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미르엘라는 괜히 두근거렸다. 이제껏 뮈엘 말고는 다른 악마를 본 적이 없다.

 

뮈엘에게 다른 악마들에 대해 물어봤으나 그냥 악마답게 제멋대로인 녀석들뿐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악마는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족속이라더니, 과연 뮈엘 또한 여타 악마들한테 일말의 정도 없는 모양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만물점 ‘그믐’은 매일같이 문을 열었고 소박하게나마 수익이 발생했다. 그동안 뮈엘은 미르엘라가 따로 부르지 않아도 때때로 주군이 있는 곳으로 찾아오곤 했다.

 

 

“내가 안 부를 땐 보통 어디서 무얼 해?”

“별다른 용무가 없을 경우 대부분 마계에 있습니다.”

“거기엔 뭐가 있는데?”

 

 

사실 미르엘라는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다스리는 천상의 땅에 가 닿을 수 있다. 그러니 이 시시콜콜한 문답은, 호기심과 맞먹는 귀찮음에 더하여 뮈엘이란 사람과 한담을 떠들고픈 심심함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발 디딜 땅이 있습니다.”

“제발 그게 전부라고 하지는 말아줄래.”

 

 

미르엘라가 눈을 흘기자 잿빛 머리의 악마는 얇은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간혹 누군가 심심풀이 삼아 인간의 건축물을 따라 만든 공간이 더러 있긴 합니다만 악마들은 의식주가 충족되지 않더라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잠시 안착할 지대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악마란 참 재미없는 삶을 사는구나, 하고 악마들의 왕이 무덤덤하게 생각한다. 저러니까 자극이 강한 일에만 매료되는 것이 아닐까.

 

문득 미르엘라가 무감한 시선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이 넓은 저택은 유감스럽게도 그 규모만큼 효용을 다하진 못했다. 이 집에서 생활하는 인구가 단 셋뿐이었던 탓이다. 주인의 수려한 악마는 구태여 인간답게 살지 않았다.

 

 

“심심하면 너도 같이 출근할래?”

 

 

성실한 만물점 주인이 한쪽 입가를 올려 웃은 채 넌지시 권유했다. 반쯤 농담이긴 했으나 때마침 뮈엘이 출근 직전에 찾아왔으니 하는 소리였다.

 

미르엘라가 이렇게 늑장 부리지 않고 저절로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다. 덕분에 찻집 주인인 다니케가 감탄했던 적이 있다. 손님도 잘 안 오는 시각에 어떻게 꼬박꼬박 가게를 여느냐고.

 

 

“사양하겠습니다.”

 

 

악마는 가느다란 눈매를 휘어가며 웃음기가 스며든 목소리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마왕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든지.”

 

 

어차피 뮈엘은 앞으로도 다른 인간들 앞에서 모습을 보일 의향이 없어 보였으니 함께 만물점에 가봤자 딱히 할 일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미르엘라 곁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하는 리칸과 류 역시 이 악마와 별로 돈독한 사이가 아니었다.

 

 

“내일 사람들이 올까? 거래소 말이야.”

“인간계에서 암암리에 소문이 퍼지려면 시간이 제법 걸립니다. 그러니 당분간 천하를 구경거리 삼고자 하는 악마들만 몰려오겠지요.”

 

 

역시나 동족을 냉소적으로 대하는 악마는 가게로 출근하는 주인을 배웅하자마자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마왕 하나와 마인 둘이 만물점 ‘그믐’으로 향하는 길은 적당히 한적하고 적당히 소란했다. 심부름하러 나온 돈 많은 집안의 고용인들이 이곳저곳 발 빠르게 돌아다니고, 인근 도시에서 수도 중심부로 이동하는 마차가 간간히 들어오기도 했다.

 

 

“마와……, 아니, 미르엘라 님! 저거 먹어보셨어요?”

 

 

미르엘라보다 두 살 많은 주제에 아직도 덜 자란 소년 같은 류가 별안간 제과점을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자 실제로 류와 유년시절을 함께 보내 가족이나 다름없다던 리칸이 조심성 없는 동생에게 따끔하게 눈치를 주었다.

 

야무진 리칸과 달리 류는 주위 상황에 따라 호칭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게 아직 익숙지 못한 듯했다. 류가 적응하기에는 일주일이 조금 짧았나 보다.

