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쇄마을에서 멀지 않은 행앗구 시내. 이곳은 다른 타지역 시내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그래도 나름 필요한 시설은 빠짐없이 갖추고 있어 가성비 시내라 불리고 있는 곳이었다.

시내 중앙에 위치한 사자 분수대에서 거친 물보라가 쏟아져 내렸다.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이 꺄르르 소리를 지르며 물보라를 피해 멀리 달아났다. 

분수대 주변에는 유독 사람이 많았다. 이곳은 위치상 약속 장소로 정하기 최적인 장소였다. 분수대 주변 벤치에 이어폰을 낀 남학생이 뚱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는 눌러쓴 검은색 캡모자를 매만지며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던 모양이다. 약속 상대가 도착하지 않은 걸 확인한 초록머리 남학생은 묵묵히 손에 쥔 게임기를 두드렸다. 리드미컬한 손놀림이었다. 

게임기를 내려보고 있던 남학생이 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어딘가를 주의 깊게 쳐다보던 남학생은 후드티 앞주머니에 게임기를 찔러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묵묵히 걷기 시작한 그의 발치 너머 어여쁜 여학생이 한 명이 서있다.

여학생은 손으로 그늘막을 만들어 주변을 살폈다. 남학생과 마찬가지로 약속 상대가 있던 모양이다. 여학생의 등 뒤로 접근한 남학생이 가녀린 어깨를 검지로 두드렸다. 화들짝 놀란 여학생이 황급히 등을 돌렸다. 그러자 길게 묶어 늘어뜨린 분홍색 머리칼이 남학생의 볼을 찰싹 때렸다.


“ 김초록! ”

“ ……. ”


초록은 말없이 오른뺨을 매만졌다. 고통의 장본인은 자신의 머리칼이 위해를 가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초록은 한숨을 내쉬고서 뺨을 만지던 손으로 분수대 옆에 선 아담한 시계탑을 가리켰다.


“ 지금 몇 시야? ”


초록이 날 선 시선과 함께 여학생을 몰아붙였다. 여학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계탑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뭐가 문제냐는 듯 너스레 웃으며 당당히 대답했다.


“ 두 시 사십오분. ”

“ 우리가 만나기로 한 시간은? ”

“ 두 시! ”


초록은 쾌활하게 웃는 그녀를 바라보며 살인충동과 비슷한 무언가를 느꼈다. 손으로 미간을 가린 그는 작은 목소리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앞에 선 여학생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였다. 손을 내리자 송곳처럼 날카로웠던 그의 눈빛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 패고 싶다 신하로? ”


들려선 안 될 자신의 못된 말이 그녀의 귀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초록의 숨이 막혔다. 평소라면 차게 웃으며 초록의 볼을 꼬집었을테지만, 늦은 점을 감안해 어떠한 처벌도 가하지 않는 하로였다.

사이좋게 합류한 초록과 하로는 동쪽 상가를 향해 발맞춰 걸어갔다. 가성비 시내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크게 네 갈래 길로 나뉘어 있다. 북동쪽 외곽에는 주로 의류, 화장품, 액세서리를 취급하는 상가가 많고, 남서쪽 외곽에는 음식점이나 노래방, 술집, 유흥업소들이 몰려 있다. 둘이 향하는 곳은 남서쪽 방향이었다. 익숙하게 걸어나간 그들이 도착한 곳은 커다란 게임센터였다. 3층 상가 전체가 게임센터로 운용되고 있는 이곳은 마감동 게이머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하고 핫한 곳이다. 게임 전자음 소리로 시끌벅적한 게임센터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이 게임센터는 흔히 고인물이라 일컫는 고수 유저들의 활동 영역이다. 제일 넓은 1층은 주로, 고인물 유저가 자신의 실력을 뽐내기 위한 무대라 취급받는 곳이다. 인기 많기로 소문난 리듬 게임 자리가 오늘도 텅 비어 있었다. 어수룩한 실력으론 사람들의 비웃음밖에 사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많은 사람이 게임 참여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수의 공연 무대라 칭해지는 리듬 게임 도전을 누가 할 것인지에 대한 이목이 쏠리고 있는 가운데, 하로와 초록이 모습을 드러냈다.

