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다만 바라는 것은,

그대가 오래도록 살아 천리 밖에서나마

저 고운 달을 함께 누리는 것이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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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이젠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나으리의 출신은 제게 중요하지 않아요.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설이 호흡을 가다듬고는 말을 꺼냈다. 아침부터 긴히 드릴 말씀이 있노라 제 부모를 모아놓고 한다는 소리가, 다시 혼례를 허락해달라는 말이었다. 제 낭군 될 사람의 출신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며.


"어머님 아버님께서 아무리 반대하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이 혼례를 꼭 올려야 하겠습니다."

"설아. 다른 이도 많다. 너를 더 아껴줄 수 있는 자, 신분도 더 높은 자가 이 고려에는 많대도."

"저는 해원맥 나으리가 아니면 안됩니다."

"조 대감댁에서 혼담이 왔다. 알겠다 답했으니, 그런 줄 알고 있거라. 좋은 사람이다."

"아버님, 혼담이야 물리면 되지 않습니까. 전 그분 뵌 적도 아직 없는 것을요. 도련님께서 좋으신 분이라는 것은 저잣거리에서 익히 들어 알고있지만은, 아니됩니다. 저는 해원맥 나으리가 아니면 절대 혼례는 올리지 않을 것입니다."


손사래를 치는 설을 지켜보던 덕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손으로 제 수염을 매만졌다. 덕문이 난처할때 흔히 보이는 습관이었다. 긍정의 뜻일까, 설이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덕문을 올려다 보았다.


" ...이미 늦었다."

"예?"

"해원맥은 북방으로 가게 될 것이다. 아주 오래가 되거나, 평생이 되겠지."


일말의 희망마저 무너졌다. 예? 아버님. 그게 대체 무슨. 설의 손이 애처로울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윤씨 부인이 설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쥐는 제 어미의 손을 제쳐내고 설이 일어나 제 아비 앞에 마주섰다.


"그게,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님! 그게 대체,"

"말한 그대로이다. 해원맥은 북방으로 가게 될 것이다. 오늘 폐하의 명이 있었다. 내 친히 부탁을 드렸지."

"지금, 저를 겁주시려는 것이라면 그만 두시지요. 농이 지나치십니다."


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제 아비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농으로 보이더냐. 참이다. 폐하께서 그 용맹함을 높이 사, 변방의 오랑캐들을 막기 위해,"
"아버님!"


설의 새된 소리가 덕문의 말을 막아섰다. 생전 큰소리 한 번 낸 적 없던 설이었다.


"사내 하나 때문에 이젠 제 아비에게까지 이리 역정을 내는구나. 금방 잊을 것이다. 그리 될 것이다."

"못나셨습니다. 가혹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으십니까? 단지 저와 혼례를 올리려 했다는 이유로, 대장군의 아들이나 그 본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북방까지 쫓겨난다는 것이?"

"그러게 진작 그만두었어야지. 안된다 그리 일렀는데도 끝까지 고집한 것은 설이, 너다. 무튼, 그리 알고 있거라. 가서 작별인사 쯤은 내 하게 해주마."

" ...아버님!"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덕문이 매정하게 방을 나섰다. 큰 충격에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설에 윤씨 부인은 다급하게 설주를 불렀고, 곧 이어 의원들이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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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감 댁 아가씨가 혼절했대. 왜? 글쎄, 제 아비가 그리도 반대하는 혼인을 하려고 하다가. 왜, 그 대장군네 둘째 아들 있잖아. 대장군네 아들을 윤 대감은 왜 그리 반대를 한대? 아니, 글쎄, 사실은 그 둘째 아들이 주워온 자식이래. 그것도 오랑캐래! 어머머, 세상에 세상에. 그리 감쪽같이 속여놓고 감히 윤 대감 댁 아씨랑 혼례를 올리려고 해? 아씨는 뭐, 알고 만났겠어? 기구한 운명인게지. 북방으로 쫓겨나다시피 한다던데. 세상에, 여자 하나 마음에 품었다가 이게 무슨 일이래. 안 됐다. 안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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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들었으니 알 테지. 폐하의 명이시니 지체말고 빠른 시일내로 떠나거라."

