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인심지척간 

(惟有人心咫尺間 ; 사람의 마음은 지척간에 있음에도)




오오쿠리카라는 복도의 모퉁이를 돌기 직전 갑자기 나타난 상대와 부딪힐 뻔 했다.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춰 사고를 모면한 그는 고개를 들었다. 아래위로 붉은 체육복을 입은 채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여 복도를 빠르게 가로질렀던 녀석은 이즈미노카미 카네사다였다.

“아, 미안.”

이즈미노카미는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된 칼이었으나, 그 이름은 이미 오오쿠리카라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가 우아함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카네사다의 칼이었기 때문임은 아니고,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와 비슷한 큰 키에 사내의 몸으로는 드물게도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지녔고 목청이 크다는 특징 때문에 어디에서나 쉽게 남의 이목을 집중시켰기 때문이었다.

요즘에는 이즈미노카미를 비롯하여 그렇게 처음 보는 칼이 혼마루에 부쩍 늘었다. 옛날 같았으면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은 채 한적하게 거닐 수 있었던 복도도 아침부터 북적거릴 정도로.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까닭은 드디어 혼마루에 주인이 바라던 대태도, 이시키리마루가 현현했기 때문이었다. 단도 이마노츠루기와 마찬가지로 산죠 도파에 속하여, 검으로 지낸 세월이 오래되었던 그는 그 시간이 무색하게도 처음에는 전투를 부담스러워하며 자신은 신검이니 기도가 더 적성에 맞는다는 푸념을 늘어놓았으나 실전에서 드러난 그 힘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바위를 베어낸다는 이름을 지닌 칼답게, 그의 검격은 환한 대낮의 평지에서 번쩍일 때마다 두셋의 적을 한 번에 베어내곤 했다. 그런 힘이 실리니 전투는 예전보다 훨씬 더 쉽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 전투에서 한창 새로운 칼을 발견했을 때에는 하루가 다르게 혼마루가 시끌벅적했다.재회를 반기며 회포를 푸는 술자리가 연일 반복되자 오죽했으면 재정을 걱정한 카센 카네사다가 엄격히 주방을 관리하겠다고 나서야 할 정도였다.

인적이 드물었던 2층에서도 이제는 자주 다른 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오오쿠리카라는 이즈미노카미를 지나치며, 어제 보았던 광경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간혹 어떤 칼들은 조용한 곳에서의 휴식을 위해 남아도는 방을 잠깐 휴게실처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기가 있었던 장소는, 창 너머로 푸른 바다가 모로 보일 뿐 아니라 좁은 노대가 달려 외출을 하지 않고도 수월하게 바깥 공기를 쐴 수 있게끔 조성된 방이었는데, 어제는 웬일로 아와타구치 형제들이 거기에 옹기종기 모여 바다를 내다보고 있었다.

야겐 토시로는 그 사이에서 먼 바다 깊은 곳에서 산다는 고래라는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바다에는 고래라는 물고기도 산대.”

“그건 무슨 물고기인데?”

“무츠노카미의 말로는 집채만큼 커다란 몸집을 가졌고 범종만한 심장으로 움직이는 물고기인데, 한 번 물 밑으로 가라앉으면 산 하나만큼의 깊이만큼 가라앉고 한 시간 넘게 헤엄을 칠 수 있다더군. 그리고 다시 바다로 올라왔을 때는 머리 쪽에 있는 숨구멍으로 분수를 뿜어내고, 그럴 때 주변으로 무지개가 인다나.”

무츠노카미는 바다를 좋아하는 만큼 그 방면의 지식에 대해 해박했다. 아마도 그와 잡담을 나누며 주워들었을 이야기를, 야겐은 정확히 기억하여 동생들에게 들려주었다. 놀라운 이야기였으나 신뢰할 수 있는 전달자가 출처였으니 그 진위를 쉽게 의심하기 힘들었다. 야겐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아와타구치의 다른 칼들은 저마다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신기하다….”

“우와. 그 정도면 물고기가 아니라, 요괴 아니야?”

“보, 보고 싶어요. 여기에서도 볼 수 있을까요?”

“일단 무지개를 찾아볼까?”

“배를 타고 멀리 나아간다면 혹시 모르지.”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네, 지금 무츠노카미 씨가 만들고 있으니까!”