둘의 등장에 게임센터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등신 좋고 비율 좋은 훤칠한 소년 초록과 보기 드문 미소녀 여성 플레이어 하로는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사실 이목의 대부분은 하로가 차지하고 있었다. 실력이 우선시되는 게임센터에 몰리는 구경꾼과 플레이어의 칠할 이상이 남자였기 때문이다. 


“ 너 밥 먹었어? ”

“ 아니. ”

“ 오, 그럼 이기는 사람이 밥 사는 거다? ”

“ 그러지 뭐. ”

“ 좋아 좋아. ”


하로와 초록은 여유롭게 게임기 위로 올라섰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구경꾼들의 이목이 둘에게 쏠렸다. 장내가 술렁이며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구경꾼이 몰렸다. 와중에도 하로와 초록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마치 세상에 둘 밖에 없는 듯한 여유로움이 더욱 구경꾼들의 기대를 끌어올렸다. 둘이 선택할 노래 난이도에 많은 기대가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초록의 플레이어 레벨이 게임 화면에 공개됐다.


“ 레벨 183…!? ”

“ 어이어이…! ”


설명하긴 힘들겠으나 아무래도 상당히 고수준의 레벨인 듯했다. 하로는 따로 플레이어 카드를 만들어두지 않았는지 먼저 코인을 넣었다. 많은 사람들은 플레이어 카드가 없는 그녀를 뉴비일 것이라 추측했다. 


“ 노래는 내가 고른다? ”

“ 예예, 좋을 대로 하십쇼. ”


초록이 노래를 고른다는 말에 사람들이 절망했다. 레벨 183인 그가 선택하는 노래 난이도는 분명 그녀의 발을 꼬이게 만들 것이다. 초심자에게 뭐 하는 짓이냐며 따지는 듯한 시선이 초록에게 쏠렸다. 하지만 초록은 여전히 주변에 일절 신경쓰지 않았다. 게임 시작 전 하로는 가볍게 발판을 두드리며 몸을 풀었다.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는 그 모습이 지켜보는 구경꾼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 힘내라고 젠장!! ”

“ 죽어도 포기하지 마 뉴비!! ”


열띤 응원에 화들짝 놀란 하로는 등을 돌려 손을 흔들었다. 원치않던 성원이었으나 응원해주는 구경꾼이 웃기기도 했고, 괜히 고맙기도 했다. 앞머리가 흐트러지지 않게끔 머리핀을 끼워 넣은 하로는 초록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초록은 극도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 표정 풀어라 김초록. ”

“ 하이고, 어림도 없지. ”

“ 두고 봐, 오늘 이기면 코스요리 먹는다. ”


재산 탕진의 위협을 느낀 초록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둘이 사이좋게 붙어 달짝지근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게임 시작 전광판이 점등됐다. 수 초 뒤, 점등된 노란빛이 사라진 순간, 게임이 시작됐다. 게임 스타트 글씨가 화면에서 지워진 순간 구경꾼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어떤 발판부터 밟아야 할지 혼란이 올 수준의 패턴 타일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 수준이라면 하로의 빛보다 빠른 탈락이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하로는 여유만만하게 만인의 예상을 깨부쉈다.


“ 뭐라고…!? ”

“ 오, 올콤보! ”

“ 어이어이! ”


둘의 게임 실력은 고인물조차 감탄할 정도의 수준을 웃돌았다. 막상막하의 승부였으나 뉴비일 것이라는 예상이 틀어진 시점에서 이목은 당연히 하로에게 쏠렸다. 적게 봐도 마흔 명 정도 몰린 구경꾼이 하나같이 하로를 응원했다. 안 그래도 공복 상태인 초록은 토가 쏠려왔고, 그 모습을 힐끗이던 하로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앙다물었다. 자두색 입술을 다문 하로의 모습이 구경꾼들에게 절대 지지 않겠다는 강인한 의지로 와전됐다. 전보다 열띤 응원과 함성이 장내를 메우는 가운데 노래는 클라이맥스에 다다랐다.


