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숙소로 돌아간 건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한 무렵. 그리 늦지 않은 저녁 시간이었다. 간단하게 짐만 챙겨 나올 생각이어서 입주자 전용이 아니라 게스트들이 사용하는 구역에 주차했다. 활동기가 아닌 시기에는 숙소를 사용하는 멤버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정국이가 가끔 와서 삐대고 간다는 얘길 듣긴 했으나 그마저도 요즘은 드문 것 같았다. 윤기는 차 키의 잠금 버튼을 누르고 건물통로 앞에서 익숙하게 보안 인식을 풀었다. 웬만한 건 이미 집으로 다 옮겨뒀지만, 숙소에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느지막하게 점심을 먹고 나와 작업실에 있을 때 걸려온 전화 한 통 탓이었다. 며칠 전부터 애를 먹던 작업물의 가사를 막힘없이 술술 써 내려 갈 때쯤이었다. 흥을 깨는 진동이 시끄럽게 울렸다. 기본적으로 윤기는 무음을 선호했다. 낮에 받아야 했던 업무 전화가 아니었다면 모드를 변경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눈꼬리가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하필이면 잘 될 때 꼭 이따위지.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원천을 차단하기 위해 핸드폰을 집어 든다. 그러나 액정 속에는 차마 통화보류를 누를 수 없는 이름이 떠 있었다. 힘이 들어갔던 눈자위가 스르륵 풀렸다. 결국 통화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네. 형.”

[어. 윤기야.]

“네.”

[오랜만인데 반갑다는 말도 없냐.]

“전화 받았잖아요. 이 정도면 반가움의 표현은 다 했구만.”

[그래, 야. 고오맙다.]

 

그러고 보면 이 장난기 어린 말투를 듣는 것도 제법 오랜만이었다. 윤기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술 끝을 슬쩍 내리며 전화기를 고쳐 잡았다. 작업 테이블에서 벗어나 소파에 앉아 허리를 젖힌다.

 

[스케줄도 없는데 내일 낚시나 갈래?]

“예. 그래요.”

[그럼 윤기야. 음... 형이 내일 4시쯤 너네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

“네.”

[새벽이야.]

“알아요. 한두 번 갑니까.”

 

자신의 담담한 대꾸에 전화 저편에서는 피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내일 보자. 상냥하고 나긋한 말투에 핸드폰을 꽉 쥐었다. 통화내용은 언제나 간결했다. 이대로 끊어지는 게 아쉬워서 대꾸하지 않고 있으면, 석진 역시 잠시간 그 시간을 기다려주곤 했다. 결국 윤기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소파 위에 턱 내려놓고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 후 두어 시간 뒤 작업실에서 나왔다. 오늘은 반드시 전부 다 끝내고 가겠다는 다짐과는 달리, 한번 흐트러진 집중력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숙소에 놓아둔 낚싯대만 챙겨 집에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늘은 일찍 자야 늦잠을 자지 않을 것 같았다. 석진의 성격을 잘 알아서였다. 한두 번 깨워보고 안 일어나면, 주야장천 윤기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할 형이란 걸 알아서 늦기 싫었다.

 

오랜만에 온 탓일까? 순간적으로 비밀번호가 감감했다. 보안 인식 번호에서 플러스 네 자리. 일순 머뭇거리다 문 앞에 잠시 쪼그려 앉았다. 언젠가 호석이가 말한 적이 있었다. 무릎을 땅에 대고 이마를 서너 번 툭툭 치면 까먹은 것도 금방 되살아난다고. 다른 사람의 말이었다면 비웃고 넘겼을지도 모르지만, 호석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왠지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닥에 털썩 무릎을 대자마자 불현듯 거짓말처럼 비밀번호가 떠올랐다. 야. 와. 대박. 내적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잇몸을 만개한 채로 문을 열었다.

 

현관에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태형이의 슬리퍼와 운동화 두 켤레가 놓여있었다. 누가 놓고 갔나. 딱히 챙기지 않아도 때가 되면 누군가가 알아서 들고 갈 것이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습관적으로 쓰읍 하는 소리를 내었다. 낚싯대를 어디 뒀더라. 아득한 기억이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쓰고 베란다 쪽 창고에 뒀던 건 어렴풋이 떠올랐다. 거실을 넘어서자 어둑해진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이어진 복도의 센서 등은 언제나 가물가물했었다. 어둠 속의 고양이처럼 동공을 키우고 한없이 널찍한 공간을 걸었다.