" ... 형님."

"그러게 어디 감히 넘보아서는 안 될 것을 넘보아서. 내 늘 네 분수를 알라고 했지."


강림이 해원맥을 매정하게 지나쳤다. 그 넓은 기와집 마당에는 해원맥 홀로 무릎을 꿇은 채 몇 시간을 일어날 줄을 몰랐다. 


"나으리, 나으리... 고뿔에 드시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대체!"

"그래... 고뿔. 우리 설이가 그리 고뿔에 들지 말라 하였는데."


해원맥이 허탈하게 웃으며 털보에게 그냥 가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어보였다. 




"털보야. 참으로 웃기지. 난 이리 대장군의 아들인데, 그 출신때문에 연모하는 사람과 혼례조차도 올리지못하고, 북방으로 쫓겨가는 것이."

"나으리이... ..."

"나보고 그리도 아프지 말라던 아이가 혼절을 했다더구나. 너도 들었으니 알겠지. 생전 아픈 적이 없다던 아이가 혼절을 하였으면. 혼절이라니."


해원맥이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 흐느꼈다. 눈을 덮은 손 아래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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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슬픔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매정하게도 태양은 밝았다. 해원맥이 말에 올라탔다.


"나으리, 정말 아씨 깨어나실 때까지 안 기다리시고 가시렵니까? 아씨께서 깨어나시면 얼마나 슬퍼하실지 제일 잘 아시오면서."

"설이가 깨어나면, 전해주라 한 서신은 잊지 않았지."


털보는 고개를 끄덕였고, 해원맥은 대답을 피했다. 깨어나는 것을 보고, 설의 눈을 보면 걸음을 뗄 수 없을 것, 역모를 일으켜서라도 함께하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해원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방법이 최선이라생각했다. 애써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눈이 오는 날이었다. 해원맥이 지나간 말 발자국 조차 금새 사라지는, 그렇게 눈이 오는 겨울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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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간다, 설아.

바라보는 것 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것을

감히 탐낸 내 죄이다. 자책하지 말거라.

그리움을 삼키는 법도 배워야 하느니,

이만 걸음 옮기마.

내 너 없는 곳에서조차 너를 그릴테니.

늘 미안한 일들 뿐이었다. 미안하다.

허나, 감히 연모했다.

그간 너와 내가 함께 꾸었던 꿈들은 모두 잊거라.

꿈이었다, 생각하고 잊으려무나.

부디 잘 지내주거라.


解怨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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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보가 설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기도 전에 깨어난 설이 한달음에 해원맥의 집으로 달려왔다. 강문직, 강씨 부인, 강림, 모두가 있었는데 해원맥만 없었다. 깨어나신지 얼마나 되었다고 여기서 또 혼절하시면 안된다며 서신을 쥐어준 털보가 꼭 돌아가서 읽어보시라 설을 달래 보냈다. 설이 그 길을 다시 달려 집에 돌아왔다. 뺨에 흐르던 따뜻한 눈물을 살을 째는 바람에 이미 말라붙은지 오래. 허겁지겁 방에 들어온 설이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펼쳤다. 애써 서신에 눈물이 떨어지게 하지 않으려 떨리는 손을 허공에 들고 읽어 내려갔다. 그렇다고 이리 작별인사를 할 새도 주지 않으시고 가면 어쩐단 말입니까. 설이 소리 없이 오열했다. 처마 밑에 달린 고드름에서도 물이 녹아 떨어져 내렸다. 눈물은 웅덩이가 되었고, 설을 잠식시켰다. 헤어나올 수 없는 슬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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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북방으로 쫓겨난 강 대감네 둘째 도련님 있잖아. 그 왜, 윤 대감네 아씨랑. 응, 으응. 글쎄, 군량미를 빼돌려서 오랑캐들한테 몰래 나누어 주고 있었다지 뭐야! 어머, 진짜? 피는 못 속인다고, 제 동족에게 주는게지. 우리 백성들의 식량이 다 그리 들어가는 것 아니오? 내 화딱지가 나서 살 수 있어야지. 위에선 아무 말 없대? 폐하께서도 아시고 단단히 노하셨나봐. 가만두지 않으시겠다 하시더라고. 그래서 대장군께서 가신다잖아. 아니, 그 강 대감 말고. 아드님. 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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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따라 햇볕이 따스했다. 간만에 해가 드는구나. 해원맥이 제 부하들과 주위를 살피곤 언덕 끝에 걸터앉았다. 사박사박, 눈 밟는 소리 조차 경쾌하게 들렸다. 저 멀리서 들려온 발소리는 이내 점점 커지더니, 해원맥의 뒤에서 멈추었다.