“ 이 부분이 문제야…… ”

“ 아아…작곡가 디제이 디디가 고인물을 위한 능구렁이 패턴…! ”

“ 과연 그녀가 벗어날 수 있을까!? ”


그렇다. 초록이 선택한 이 노래는 유저 생각을 일절도 하지 않는 비트 메이커 DJ 디디의 노래였다. 일반인들에겐 당연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저들 사이에선 혹독하기로 유명한 작곡가였다. 둘에게 곧 약속의 패턴 시간이 다가왔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이들이 침묵했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사이 발이 네 개여도 부족한 패턴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하로는 그 순간 상체를 숙였다. 그녀가 몸을 숙이자 많은 사람들은 의문을 품었으나 그것은 곧바로 환희와 경이로움으로 바뀌었다. 하로는 네 발 동물처럼 두 손까지 활용해 극악 난이도의 패턴 파일을 공략했다.


“ 말도 안 돼!! ”

“ 우리는 지금 역사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거라고!! ”

“ 어이어이!! ”

“ 어이어이 밖에 할 줄 모르세요? ”


열띤 함성과 호응으로 가득한 열기의 현장 속에서 하로는 가뿐히 날아올랐다. 제자리에서 가볍게 뛴 그녀의 이마에서 몇 방울의 땀이 튕겨 나갔다. 그 모습은 플레이어들의 뇌리에 강렬히 각인되었고, 이 날 하로는 사족보행 고수라는 호칭을 얻게 됐다. 발을 헛디뎌 타일 1개를 놓친 초록은 이 날 눈물의 코스 요리를 맛보게 됐다.

열띤 게임 대결은 그렇게 하로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게임이 끝난 뒤 둘에게 아낌없는 환호와 갈채 박수를 건넸다. 하로는 볼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고, 초록은 묵묵히 지갑을 열어 수중에 있는 돈을 확인했다. 한 번 더 말없이 미간을 손으로 덮는 그의 모습에서 패잔병의 기운이 느껴졌다. 

둘은 근처에 있는 자판기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그 둘을 뒤따라 온 일행이 있었다.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고인물 원톱이라 불리는 남자와 그의 수하였다. 커뮤니티 사이트 일절 관심 없는 하로와 초록은 낯선 인물의 등장에 고개를 갸웃했다. 게임센터에선 나름 인지도 있었던 남자는 머쓱함에 괜히 헛기침을 뱉었다. 그는 비쩍 마른 팔을 움직여 휴대폰을 내밀었다.


“ 번호 좀 줄 수 있나요? ”


그 말에 초록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남자와 두 명의 수하는 몸을 움찔했다. 구겨진 그의 표정에서 귀기 서린 살기가 느껴졌다. 겁에 질린 그들은 하로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줄행랑쳤다. 멍하니 서있던 하로는 배를 잡고 웃었다.


“ 아 진짜 대박이다. 재네는 너 화난 줄 알겠지? ”

“ 그게 더 화나네. ”


초록은 그저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소꿉친구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심기가 나빠진 게 아니었다. 하로가 인기인이 된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던 것 뿐이다. 그게 꼴보기 싫어 인상을 쓴 것 뿐인데 수작 거는 남자들을 쫓아낸 아이러니한 상황이 됐다.


“ 아이고 고맙습니다. 김초록 선생님. ”

“ 고마워하지 마라 밥 안 사준다. ”

“ 쩨쩨하긴! ”


하로가 초록의 등을 찰싹 때렸다. 그 덕에 음료수를 머금던 그의 입술 사이로 아름다운 청정수가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은 마치 시내 중앙에 있던 분수대처럼 아름다웠다.


이 둘의 사이가 이토록 돈독하고 보기 좋은 덴 다 이유가 있었다. 마감동 행앗구의 토박이로 소문난 둘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소꿉친구 사이였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옆집에 살아 등교 시간이면 매번 마주치기 일쑤였고, 게임이라는 공통된 화제까지 있어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둘은 자연스레 매일 붙어 다니게 됐다. 양쪽 부모님은 이쯤 되면 사귀는 게 맞지 않겠냐며 버릇처럼 말했고, 그럴 때마다 하로와 초록은 극도로 혐오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았다.