 

거실을 스쳐 옷방으로 사용하던 공간을 지나치던 찰나였다. 유난히 끙끙거리는 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가로젓는데 아까보다 더 커다란 소리가 울린다. 반대쪽에 있는 정국이의 방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왔다고 얘기나 할까 싶어 방문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반쯤 열린 문 앞에서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그 순간 어설프게만 들리던 소리의 정체가 더 적나라하게 터져 나왔다. 침대 위에서 앉아 있는 정국이 보였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돼서 눈을 껌뻑거리는데, 맞은편에 너른 등만 보이던 남자의 입술에서 진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전화를 끊기 전까지 늘 듣던 그 익숙한 숨소리가 욕정에 짓눌린 신음으로 뒤바뀐다. 경악으로 물든 눈이 서슴없이 커졌다. 열기가 확 솟구쳤다. 최고치로 비트를 찍었을 때보다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 같았다.

 

몸을 빠르게 돌려세우고 문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너무 놀라서 그런지 몰라도 눈가와 입 주변이 파르르 경련했다.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낚싯대가... 낚싯대가. 손이 덜덜 떨렸다. 뭘 본 건지, 제대로 본 게 맞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로 허황되고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베란다의 벽에 등을 기대자 다리에 힘이 스르륵 풀렸다. 그대로 주저 앉아 깊게 숨을 골랐다.

 

자신이 제대로 본 게 맞다면 단단히 발기한 두 개의 성기가 뒤엉키듯 얽히고 있었다. 마주 한 채로 서로의 것을 비벼대고 문지르는 순간이었다. 뒷골이 지끈지끈했다. 사귀는 건가. 모르겠다. 윤기는 엉망으로 구겨진 제 미간 사이를 엄지와 검지로 질끈 눌렀다. 놀람과 동시에 착잡함이 육신을 지배한다. 석진이 자주 쓰는 제길. 이라는 낡은 비속어가 입안에서 절로 맴돌았다. 거칠게 뛰던 심장이 조금 안정을 찾자 걷잡을 수 없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얗고 기다란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이럴 줄 알았으면, 티라도. 티라도 한번 내 볼 걸 그랬다. 아슬아슬하게 벽에 기대 일어선 윤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벌써 이삼 년 전의 일이었다. 친한 조연출 형에게 티켓을 받았다고 했다. 한참동안 연극 티켓을 들고 방정맞게 굴던 석진은 금세 힘이 빠진 얼굴로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야, 근데 티켓이 있으면 뭐하냐. 같이 보러 갈 사람도 없는데. 왜요. 산들형이랑 보러가든지. 걔 오늘 스케줄 풀이래. 아니면... 지원이 누나랑 가요. 그 맘때 석진에겐 썸을 타던 두살 연상의 여자연예인이 있었다. 윤기는 얼굴이 유독 하얗고 심하게 마른 그녀의 모습을 골몰히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대뜸 윤기의 관자놀이에 뭉툭한 검지 끝이 툭 닿았다. 반사적으로 밀린 머리를 세우며 쳐다보자 석진이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었다.

 

너 몰랐냐. 나 이제 걔 안 만나.

...왜? 뭐 만난 지도 얼마 안 됐잖아요.

아니, 그냥. 내 스타일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까탈스럽기는. 형 그러다 진짜 연애 못 해요.

 

그놈의 스타일이 도대체 뭐길래. 제가 아는 것만 해도 벌써 다섯 명이 넘었다. 아마 이번에도 보나 마나 저 형이 찼을 거라는 예감이 극렬하게 들었다. 이런 게 얼굴값 한다는 건가. 비죽 입술을 올리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 보이는 석진의 표정이 미묘했다. 매번 잘 안된 얘기를 할 때면 저런 얼굴이었다. 별것도 아닌 거로 민망해하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그래서 윤기는 번번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런 석진을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었다.

 

연극 같이 보러 갈래?

예?

 

빨갛게 귀를 물들이고 나는 이쪽은 영 체질이 아니야아~ 라고 하는 모양새여야 맞았다. 그날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자주 나오던 말투도, 반응도 없었다. 그러더니 석진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덤덤히 떨어지는 말투를 듣던 윤기가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티켓 아깝잖아. 형이 밥 살게.

