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화양연화_제2장(3)






아카아시가 놀아준다는 말에 신이 난 보쿠토는 폴짝거리면서 아카아시를 따라갔다. 궁에 도착하자마자 가져온 공을 이리저리 던지고, 그걸 주우러 다니는 모습에 아카아시는 그저 팔짱을 끼고 멀찍이 서서 바라보았다. 혹시나 이 아이를 만나고 있는 것이 황후나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갈까 오는 길도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으로 왔고, 상궁을 포함한 모든 시녀, 시종들의 입을 단속시켰다. 뒤에 서 있는 궁녀들을 모두 물리고, 호위무사들 또한 물러가라 명했지만 그들 중 한 명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사쿠사 키요오미'라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황후가 가르쳐준 이름이지만 누가 알려주던지 상관없었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이름을 부를 일이 지금도 앞으로도 없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 아카아시는 황후께 문안을 드리기 위해 아침 일찍 황후의 궁을 찾았다. 마침 세욕을 마치고 나온 그녀는 냉차를 마시며 데워진 몸을 식히고 있었다. 미처 다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의 끝에는 물기가 맺혀 있었고, 그 물방울들은 그대로 이불과 바닥에 떨어져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시중을 드는 궁녀에게서 수건을 건네받아 황후의 옆에 앉은 아카아시는 황후의 머리카락을 수건 사이에 넣어 조심스럽게 물기를 닦았다.



“물기도 제대로 닦지 않으시고. 고뿔이라도 걸리시면 큰일입니다.”



“태자.”



“예, 어마마마.”



“이 어미는 태자가 걱정되어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소자가 미흡한 탓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황후이기 이전에 나 또한 자식을 둔 어미니까요. 우리 태자가 걱정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요전에 잠을 자는데 태자가 큰 봉변을 당하는 꿈도 꾸었습니다. 그래서 이참에 태자가 호위무사를 데리고 다녔으면 해요.”



“호위무사라면 있으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그 호위무사 말고 이 어미가 고심하여 데려온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같이 실력이 좋은 자들이니 거절하지 말고 어딜 가든 같이 가세요.”



들라 하여라.


안으로 들어온 5명의 검은 사내들은 황후와 아카아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황후의 머리카락을 닦아주던 손이 멈췄다. 황후는 뒤를 돌아 아카아시의 손을 꼭 잡은 뒤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영상이 자신의 손자를 황태자 자리에 올리고 그도 모자라 황위까지 올린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이 어미는 태자가 무슨 짓을 당할지 무섭고 불안해 하루도 편히 잘 수 없습니다.”



“어마마마, 지금도 호위무사는 충분합니다. 이 정도의 호위무사라면 영상이 아닌 저에게서 뒷말이 나올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다른 쪽으로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은 어찌 믿으려고요? 벌써 영상과 접촉해 태자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사람이면 어쩌려고 이럽니까. 태자, 이 어미의 말을 따르세요. 그래야 태자도 살고, 이 어미도 삽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그리해서 어마마마의 마음이 편해지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태자, 태자는 어엿한 이 나라의 황태자임을 잊지 마세요. 몸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영상의 손자인 그놈과 가까이하지 마세요. 태자의 목숨과 자리를 노리는 자입니다.”



“그 또한 명심하겠습니다.”



황후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걸 보고 나서야 아카아시는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녀가 편히 옷을 갈아입고 치장할 수 있도록 궁을 나온 아카아시는 뒤를 따르는 검은 사내들을 힐긋 쳐다봤다. 검은 옷에 등 또는 허리에 긴 칼을 차고 있는 그들은 언제 어디서라도 칼을 빼 들 준비가 되어있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말 황후는 순수하게 자신을 걱정해서 이 호위무사들을 붙인 것일까,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까.



'사실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지금 자기 생각이 우스워 하마터면 입 밖으로 웃음이 새어 나올 뻔 했다. 황궁은 늘 이런 곳이었다. 어느 누가 칼을 제 목에 칼을 겨누고 있을지 몰라서 숨을 쉬고 걸어 다니는 것이라면 늘 경계해야 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주위의 사람까지 모두를 의심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이 황궁이었다. 황제의 색을 추앙하고, 아름다운 것을 우대하며, 그 누구보다 빛나되 그런 자신을 숨겨야 하는 이곳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황후의 힘이 컸다는 것은 다른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아카아시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황후에게는 늘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감사와 의심은 다른 선상의 감정이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감싸다 못해 천으로 입까지 가린 '사쿠사'라는 남자는 듣자 하니 호위무사 중 가장 실력 좋은 자라고 들었다. 황후의 궁에서부터 여기까지 같이 오면서 느낀 건데 그는 일정 거리를 두고 그 이상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거리감을 두는 사람. 이것이 사쿠사에 대한 아카아시의 첫인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혼자만의 생각이었고, 섣부른 판단과 성급한 일반화로 그에 대한 이미지를 고정할 수는 없었다. 어떤 일이 계기가 되었건 계속 자신의 곁에 있을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아카아시와 눈이 마주친 사쿠사는 고개만 살짝 숙였다. 황궁 예법에 익숙하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예를 갖추는 데 있어서 매우 부족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도 추가해야 할 것 같았다.



“아카시!”



자신을 부르는 보쿠토에 아카아시는 사쿠사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자신의 이름을 똑바로 가르쳐 줬는데도 또 틀리게 부르는 보쿠토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힌 아카아시는 차근차근 말했다.



“아카아시입니다. 따라 해 보세요, 아.”



“아-”



“카.”



“카-”



“아.”



“아-”



“시.”



“시이-”



“붙여보세요. 아카아시.”