새로운 동료의 합류로 각자에게는 조금씩 남는 시간이 생겼다. 휴식이나 취미에 매진하기 딱 좋을 정도의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그 여유를 어색해하던 칼은 서서히 새로운 분위기에 적응을 해나갔다. 하지만 오오쿠리카라는 아직도 이런 상황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이른 아침의 복도에서 남과 부딪힐 뻔 하거나 2층에서 뜻하지 않게 다른 칼의 수다를 엿듣게 되는 상황이.

그 와중 몇 시간 동안 얼굴을 맞대고 꼬박 함께 손을 놀려야 할 상대가 츠루마루 쿠니나가라는 점은 다행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어째야 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오오쿠리카라는 한 발 먼저 밭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부쩍 자라난 작물 사이에서 하얀 칼이 표표히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



인원이 늘어난 만큼, 주방도 활기가 넘쳤다. 다행히 입이 늘어났지만 그 만큼 식사 준비를 거들어주는 칼도 있었다. 쉬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오전부터 일찍 주방으로 나온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는 제 옆에서 능숙하게 프라이팬을 다루는 호리카와 쿠니히로를 보고 진심어린 감탄을 중얼거렸다.

“호리카와 군은 참 솜씨가 좋구나….”

최근 합류한 신선조의 칼 중, 유일한 협차였던 그는 작은 키에, 아직 약관의 나이를 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귀여운 얼굴을 지니고 있었지만 손끝은 누구보다도 야무졌다. 지금도 그는 요령 좋게 계란말이를 뚝딱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니야. 쇼쿠다이키리 씨가 잘 설명해준 덕인걸!”

게다가 친화력 또한 발군이었다. 같은 도파라곤 하나 이전에 서로 만났던 적이 없었던 야만바기리 쿠니히로와도 어렵지 않게 다가가며 서로를 형제처럼 여기자고 먼저 제의했던 것도 그였다. 원래도 즐거웠던 요리는 그런 동료와 함께하니 더더욱 즐거웠다.

“쇼쿠다이키리 씨에게 잘 배운 덕에, 카네 씨가 이 요리를 아주 좋아해. 항상 고마워.”

“고맙기는? 그런 소리는 내 쪽에서 해야지. 우리 쪽의 카라쨩과 츠루 씨도 호리카와 군의 솜씨에 혀를 내둘렀는걸.”

“하하,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고.”

모난 곳 없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호리카와는 도시락을 싸다 말고 그 미소가 함박웃음으로 바뀔만한 정보를 들려주었다.

“맞다. 쇼쿠다이키리 씨, 그 이야기 들었어?”

“무슨 이야기?”

“주인님이 조만간 혼마루의 방 배정을 다시 바꿀지도 모른다고 하셨대. 야스사다 군이 들려줬어.”

“저, 정말?”

호리카와는 같은 신선조의 칼이었던 야마토노카미 야스사다와 오랜 면식이 있는 만큼 친하기도 했다. 그런 사이에 전해진 이야기였으므로 충분히 신뢰할 만 했다. 쇼쿠다이키리는 이제야 올 것이 왔다 싶었다.

요즘 들어 늘어난 동료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남은 방을 사용해야 했다. 2층 건물의 저택에는 아직 빈 방이 적지 않게 남아있었지만 모두가 주어진 선택에 만족하진 못했다. 단순한 순서의 이유로 권리가 제한되는 것은 불공평한 것 같다고, 주인도 누누이 이야기하던 바였다.

“일단, 아와타구치 형제들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참여해야 할 것 같아.”

걸출한 도공 요시미츠의 손에서 탄생한 그들은 이곳에서 수가 제일 많았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형제 모두가 한 공간을 사용하기 원했던 그들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1층에서 가장 넓은 방을 배정받았고 앞으로도 그 환경이 달라질 일은 드물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 2층에서 지내지만, 카네 씨는 이번 기회에 1층에 방을 얻고 싶대. 그게 돌아다니기 더 편하니까. 그리고 키요미츠 군도. 바닷바람이 피부에 안 좋다나?”

“그렇구나….”

“쇼쿠다이키리 씨는? 혹시 특별히 원하는 방 있어?”

“으, 응.”

