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대로라면 회사에 출근할 시간이었지만 여주는 오늘 일정이 따로 있었다. 패션 브랜드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축하를 하기 위해 다른 기업들도 다 참석하는 자리였다. 사실 A 전자 대표인 지환이 참석해야 되는 게 맞았지만 지환은 이런 자리를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머리가 아프다나 뭐라나. 이런 자리에서 다른 그룹과 콜라보도 이루어지고 투자도 받는 건데. 그래서 이런 행사 자리들은 그런 점에 능한 여주가 대신 참석했다. 오늘도 지환 대신 참석해야 하는 공식적인 자리라 샵에 들러서 준비를 하고 에스코트를 받으며 차에 올라탔다.





행사가 열리는 현장 앞에는 이미 카메라를 들고 있는 기자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 여주는 차 실장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을 주라는 말을 하고 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여주를 향해 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띤 여주가 기자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며 행사장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많은 회사 대표들이 여주를 보며 인사를 해왔다. 웃으면서 서로의 안부를 주고 받다가 재민의 형인 C 백화점 대표가 행사장에 들어왔다.





재호를 발견한 여주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걸음을 옮겼다. 대표님! 여주가 밝은 목소리로 부르자 재호는 여주를 보고 반갑다는 표정을 하며 손을 뻗었다. 여주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고 재호가 오랜만이라며 웃으면서 얘기했다. 여주는 더 예뻐졌네. 재호의 말에 여주가 가볍게 웃으면서 대표님도 더 멋져지셨다고 화답했다. 회장님은 잘 지내시죠? 응. 잘 지내고 계셔. 오늘도 여주가 온 거구나. 알잖아요. 저희 대표님은 이런 자리 참석 잘 안 하시는 거. 여주의 대답에 재호가 알고 있다는 듯이 웃는다. 그리고 재호 뒤로 재민이 다가왔다. 여주는 재민과 시선이 맞추고 눈짓으로 인사를 했다. 재호는 재민을 데리고 다른 기업 대표들과 인사를 하다가 행사가 시작됐고 여주는 재민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대표님 뒤로 너 보이길래 깜짝 놀랐네. 예전에는 이런 자리 피해 다녔잖아."


"아, 이제 이런 자리도 나와야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 알겠지."


"응?"


"여주야. 나 호텔 물려받기로 했어."


"오, 회장님이 물려주신대?"





옛날에는 너 정신 차리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말라고 하셨잖아. 여주가 웃으면서 예전에 나 회장이 재민에게 했던 말을 꺼내자 재민이 웃었다.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봤으니 이제 슬슬 정신 차릴 때도 됐지. 재민의 대답에 여주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웬일이야. 나재민. 유학 다녀오면서 무슨 일 있었어?"


"어렸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던 거고."


"갑자기 이렇게 생각이 바뀐다고?"


"그냥 내가 세상의 이치를 너무 늦게 깨달은 것 뿐이지."





뭐야. 내가 아는 나재민 아닌 것 같아. 낯설어. 여주의 말에 재민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서 피식 웃었다. 낯설어 할 필요 없어. 나 네가 알고 있는 나재민 맞아. 나지막하게 얘기한 재민이 여주를 보고 입꼬리를 올려 꾹 웃어 보였다가 고개를 돌려 앞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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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혁은 점심을 먹고 회사로 돌아와 양치를 하고 사무실로 들어와 자리로 향하는데 한 팀원이 우와! 하며 감탄사를 내뱉더니 다들 이거 좀 봐봐요! 하며 소리쳤다. 그 팀원의 말에 삼삼오오 흩어져 있던 다른 팀원들이 모여 모니터 화면을 쳐다봤다. 뭐길래 그러지 동혁도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가자 모니터 화면에 띄워져 있는 기사.





"어, 우리 전무님이시네?"






'A 그룹 둘째 김여주. 축하해 주러 왔어요.'



A 그룹 둘째 김여주가 W 기업 창립 30주년을 축하해주기 위해 행사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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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기업 창립기념식 참석하는 김여주 전무이사'



A 전자 김여주 전무이사가 xx일 W기업 창립기념식에 참석하여 기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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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행사 자리였던지라 인터넷에 여주의 기사가 올라왔다. 와- 솔직히 기사 사진 막 찍는데 전무님은 너무 잘 나오셨네. 그러니까요. 근데 실물을 다 담지 못하네. 우리 전무님 실제로 보면 아우라 넘치는데. 팀원들은 하나같이 여주 기사 사진을 보며 감탄을 하기 바빴다. 뒤에서 같이 보던 동혁도 팀원들의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사진보다 실물이 더 예쁜데.