"무달이냐? 먼저 가 있거라. 나는 조금 더,"

" 무달이 아니고, 설 입니다."


해원맥이 흠칫했다. 반자동적으로 일어났다. 뒤를 돌아보기가 겁났다. 한동안을 등을 대고 서있었다. 뒤에서 한 발 내딛는 소리가 들리더니 부드러운 손이 제 손을 잡아 돌려놓았다.


"내가 이제 하다못해 백일몽이라도 꾸는게지."

"차라리 꿈이라면 낫겠지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해원맥이 제 눈 앞의 설을 끌어안았다. 설아, 미안하다... 이리 미안한 일들 뿐이구나... 해원맥이 같은 말 만을 반복했다. 미안하다.


"미안해 하셔야지요. 가신다 한들, 깨어나는 것도 안 보시고 떠나신단 말입니까.

"미안하구나. 늘 미안한 일들 뿐이다."

"되었습니다. 이제 이리 함께 있는 것을요."


한참을 끌어안고 있던 해원맥이 설의 어깨를 잡고는 의아한 듯 묻는다.


"헌데, 네 혼사는 어쩌고 이리 와있느냐. 윤 대감께선 아시고?"

"이 와중에 혼사 얘기는 또 어찌 들으셨답니까?"

"뭐, 그게.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어찌 하려고."

"도망쳐 왔습니다. 집에서야 제가 어디로 갔는지는 뻔히 알겠지요. 그럼에도 뒤를 쫓는 이가 없더군요. 뭐,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리 도망치면 조 대감 댁 아드님은 뭐가 되고."


설이 기가 차다는 듯 해원맥의 손을 놓아버린다. 그리 남의 혼사에 신경쓰실 바에야 본인 혼사에나 신경쓰시지 그러셨습니까. 이거 놓으십시오. 토라진 듯 제 손을 놓아버리는 설이 귀여워, 또 이리 찾아온 것이 기특하고 대견하여 실로 오랜만에 해원맥이 소리 내어 웃는다. 웃어요? 지금 웃겨? 설이 눈을 흘기더니 이내 마지못해 저도 웃어버린다. 얼마 만에 소리 내어 웃는 것인지. 해원맥이 떠나고 설은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 나날들이 설에겐 지옥과 같았다. 





제 세상의 해가 사라졌다며 식음을 전폐하던 설에게 윤씨 부인은 이리 말했었다.


'설아, 이 세상엔 해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비록 낮에는 보이지 않아도 달도 있는 법. 이제 해가 사라졌으니 달이 빛을 발할터인 것을.'


그럼 설은 울며 이리 답했다.


'해를 보았는데, 어찌 달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해원맥이 설의 어깨를 가만히 감쌌다. 그 사이 몸은 비쩍 말라있었다. 분명 끼니도 다 마다했을 터. 그간의 고생이 눈에 보이는 듯 하여 해원맥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들어가자. 날이 차다."