둘은 서로의 인기를 실감할 때마다 곧잘 진 빠지는 표정을 짓곤 했다. 둘의 외모는 제3자가 봤을 때 출중한 게임 실력만큼 고왔다. 은색 머리만큼 타고나기 힘든 핑크빛 머리의 소유자 하로는 항상 쾌활하고 긍정적인 소녀였다. 말괄량이라는 단어가 기막힐 정도로 어울리는 그녀는 남녀를 불문하고 만인에게 사랑받는 존재였다. 성격도 원체 좋다 보니 학교뿐만 아니라 동네 친구도 많아 발이 무척 넓었다. 순진무구한 생김새와 의외로 당찬 성격에 홀려 남몰래 가슴 앓이 하는 이성친구가 한둘이 아니었다.

초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성격이 밝고 쾌활한 편은 아니었다. 구태여 말하자면 차갑고 무뚝뚝했다. 할 말만 딱딱하고 자기가 원하지 않으면 지금처럼 표정을 찡그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의외로 친구는 많았다. 무뚝뚝하고 차갑지만, 알게 모르게 챙겨주는 마음씨가 넘쳐나는 겉바안촉남이었기 때문이다. 시크하고 날렵한 그의 인상은 몇몇 여학생의 연심을 불타오르게 만들곤 했다.


음료수로 수분 보충을 마친 하로와 초록은 힘차게 2층 계단을 올랐다. 불타는 금요일 클럽을 연상케 했던 1층과는 달리 2층은 마음 편히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곳에도 고인물존은 존재했다. 그곳이 바로, 권철이라 불리는 1 대 1 격투 형식 게임이 몰려 있는 곳이다. 

그곳에 주머니에 손을 꽃은채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무리가 있었다. 손 넣은 주머니 속에 동전이 가득하면서도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은 뉴비를 노리는 악질 유저였다. 그들은 게임하는 사람의 플레이 수준을 면밀히 감시하고, 이 사람이 완벽한 뉴비라 판단하면 곧바로 반대편으로 가 게임을 잇는 잔인한 종족이다. 게임이 시작되면 고인물은 허접한 공격 패턴을 보이는 뉴비를 비웃으며 일부로 HP를 내어주는 기행적인 모습을 선보인다. 

이윽고 고인물의 HP가 실만큼 남았을 때, 상대방은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취해 어설픈 공격에 나선다.그  순간 판도는 뒤집힌다. 삽십 초간 제대로 된 대응조차 못하고 있던 캐릭터가 불현듯 모든 공격을 흘리고, 십여 초 만에 FULL HP 캐릭터를 박살 내는 것이다. 반항조차 못하고 패배한 청정수 유저는 다음 라운드엔 반드시 이기겠노라며 이를 악물고 동전을 넣는다. 하지만 뉴비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히 수 천, 수만 시간 동안 고이고 고여 만들어진 극악의 콤보란, 뉴비가 당해낼 수 없는 자연재해와 같은 것이었다.

스틱을 잡고 있던 작은 꼬마가 울상이 되어 게임기에서 떠났다. 주변을 서성이던 고인물들은 씩 웃으며 조용히 저들의 승리를 자축했다. 고인물 무리가 승리를 자축하는 사이 하로와 초록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록은 망설임 없이 비어 있는 자리에 착석해 동전을 넣었다. 하로는 동전을 넣지 않고 팔을 괸 체 초록의 게임 화면에 눈을 뒀다. 이 모습을 본 고인물들은 극도의 분노에 휩싸였다.


“ 감히 이 신성한 곳에 커플이 들어와? ”


연애와는 영 인연 없는 그들에게 커플로 보이는 초록과 하로가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 야 끝판 못 깨면 디저트도 먹는다? ”

“ 깨면 어쩔 건데? ”

“ 그럼 내가 사고. ”

“ 제발 그러길 빈다. ”


아쉽게도, 이들의 대화는 고인물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뇌는 이미 분노로 장악된 지 오래였다. 초록의 캐릭터를 박살 내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움직인 한 남자가 초록이 앉은 반대편 게임기에 동전을 넣었다.


