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잰

리추


 

 

31.

 

 

리사는 끝까지 덤덤했다.

 

마지막 식사 때도 별말 않았다. 그래서 헤어진다는 게 실감 나질 않았다. 보통 때 같았으니까.

 

“왜 집 하나밖에 안 샀어?”

 

그런 말엔 괜히 머쓱해져서 지수는 조금 움츠러들었다.

 

“너한테 더 신세 지기가 좀…….”

“싫었구나.”

“너랑 있으면서 누릴 것도 다 누려봤고…… 집도 나름 비싼 거였는데.”

 

천천히 깜빡이는 리사의 눈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부끄러워질 일도 아닌데 부끄러워졌다. 정색하는 것도, 다정하게 바라봐주는 것도 아닌데. 무심한 리사의 눈앞에선 늘 그랬듯 작아진다. 후견인 같았던 리사였기에 리사의 앞에 있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가 되는 기분이기도 했다.

 

“뭐할지 알아봤어? 일.”

“으응. 걱정 안 해줘도 돼.”

 

그럴 거라 생각도 안 하긴 했지만 내심 긴장했는데 리사는 더 묻지 않아줬다. 지수는 말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꿈틀 일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정리해야 할 사이인데 괜히 알리고 싶지 않았다. 리사가 알게 된다면 그것까진 어쩔 수 없지만. 어쩐지 알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싫은 건 아니었다. 괜찮은 기업의 홈쇼핑 MD로 이직하게 되어서 조금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긴 있었다. 쌓은 경력 자체가 리사 덕분이긴 해도 어쨌든 새로운 일자리는 지수의 성취였으니까. 말하면 잘했다고 칭찬해줄 것 같은데. 뿌듯하다가도 씁쓸해진다. 그런 감정은 이제 어울리지 않으니까.

 

리사는 요즘 식후에 뭔지 모를 약을 챙겨 먹는 것 같았다. 알러지 약인지, 신경안정제 같은 건지 알지는 못했지만 지수도 그냥 묻지 않았다. 어쨌든 그런 것 치고 리사는 지수에게 예민하게 군다거나 신경질을 낸다거나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예전보다도 차분해진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나니 짐을 다 빼서 기존에 있던 가구들만 뼈대처럼 남은 방으로 들어가기도 그렇고, 리사와 회포를 풀자니 리사도 딱히 별로 반응이 없어서 지수는 조금 무안해졌다. 그렇다고 그냥 떠나자니 그것도 조금 찜찜했다. 리사는 무엇에든 쿨할 것 같은데 저만 계속 왔다갔다하는 기분이었다.

 

자고 갈까? 물었더니 리사는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끄응. 그놈의 마음대로. 지수는 멋쩍어하다가 그냥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다. 제니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았고 제니에게 충실해지고 싶었다. 제니가 그렇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저는 그러고 싶었으니까. 제게 절대적인 사람이었어도 리사 역시 그저 제니 아닌 다른 여자일 뿐이었다. 그렇게 된다. 그러니까 깔끔해지고 싶었다. 지수는 조금 머뭇거리다 그냥 가겠다고 했다.

 

리사는 그래도 현관까지 배웅을 해줬다. 벽에 기대서서 지수를 찬찬히 바라보며 말했다.

 

“인내심이 부족해져.”

 

뜬금없는 말 같았지만 듣고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제게 남은 리사의 용건은 그것뿐일 테니까.

 

“많이 못 기다려준단 얘기야. 그 여자애, 빨리 헤어지게 하는 게 너한테도 좋을 거야.”

 

헤어지는 마당에 웃어주지도 않는 채 할 말만 전하는 리사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해해야 했다. 어차피 리사는 손익에 밝은 사람이고, 저에게도 실속이 될 말만 해줬으니까. 아주 중요한 경고를 간결하게 말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지수는 알겠다는 듯 리사에게 웃어보였다.

 

“으응. 노력할게.”

 

리사의 기묘한 침묵은 마치 어떤 엔딩을 가리키는 것만 같았다. 볼일 다 끝났는데 문을 열고 나가지 않고 멍청하게 서 있는 게임 캐릭터가 된 듯한 기분. 지수는 그래도 마무리는 사람답게 하고 싶었다.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고 해도. 점점 더 냉정하게 느껴지는 리사였지만 지수는 용기 내어 짤막짤막하게라도 그동안 고마웠다고 얘기했다.