아 저, 뭐 그런 거 별로 관심 없는데.

 

턱을 긁적거리며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러자 석진이 팔목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양꼬치 사준다.

콜.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형태에 극적으로 성사된 약속이었다. 스케줄이 끝나자마자 석진과 함께 대학로로 향했다. 극장 앞에 내렸을 때는 이미 연극이 시작한 지 5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규모가 협소한 소극장이라 관람의 편의를 위해 정시 입장만 가능하다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그러나 석진은 포기 하지 않고 제 모자를 벗으며 슬쩍 웃어 보였다. 저게 먹힐까 싶었는데 실제로 먹혀 어이가 없었다. 어렵사리 제일 뒷줄 끝자리에 앉았다. 옆자리 앉은 이들의 시선이 닿았다가 떨어졌지만 그다지 신경 쓰진 않았다.

 

형 미남계 어떠냐.

쉬이. 조용히 좀 해요.

 

소곤거리며 들러붙는 석진의 어깨를 쓱 밀어냈다. 못마땅한 듯 입술을 쭉 내밀더니 곧 팔짱을 끼고 무대 위를 응시했다. 또렷하게 잘빠진 콧대를 주시하던 윤기도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계속 보고 있으면, 조명 아래의 배우보다도 다른 곳에 열중해버릴 것만 같았다.

 

극 내용은 흥미로웠다. 불알친구의 첫사랑을 도와주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종국에는 남자가 제 친구를 다른 감정으로 느끼고 있는 걸 깨닫고 끝이 나는 결말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걸 이 형이랑 보러올 줄은 몰랐다. 민망했다. 옆에 앉은 인간이 어떤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시시각각 신경이 쓰일 즈음이었다. 어깨 위로 툭 닿는 무게에 윤기는 휙 고개를 돌렸다. 허무했다.

이미 여러 번 헤드뱅잉을 한 듯 축 늘어진 목에는 힘이 없었다. 적당한 곳을 찾아 정착한 머리는 더 이상 흔들림이 전무했다. 간간이 옅은 숨소리만 존재할 뿐이었다. 의식하고 있던 게 오로지 자신뿐이었다는 사실을 알자 경직됐던 목덜미에 힘이 스르륵 풀렸다. 피곤하면 그냥 집엘 가든가. 억지로 끌고 오기에 기대하던 공연인 줄 알았다. 옆 모습을 힐끗 쳐다보았다. 진한 눈썹 아래로 굴곡진 얼굴이 멀찍이서 쏘는 조명에 반사된다. 눈을 깜빡였다. 완벽한 각의 형태가 잔상으로 생생하게 그려질 만큼 잘생겼다. 윤기는 마치 지금 이 순간만은 자신이 저 무대 위에서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명멸한 곳에서 숨어 있던 희미한 감각들이 계속해 또렷해진다. 그것은 은밀한 감정으로 뒤바뀌어 윤기의 가슴을 세게 내려쳤다. 빳빳하게 어깨를 세운 윤기는 숨마저 느릿하게 내쉬기 시작했다. 혹시 이대로 깨버릴까 봐. 움직임을 최소화한다. 이 찰나의 순간이 목전에서 매몰되어 버릴까봐 초조했다.

 

 

깨우지. 끝나는 것도 모르고 잤네.

아, 뭐. 그러게 피곤한데 그냥 집에서 쉬죠. 뭔 연극이야. 또.

재미없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무슨 내용이야?

형 내용도 모르고 온 거였어요?

응. 그냥. 받은 거니까.

근처에 있는 식당에 와서도 윤기는 여전히 팸플릿을 팔랑거리며, 얼굴을 부쳐댔다. 러닝을 하고 온 사람처럼 빨개진 뺨을 식히던 윤기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내용이 뭐야? 잘 봤다고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이야. 너 데려와서 천만다행이다.