"여긴 진짜 춥네요. 그래서, 내가 이걸 가져왔죠."




이게 무엇이냐, 묻기도 전에 설이 제 목에 둘러져 있던 하얀 목도리를 풀어내 해원맥에게 둘러주었다. 하얀 삵의 털로 만든 것 입니다. 북방은 추우니, 이걸 하고 계시면 고뿔에도 끄떡 없으실 겝니다. 설이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리 좋은 것이라면 네가 해야지."


다시 풀어 건네주려는 해원맥의 손을 설이 꼭 붙잡았다. 나으리께 드리려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개까지 내저으며 한 사코 거절하는 설을 보며 해원맥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식사하실 시간이라며 해원맥을 부르러 나왔다가 설을 보고는 기절할 듯 놀라며 비명을 지르곤 웃으며 절을 하는 털보까지, 모두가 웃었다. 실로 오랜만에 북방에 웃음꽃이 가득한 날이라. 눈마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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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흰 색이 무색할 만큼 눈은 차가웠다. 아플만큼 하얀 눈 위로 피가 흘렀다. 


"설이는 살려 보내주십시오 형님. 불필요한 살생은, 대 죄입니다."

"가는 마당에 말도 많구나. 내 알아서 잘 모셔드릴테니."

"어찌 그리 저를 미워하,셨습니까."




입 안에 피가 차올라 해원맥의 말이 끊겼다. 벌어진 입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이미 피로 물든 하얀 옷,피에 젖어드는 눈까지. 해원맥의 주위는 온통 붉었다. 붉은 반경 너머에 설이 쓰러져 있었다. 손을 뻗어 보았지만 닿지 않았다.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일까, 앞이 흐렸다. 눈 앞이 핑 돌았고, 쓰러져 있는 설의 얼굴에 시선이 마주 닿았다. 한 번만, 제발.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강림이 다가와 해원맥의 등에 칼을 꽂아 넣었다. 윽. 피가 뿜어져 나왔다. 서서히 해원맥의 눈이 감겨왔다. 강림이 설에게로 다가가 설을 안아들어 말에 태웠다. 해원맥이 본 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저 아이는 어찌 될까. 밀쳐졌다고 혼절을 하는 저 약한 아이는 앞으로 어찌 살아갈까. 조 대감 댁으로 시집을 갈까. 어찌 살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으리!'


해맑게 웃는 설의 모습이 눈에 비쳤다. 제 목도리를 꼭 쥔 손에 힘이 풀렸다. 내 너를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이 세상, 네가 곁에 있어서 밤조차 낮보다 밝았다고. 참 다행이라고. 해원맥은 그리 생각했다. 


울지 말아라, 설아.



그날 해원맥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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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설, 윤 설, 윤 설. 


아이고~ 정신이 좀 들어요?

어어, 놀라지 말고. 

아가씨 오늘 처음 죽어봐서 그래.

그나저나, 되게 미인이시네. 

아아, 미인박명이 이래서, 아 예. 조용히 할게요.

저승사자 맞냐고요? 

그럼 저승사자가 혼자 다니지, 둘이 다녀, 셋이 다녀?

아, 뭐 그래. 원래 우리 대장이랑 덕춘이랑 같이 오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나 혼자 가라더라고.

어, 그래요. 아무튼. 갑시다. 귀인 윤 설. 귀인이야, 귀인! 

이거 이거, 보기 드물다? 특별한 거라고. 

아무튼, 갑시다 귀인 윤 설 씨. 

아, 내가 누구냐고?

내 소개가 늦었네.


일직 차사 해원맥 입니다.

보고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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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相思花). 꽃이 필 때 잎은 없고 잎이 자랄 때는 꽃이 피지 않으므로 서로 볼 수 없다 하여 상사화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이정재 2.5D위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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