실은 진작 점찍어둔 곳이 있긴 했다. 2층 서편에 위치한 작은 노대가 마련된 방이었는데 경치도 좋았을 뿐더러 규모도 여럿이 쓰기 적당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장소는 두 번째 요건이었다. 첫 번째 요건은 자신이 원하는 동료와 방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현재 쇼쿠다이키리는 야마부시 쿠니히로와 함께 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역시 믿음직한 동료였고 이제껏 생활하며 불편한 점은 없었으나, 야마부시는 방을 옮길 기회가 주어진다면 야만바기리 쿠니히로와 함께 방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호리카와의 합류로 그들끼리의 관계가 새로이 정의되기 이전부터, 야마부시는 전부터 줄곧 다른 동료들과 쉽사리 어울리지 못하는 야만바기리가 신경 쓰인다고 종종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그 말을 서운히 여길 이유는 없었다. 쇼쿠다이키리 역시 함께 방을 사용하고 싶은 동료가 있었다. 그 상대는 오오쿠리카라와 츠루마루 쿠니나가였다. 하나는 일찍이 다테 가문에서 친구가 되었고, 다른 하나와는 다테 가문의 소속이었다는 공통점 덕에 여기서 새로이 친분을 쌓게 되었으니 그들과 함께 방을 사용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아마 셋이서 같은 방을 쓰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당당히 그 친분을 혼마루에 과시할 수 있으리라. 지금도 이런저런 인연을 내세워 서로를 보다 더 각별히 여기는 동료들은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쇼쿠다이키리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내심 그들이 부럽기도 했었다. 언젠가 혼마루에 찾아올 타이코가네 사다무네를 생각하면 더더욱 지금의 환경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 역시 끈끈한 다테의 결속력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싶었다.

하지만 과연 당사자들의 의향은 어떨 것인가. 쇼쿠다이키리는 쉽게 확신할 수 없었다. 어려움 없이 동료들의 의사를 들려주었던 호리카와와 달리 갑자기 말수가 적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오오쿠리카라는 혼자 독방을 사용하는 지금 생활에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 뻔했고, 오랜 검생만큼 두루두루 인맥도 넓었던 츠루마루에게는 함께 방을 사용하자는 제안이 빗발칠 것이 뻔했다. 그 숱한 제안 사이에서 과연 자신은 승낙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인지. 쇼쿠다이키리는 막연한 불확실함 속에서 젓가락만 재게 놀렸다.



*



부족했던 자신감만큼 채워진 도시락은 그야말로 휘황찬란했다. 잠깐의 허기를 달래고 말 새참으로 가져가기엔 과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으나 쇼쿠다이키리는 고민 끝에 양 손으로 삼단 도시락을 집어 들었다.

이왕 만든 음식을 버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고, 그렇다고 식사 사이의 간식으로 먹기에도 종류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김에 오랜 시간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다 보면 슬쩍 방을 옮기는 화제에 대해 운도 띄워볼 수 있으리라 여기는 쪽이 마음 편했다.

혼마루의 날씨는 화창할 때가 더 많았다. 바깥에선 오늘도 찬란한 햇살이 나부끼고 있었다. 평소에는 멋이 나지 않아 애용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진작 밀짚모자를 챙겨 쓴 쇼쿠다이키리는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였다.

처음에는 황량했던 느낌을 주는 밭은 이제 멀리서도 싱그러운 초록빛이 감돌았다. 최근에 야채를 한 번 수확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영글어 가는 작물이 아직도 무성했다. 그 사이로 난 고랑에 쪼그려 앉아 있으면 아무리 큰 칼이라도 쉽게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쇼쿠다이키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밭에 도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빽빽한 잎과 열매 사이로 오오쿠리카라와 츠루마루의 모습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주변에서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밭에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군.”

“그렇지-?”

“그러니까 일이나 해.”

“아, 그 얘기였어?”

상냥하다고는 할 수 없는 화법이었지만 츠루마루는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한 방 먹었다고 낄낄 웃어대는 모습에선 유쾌함까지 느껴졌다. 처음에는 고코타이나 사요의 말마따나, 서로를 약간 어색해하는 것일까 우려되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런 내용을 고민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알게 모르게 부딪히는 것도 없었고, 전투에서도 죽이 잘 맞았으며 그가 없는 자리에서 서로 짧은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라면 함께 방을 쓰는 것에 대해서도 특별히 거리낌이 없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렇다면 관건은 자신이 어떻게 둘을 설득할 지에 달려 있는 셈이었다. 쇼쿠다이키리는 마음을 새삼스레 다잡고는, 힘차게 둘의 이름을 불렀다.

“카라쨩, 츠루 씨! 점심 먹자!”

“오, 벌써 시간이 그리 되었나?”

“…알았다.”