그러다 동혁은 띄워져있는 사진 중 구석에 보이는 인물에 살짝 눈을 찌푸렸다. 어, 저 사람. 며칠 전에 전무실에서 봤던 사람이었다. 그날 전무실에서 나올 때 들린 여주와 재민의 대화 내용에 동혁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4년 동안 여주가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동혁은 재민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






예약한 한정식집에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여주가 상대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뜻한 물을 마시는 여주의 입가에 미소가 은은하게 걸려있었다. 발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면 여주가 활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님!"





여주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C 그룹 회장인 재민의 아버지였다. 나 회장은 어렸을 때부터 여주를 볼 때마다 똘똘하고 총명한 아이라며 여주의 아버지에게 저런 딸을 둬서 부럽다고 할 정도로 여주를 예뻐했다. 며칠 뒤가 나 회장의 생신이어서 여주가 미리 선물을 보냈었는데 바로 나 회장에게 연락이 왔었다. 보낸 선물 잘 받았다고 여주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오늘 약속을 잡았다. 여주의 아버지랑 식사할 때와는 다르게 즐겁게 웃으면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재민이 들어왔다. 재민이 오는 줄은 몰랐던 여주가 눈을 껌뻑이며 쳐다보면 나 회장이 웃으면서 자기가 불렀다고 얘기해왔다.





"아들이란 놈은 하나뿐인 아비 생일인데 아무것도 없고."


"가질만한 거 다 가지신 분이 뭘 더 바라세요."


"여주는 나 몸 챙기라고 무려 홍삼을 보냈는데."


"여주야. 그런 거 네가 먹어. 아버지 우리보다 몸에 좋은 거 더 많이 드시니까."





여주야. 이놈 봐라. 이런 놈을 내가 아들이라고. 한마디를 안 지는 재민을 보며 나 회장이 혀를 찼다. 재민이 너 회장님한테 왜 그래.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여주가 웃으면서 얘기했다. 화기애애한 식사가 끝나고 사업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다 나 회장이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주는 더 멋있어지는구나. "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재민이가 우리 여주의 반이라도 닮았으면 했는데..."





나 회장의 말에 여주가 시선을 내려 살짝 웃었다. 재민이도 생각이 많이 달라졌던데요? 놀랐어요 저. 여주가 재민을 슬쩍 한번 쳐다보며 얘기하자 눈이 마주쳤고 둘은 동시에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쯧쯧, 재민이 쟤는 아직 멀었어. 더 배워야 해. 혀를 차며 얘기하던 나 회장이 여주를 똑바로 쳐다보며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그나마 여주가 재민이 옆에 있으니까 그나마 내가 안심이 되는구나."


"네?"


"여주가 저 철 없는 놈 옆에서 좀 잘 돌봐줘라."





이야기를 마친 나 회장이 먼저 일어나 여주를 한번 토닥여주고서는 룸에서 나갔다. 어휴,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여주 너밖에 모른다니까. 나 회장이 나간 후 재민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웃으며 말해왔다. 그나저나 회장님 왜 마지막인 것처럼 말씀하시지? 여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얘기했다. 마지막인 것보다는 이제 좀 쉬고 싶으신 거지. 재민은 여주를 한번 쳐다보고서는 다시 문 쪽을 바라봤다.





"형은 언제나처럼 잘 하고 있고 이제 나만 호텔을 잘 운영하면 되거든."


"응?"


"오늘부터 대표이사 바뀌었어."


"...와, 진짜? 이렇게 바로 물려주셨다고?"





잠깐만, 나는 전무인데 그럼 너는 이제 대표야? 나재민 대표? 여주의 말에 재민이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여주는 그제서야 나 회장이 한 말이 이해가 됐다. 나 회장 눈에는 아직 재민이가 못 미더웠기 때문에 여주에게 그런 부탁 아닌 부탁을 한 거였다. 한동안 바쁘겠네? 여주의 말에 재민이 눈동자를 굴리고서 잠시 무언갈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내일 뉴스에 공식 보도도 될 거고 좀 많이 정신없을 것 같다며 대답해왔다.





"그래도 너 심심하게 할 일은 없을 거야."


"뭐래. 나재민 너 아니어도 저는 심심할 틈이 없어요."


"우리 여주는 조금만 솔직해지면 좋을 텐데-"







대체 언제쯤이면 솔직하게 말해주려나? 재민이 웃으며 피식 웃으며 여주를 쳐다봤다. 나보다 더 솔직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여주가 자기는 거짓말 같은 거 안 한다며 당차게 대답했다. 그래. 내가 다 알아들으니까 괜찮아. 우리도 이제 일어날까? 장난스럽게 눈썹을 들썩이며 얘기하는 재민을 보며 여주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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