 

무슨 내용이냐고 묻는 얼굴은 그저 무덤덤해 보이기만 했다. 묵묵부답하자 석진의 턱 끝이 슬쩍 다가왔다. 의문이 가득했다. 이걸 다시 설명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선 고역이었다. 게다가 사실 중반부터는 내용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내내 손에 쥐고 있던 얇은 책자를 석진에게 내밀었다. 앞에 놓인 잔을 뒤집어 맥주를 반쯤 부었다. 코앞에 종이를 대고 글을 읽어내리던 석진의 안면에 난감한 빛이 서린다.

 

야 윤기야. 형 진짜 이거 이런 내용인지 몰랐어.

뭐.

미안하다. 너 이런 거 안 좋아하지 않았냐.

 

윤기는 천천히 내려앉는 눈썹 끄트머리를 힐끗 살피며 앞에 놓인 양파절임을 뒤적거렸다. 의문이었다. 제가 언제 싫어한다 말한적이 있던가. 저조차도 명확하지 않은 감정의 뭉텅이였다. 그러나 윤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근데 너 더워? 아까부터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석진이 들고 있던 종이를 아래위로 슬슬 흔들었다. 하느작대는 바람이 느껴졌다. 긴 팔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마 위를 덮고 있던 앞머리를 슬쩍 들어 올린다. 몸을 당겨 다가온 석진에게서는 풀밭을 스치는 듯한 싱그러운 냄새가 났다. 미미한 후각이 단번에 반응한다. 얼굴이 더 익었을지도 몰랐다. 윤기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양꼬치를 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물음에 대한 답이 턱 막힌 음울을 정리할 수 있게 만들리라 믿었다. 그때는.

 

 

 

 

어떻게 숙소를 빠져나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이렇게 얼이 빠진 상태로 운전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가까스로 차에 올라, 핸들에 얼굴을 처박았다. 밋밋하던 낯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김석진에 한해 무너질때마다 윤기는 홀로 남을 수 있는 공간에 틀어박혔다. 자꾸만 굴을 뚫고 어둠 속을 파고드는 두더지처럼 빛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을 자처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어느덧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 있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한참 같은 길을 돌고 돌다 양재IC를 지나쳐 서울을 빠져나갈 뻔했던 것만은 또렷하게 떠오른다. 멍한 상태가 유지되던 와중에도 내일 석진과 낚시를 가야 한다는 사실만은 잊지 않았던 몸이 우스웠다. 침대에 올라 한참을 뒤척였다. 눈을 감아도 사고는 여전히 숙소의 복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3시 반에 맞춰놓은 알람은 칼같이 고막을 때려 부순다. 얼마 자지도 못하고, 비실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침실 한 편에 가지런히 챙겨둔 낚싯대를 멍하니 보다가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오랜 시간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니 최대한 편한 복장이 좋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모자 하나를 눌러쓰고, 짐을 챙겨 들었다. 주차할 필요가 없게 단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하나 남은 담배를 얇은 입술 끝에 물었다. 텅 빈 담뱃갑을 사정없이 구기고 불을 붙인다. 그 어떤 생경한 눈으로도 보지 말자. 무엇도 묻지 말자 다짐했다. 불편한 진실을 옴팡지게 마주하느니, 가끔은 암흑 속에 그대로 묻어두는 것이 나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저 역시 제대로 숨길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참을 수 없는 암상의 발자국을 컨트롤 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손 끝에 닿을 듯 파고든 단초를 눌러 끄고 발로 비빈다. 쥐고 있던 쓰레기와 함께 처리하고 나자 밤이슬의 축축함이 어깨 위에 서리기 시작했다. 낮게 한숨을 내뱉으며 석진이 올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타이밍 좋게 가파른 길을 올라오는 환한 불빛이 시세포를 깨웠다. 확인하지 않아도 석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안 깨웠는데 어쩐 일이야.”

 

차 문을 열자, 드물게 잠긴 목소리가 윤기를 반겼다. 신기하다는 듯 동그랗게 커지는 눈동자를 잠깐보다 먼저 고개를 돌렸다. 어제의 김석진이 떠오를 것만 같아서 저 눈을 똑바로 응시할 수가 없었다.

 

“가끔은 그럴 때도 있죠. 가요.”

“아니 넌 애가 어디 가는지 묻지도 않고.”

“원투낚시 할 거 아니에요? 바람 이렇게 부는데 낚싯배 탈 것도 아니고.”

“윤기야.”

“네?”

“너 살 좀 빠진 거 같다? 얼굴 좀 보자.”

