로 잘 먹어야 해."


그건 물론 거짓말. 아침? 사실 할머니가 요양원 간 이후, 한 번도 먹은 적 없어. 하루에 두 끼라도 잘 먹으면 다행인 날이 이어졌으니까. 


'아, 근데 어쩌지. 시간이…….'


석진은 망설였다. 하지만 식탁 위 따끈한 아침상을 본 뒤로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서 등에 맸던 백팩을 현관에 내려놓고 부엌으로 돌아왔다.


"먹고 갈게요."

"아니야, 학생! 시간 없는데 어떻게 그래."

"아니에요. 사실 오늘 강의 늦게 있거든요. 아침 먹고 가도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지만……."

"잘 먹겠습니다."


감사를 전한 석진은 의자에 앉아, 제 몫으로 놓인 수저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태형도 싱긋 웃으며 석진의 맞은편에 자리한다.


"다 먹으면 데려다줄게요."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항상 거절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태형은 그리 말하며 따끈따끈한 계란말이를 석진의 밥 위에 얹어 주었다. 노랗고 포들포들한 계란에서 고소한 냄새가 난다. 태형이 말했다.


"아주머니, 요리를 정말 잘하세요."

"냄새만으로도 벌써 맛있네요."


석진이 눈을 접으며 오물오물 말하자, 아주머니가 활짝 웃으며 좋아하신다. 


"예쁜 학생이 들어왔네!"

"그러게요."

"태형 씨 후배는 어디서나 예쁨 받겠어. 안 그래?"


아주머니의 마지막 말에 석진은 움찔했다. 


'어디서나 예쁨…….'


아닌데. 사실 어디서나 미움 받는데. 그리고 그냥 후배 아니고 이젠……. 

석진은 눈동자만 도르륵 굴려 맞은편의 태형을 바라봤다. 그러자 줄곧 자신을 보고 있던 태형과 눈이 마주치고 만다. 쿵, 쿵, 쿵, 쿵. 아, 또 이러네. 석진은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 귀가 또 뜨거워.'


석진은 서둘러 시선을 밥상으로 돌렸다. 하지만 태형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걸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괜히 딴 소리만 뱉는다.


"얼른 드세요." 

"응. 먹고 있어요."

"오늘 수업 끝나면……."

"가야죠, 맥베스. 학교로 데리러 갈게요."

"좋아요."


그래. 좋다. 뭐든 좋지. 당신과 함께라면 뭐든 좋을 것 같다. 석진은 따끈한 계란말이를 입안에 쏙 넣으며 생각했다. 


"……."


그래.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니까? 뭐든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니까? 하지만 그건 정확히 1시간 뒤에 변질 되고 말았다. 이미 강의가 시작된 강의실 문 앞. 석진은 들어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한 채 가만 서 있기만 했다. 흠, 들어가야 하는데.


"하아……."


나오는 건 그저 한숨 뿐. 이 문을 열면, 시선이 쏠리겠지. 

시선.

사람은 왜 눈이 두 개일까. 왜 눈이 두 개가 달려서 다른 사람을 쳐다보는 걸까. 눈은 참 신기해. 어떤 사람은 그 두 개로 날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고, 어떤 사람은 그 두 개로 날 이상한 것 보듯 쳐다보고, 어떤 사람은 그걸로 날 미친 듯이 부러워하고, 어떤 사람은 그걸로 날, 구원해준다. 


"……."


석진은 조금 전, 학교까지 태워다 준 태형의 눈을 떠올렸다. 응. 그건 구원자의 눈이야. 그건 해바라기의 눈이고, 날 위한 유리구슬이야. 모든 사람이 당신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쓸데없는 생각이자, 내 욕심이란 걸 안다.  


"시선……."


아. 언젠가 태형이 시선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는데. 석진은 기억 속, 태형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제 곧 알게 되겠죠. 그리고 달라질 거예요."

"……무엇이 달라지는데요?"

"석진 씨를 쳐다 보는 시선."


그래. 생각났어.


"시선 말이에요, 시선. 당신을 향한 시샘의 눈빛들이 바뀔 거예요. 예를 들면, 동경 같은 걸로. 그리고 석진 씨도 변하겠죠. 

무대를 꽉 채운 관객들의 시선을 경험하고 나면. 그것이 얼마나 짜릿한 것인지 겪어보고 나면. 자신이 유니콘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황홀하고 기적 같은 선물인지 알게 될 거라고요."


태형의 말을 온전히 떠올리고 나니, 온몸을 감싸던 불안감이.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가득했던 두려움이 사라졌다. 시선에 대한 공포에 짓눌렸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마음. 


"……."


석진은 비로소 발끝 향했던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래. 맞아. 난 이제 곧 경험할 거야. 무대를 꽉 채운 관객들의 시선을 몸소 받을 거라구. 게다가 이제 막 시작했잖아. 내 인생에 열린 새로운 1막.


'저기 있는 사람들이 날 좀 싫어하면 어때?'


게다가 싫어하는 이유란, 시기와 질투 같은 하찮은 것이다. 그 얼마나 가소로운지. 게다가 그걸 무시하는 일 따위.


"「……이 얼마나 손쉬운 일인가요!」"


석진은 아무도 듣지 못할 목소리로 맥베스 부인의 대사를 작게 읊조렸다. 그래. 이 얼마나 손쉬운 일이냔 말이야. 석진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눈을 또렷이 떴다. 멕베스 부인은, 나 같은 사람이 아니야. 석진은 맥베스 부인과 닮은 눈매를 하고선 문고리를 잡아 최대한 소리 없이 돌렸다. 