“ 오 뭐야? ”

“ 저쪽에서 걸었나 보지. ”

“ 이야, 인기 많네 김초록이. ”


초록은 재미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한 편 반대편 게임기에선 다섯 명의 남자가 돌돌 뭉쳐 게임 화면을 가리고 있었다. 상대방을 죽이라 외치는 그 모습은 사이비 종교 예배 현장을 방불케했다. 조이스틱을 부술 기세로 잡아 쥔 남자의 눈은 불길처럼 이글거렸다.

해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던 초록은 별 생각 없이 캐릭터를 골랐고, 반대편 남자는 이만 판 동안 동고동락해 온 캐릭터를 선택했다. 가볍게 손을 풀던 초록은 로딩 화면으로 넘어가자 시끌벅적해진 건너편 자리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렇게 소란스러운걸 보니 분명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모임이겠거니 싶었다. 고작 권철을 하는데 저렇게 호들갑 떠는 어른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평균 나이 스물셋 고인물 무리는 숨 쉬지 못한 채 게임 시작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호쾌한 목소리와 함께 게임이 시작됐고, 고인물 파티는 사십 초 만에 2라운드 퍼펙트게임이라는 전패를 맛봤다. 조이스틱을 잡고 있던 사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초췌해졌다. 생기라는 게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간 게임 물정 모르는 뉴비에게 해왔던 짓을 그대로 당하니 얼이 빠진 모양이다. 남자는 결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록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압도적인 결과에 놀란 고인물 무리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들은 패배 글씨가 적힌 화면을 뒤로하고 쓸쓸히 게임장에서 모습을 감췄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초록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게임을 진행했다. 옆에서 가만 지켜보는 하로는 초록이 이길 때마다 물개 박수를 쳤다. 하로도 초록 못지 않게 게임을 좋아하지만, 그녀는 1 대 1 형식 격투 게임만은 항상 기피했다. 그게 궁금했던 초록이 넌지시 묻자 하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 다 좋은데 지면 상대방이랑 1 대 1 뜨고 싶어지더라고. ”


예상못한 살벌한 대답에 초록은 입을 다물고 열심히 스틱을 움직였다.

손쉽게 끝판 보스를 공략한 둘은 고인물 존에서 벗어났다. 둘은 나란히 걸어 다니며 오래간만에 여러 게임을 즐겼다. 견착법이 어려운 사격도 해보고, 극심한 현기증 유발 게임이라 불리는 VR 게임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총으로 좀비를 쏴 죽이는 1인칭 FPS 형식 게임도 즐겼다. 그 많은 게임 중 유일하게 클리어하지 못한 건 VR 게임뿐이었다. VR 게임 도중 어지러움을 느껴 중도 포기한 하로는 아직 세상에 익숙하지 않은 게임이라며 불평을 토했다. 어지럼증은 없지만 두통을 느낀 초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자파를 쐬느라 지친 둘은 게임센터 구석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피로를 풀었다. 둘은 일정 거리를 두고 앉은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매일같이 보는 둘은 얼굴을 볼 때마다 말할 화제가 끊기질 않았다.


“ 좀 있으면 봄 방학도 끝이구나. ”

“ 그러게. 죽고 싶다. ”

“ 동감이야. ”


평생 갈 거라 생각했던 봄방학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방학 동안 감히 사람의 일과라 부르기 힘들 정도로 나태하고 느긋한 삶을 추구해왔던 둘은 격정적인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이제 곧 이러한 느긋함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게 새삼 충격적이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파이프로 엮인 천장을 바라봤다. 


쿵!쿵!

3층 플로어 너머에서 상당히 수상한 소음이 들렸다. 서로를 마주본 하로와 초록은 말한마디조차 나누지 않고 동시에 일어나 계단을 올랐다. 