하나는 하얗고, 하나는 까무잡잡하고. 서로 정 반대의 특징이 자리 잡은 얼굴이 작물 사이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은 그늘 가에 자리를 잡고 나서야 숨을 돌렸다.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손은 성실히 움직인 듯, 츠루마루의 뺨은 열에 익어 발간빛을 띠고 있었고 오오쿠리카라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자, 둘 다 맛있게 먹어줘.”

“이건… 정말 놀라울 정도의 푸짐함인걸!”

“…….”

오오쿠리카라는 츠루마루처럼 소리 내어 감탄을 말하진 않았으나, 충분히 반짝거리는 두 눈에서 기쁨과 기대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쇼쿠다이키리는 일단 내심 준비했던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둘이 충분히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쉴 새 없이 젓가락이움직이는 와중, 츠루마루는 뺨을 우물거리며 줄곧 탄성을 늘어놓았다.

“진짜 맛있다! 어떻게 어디 하나 모자란 게 없지? 이걸 미츠 도령 혼자 다 한 거야?”

“아니야. 오늘은 호리카와 군이 많이 도와줬어.”

“오오, 그 쿠니히로의.”

“응.”

츠루마루는 벌써 새로 온 칼에 대해서도 도통했다. 오래 알아 온 사이처럼 벌써 저마다의 특징에 대해 훤히 꿰고 있었다. 쇼쿠다이키리는 츠루마루의 상당한 친화력에 새삼스럽게 감탄하며, 슬슬 생각해둔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싶었다. 아무래도 선수를 치지 않고서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 호리카와 군이 아침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말이지….”

“아, 미안. 잠깐만.”

하지만 기껏 준비한 화제가 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츠루마루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마에다 토시로였다. 오늘의 근시를 맡은 그는 갑작스럽게 주인이 츠루마루를 찾는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나를? 왜?”

“다음 전장에 대해 상담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으음, 오래 걸리려나?”

츠루마루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슬쩍 오오쿠리카라를 돌아보았다. 지금은 잠깐 쉬는 것뿐이었지, 일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오쿠리카라는 도시락에서 눈을 돌리진 않았으나 그 시선을 알아보고 짧은 대꾸를 내놓아주었다.

“상관없다. 마무리는 혼자 할 수 있으니.”

“…고마워.”

츠루마루는 배려를 사양하지 않았다. 주인의 부름은 언제, 어느 때라도 우선시 되어야 하는 사항이 맞았다. 빠르게 이루어진 대화에는 쇼쿠다이키리가 끼어들 틈도 없었다. 영차, 작은 기합을 중얼거리며 츠루마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미츠 도령. 이야기는 갔다 와서 들어도 되는 거지?”

“으, 응? 그럼, 물론이지. 여긴 걱정 말고 갔다 와.”

나도 카라쨩을 도울게.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입 안에서만 맴돌던 말은 그제야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츠루마루는 씩 웃어주고는 마에다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주인이 츠루마루에게 전장에 대해 상담하는 것이 드문 경우는 아니었다. 쇼쿠다이키리 역시 근시로 있을 때 몇 번 그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일찌감치 혼마루로 합류했을 뿐더러, 도장도 여러 개 지닐 수 있었기에 다른 칼보다 부상의 염려가 적었던 그는 이곳의 누구보다 빠르게 실전 경험을 쌓아나갔다.

“할 일이 있다면 해라. 이곳은 나 혼자 정리할 수 있으니.”

쇼쿠다이키리는 그 말에 오오쿠리카라를 돌아보았다. 그는 어느새 식사를 마쳤는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빈 찬합통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니야, 같이 하자.”

“괜찮다고 했을 텐데.”

“그게 아니라…. 할 말이 있어서 그래.”

“할 말?”

어차피 둘 다에게 들려줄 이야기이긴 했다. 쇼쿠다이키리는 일단 오오쿠리카라에게 방 배정에 대한 화제를 꺼내놓았다. 그는 호리카와에게 전해들었다는 내용을 그대로 전달한 이야기에 묵묵히 귀를 기울였으나, 별다른 반응은 내비치지 않았다. 쇼쿠다이키리는 그런 그의 반응을 떠보는 일 없이, 바로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계획을 입에 올렸다.

“나는 이번 기회에, 우리 셋이 같이 방을 사용하면 좋을 것 같아!”

“셋?”

“나, 카라쨩, 그리고 당연히 츠루 씨도 함께지!”