“오버는. 안 본 지 일주일 밖에 안 됐거든요.”

“너는 인마. 형, 동생 간에 우애도 없고 그러냐.”

 

끝끝내 고개를 돌려주지 않자 석진은 낮게 한숨을 쉬며 시동을 걸었다. 서로를 너무 잘 아는 거다. 낯간지러운 짓이 안 먹힌다는 걸 알면 빠르게 선회하는 방식. 타협되지 않을 땐 포기하거나 차선을 다루는 태도. 본인이 원하는 걸 절대 상대방에게 막무가내로 강요하지 않는다. 석진과 윤기가 오랫동안 함께 지내며 터득해온 방법이었다.

 

서울을 벗어나는 창밖을 보다 유리창에 꾸벅꾸벅 머리를 박았다. 매니저 형이 동행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근래에는 거의 석진과 윤기 단둘이서였다. 간혹 석진의 친구가 함께하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땐 항상 미리 연락한다. 몸에 밴 배려는 언제나 다정하고 자상하다. 윤기는 이따금 생각했다. 언젠가 그 이타적인 익숙함이 어느 한 타인만을 위하는 날이 올 때, 그걸 받아들여야 하는 매 순간이 서글플 것 같다고.

 

졸다 말고 경기가 일었다. 헉. 하고 파묻힌 고개를 바로 세우자 피식 웃는 석진의 옆모습이 보였다. 민망함에 입술 끝에 흐른 침을 쓱 닦고 중얼거렸다.

 

“휴게소 지나면 제가 운전해도 돼요.”

“아니, 내가 어디 가는 줄 알고.”

“내비가 안내하겠죠.”

“너 지금 운전시키면 나 집에 못 돌아갈 거 같아서 안 되겠다.”

“저승길 갈까 봐 무서워요?”

“잠 안 자고 뭐 했냐. 어제.”

“뭐 했어요.”

“그니까, 뭐.”

 

말없이 고개를 돌리고 앞서가는 불빛을 쫓는다. 이 시간이라면 텅 빈 도로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고속도로 위의 차들은 여전히 매서운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빠르게들 달려나가고 있었다.

 

 

“윤기야. 일어나봐. 물어보고 왔는데 지금 시간대가 제일 좋대. ”

“...네. 네.”

 

뺨을 톡톡 치는 석진의 손길에 늘어지는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세웠다. 눈을 비비며 밖을 쳐다보았다. 이미 앞쪽 방파제 위에는 제 의자와 낚싯대가 다 설치되어있었다. 잠에서 막 깨서 그런지 몸이 으슬으슬했다. 주변은 여전히 두터운 어둠이 깔려있었다. 차 문을 열고 나와 바깥 공기를 마신다. 바다 냄새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썰렁하네.”

 

이제 푹푹 찌는 여름이 시작 될 터였지만, 늦은 봄날의 새벽은 여전히 쌀쌀했다. 석진과 함께 구매한 낚시용 간이의자는 제법 편해서 몸을 파묻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돈은 이런데 쓰는 거지 하며 제일 비싼 라인을 고르는 석진에게 타박을 줬던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입고 안 춥냐.”

“여름인데요. 곧.”

“담요 두르고 있어.”

“안 춥대도요.”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 무릎 위에 담요를 덮어주는 손길은 다감하기 짝이 없었다. 손을 탄다는 게 이런 의미라면 자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석진의 손을 타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동이 틀 때까지도 입질은 오지 않았다. 저번 주 내내 게임을 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자 시답잖은 아재 개그가 물 흐르듯 스며든다. 그러다 문득 나온 이름에 윤기는 고개를 틀어 석진을 쳐다보았다.

 

“어제 그래서 정국이 보고 먹고 싶은 거 다 시키라고 하긴 했는데... 야 내 말 듣고 있냐?”

“네? 아. 네.”

“계산하니까 얼마 나온 줄 알어?”

“모르죠. 저야.”

“에이씨. 고민이라도 좀 하고 대답하라고. 인마. 걔랑 둘이 먹었다니까? 맞춰봐.”

“이십?”

“오십만 원 나왔다.”

