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SECOND CONFESSION



창섭을 내려준 성재는 다시 2구역 10동, 연구단지로 향했다. 어둠이 내려앉아, 아무도 없는 조용한 도시를 지나, 교대를 마친 새로운 헌터들을 지나, 한번 밖에 와보지 않았지만 익숙한 병원 복도를 지나, 아주 조심히 민혁이 잠들어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 여전히 잠들어 누워있는 민혁 옆에, 의자에 소리 없이 천천히 앉았다. 



그는 많이 수척해 보였다. 앙상해진 손목과 눈빛에 드리워진 다크서클. 잠이 든 모습이 꼭 시체같다는 생각마저 들만큼 그는 고통의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예전처럼 그의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깰까 망설이는 성재의 손이 허공에 머물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성재는 두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그가 깨어나기를, 바보같았던 자신을 용서해 주기를, 그리고 다시 한번 더 나의 고백을 받아 주기를.



커튼 틈 사이로 햇살이 조금씩 스며들어 왔다. 밤새 민혁의 곁을 지키던 성재가 햇빛에 고개를 들어 햇살에 비친 민혁의 얼굴을 바라봤다. 처음으로 우리 둘이 맞는 아침이네, 이렇게 멀리 돌아서 맞는 첫 아침. 어쩌면 처음부터 우리 사이는 조각 나있었는지도 몰라, 너의 마음을 얻으려 하지 않고 강제로 내 마음을 우겨 넣기만 했으니. 그래서 어쩌면 내가 벌을 받는걸지도, 네 사랑을 다시는 얻지 못할지도 몰라. 민혁아, 내게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을래? 성재는 시간을 한번 확인 하고는 민혁의 손등에 가만히 입을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성재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 입고는 15층 식당으로 향했다. 11시에 왕위 계승식이 있기전 모든 도미너스들과 왕족이 모여 함께 아침 식사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에 민혁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지만, 성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기계적으로 해내는 것에 익숙해져있었다. 



식당에 들어서자 거대한 연회장으로 세팅 된 테이블과 식탁들 사이로 삼삼오오 여러 위원들과 후계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성재가 아버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윽고 일훈과 국왕이 화려한 제복을 입고 식당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우리 왕국이 오랫동안 강건하게 지켜질 수 있도록 함께 해주신 위원 여러분께 감사를 표하며, 앞으로 우리 일훈이가 국왕이 되었을때 여기계신 위원님들과 각 자제분들이 많이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식사 하시죠” 



국왕의 인사와 함께 위원들은 각자 지정된 자리에 앉아, 내어오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모두 새로 왕이 될 일훈에 대한 칭찬과 격려, 어쩌면 아부와 같은 말들이 오갔다. 비로소 내가 왕이 된다, 모든 것은 내것이 된다. 일훈의 기분은 들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도, 여러 도미너스 후계자들이 일훈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한때 모두 친구처럼 지내던 형과 동생들이었지만, 이제는 일훈이 위에 있는 듯한 우월감을 가지게 했다. 허나, 성재만은 일훈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식사가 끝나자 마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향했다. 



우욱… 성재는 화장실에서 아침에 먹은 것들을 게워냈다. 지난 몇일 간 입맛이 없어 음식을 잘 먹지 않다가 갑자기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자, 몸에서 받지 않는 듯 속이 울렁거렸다. 성재가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입가를 닦고 있을때, 일훈이 화장실로 들어왔다. 



“너는 왜 인사 안하냐”

“시비걸지 말고 꺼져”

“내가 왕이 되면 이제 그따위 말투 쓰지도 못할텐데, 그래 지금 많이 써둬라”



성재는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일훈을 지나쳐 화장실 문을 나가려는 찰나 였다.



“너 이제 민혁이 안 만나나봐?”



성재는 순간 자리에 멈춰 섰다가 화를 삼키며 다시 한 걸음을 뗐다.



“왜 나랑 해서 더럽게 느껴져?”



성재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일훈을 향해 돌아섰다. 



“가지기 싫으면 나 줘”

“이민혁이 물건이야? 니가 가지고 싶다고 가지게?”

“강제로 하면 되지, 그날 밤 처럼”

“뭐?”

“너 아직도 모르는 구나? 어떤 맛인지… 내가 이민혁-”



퍽. 일훈의 말을 듣고 성재는 주체할수 없는 화를 다해 주먹으로 일훈의 얼굴을 가격했다. 일훈을 향해 끓어오르는 분노와 자신이 구하지 못한 민혁에 대한 미안함으로. 일훈은 피할 생각도 없이, 눈을 감은채 성재가 때리는 그대로 다 맞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 그리고 미처 빌지 못한 용서. 동시에 그리워 지는 그의 입술과 얼굴. 지난 며칠 잠도 못 이룰 만큼 민혁을 생각한 자신이 미워서, 일훈은 누군가에게 혼나고 싶었다. 혼자만의 죄책감을 토해내고 싶었다. 어쩌면 그래서 성재에게 차갑게 말을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입안에서 싸리한 피맛이 느껴졌다. 일훈은 침과 함께 섞인 피를 삼켜 넘기려했지만, 부어오른 뺨과 터진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너 같은 새끼가 왕이 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성재는 주먹에 묻은 피를 개의치 않는 다는 듯이 하얀 양복 위에 쓱쓱 닦고는 화장실을 나왔다. 민혁이… 우리 민혁이를 만나러 가야겠다. 내가 미안하다고, 내가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용서해달라고 말하러 가야겠어.