“…과연 어떨지 모르겠군.”

“과연 이라니?”

“그 녀석은 오랜 세월동안 많은 곳을 전전해왔으니, 녀석을 친근하게 여기는 칼 또한 많겠지.”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은 쇼쿠다이키리가 고민하고 있던 지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같은 사항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바로 튀어나올 수 없는 말에 쇼쿠다이키리는 내심 깜짝 놀랐지만, 이쪽의 들뜬 반응을 섣불리 내비쳤다가는 자칫 성급히 대화가 끊어질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그의 친구는 이런 화제에 대해서는 영 솔직한 성격이 아니었다. 

“나도 그걸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은 이야기를 꺼내 보려고!”

“…흠.”

“카라쨩의 의향은…어때?”

중요한 건 그 부분이었다. 쇼쿠다이키리는 조심스레 친우의 의중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헌데 말수는 적어도 사안에 대한 호불호는 확실히 주장했던 오오쿠리카라는 바로 대답을 꺼내지 않고 가만히 두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밀짚모자의 챙이 만들어낸 그늘 아래에서 그것은 작은 개암처럼 보였다.

쇼쿠다이키리는 섣불리 재촉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대로 대답을 보류한 채 대화가 지지부진해지는 것을 두고 볼 생각도 없었다. 단숨에 싫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하니, 타협의 여지는 충분했다.

“일단은 우리 셋이서 함께 지내다가, 사다쨩이 오면 넷이서 지내면 되는 거야.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아?”

“…사다.”

“그래, 사다쨩!”

이럴 때는 기운찬 성격의 단도의 이름을 꺼내놓는 것이 제일이었다. 서로 알고 있는 친우의 이름을 꺼내자 오오쿠리카라는 확연히 표정을 달리 했다. 쇼쿠다이키리는 비록 자신이 다테 저택에 머물지 않았던 시절의 셋이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오오쿠리카라와 츠루마루의 반응으로 미루어 결코 나쁜 사이는 아니었으리라 짐작했다.

“녀석에게도 이런 식으로 제안을 꺼낼 건가?”
“음, 아마도?”

“…꽤나 용을 쓰는군.”

그리고 그 짐작은 아마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오쿠리카라는 퉁명스러운 대답을 내뱉고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쇼쿠다이키리는 그 짧은 말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츠루 씨만 오케이하면 셋이서 지내는 거야? 알았지?”

오오쿠리카라는 입을 꾹 다물고 침묵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까의 침묵과는 성질이 달랐다. 쇼쿠다이키리는 눈치로 알아챌 수 있었다. 신이 난 바람에 짧은 영어도 술술 흘러나왔다. 그는 만면에 싱글벙글한 미소를 지은 채, 오오쿠리카라와 함께 서둘러 주변을 정리했다. 난관을 하나 넘은 것뿐이었지만 이미 원하던 상황이 이루어진 것처럼 기분이 마냥 좋기만 했다.



*



설거지는 나중에 해도 충분했다. 일단은 츠루마루를 만나 확답을 받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빈 찬합을 주방에 둔 채, 쇼쿠다이키리는 바로 주인의 방으로 향했다. 차라리 거기에서 바로 츠루마루가 나오길 기다릴 생각이었다.

헌데 정작 당사자는 다른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여럿이 모인 응접실에서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도드라지는 하얀색은 멀리서도 그를 다른 칼로 착각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츠루마루의 주변에는 이마노츠루기를 비롯하여 마에다 토시로, 시시오, 소우자 사몬지가 모여 있었다.

“츠루마루는 고죠파의 칼이니까, 우리 산죠와도 사제(師弟)의 연이 있다고 할 수 있죠! 원한다면 우리 방으로 와도 좋다구요?”

아뿔싸. 쇼쿠다이키리는 낭패감에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이마노츠루기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는 아이치고 카랑카랑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분별이 쉬웠다.

“아니면, 저희 방으로 오셔도 좋습니다. 히라노와 이치 형과도 잘 알고 지내셨던 사이시잖아요?”

이마노츠루기의 말 다음으로는 마에다 토시로가 비슷한 제안을 꺼내왔다. 역시 츠루마루를 은연중 염두에 두고 있었던 칼은 자신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되새기며, 쇼쿠다이키리는 황급히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츠루 씨는 우리랑 같은 방을 써야지!”