 

미친 거 아니냐고 허리를 젖히며 껄껄 웃는다. 어제 둘이서 밥 먹고, 쇼핑하고. 그러다 숙소에 가서. 눈앞을 스치는 그 당혹스러운 장면에 윤기는 인상을 구겼다. 주먹을 꽉 쥐자 가지런히 놓여있던 낚싯대가 균형을 잃고 흔들린다.

 

“야. 이거.”

 

가느다란 손이 윤기의 하얀 손등 위를 단단하게 감쌌다. 정국의 성기와 맞댄 채 함께 흔들던 손이었다.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에 겹쳐진 손을 떼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뭐야? 왜?”

“컵라면 사 올게요.”

“배고파?”

“네.”

“걸어가게?”

“저기 불 켜진 데 아니에요? 슈퍼?”

“어, 맞는데. 야 그럼 찌도 하나 사 올래? 이따 찌낚시로 바꿔 해볼까 싶어서.”

“네. 갔다 올게요.”

“윤기야, 밤길 어둡다. 안 넘어지게 조심해.”

“예. 제 몸은 저 알아서 하니까 그, 형은 제 낚싯대나 잘 잡고 있어요.”

 

손가락 끝을 꽉 모아 눌렀다. 능글맞게 굴면 굴었지, 이런 데서 민망해할 놈이 아닌데도 급박하게 몰려오는 감정은 좀처럼 제어되지 않았다. 주위가 아직 어둑하긴 했지만, 동이 터 오르고 있었다. 지평선의 경계가 빨갛게 물들어 어둠을 밀어내고 있는 걸 보면 그랬다. 

도망가는 게 아니다. 짝사랑의 민낯을 들킬까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오히려 석진에게 따지고 들 거 같아서였다. 이런식으로 빌어먹게 사람을 흔들어대면서, 자신의 마음은 단 한 번도 눈치채지 못한 거냐고. 아는데도 모른 척 한건지, 아니면 제가 그 잘난 타입에 충족이 되지 않아서인 것인지 묻고 싶었다. 여자가 아니라 남자도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이 생각뿐이었다. 왜 정국이인지, 맏형주제에 양심도 없이 다섯 살이나 어린 막내를 건드리냐고 있는 대로 짜증을 부리고 지랄을 떨고 싶을까 봐. 그래서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손등 위에 닿은 작은 온기 때문이 아니었다.

 

 

계산을 하려고 하자 아주머니는 아직 온수기에 뜨거운 물이 준비가 안 됐다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아쉬움에 컵라면을 들고 만지작거리자 직접 물을 끓여주겠다며 거슬러 주려던 돈을 쓱 걷어갔다. 감사하다고 허리를 꾸벅 숙이곤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중얼거렸다.

슈퍼 앞에 있는 평상에 앉아 검은 비닐봉지를 뒤적거렸다. 담배 한 갑과 형이 부탁한 찌, 김밥 두 줄, 컵라면 두 개. 그리고 팩 소주 하나. 카운터에서 집어온 빨대를 작은 구멍에 맞춰 폭 끼웠다. 한 모금을 홀짝이며 빨았다. 빈속에 들어간 술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더 쓰게 느껴졌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면서도 천천히 목 뒤로 넘긴다.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했다. 화가 났다. 윤기는 아직도 그 과거의 공기를 잊지 않았다. 양꼬치 틀 너머에 앉아 있던 김석진의 표정이 여태껏 생생했다. 거북한 건지 기분이 상한 건지 알 수 없는 묘한 얼굴. 그 기색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던 곤란함을 안고 있었다. 이어 나온 낯설기 짝이 없는 말투가 윤기에게 포기의 첫 글자를 가르쳤다.

 

 

혼자서도 빼 먹을 수 있는데 굳이 제 앞으로 놓아준 양꼬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헷갈리게 하는 건 늘 이 형이 먼저였다. 평소라면 묻지도 않고 먹었을 음식 앞에서 멀뚱히 있자, 석진이 고개를 들었다. 

고민이 되었고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이런 걸 묻는다고 해서 자신이 게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여전히 인정할 생각도 없었고, 그런 풍파 속으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윤기는 한참동안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기어코 입을 열었다.

 

형.

응. 너, 안 먹냐?