“아카아시이-”



“네, 그겁니다.”



“헤헤, 아카아시이!”



“시이가 아니라 시입니다. 시.”



“아카아시!”



“네, 잘했습니다.”



“헤헤, 아카아시! 아카아시!”



연신 그의 이름을 부르던 보쿠토는 또 한 번 들고 있던 공을 위로 던졌다. 아카아시의 키보다 높게 올라간 공은 둥근 포물선을 그리며 뒤로 넘어갔고, 보쿠토는 그 공을 잡기 위해 손을 뒤로 뻗다가 무게 중심이 뒤로 쏠리는 바람에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기본적으로 마당에 잔디가 깔려 황궁의 다른 곳보다 다칠 위험은 적었지만, 하필 보쿠토가 넘어진 곳에 조금이지만 물이 고여 있었다. 철퍽, 소리와 함께 손과 옷에 흙탕물이 튄 보쿠토에 아카아시는 인상을 찌푸리며 평소 챙겨 다니던 천을 꺼내 내밀었다.



“뭐하는 겁니까.”



“있는지 몰랐는걸.”



“닦으세요. 더럽습니다.”



소매를 걷고 자신이 준 천으로 더러워진 곳을 닦는 보쿠토의 행동이 미덥지 않아 아카아시는 천을 다시 건네받았다. 손에만 묻은 줄 알았더니 얼굴에까지 흙탕물이 튀었었기에 그곳까지 마르기 전에 얼른 천으로 닦아냈다. 혹시나 더 묻은 곳이 없나 살피는데 아카아시의 손이 멈칫했다.



“꽤, 상처가 많군요.”



“이건 저번에 산에서 토끼랑 뛰다가 넘어져서 생긴 거고, 이건 나무에서 떨어져서 생긴 거, 그리고 이건 어제 방에서 놀다가 미끄러져서 생긴 거야.”



“과거의 상처는 어쩔 수 없지만 이제 황자의 몸이니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난 강한 남자니까 괜찮아. 다칠 땐 좀 아프지만 곧 괜찮아지는 걸? 약 바르면 금방 나아!”



읏차, 자리에서 일어난 보쿠토는 근처에 떨어진 공을 주워 아카아시에게 내밀었다.



“나랑, 공놀이하자. 놀아주기로 약속했잖아.”



“약속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지 모릅니다.”



“아카아시!”



“그러니, 방법을 알려주시죠. 같이 놀자고 제안한 건 그쪽이니까요.”



한 손에 움켜쥘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공을 던졌다 받았다 하기를 수십 번, 어른과 아이의 공놀이라 보쿠토가 아무리 세게 던져도 아카아시에겐 부족했고, 아카아시가 아무리 약하게 던져도 보쿠토에겐 강했다. 슬슬 그만둘 법한데도 보쿠토는 포기를 몰랐고, 몇 번이고 아카아시에게 공을 던졌다.



“힘들면 잠시 쉬도록 하죠.”



“아카, 아시, 헤엑, 힘들, 헤엑, 구나? 하아-”



어린 것이 무슨 허세가 저리 들었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것이 누가 봐도 지친 쪽은 보쿠토였는데 전혀 지치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나는 괜찮아.’라고 말하는 보쿠토의 모습이 우스웠다. 제가 아니라 당신이 매우 힘들어 보여서요, 라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지만 아카아시는 그 말을 삼켰다.



“바깥놀이가 오랜만이라 그런지 지치네요. 차라도 좀 마시면서 쉬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는 좋아!”



잠시 두 사람을 살피러 온 상궁에게 아카아시는 차를 준비해달라는 명령을 내렸다. 차가 도착할 때까지 잠시 쉬고 싶어 정자에 올라간 아카아시를 보쿠토도, 아카아시의 일정 거리에서 떨어지지 않는 사쿠사도 뒤를 따랐다. 움직였을 두 사람을 위해 상궁은 냉차와 다과를 준비해 왔고, 다과상이라고 하기엔 화려하게 차려진 한 상에 보쿠토는 연신 환호성을 질렀다. 차로 목을 축이는 아카아시와 다르게 보쿠토는 제일 먼저 꿀에 절인 과일을 손가락으로 집어 입 안에 넣었다. 달달한 꿀이 입안에 퍼지다 마지막에 터지는 새콤한 과즙에 보쿠토는 몸을 잘게 떨었다. 잘 차려진 다과들을 하나씩 맛보면서 연신 맛있다고 외치는 보쿠토의 모습에 아카아시는 피식 웃으며 차만 연신 홀짝였다.



“아카아시, 이거 먹어 봐!”



“전 괜찮으니 그쪽이나 많이-”



“이거! 이거 맛있어!”



달걀을 풀어 얇게 부친 육전이 왜 올라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먹어보라며 몇 번이고 육전을 권했다. 눈앞에서 육전이 젓가락에 끼여 흔들거리는 걸 계속 보기 싫은 데다가 맛있으니 빨리 먹으라며 반짝이는 눈으로 권하는 보쿠토에게 모질게 싫다 말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아카아시는 입을 벌렸고, 보쿠토는 그 입에 육전을 넣어주려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순간, 보쿠토의 무게가 실린 상이 한쪽으로 기울면서 상에 차려진 음식들이 한쪽으로 와르르 쏠렸다. 옆에서 대기하던 시녀들이 손쓸 틈도 없이 음식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접시는 귀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이리저리 굴렀다. 시끄러운 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던 아카아시는 조용해진 주위에 다시 눈을 떴고, 눈앞의 풍경에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아카아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기 있던 사쿠사가 바로 앞에 있었고,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로 보쿠토의 목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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