 

안아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점점 자신이 없어져서 그냥 다가가서 안았다. 고용만 했지 늘 이런 식으로 저를 내버려둔 리사가 떠올라 지수는 울컥 서러워지려고 했다. 사랑해줬더라면 다른 무엇도 꿈꾸지 않았을 텐데. 얌전히 안겨서 평생을 바라봤을 텐데. 리사가 뒷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익숙한 보상이라도 받은 듯이 눈물이라도 나려고 했다. 애써 제니를 생각하며 그런 감상을 겨우 밀어냈다.

 

“잘 가.”

“으응.”

 

리사는 손을 흔들어주며 아주 살짝 웃어주었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차갑지는 않았다. 그건 그 여자가 달래줘야 할 외로움이겠지. 지수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그렇게 떠넘기는 척해도 리사가 신경이 쓰였다. 해피엔딩인 걸 거야. 그냥 과정인 거야. 리사는 원하던 대로 그 여자를 다시 만나고, 나는 제니를 만나고. 그냥 그렇게 되는 거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집밖에서 서성이진 않았지만 천천히 모는 차의 사이드미러로 자꾸 리사의 저택을 돌아보게 됐다. 왠지 모르게 떠나면 안 될 곳을 떠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기분이 너무 묘하고 이상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은 했다. 리사의 집에서 멀어질수록 이제 정말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게 점점 현실이 되었다.

 

 

 

**

 

 

 

생각보다 제니는 지수의 집에 자주 찾아왔다.

 

기대도 안 했는데 저번에 말 나왔던 대로 백화점 쇼핑도 같이 해줬다. 제니는 일주일에 하루이틀 꼴로 채영을 만나는 것 같았고 나머지 시간은 놀랍게도, 지수와 보냈다. 옆에 누워 잠만 자고 가더라도 그랬다. 마음에 무슨 변화라도 생긴 건지 지수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제니가 머무는 시간이 쌓이니까 자연스럽게 제니의 물건들도 여기저기 꽤 생겼다. 좀 더 착각하자면 신혼살림이라도 차린 셈이었고 최소한 제니와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아지트였다.

 

“에이전시 일을 그만뒀다고?”

 

제니에게는 솔직하게 말했다. 제니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물적으로 적극 공세를 하려면 제겐 그 일이 최선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언젠가 제니도 알게 될 텐데 거짓말하거나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속으로 걱정은 했다. 쓸모없어졌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막연하게 불안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덤덤한 척했다. 제니는 그런 지수를 빤히 쳐다보는 것 같았다. 쳐다보니 어딘가 불만스럽다거나 깜짝 놀라거나 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궁금해하는 듯 천진한 눈이었다.

 

갑자기? 왜? 물어보길래 대충 얼버무렸다. 예전부터 관두고 싶었고 상황상 그럴 타이밍이었다, 다른 업계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다음 주부터 다른 일을 하게 됐다고. 무슨 일을 하게 됐냐고 물어보길래 괜히 머뭇거리다 P사 홈쇼핑 MD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제니는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이 올라가더니 축하한다며 웃어주었다. 그런 의미를 두자면 또 끝이 없어지지만 어쨌든 지수가 처음으로 받은 축하였다. 지수는 기뻤지만 진심을 다 드러내기가 괜히 민망해서 멋쩍게 조금만 웃었다.

 

긴장했는데 제니가 마시던 주스나 태평하게 마시니까 머리를 긁적이게 된다. 지수는 제니의 눈치를 조금 더 보다가 결국 괜히 찔러보듯 말을 건넸다.

 

“의외네, 싫어할 줄 알았는데.”

“내가 왜?”

“그냥…… 내가 에이전시 대표를 해야 너한테 도움도 되고 그러니까. 관두면 내가 너한테 필요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제니가 점점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길래 지수의 목소리도 점점 쭈뼛쭈뼛 줄어갔다. 이놈의 입방정 진짜. 그래도 궁금한 걸 어떡해. 이미 말해버렸는데 뭐. 난 몰라. 그래도 왠지 제니가 예전처럼 몰아세우듯 화를 낼 것 같진 않아서 지수는 얌전히 기다렸다. 얌전해진 척은 이제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단 우스개 같은 생각이나 하면서.

 

“네가 에이전시 관두는 걸 내가 왜 싫어해? 누가 들으면 내가 너 없음 망하는 연예인인 줄 알겠어.”

“그, 그런 건 당연히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막, 전처럼 네가 사달란 대로 다 사주기도 힘들어지니까.”

“나 돈 많아. 너보다 더 많을걸. 자꾸 뭘 걱정하는 거야? 너 진짜 내가 널 만나는 게 그런 대가성일 거라고밖에 생각 못 해?”

 

역시 괜히 말했다. 그치.