졸지에 한꺼번에 제안을 받게 된 츠루마루는 난처한 모양으로 눈썹을 말았다.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시시오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댔다. 소우자 역시 표현이 과하지 않았다 뿐이지 반응은 그와 다를 바 없었다.

“허, 당신의 인망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그러게나 말이야, 인기가 끝내주는데? 하하하!”

“하핫, 부럽나?”

원한다면 바꿔줄 수도 있네만. 하지만 츠루마루의 농담에 시시오는 낄낄대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닛카리 아오에와 함께 방을 사용하기로 이야기가 되어있었다는 것이었다. 닛카리는 시시오와 늘 함께 다니는 누에를 무서워하지 않는 칼 중 하나였다. 유령을 베어냈다는 칼은 전설 속의 괴물도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흐음. 나는 어디까지나 제안을 한 거니까요! 중요한 건 츠루마루의 마음이죠! 언제든 부담 없이 이야기하라구요!”

“아와타구치의 형제들도, 츠루마루 님이라면 모두 환영할 거에요.”

생각지도 못한 경쟁자가 늘어나자 이마노츠루기는 한 발 물러났다. 마에다 토시로도 차분한 한 마디만을 남길 뿐이었다. 야겐의 대범함과는 성질이 다른 마에다의 침착한 성격은 유독 이런 상황에서 빛이 났다.

그 말까지 귀담아 들은 다음에야, 츠루마루는 마지막으로 쇼쿠다이키리를 돌아보았다. 저마다 한 마디씩을 꺼낸 탓에 자연스럽게 그에게 차례가 돌아온 것 같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쇼쿠다이키리는 자신에게 모인 여러 개의 시선 속에서 순간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가, 친구의 이름만을 간신히 떠올려 낼 수 있었다.

“카, 카라쨩도 기대하고 있어! 같이 방 쓰는 거….”

“뭐?”

츠루마루는 그 말에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던 놀랍다는 말도 잊은 채였다. 어차피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니 상관없으리라. 쇼쿠다이키리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목에 힘을 주었다.

“사실은 아까 셋이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그렇게 된지라….”

먼저 오오쿠리카라에게만 제안을 꺼냈더니, 그가 흔쾌히 승낙했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츠루마루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정말로 순도 높은 놀라움만 남아버린 표정은 연륜이 한 점도 엿보이지 않아 그의 나이가 무색하게, 마치 동갑내기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 답이 그렇게 예상외의 반응을 부를 정도였던 것일까. 쇼쿠다이키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놀란 나머지 대답을 잊은 츠루마루를 향해 조심스레 의사를 물어보았다.

“츠루 씨의 의향은 어때?”

“으, 음…….”

하지만 쾌히 승낙할 줄 알았던 츠루마루는 웃음기 하나 없이 갸름한 턱을 짚으며 고민에 빠졌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쇼쿠다이키리는 바짝바짝 입술이 말랐다.

“혹시 방이라면 걱정하지 마. 우리끼리 최대한 조율하면 될 것 같고….”

일찌감치 보아둔 방이 있었으나 쇼쿠다이키리는 장소에 대해서는 최대한 둘의 의향을 맞춰줄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츠루마루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결국 쇼쿠다이키리는 그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어야 했다.

“나중에 사다쨩이 왔을 때 우리 셋이 함께 지내지 않는다면 얼마나 놀라겠어?”

“사다 도령….”

“그래, 사다쨩!”

츠루마루는 타이코가네 사다무네의 이름을 읊조리며 눈을 깜빡거렸다. 마치 먼 곳을 보고 있었던 것처럼 초점이 아득했던 눈동자가 서서히 시선을 맞춰왔다.

“혹시 카라 도령에게도 그런 식으로 얘기한 건가?”

“그, 그렇긴… 한데.”

쇼쿠다이키리는 잠깐 고민하다 솔직하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어차피 일만 잘 풀리면 함께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할 사이에 굳이 작은 비밀을 가지고 있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츠루마루는 그 대답에 풋,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가 일찍이 여러 번 보여주던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그리고 츠루마루는 환한 표정 사이로 쇼쿠다이키리가 그토록 바라던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렇다면 좋아! 나도 너희 둘이라면 환영이고, 사다쨩을 실망시키고 싶은 생각 또한 없으니까 말이지!”

“정말? 신난다!”

쇼쿠다이키리는 기뻤던 나머지 순간 주변의 수많은 눈도 잊고서는 손뼉까지 치며 환호했다. 다른 칼은 그 모습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며 함께 축하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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