3층은 유난히 사람이 적은 곳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올라오기 힘들고, 있는 게임이라곤 초심자용 리듬게임과 인형 뽑기 기계, 철 지난 스티커 사진 기계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신체활동 능력이 특히 뛰어난 하로가 먼저 3층 플로어에 도착했다. 기묘한 소리의 방향은 유아용 리듬 게임 자리였다. 먼저 도착한 하로는 유리벽면에 배치된 게임 기계가 있는 곳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 ……! ”


하로는 숨을 멈췄다. 아니, 정확히는 숨이 멎은 것이다. 그녀는 초심자용 발판 게임기에서 천사와 조우했다.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은색 머리칼. 세상 모든 보석을 끌어다 모은듯한 하늘색 눈동자. 가련하고, 유려하고, 수려한 소녀 나기가 열심히 발판을 밟고 있었다. 곡 난이도가 최하임에도 불구하고 나기는 고전하고 있었다. 이런 부류의 게임을 해보지 못한 건지 한 발로 밟도록 설계된 발판을 두 발로 도장을 찍듯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그 모습을 마주한 하로는 입을 떡 벌렸다. 저도 모르게 벌려진 입을 닫기 위해 손바닥으로 열심히 턱을 끌어당겼다. 설마, 그녀를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무엇을 숨기랴. 하로와 초록은 나기와 같은 마루 고등학교 학생이다. 심지어 1학년 땐 나기와 같은 반 동급생 출신이었다. 동급생이라곤 하나, 나기와 말을 나눈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귀엽고 어여쁜 사람을 사모하던 하로는 감히 나기에게 접근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감히 곁눈질로 흘겨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간, 심장박동수가 염라대왕과 하이파이브를 할 수준까지 솟아오를 것 같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요정처럼 발판 위를 뛰어다니는 나기를 목격한 하로는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절대로 눈을 떼지 않았다. 죽더라 한들, 놓쳐서는 안 될 장면이었다.


 두 발로 뛰어다녀도 하나도 맞지 않는 타일을 바라보며 볼을 부풀린 나기의 모습은 각성제보다 더한 효과를 불러왔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하로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마디 사이사이로 거친 숨결이 새어 나왔다. 뒤늦게 하로를 따라잡은 초록은 먼저 옆자리 소꿉친구의 상태를 살폈다. 평소에도 정상적이진 않았지만, 지금은 특히나 비정상적인 상태였다. 도대체 누가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인가 싶어 고개를 돌린 곳에 마루 고등학교의 우상이 가련한 탭댄스를 추고 있었다. 


“ 오우 마이갓…! ”

“ ……? ”


하로와 초록이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는 사이 개구리 모자를 뒤집어쓴 여자아이가 둘 사이를 몸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어디서 구해온 건지 모를 헤드 고글을 이마까지 벗어 올린 그녀는 개구리처럼 동그런 눈으로 나기를 관찰했다. 그녀의 새카만 동공이 수초마다 커졌다 작아지다를 반복했다.


“ 이것은 역사가 높이 평가하겠군! ”


의미 모를 감탄사를 뱉은 소녀는 땅바닥에 앉아 개구리 자세를 잡았다. 그러고는 폴짝폴짝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어떠한 원리로 저렇게 높이 뛰어오르는 건지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것은 후일담이지만, 계단을 뛰어내려간 개구리 소녀의 정체가 바로 괴짜 극악 난이도 비트메이커 DJ 디디였다. 이 후일담은 이이상 깊이 알 필요가 없다.

개구리 소녀에게 잠시 시선을 팔린 사이 어느새 게임이 끝났다. 하로는 나기의 모습을 일초라도 더 새겼어야 했다며 마음속으로 깊이 후회했다. 게임이 끝나자 나기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하로는 머릿속에서 저 땀을 자신이 직접 닦아주고 싶다는 욕망이 머릿속에서 날뛰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녀는 나기와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다. 수줍어 제대로 인사조차 나누어 본 적 없는 마당에 다짜고짜 소매로 땀을 닦아줬다간,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나기는 게임기 뒤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은 금색 머리 여성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그녀는 소탈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 생각보다 어렵네요. ”

“ 그치? ”

“ 으음…나름 달리기는 잘하는데 왜 못하는 걸까요? ”

“ 이건 달리기가 아니라 게임이잖아. 네가 게임을 못 하는 것뿐이야. ”

“ 맞는 말이지만, 그렇게 들으니까 분하네요. ”