 

석진이 양꼬치 하나를 입에 넣고 씹을 때마다 마치 초식동물처럼 인중이 귀엽게 오물거렸다. 그러더니 석진은 막 꼬치에서 빼낸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었다. 소스에 마구 굴린 살점이 그대로 윤기의 입안으로 쓱 밀려 들어왔다. 이런 행동은 누구든 오해 할 만했다. 비단 제가 아니어도 그럴 것이다. 어금니로 쫄깃한 고기를 씹어 넘기고, 맥주를 한잔 들이켰다. 남자와 남자 사이기 때문에 이렇게 스스럼없이 굴 수 있는 건지, 마주 보는 자신들이 남자와 남자 사이가 아니라면 다르게 보일 수도 있는 광경인지. 아니면 애초에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른 한숨을 내쉰 윤기는 손을 들어 맥주 거품이 묻은 입가를 훔쳤다.

 

형은 그런 거 싫어해요?

그런 게 뭔데?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오늘 본 연극 같은 거.

아아. 게이, 바이 그런 거?

아, 주위 좀 살피고 말해요.

 

남들의 귀도 아랑곳하지 않고 중얼거린다.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다가도 가끔 보면 간혹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난 뭐 별로 상관없는데?

네?

 

멤버들끼리 연결하면서 좋아하는 팬도 있다는 걸 알았다. 공공연하게 브로맨스다 뭐다 그런 관계성 짙은 콘텐츠들이 상품화되기도 했고, 잘 팔리기도 했다. 회사에서도 그에 부정적이지 않았다. 돈이 되는데 굳이 막을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다. 데뷔 초 그런 요소에 불만을 토로하던 건 언제나 윤기였고, 그게 뭐라고 웃어넘기는 쪽은 석진이었다. 이런 반응이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간단히 윤기의 허를 찔렀다.

 

나랑만 안 엮이면 돼. 아니, 남들 연애에 내가 뭐랄 거야.

 

냉랭하게 떨어지는 말에 숨소리를 죽였다. 불쾌한 듯 이마에 잔뜩 주름이 졌다. 날이 선 목소리가 윤기의 귀를 잔혹하게 갈겼다. 부유하듯 떠 있던 감정들이 단걸음에 나락으로 흩어진다. 

단단하게 굳은 턱을 슬쩍 들어 올리자 석진의 손이 윤기의 입술 위에 닿았다. 다 닦지 못한 거품을 훔쳐내고 아무렇지 않게 고기를 질겅질겅 씹었다.

 

근데 갑자기 그건 왜?

그럼 누가 형 좋다고 하면요?

날?

네.

싫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내가 워낙 완벽한 피사체라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슬쩍 웃으며 말하는 석진의 자화자찬 농담에도 윤기는 웃을 수가 없었다. 억지로 안면 근육을 당겨도, 잔뜩 굳어 경직된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석진의 앞에 놓인 소주를 들고 와 맥주잔에 부었다. 단숨에 반을 들이켰으나 그 어떤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빈속에 들이킨 소주는 생각보다 더 빨리 취기가 돌았다. 비어버린 소주 팩을 야무지게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봉지를 팔에 걸고 컵라면 두 개를 쌓은 채로 방파제의 커다란 돌계단을 올랐다.

의자 앞에 다다르자 고개가 뒤로 축 처진 석진이 보였다. 말을 안 하니 금세 졸음에 사로 잡힌듯했다.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간이 의자 뒤쪽에 컵라면 두 개를 내려놓고 석진의 앞에 가만히 쭈그리고 앉았다. 저렇게 목젖이 다 넘어가는데도 깨지 않는 게 신기했다. 예민하다는 말은 순 뻥이다.

 

보통 잘 때까지 저렇게 잘 생기긴 어려운데. 입가에 흐른 침을 닦던 몇 시간 전의 본인이 새삼 수치스러워진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특출난 얼굴을 빤히 보았다. 둥글게 휜 목젖이 강력하게 자기 주장을 해댄다. 예고도 없이 어제저녁의 석진이 떠올랐다. 지금처럼 젖혀졌던 목울대 사이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신음이 터졌다.

 

그간 참고 참으며 버텼던 밑바탕이 우중충하게 물들었다. 허무했다. 포기하기 위해서 마음을 다잡고 버텨내던 모든 순간이 숫제 쓰라리기 시작했다. 조급함이 들었다. 이대로 자신과 이 형은 멤버와 멤버, 형과 동생으로 끝나는 걸까. 