 

보다 못한 미르엘라가 차라리 그냥 집에서든 밖에서든 항상 미르엘라 님이라고 부르면 편하지 않겠느냐 물었더니, 류가 말하길 마왕님은 마왕님이어야 한다며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이상한 데에서 고집이 셌다.

 

 

“저러다 언제 한번 거하게 사고 치겠군.”

 

 

리칸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비슷한 일이 자주 있었는지 그의 해맑은 동생은 주눅 들지 않고서 두 동행인을 제과점 앞으로 이끌었다.

 

 

“흰달꽃 꿀로 만든 사탕이 나왔다고요. 하나 사 가지고 가게에서 한가할 때 먹으면 어떨까요?”

“그럴까?”

 

 

일견 철없는 제안에도 미르엘라는 기꺼이 혹했다. 그 역시 먹어본 적이 없어 맛이 궁금했다.

 

화밀사탕 중에서 특히 흰달꽃 꿀사탕은 값비싼 축에 속한다.

 

흰달꽃[白月花]. 평소엔 개화하다 만 꽃처럼 하얀 잎을 웅크리고 있어 멀리서 보면 희고 동그란 달 같다 하여 그리 이름 붙여졌다. 심지어 만월이 뜨는 밤에만 활짝 피었다가 아침이 되면 다시 꽃잎을 아쉽게 굽혀버린다.

 

이러한 새침데기 같은 특성 탓에 흰달꽃 양봉 작업은 다른 꽃에 비하여 몇 배는 더뎠다. 안 그래도 사탕은 사치품이라 비싸건만 주재료의 희소성까지 더해지니 생활비가 빠듯한 평민들로서는 쉬이 사먹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자, 먼저 드세요.”

 

 

부리나케 제과점에 들러 꿀사탕 한 병을 구입해온 류는 힘주어 뚜껑을 열어 미르엘라가 사탕만 집어먹을 수 있도록 건넸다.

 

황금빛에 가까운 네모난 사탕이 들어찬 유리병이 열리자마자 달달한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미르엘라는 눈을 깜빡이는 그 찰나를 영원처럼 음미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익숙한 향이 났다. 이따금씩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창문 너머로 그윽한 달빛과 함께 새어 들어오던 선선한 바람 내음이.

 

아. 그는 흰달꽃의 향기를 좋아했던 것이다.

 

 

“다음에 또 사러 오자.”

 

 

아득한 추억만큼 막연하기만 했던 호감이 마침내 이름을 얻는 순간은 이토록 사소하고도 다채롭다.

 

미르엘라가 입안에 퍼지는 달큰한 맛을 느끼며 리칸에게도 사탕을 권유했다. 리칸은 사양하지 않았다.

 

만물점 ‘그믐’은 오늘도 그렇게 하나씩 달콤한 간식을 입에 문 사람들의 기분 좋은 미소로 영업이 시작되었다.

 

 

“어서 오세요, 점장님.”

 

 

나른하게 앉아 있던 만물점 주인은 오후 느지막이 방문한 손님에게 이렇게 묘한 인사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그 손님이 정말로 어떤 찻집의 점장이었고, 이 만물점 주인이 과거 그곳의 직원이었으니 말이다.

 

 

“미르엘라 씨?”

 

 

황급히 중절모를 벗은 다니케가 휘둥그레 뜬 눈을 또르륵 굴렸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멀뚱히 서 있던 마인 남매도 눈을 깜빡였다.

 

 

“아는 분이셔요?”

 

 

방정맞은 게 매력이라면 매력인 류가 호기심을 못 참고 물어보았다. 미르엘라를 향한 존대에 다니케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맙소사. 설마 미르엘라 씨가…….”

“네. 제가 저쪽의 왕이라네요.”

 

 

미르엘라는 끝맺어지지 못한 질문에 순순히 대답을 내놓았다. 손가락으로 천장을 슬쩍 가리키면서.

 

 

“사실 점장님을 이렇게 금방 다시 만날 줄은 몰랐어요.”

“저야말로…….”

 

 

답지 않게 당황한 내색을 보이던 다니케는 이내 예의 단정한 모습을 되찾았다.

 

겉보기에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마인이므로 아마 실제로는 서른 중후반은 될 것이다. 그 나이쯤 되면 놀랄 일도 적고 설령 놀라더라도 금세 감정을 갈무리할 줄 안다.