 

제니는 다그치는 톤의 목소리도 아니었지만 지수는 알아서 찌그러졌다. 그럼 나를 왜 만나? 묻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좋아하니까’일 거라고 그냥 착각하고 싶었다. 지수가 소심해진 표정으로 잠잠해지니까 제니는 좀 더 쳐다보다가 휴 가볍게 숨을 내쉬곤 주스를 마저 마셨다.

 

휴. 제니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작게 내쉬는 한숨인데도 지수는 관심이 온통 제니한테로 가 있어서 작은 것도 다 크게 느껴진다. 제니의 옆얼굴, 깜빡이는 길고 촘촘한 속눈썹 같은 걸 쳐다보게 된다.

 

“난 네가 그만둔 게 더 좋아.”

“그, 그래?”

“너 처음에 나한테 했던 짓 생각해봐. 그런 일 계속하는 걸 누가 좋아하겠어.”

“그, 그치.”

 

제니가 다정한 목소리길래 지수는 금방 반색이 됐다. 뿅 밝아진 얼굴로 제니를 쳐다봤다가 눈이 마주치니까 금방 머쓱해진 지수가 또 그렇게까지는 아닌 척을 하느라 표정이 어색해진다. 괜히 엄지손톱만 만지작거리다 너한테도 떳떳해지고 싶었다고 툭 말해버렸다. 말하고 나니까 뒤늦게 부끄럽고 난리였다. 다른 사람들한텐 헛소리도 유창하게 늘어놓을 수 있는데 제니한테만큼은 그렇지가 못했다. 지수 얼굴이 빨개지니까 제니는 좀 쳐다보는가 싶더니 픽 웃는다. 배려해준다고 놀리지도 않나 본데 그래서 더 부끄러워진다. 지수는 주스만 벌컥벌컥 마셨다.

 

“그럼 바람이나 쐬러 갔다 올까? 너 취직하면 바빠질 테니까.”

“어? 그럼 나야 좋지…….”

“너 언제부터 출근하는데?”

“나, 다음 주 월요일.”

 

뜻밖의 제안에 지수는 얼떨떨해졌다. 그냥 하는 말이라기엔 핸드폰 속 캘린더를 살펴보는 제니는 진짜로 뭔가를 재보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대뜸 이번 주 목금토 비워놓을 수 있지? 물어온다. 지수는 고개를 크게 끄덕끄덕했다. 어디 가고 싶은 데 있냐는 말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그냥 네가 편한 데면 된다고 말했다.

 

“그럼 내가 알아서 한다?”

“으응.”

 

 

 

**

 

 

 

제니가 알아서 한다고는 했는데 정말로 다른 연락이 없어서 지수는 걱정이 됐다. 다른 약속을 잡을 것도 아니긴 하지만 제니가 진짜로 이박 삼일씩이나 시간을 같이 보내주는 건지. 걱정되는데 아닌 척 어디 가는 거냐고, 뭘 준비하면 되냐고 떠보듯 문자를 보내면 제니는 한참 뒤에 그냥 여행 짐이나 싸라고 했다. 아니, 어디 가는 줄은 알아야 뭘 싸든가 하지. 꿍얼거리고 있으면 제니가 어떻게 알았는지 제트 스파 딸린 독채 펜션에 갈 거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수영복 챙기라고.

 

긴가민가하면서 정말 짐만 쌌다. 이렇게 갑자기 갔다 올 수 있는 게 진짜 맞나. 스케줄 같은 게 없나. 세 시쯤 온다길래 그냥 그런 줄 알고 얌전히 기다렸다. 바람맞는 것만 아니면 지수야 뭐든 다 좋았다. 솔직히 바람맞는대도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기대되고 설렜다. 제니가 웬일이지. 진짜 나 좋아하나. 조금이라도.

 

선글라스를 끼고 멋지게 나타난 제니는 자기 차에 타라고 했다. 운전 내가 해도 되는데, 너 힘들게…… 지수가 머뭇거리자 지수의 자그만 캐리어를 돌돌 끌고 가더니 트렁크를 열고 콱 넣어버린다. 따라온 지수가 옆에서 어버버거리고 있으니까 트렁크를 탕 닫은 제니가, 시간 아까우니까 빨리 타라고 했다. 응. 지수는 얌전히 조수석에 올랐다.