달칵.


쏠린다. 시선이. 한 사람당 두 개의 눈이. 하지만 강의실엔 기껏해야 30명. 그 30쌍의 눈은 석진을 확인한 뒤 대부분 아니꼬운 눈치를 보냈지만, 석진은 조용히 문을 닫을 뿐이다. 그래도 지각한 주제에 방해는 하지 말아야지. 

석진은 조용히 걸어 강의실 빈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자신을 따라오는 30쌍의 눈. 그래. 겨우 30쌍의 눈이다. 공연 날 나를 바라볼 눈은 수 백이야. 석진은 제 안에 조그맣게 자리한 맥베스 부인을 놓치지 않으려 그녀와 같은 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건 역시, 도움이 되었다.


"……."


여느 때와 같이 석진이 움츠러들지 않으니, 흥미를 잃은 동기들은 하나둘 몸을 돌려 앞을 보기 시작했다. 게다가 평소라면 수군거렸을 동기들 또한, 오늘은 어쩐지 조용하다. 어깨를 펴서 그런가. 눈을 똑바로 떴기 때문인가. 고개를 바로 들었기 때문인가. 어쩌면 그 모든 것의 영향일지도. 


"하아……."


석진은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 내디뎠다. 내 자존감의 첫걸음. 


'당신 덕분에.'


석진은 계속해서 태형의 말을 떠올렸다. 그가 자신에게 주었던, 알알이 주옥같던 말들을. 


'정말이지 보석 같다니까.'


태형이 한 말들은 하나하나 보석과 다름 없다. 그러니 그것들을 모아 꿴다면, 분명 아름다운 진주 목걸이가 될 테지. 잘 모아 놔야겠다. 길고 긴 진주 목걸이가 되도록. 언젠가 그게 내 목에 걸려서, 나를 빛내줄 수 있도록. 




****




석진이 다니는 대학교 야외 주차장. 파란 아우디에 앉아 책을 읽던 태형은 저 멀리 석진이 달려오는 걸 보고 책을 덮었다. 고작해야 3시간 못 봤을 뿐인데, 굉장히 반가운 기분. 그건 아마 석진이 반가운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태형은 조수석 문을 열고 자리한 석진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왔어요?"

"네, 선배님."

"그 '선배님'이란 호칭을 고칠 때도 된 것 같지 않아요?"

"왜요?"

"어어? 왜라니."


태형이 안전벨트를 맨 석진을 향해 눈을 크게 떴다.


"석진 씨 이제 '그냥 후배' 아니잖아요."

"그럼 뭐, '좀 특별한 후배'겠죠."


어쩐지 부끄러워진 석진이 가방을 뒷좌석에 두며 덤덤히 말했다. 하지만 태형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은 이야기. 태형이 석진의 안전벨트를 한 번 더 확인하며 말했다.


"틀렸어요. '좀' 특별한도 아니고, '후배'도 아니잖아요."

"……."

"우리 이제 '연인'인데."

"……그런 말 좀 안 하면 안 돼요?"


석진은 이런 것엔 면역이 없는 모양인지, 얼굴이 빨개져서 안전벨트를 꼬옥 쥐었다. 그리고 태형은 그걸 은근히 즐기며 말했다.


"왜요? 나 좋다고 했으면서."

"……."

"내가 석진 씨 무대의 주연이라 그랬잖아."

"……그래요. 맞아요. 제가 그랬어요."


석진이 결국 체념하듯 말하며 태형을 흘긴다. 조금 삐쳤나? 하지만 그조차 사랑스럽다. 태형이 손을 들어 석진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게 노려봐도 소용 없는데? 너무 예뻐서."

"선배 눈에나 그렇죠."

"어? '님'자 뺐다!"

"'선배님'이란 호칭 좀 어떻게 고쳐 보라면서요."

"그래서 '님'자 하나만 뺐어요?"

"그 정도로 충분해요."


석진이 아랫입술을 조금 내밀며 말했다. 아, 젤리 같아. 한 입 베어 물면 딸기향이 풍기지 않을까? 태형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하지만 지금 베어 물었다간 석진이 도망갈 것 같은 직감이 들어, 고개 돌려 시동을 켰다. 그리고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오늘 강의 잘 들어갔어요?"

"네, 잘 들어갔어요."

"다행이다. 걱정 했는데. 좀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맞아요. 사실 강의실 문 앞에서 조금 망설였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태형이 핸들을 돌리며 말했다. 매끄럽게 학교를 빠져나가는 아우디. 석진은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며 나른한 목소리를 내었다.


"괜찮았어요. 선배 목소리를 떠올렸거든요."

"내 목소리?"

"시선에 대해 말해 준 적이 있잖아요. 기억 나요? 벌써 몇 달 전의 이야기지만."

"아. 기억 나요."

"그냥 문득.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석진은 창밖을 보던 시선을 돌려 태형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운전 하면서도 잠깐씩 마주치는 시선. 시선, 시선, 시선. 태형의 시선은 그야말로 구원자의 것이고 해바라기의 것이다. 석진은 그것이 참 따뜻하다 느끼며 말했다.


"선배 말대로 나는 유니콘이고, 앞으로 굉장한 시선을 받을 거라 생각하니까……."


그들 시선이 별것 아니라고 느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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