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위험하니까. 잠깐, 아니”

 




망토와 로브를 벗고 얇은 튜닉과 바지차림의 리프탄이 대장간에서 나와 그녀의 손을 잡고 대장간과 약간 떨어진 들판으로 데려갔다. 그녀의 위치와 대장간의 거리를 가늠해보던 그가 허리를 숙여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줬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어디가면 안돼. 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

 




리프탄이 마지막 문장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 그녀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대장간의 커다란 문짝을 떼어내 벽에 기대두었다. 문짝이 사라지자 대장간 내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맥시는 그 모습을 넋 놓고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에 작은 턱을 올려놓았다.

 

 


서늘한 바람이 꽃향기를 안고 왔다. 맥시는 등을 기대고 있던 커다란 나무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너른 들판 위에 수선화가 야생화들과 섞여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리프탄을 쳐다봤다. 그는 몹시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장난감 같은 망치로 편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맥시는 그의 집중한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나무 뒤로 팔을 뻗었다. 짧은 팔이 나무 뒤까지 닿을리 만무했다. 그녀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아주 조금씩 나무 뒤쪽으로 몸을 옮겼다.

 

 






 




리프탄은 자꾸만 종잇장처럼 휘어져버리는 편자를 던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 망치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기억을 더듬어 왕관 모양을 만들고는 있었으나 수십 배로 늘어난 악력 탓에 납작하게 펴진 편자는 굳이 공구의 힘없이도 휙휙 멋대로 휘었다.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봤자. 그는 어린 날의 자신을 떠올렸다. 찌그러져 버려진 편자로 만들었던 왕관을 머리에 쓰고 환하게 웃는 맥시밀리언의 모습을 상상하던 어린 리프탄이 스쳐갔다. 바보같은 짓이야. 이런건 얼마든지 살 수 있어. 그는 얼추 왕관의 형태를 갖춘 쇠고리를 내던지려다 맥시의 안절부절한 표정을 떠올리고는 한숨과 함께 다시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면서도 조금씩 나무 뒤로 사라지는 맥시를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제 딴에는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려는 거겠지만 본인의 눈에는 뛰어가는 것 만큼 선명히 들어왔다. 그는 나무에 채 가려지지 않고 바람결에 따라 굽이치는 새빨간 머리카락을 보고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다 문득 문설주 뒤에 숨어 자신을 지켜보던 어린 맥시밀리언과 그날 밤 오두막 대들보에 매달려 있던 형체가 순차적으로 떠올라 입매를 굳혔다. 과거일뿐이야.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십여년전 만든 것보다 크게 나아지지 않은 모양새의 왕관이 그의 손에 쥐여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장장이의 도움을 받을걸 그랬나. 그의 입매가 불만족스럽게 비뚤어졌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겨우 이딴걸 만드는데 시간을 쓰다니. 그가 허탈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허접한 결과물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다시 맥시가 있을 나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거리던 붉은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았다.

 





“맥시”

 




그가 한달음에 나무로 뛰어갔다. 나무와 조금 떨어진 꽃밭에 주저앉아있던 그녀가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눈에 보이는 곳에 있으라고 했잖아”

 




리프탄의 날선 말투에 그녀는 황급히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등 뒤로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그녀 앞에 주저앉으며 조심스레 그녀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미안해. 화낸거 아니야. 그냥 네가 보이지 않아서. 놀래서”

 


“....”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의 다정한 말투에 맥시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손에 걸려있는 왕관에 꽂혔다.

 





“아, 이거. 역시..그냥 더 괜찮은걸로 사주는게”

 






맥시가 그의 손에 들려있는 왕관을 가져갔다. 그녀의 입이 점차 크게 벌어졌다.

 





“형편없지?”

 


“아,아,아니..아니요. 저,정말..정말...마,마,마음에..”

 






그녀가 조심스레 그가 만든 왕관을 자신의 엉킨 붉은 머리위에 올려놨다. 그녀 등 뒤로 넘어가던 석양에 반사된 빛에 리프탄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 사이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머리 위에 무언가를 올려놨다.

 





“이,이번엔..저,저도..무,뭔가...드,드리고..싶어..서”

 






리프탄은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 위에 씌여진 것을 만지다가 손을 멈췄다. 여린 꽃잎이 그의 손 끝을 스쳤다.

 





‘너는 스스로를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지 말어’

 





의부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스쳐갔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경한 목소리에 그는 주먹을 쥐었다.



 




‘땅 버러지로 태어났으면 땅바닥만 보고 살아야 되는 거야. 위를 올려다보면 불행해지는 거라구’

 






그는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맥시밀리언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왜소한 몸과 동그랗고 흰 얼굴. 커다란 눈망울과 붉은 머리카락이 차례로 그의 눈에 담겼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 위에 올려져있는 왕관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위를 올려다보면 불행해지는 거라구’

 





의부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자 맥시는 천천히 그의 머리를 작은 품에 끌어안았다. 그는 연이어 떠오르는 악몽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가 그의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을 작은 손으로 연신 쓰다듬었다.





 

“리,리프탄..”

 


“....”

 


“덕분에...나는...더, 더 이상...불행하지 아,않을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묻혔다. 그는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영문모를 피로감이 몰려왔다. 대장간에서 하루 종일 죽어라 말편자를 두드리고도 대장장이에게 실컷 욕을 얻어먹고 나온 앳된 열네 살의 소년이, 화관을 만들며 자신을 기다리던 붉은 머리를 한 소녀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자신이 건넨 왕관을 쓰고, 자신에게 화관을 씌워주고는 눈이 부시게 웃었다. 그는 눈을 뜨면 모든게 환상처럼 사라질까 두려워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이,이제 지,집으로..가요”

 





집. 집이라는 한 글자가 그의 심장을 두드렸다. 리프탄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역광에 가려져 맥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서 한걸음 멀어진 그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환상이 아니라는 듯 그의 손을 힘주어 마주잡았다.

 



너는 기어이 내 환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네가 어디까지 들어와 나를 헤집어 놓을지 이젠 두려워. 니가 흔들면 흔드는대로 나는 마냥 흔들리겠지. 니가 짓밟으면 나는 맥없이 짓밟힐 거야. 나는 니가 무슨 짓을 해도 무력하게 당할 수 밖에 없어. 그래도 좋다. 너에게 끝없이 잠식당해서, 그렇게 죽어도. 좋겠다.




* 본 연성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배경 및 소재의 저작권은 '상수리나무아래' 김수지 작가님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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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리나무아래_연성을 쓰고 있습니다. 죽기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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