 

목적지는 아주 멀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 번도 쉬지 않고 가기엔 힘들었다. 휴게소에 들렀고 간식거리를 조금 샀다. 핫바를 하나씩 들고서 마주 앉아 오물오물 먹고 있으면 별 얘기 안 해도 자꾸 웃음이 났다. 제니와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해본 적이 거의 없어서 모든 게 싱숭생숭하기만 했다. 좋아? 지수가 계속 웃는 눈이니까 제니가 장난치듯 물었다. 응, 좋아. 뭐가 좋아? 도착도 안 했는데. 너랑 있잖아. 제니는 꼭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이런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고 지수는 숨기지 않았다. 너랑 있으니까 좋아. 좋아한다고 아낌없이 표현하고 싶었다. 제니가 싫어하는 것도 아니면 더욱더 망설일 게 없었다. 제니는 살짝 웃으면서 괜히 다른 데를 쳐다보듯 눈을 돌렸다. 제니도 좋아하는 것 같아. 그치. 지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예쁘게 웃어 보였다.

 

산을 꽤 올라가는 것 같더니 상당히 호젓한 분위기를 내는 풀빌라에 도착했다. 산을 뒤로하고 저 앞으로 흐르는 강이 멀리 내다보이는 구조였고 독채 사이마다 두툼한 나무담장이 가로막듯 쳐져 있어 프라이버시 문제도 없어 보였다. 넓은 복층 독채는 인테리어와 가구 하나하나 모두 고급스러웠다. 제니가 고민해서 고른 느낌이 났다. 멋지다. 그 말만 하고 테라스에서 가만 내다보고 있으면 아무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자연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옆에 제니까지 있으니 정말 더할 게 없었다.

 

“마음에 들어?”

“응.”

 

좋아하는 지수를 보고 제니도 만족하는 눈치였다. 지수는 제니를 흘끔흘끔 쳐다보다 볼에 쪽 입을 맞춰봤다. 제니는 눈만 잠깐 동그래졌을 뿐 면박주진 않았다. 제니가 다 받아줄 것 같아서 지수는 제니를 꼭 안아도 봤다. 한 박자 늦게 제니의 팔이 지수의 허리를 감싸온다. 가까이서 마주보다 장난처럼 입술에도 쪽 입 맞춰봤다. 사랑이 넘치는 지수의 눈을 보고 제니는 쑥스럽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그러다 먼저 살짝 빠져나간다.

 

같이 독채펜션 안팎을 구경하며 사진을 찍어줬다. 옥상정원도 조용해서 제법 운치가 있었다. 날씨가 조금만 덜 추웠으면 여유롭게 앉아 커피 한 잔 하기에 좋을 곳이었다. 야외풀은 온수로 이용할 순 있는데 금방 어두워질 것 같아서 내일 써보기로 했다. 펜션엔 산책길도 있었고 자전거도 빌려준다고 해서 내일 타보자고 했다. 근처 마트에서 장 봐온 걸로 된장찌개도 끓이고 바비큐도 해 먹었다. 엄청 커다란 나방이 날아들려고 해서 둘 다 혼비백산했던 것 빼고는 별일 없었다.

 

운전했으니까 피곤하겠다고 지수가 설거지하는 동안 제니가 먼저 씻었다. 같이 스파에 들어가자고 제니가 샤워가운을 입고 기다려서 지수도 후다닥 씻었다. 제트 스파도 밖에 있어서 가운 안에 수영복을 입었다. 몸을 다 본 사인데도 어쩐지 수영복 입은 걸 보이는 게 민망해서 지수가 쭈뼛거리고 있으면 이미 머리를 올려묶고 가운을 벗고 들어간 제니가 무슨 문제 있냐는 듯 쳐다봤다. 그래서 또 후다닥 따라 들어갔다.

 

스파 물은 뜨끈해서 밖인데도 춥지가 않았다. 그래서 어두운 밤공기가 으슬으슬하거나 무섭지 않았다. 조용하고 낭만적인 곳에 제니와 단둘이 있으려니 마냥 행복하고 기쁘기보단 좀 믿기지가 않았다. 아까부터 계속 같이 있었는데도. 지수는 제니 옆에 가 앉아서 물속에서 손을 잡아봤다. 조물거리다 깍지도 껴보았다. 지수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제니를 빤히 쳐다보면 제니가 지수의 뺨에 입 맞춰주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응.”

“진짜 바람피우는 거 같애.”

 

지수의 말에 제니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틀린 말도 아니었고 지수의 순수한 감상이었지만 제니는 무슨 생각인지 몰랐다.

 

“웬일로 이런 델 데려왔어?”

“바람 쐬자고 했잖아.”

“바람은 바람이네.”

“너 나한테 잘해주는데. 난 너한테 뭘 해준 적이 없으니까.”