*



왕위 계승식이고 뭐고, 성재는 뒤돌아 보지도 않고 병원을 향했다. 얼른 그를 다시 만나고 싶은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천천히 병실 문을 열자 민혁은 깨어 있었다. 



“성… 재야… 어떻게…”

“일어났어?”

“니가 데려온 거구나. 그럼 봤겠네, 우리집도 내 비밀도”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어. 나도 너한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으니까”

“…………”

“하지만 중요한건 너와 나야, 그들을 대신해 그들의 고통까지 안고 살아갈 필요는 없어”



민혁이 고개를 들어 성재를 바라봤다.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지만, 늘 보여주던 장난기 넘치던 성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때 보다 진지했고, 햇살을 받아 빛나는 그의 얼굴은 어느때 보다 아름다웠다. 



“미안해. 너의 마음을 묻지도 않고, 계속 내 마음만 강요했어. 네 진심이 궁금해”

“내… 진심…”



성재는 민혁과 바라보며 그가 생각을 다듬고 말해주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민혁은 천천히 자신의 몸을 침대에서 일으켰다. 성재가 다가와 베개를 들어 등받침으로 올려주었다. 민혁이 한참이나 성재 눈을 마주치고 바라봤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그럼, 기억나지”

“그때 나는 죽고 싶었어. 사는게 싫었으니까. 근데 어느날 부터 나타나 멀리서 나를 계속 쳐다보는 너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더라. 네 덕분에 1년을 더 살게 됐어. 그것도 내 생에 최고로 행복하게. 그리고 오늘 또 네가 나를 살렸네… 너와 만나는 내내, 나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건지 고민했어. 우연한 순간에, 정말 죽기보다 끔찍했던 순간에… 깨달았어.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한다는 걸”



민혁이 손을 뻗어 성재의 손을 잡아왔다. 성재가 곧 눈물이 흐를 것 같은 두눈으로 민혁을 바라봤다.



“나도 네가 없는 지난 며칠, 고민했어.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저 소유하고 싶었는지”

“……………”

“그리고 너를 다시 본 순간 깨달았어. 지켜주고 싶던 마음도, 너를 웃게해주고 싶던 마음도, 내 옆에 늘 두고 싶었던 마음도 다 사랑이라는 걸”

“……………”

“니가 잠들어 있는 동안 계속 생각했어. 네가 날 사랑한다면, 네가 나를 버리지 않는 다면, 나는 내 모든 것을 버리고 너를 선택할거라고. 다시 시작하자, 대신 이제는 도미너스와 플렙이 아닌, 육성재와 이민혁으로”



민혁이 성재의 말을 다 듣고 링겔 바늘이 꽂혀있는 자신의 오른쪽 팔목과 아직도 상처로 가득한 손목을 바라봤다. 나는 왜 죽으려 했을까… 너의 차가운 뒷모습을 보고,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없는 너를 기다리다가, 일훈에게 당한 것 보다 더 고통스러운 수치스러움을 껴안고, 용기내 건 전화에 받지 않는 너를 알고, 내 삶이 드디어 끝났다는 것을 느꼈어. 네가 내 삶에 없어서… 나도 없었어.



“미안해, 지켜주지 못해서”

“성재야”

“……”

“사랑해”



처음으로 민혁이 먼저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어렵지도 않은 세글자를 먼저 입에서 뱉어내기가 너무 오래걸렸네. 이렇게 설레는 말인걸 알았더라면, 진작에 많이 해둘걸. 성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민혁에게 다가와 살포시 입술을 맞추었다. 서로의 손이 포개진 채로, 입술이 맞닿은 채로, 민혁은 처음으로 성재의 키스에 자유롭게 설렐수 있었다. 싫어해야 한다고, 밀어내야 한다고만 여겨왔던 그의 말과 스킨십들이 드디어 심장을 울리고 있었다. 



********

이번 화는 완전 진지한 내용이라 '두번째 고백'이라는 귀여운 노래를 부제로 달아도 되나 싶을정도. 


이제 후반이라 떡밥 회수를 다 해야하는데, 무슨 떡밥을 뿌려놓았는지 기억도 안나요.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한번 끝내봅시다. 


오늘도 1업로드. 감사합니다. 

LAMEL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