 

 

“이제 그냥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아요. 더 이상 미르엘라 씨의 고용주가 아니니까요.”

“그럼 다니케 씨라고 부를게요. 그나저나 뭔가 사려고 오신 건 아니겠네요.”

 

 

만물점 주인은 일주일 동안의 경력을 바탕으로 추정했다.

 

평범한 인간 손님도 있었으나 희미한 냄새를 지닌 마인들도 어떻게 알고 찾아왔더랬다. 마인 손님들은 대부분 전대 마왕을 겪어봤으리라 예상되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었다. 아무래도 지난주의 새까만 새벽하늘이 무슨 뜻인지 기민하게 알아챘던 모양이다. 아마 오래 지나지 않아 소문이 더욱 빠르게 퍼질 테지.

 

정곡을 찔린 찻집 주인은 머쓱하게 웃었다.

 

 

“물론 ‘그믐’의 주인을 확인하려는 목적으로 방문하긴 했지만, 사람 구경만 하고 홀랑 나가버릴 만큼 염치가 없진 않아요. 저도 나름 장사꾼인걸요. 게다가 마침 저는 골동품에 관심이 많고요.”

 

 

다니케가 예스러운 물건들을 모아둔 장식장 쪽으로 눈짓했다.

 

그러고 보면 이 돈깨나 있어 뵈는 찻집 주인은 그런 취향이었다. 그 찻집 내부도 옛날 분위기가 나도록 꾸며져 있었고, 차를 달여 마시는 데 쓰이는 다기나 찻잔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런 중절모를 쓰는 것만 봐도 대강 알겠으나.

 

과연 다니케는 앞주머니에 넣고 다니기에 간편한 회중시계를 골랐다. 대체 언제 적 물건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옛것인지라 다시 작동할 수 있도록 미르엘라가 손을 써야 했던 시계였다.

 

 

“만물점 운영은 어때요?”

“손님이 많지는 않아서 겨우 하루 벌어먹고 살 정도지만, 나쁘진 않아요. 그동안 다니케 씨가 넉넉하게 급여를 준 덕분에 아직 여유가 있기도 하고요.”

 

 

류가 회중시계를 상자에 넣어 포장하고 리칸이 대신 계산을 맡아주는 사이에, 미르엘라와 다니케는 짤막한 잡담을 나누었다.

 

미르엘라는 오늘에서야 다니케가 하나의 상회를 이끄는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찻집은 개인적인 취미지요.”

 

 

어쩐지 아랑곳 않고 미르엘라에게 대부분의 업무를 떠넘기는 행태가 납득되었다. 솔직히 취미치고는 좀 무관심하지 않나 싶다만 미르엘라가 알 바는 아니다.

 

 

“혹시 제가 도울 만한 일이 생긴다면 이쪽으로 연락 주세요. 대부분 거기 있거든요.”

 

 

미르엘라는 상회 주소와 다니케의 이름이 적힌 명함을 받아들었다.

 

다니케는 황궁이 자리 잡은 르웰리아에 적을 둔 모양이었다. 그쯤 되면 감히 마왕에게 도움을 줄 수 있노라 말할 만했다.

 

 

“고마워요. 다니케 씨도 문제가 생기면 알려주세요.”

 

 

부유한 상회 운영주가 아니라 마인으로서 곤란한 사건이 발생한다면 미르엘라가 수습해주겠다는 뜻이다. 인간 측이 저버린 집단에 대한 책임감 때문은 딱히 아니었다.

 

미르엘라는 마왕이기 전에 한 인간이다.

 

톄무하브의 성스러운 힘은 믿었으나 신의 자애로움은 믿지 않았다. 신의 눈부신 영광에 닿기를 거부한 사람이 기댈 곳이라곤 그 자신과, 또 다른 누군가다.

 

그러니까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사람뿐이다. 어디에도 신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기회가 되면 종종 찾아오도록 하지요.”

“그래요. 기왕이면 소문도 내주면 더 고맙겠어요.”

 

 

농담과 진담이 반반 섞인 작별 인사와 함께 반가운 고객을 보냈다. 소년 같은 미성으로 흥얼거리는 류의 목소리가 다시 ‘그믐’을 채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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