 

제니는 가볍게 건네듯 말했지만 어쨌든 생각을 많이 해준 게 느껴졌다. 해준 게 없긴 왜 없어, 하면서 지수가 멋쩍어하고 있으면 제니가 깍지 낀 손을 꼭 잡아줬다. 자연스럽게 지수의 어깨에 기대오는 제니 때문에 지수는 순간 가슴이 새삼 설렜다. 이럴 때면 저도 제니처럼 자연스럽게 대해주고 싶은데, 이런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여전히 어려웠다. 그럴듯한 말도 척척 나오고 몸도 뻣뻣해지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 여자는 제니가 이럴 때 어떻게 해줄까?

 

온전히 둘만 있는 느낌을 주고 싶은 건지 제니는 채영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않았지만 지수는 머릿속 언저리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니 없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솔직히 궁금했다. 뭐라고 하고 왔을지도. 요즘 사이는 정확히 어떤지도.

 

“너랑 있으면 왜 편할까?”

 

톡 띄워진 제니의 물음이었고 어깨에 얹힌 제니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감은 눈을 볼 수 있었다. 마음껏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아하는, 제니의 눈 감은 얼굴. 가만히 숨이 담기고 내쉬어지는 코. 이렇게 가까이 있어도 함부로 입을 맞추거나 손댈 수가 없다. 제니가 어렵게 느껴져서일 때도 있지만 함부로 만지기에 너무 아깝고 소중하게 느껴져서 그럴 때도 있었다. 지금은 두 번째 경우였다.

 

내가 편해서 같이 있는 걸까. 편해서 좋은 걸까. 지수는 서운해야 하는지 아니면 좋아해야 하는지 헷갈렸다.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조그만 머리통에 들어있을 생각들이 전부 다 궁금했다.

 

“그 사람이랑 있으면 불편해?”

 

저울질하면 불리해질 거라 늘 생각해왔는데. 제니의 그 말은 어쩐지 그 여자가 갖지 못한 저의 좋은 점이라는 언질인 것 같아서 불쑥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으로 그 여자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저야 어렵게 느껴질 만했지만, 사랑하는 연인한테는 그럴 리가 없지 않을까. 아니면 그 여자는 제니에게 모든 걸 맞춰주진 않는 건지. 나처럼 바보같이 굴지 않는 것일 뿐인지.

 

“불편한 건 아니야.”

“그럼?”

“……그냥 엄청 편한 건 아니라는 거야.”

“아무튼…… 지금 나랑 있는 게 좋다는 거지?”

 

지수의 말에 제니가 눈을 떴다. 지수의 어깨에서 머리를 떼고 바로 앉는 제니는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렇다는 대답인 것 같아서 지수가 장난스레 제니의 뺨에 입 맞춰줬다. 제니는 한 번 더 웃더니 지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여기에서만큼은 그 사람 얘기 안 하고 싶다고, 너한테 부담 주기 싫다고.

 

“그럼 내가 여기선 그 사람 생각 안 해도 돼?”

“네가 그 사람 생각을 왜 해?”

“안 할 수 없잖아. 네가 그 여자 애인이니까.”

“하지 마. 그냥 내가 네 여자친구라고 생각해.”

 

둘 다 뜨끔 놀랐다.

 

지수가 놀라 제니를 쳐다보면 제니는 눈을 마주하다 살짝 내리면서 여기서는, 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 해도 제니는 방금 선을 넘어온 거였다. 사랑한다고 말해줬던 저번에도 그런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번엔 뭘 시킨 것도 아닌데. 항상 자긴 그런 감정 같은 거 없다고 선을 긋고 매몰차게 굴던 제니였는데.

 

이기적이다 못해 나쁜 여자. 멀쩡한 애인을 두고 다른 여자랑 바람나는 여자. 그게 제니였고 지수도 알았지만 제니에게 뭐라 하고 싶지 않았다. 제니를 감싸주고 싶었다. 그렇게 죄질 나쁜 여자와 놀아나는 더 나쁜 년이 될 각오는 되어 있었다. 얼마든지, 기꺼이.

 

자기가 말해놓고 찔리는지 제니의 시선 처리는 어색했다. 지수는 그런 제니에게 다가가 양 뺨을 살짝 감싸주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서 입 맞춰주었다.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고개는 살짝 비꼈지만 입술끼리만 가만 맞대는 키스였다. 제법 여운이 남을 만큼의 시간을 두고서 지수는 고개를 살짝 떼어냈다. 아주 가까이서 제니의 아름다운 눈을 마주 보았다. 제니가 안심할 수 있게, 사랑하는 마음을 아주 많이 담아서. 웃어주면서.

 

네가 내 여자친구라면 이랬을 테니까.

 

“사랑해.”

 

언제나 망설이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해줬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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