정겹게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는 둘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물론, 하로의 시선 한정이었다. 하로는 편하게 말을 주고받는 금색 머리칼의 주인공 니엘이 부러웠다. 쏟아낼 수 있다면야 피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나기와 니엘은 짐을 챙겨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나기가 계단으로 내려가기 위해 사뿐히 등을 돌린 순간, 하로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나기는 수초 간 말없이 눈을 껌뻑였다. 그 고귀한 모습에 하로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 으윽…어떡해! 나 죽으려나 봐! ”

“ 제발 죽어. ”


짧고 빠른 스트레이트 펀치가 초록의 명치에 적중했다. 다짜고짜 급소를 가격당한 초록은 아무런 신음조차 뱉지 못한 체 자리에서 꼬꾸라졌다. 이윽고, 나기와 니엘이 가만히 서 있는 하로를 향해 다가왔다.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다가온 것 뿐, 하로에게 어떠한 용무가 있는 게 아니었다. 슬프도록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하로는 알면서도 괜한 기대심을 품었다.


‘ 그래도 같은 반이었는데 인사를 건네면 받아주지 않을까? ’


하로는 나기와 니엘이 자신을 지나쳐 가기 전까지 손을 올릴지 말지 이백 번을 넘게 고민했다. 하지만 현실은 혹독했다. 나기는 하로의 용기가 인사를 만들어 낼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그녀를 지나쳐 갔다. 하로는 쓰게 웃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이게 당연한 일이지. 애초에 말도 못 걸어봤는데 아는척해 줄 리 없잖아. 그 사실을 알면서도 울컥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하로는 다음 학기부터는 나기에게 꼭 인사하자며 붉어진 눈시울을 소매로 비볐다. 그 짤막한 순간이었다.


“ 학교에서 봬요, 하로 씨. ”

“ ……! ”


이때 하로의 몸놀림은 빛의 속도를 아득히 넘어섰다. 하로는 등 뒤에서 들린 인사말에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뺨을 옅게 물들인 나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감격한 하로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열심히 흔들었다. 아쉽게도 감격에 겨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나기는 자신의 인사에 두 팔 벌려 호응해준 하로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나기의 모습이 눈 밖으로 사라지자 하로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게 꿈인가 싶었던 하로는 자신의 볼을 꼬집으려다 초록의 뺨을 꼬집었다. 


“ 아악…!! ”


죽음의 강에서 일하는 뱃사공과 이런저런 회포를 주고받던 초록이 되살아났다.


“ 뭐야, 여기 어디야? ”


이승으로 돌아와 어리둥절한 초록의 옆에서 하로는 다짐했다. 내 기필코, 다음 학기에는 나기와 둘도 없는 짱친이 되어 보이겠다고. 하로는 진심 어린 다짐과 함께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는 갓 태어난 새끼 밤비처럼 빌빌거리며 일어난 초록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해맑게 미소 지었다.


“ 오늘은 기쁜 날이야 초록아! ”


아직 정신이 혼미했던 초록은 고개를 도리저었다. 그는 쓰고 있던 캡모자가 바닥에 떨어진 것도 모른채 어벙하게 대답했다.


“ 어? 그랬냐? ”

“ 응! 이제 코스 요리 먹으러 가자! “


갓 태어난 새끼 초록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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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들어가. 주차비 계산하고 올게. ”

“ 알겠어요. ”


니엘은 나기가 미리 세워둔 차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주차 경비실로 뛰어갔다. 조수석에 탄 나기는 조심스레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까 건넨 인사가 거절 받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하로 못지않게 긴장했던 그녀였다. 어색하게 웃으며 받아주기만 해도 좋았는데, 그렇게 열띤 반응을 보여준 건 하로가 처음이었다. 꼭 친한 친구 같았다며 만족스럽게 웃는 나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뉘엿뉘엿 저가는 노을빛을 바라보며 나기는 다음 학기에도 하로와 같은 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니엘과 함께 집에 돌아온 나기는 기나긴 방학 중 오늘이 가장 의미 있는 하루였다며 일기까지 쓰는 갸륵함을 보였다.

그렇게 전국 고교생의 봄방학이 서서히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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