누군가를 사귀거나 만나면 유난스러울 정도로 꼬박꼬박 보고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 속 어디에도 정국이의 이름은 없었다. 거짓말을 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디서 어디까지인지도 모를 눈속임. 윤기는 석진을 올려다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쪼그려 앉아 있은 지 한참이 지난 탓인지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무릎을 조금 더 세우고 몸을 일으켰다. 젖힌 고개를 바로 잡아 기대게 해줄 생각이었다.

뒤통수를 감싸려던 순간 다물려 있던 입술이 별안간 벌어진다. 머리카락 위를 덮던 손길이 멎었다. 도톰한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보였다. 윤기는 매끄럽고 촉촉한 형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래전부터 저 혀를 감고, 빨고, 핥고, 비벼보고 싶었다. 덧없이 포기해야 했던 그 무렵의 두루뭉술한 마음이 마른 장작이 되어 다시 활화를 부추긴다. 동시에 성기를 붙잡고 목젖을 꺾던 모습이 떠올랐다. 충동적인 손길로 석진의 머리칼을 세게 움켜쥐었다. 허리를 숙이고 그대로 두꺼운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겹쳤다. 혀를 맞붙인다. 달큼한 맛이 났다. 혓바닥 아래를 슬쩍 부딪치며 끝을 쪽쪽 빨았다. 그러자 석진의 혀가 단숨에 휙 감긴다. 얽히고설키는 움직임에 놀래 눈을 커다랗게 떴다. 먼저 키스를 한 사람은 자신이면서 경기하듯 몸을 떼어낸 쪽 역시 윤기였다.

석진은 입술 끝에서 흘러내리는 타액을 손등으로 쓱 훔쳐낸다. 치켜뜬 눈이 매섭게 윤기를 쫓았다.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인지되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등을 홱 돌렸다. 그러나 석진이 단단하게 붙잡은 팔 때문에 얼마 가지도 못하고 길이 막혔다. 눈을 질끈 감았다. 장난친 거라고 태연스레 변명이라도 하는 편이 좋을까.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 일각이 끝나지 않을 영겁처럼 느껴졌다. 등을 천천히 돌리자 석진의 입술 끝이 슬쩍 올라갔다.

 

“윤기야.”

“……”

“형 입술 무슨 맛이야.”

 

미친 건가 싶었다. 팔을 세게 빼내며 몸을 돌리자, 이번엔 일어나서 팔목을 움켜쥔다. 이미 환해진 주변에 익은 얼굴도 다 보일 터였다. 어디로든 숨고 싶었다. 무안하고 쪽팔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농담인데.”

“……”

 

차라리 같이 민망해해 줬더라면 이것보단 나았을까. 한 손으로 입술을 틀어막고 견고히 잡힌 손아귀를 우악스럽게 비틀었다.

 

“혼자 못가. 야. 윤기야.”

“……”

“정 가고 싶으면 차 끌고 가. 여기서 못 걸어가.”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상태를 귀신같이 눈치챈 석진이 억지로 당긴 윤기의 손바닥 위에 차 키를 올려주었다.

 

“너 괜찮으면, 톡해. 형은 괜찮으니까.”

 

스르륵 풀리는 힘에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다. 터질 것 같이 달궈진 얼굴에 바다의 찬 바람이 철썩거리며 부딪혔다. 따갑고 매서웠다.

 

차 문을 열자마자 양손으로 핸들을 꽉 쥐었다. 그러다 다시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고 얼굴을 파묻었다. 단단히 돌았다. 어지간해선 하지 않는 쌍욕을 입안에서 몇 번이나 곱씹었다. 결국 시동도 한번 제대로 걸어보지 못하고, 윤기는 한참을 차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진짜 혼자 가버리면 어쩌려고. 뭘 믿고 키를 넘겨주냐. 열이 식지 않은 얼굴은 아직도 화끈거렸다. 몇 번이고 닦고 닦길 반복해서 퉁퉁 부은 입술이 쓰라렸다. 목 깊은 곳에서 앓는 신음이 터져 나온다. 김석진의 목소리가 메아리를 치듯 반복해 들렸다.

 

“괜찮긴 뭐가 괜찮다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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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아주 티끌만큼의 jin x kook이 포함되어 있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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