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永遠)히 사랑해. 라는 말. 웃기지 않아? 다이치?
     
스가와라는 예전에 소파에 길게 누운 다이치를 바라보며 말했었다. 다이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은채로, 길게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다, 경계도 없는 게 사랑이 아닐까. 라고 느릿하게 대답했던 걸로 기억이 난다. 다이치는 꾸준한 남자였다. 처음에 이 마을에 순경으로 발령 받았을 때도, 다이치가 내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는 늘 한결같았다. 말투도, 눈빛도. 그는 다부진 얼굴에 걸맞게 중후하고 안정적인 분위기는 한결 같아서, 지루한 감도 있었다. 다이치는 처음과 끝이 어긋나지 않아 평행선 죽 그은 것 같은 사내였다. 곡선처럼 변덕스럽지도, 유연한 맛도 없던 사람이었다.
     
밋밋한 사람.
     
어떻게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스가와라는 잘 모르겠어. 하고 스스로의 물음에 답한다. 다이치는 공기보다 가볍게, 대기의 기류보다 변덕스럽게 세상을 떠나버렸다. ‘안녕’이라는 말도 함께 나누지 못한 채로. 안녕이라는 말을 할 수 있던 시절에는 그 말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몰랐다. 그냥 일상에서 툭 던지는 짧은 예의이자, 규칙일 뿐이었다.
     
그 규칙이 꺾이고 어긋나서 그 이전의 상황이 어땠는지 스가와라는 기억이 통 나질 않았다. 그 이전의 특별할 것 없던 하루가 어땠는지. 스가와라는 전 애인의 데이트 폭력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 그 때 다이치는 자신에게  ‘정상’의 감각을 가르쳐 주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다이치의 기억이 세월에 매장될 줄 알았다. 앞으로 카오루와 앞으로만 나아간다면 다이치의 빈자리도 볼 겨를이 없을 것이라고 믿어왔다. 아침에 눈 떴을 때 커튼을 젖히고 창에 비친 세상을 내려다 볼 때면 무언가 하나 쯤 없어져버린 듯한 감각에 시달렸다. 처음 다이치가 없는 방에서 옆으로 몸을 뉘었을 때 외로움보다 죄책감이 스가와라의 숨을 죄여왔다. 자신이 없었다면 다이치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스가와라를 짓눌렀다. 가능성은 슈뢰딩거의 상자 속 고양이처럼 죽음과 삶을 한 몸에 지닌 괴물이었다.
     
그 괴물이 매일 밤마다 스가와라의 옆에서 다이치의 환영을 띈 채로 스가와라를 협박했다. 다이치는 사실 스가와라 네가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고. 다이치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서 해결 할 문제를 다이치와 함께 풀려고 했던 점, 도와달라고 했던 점 모두를 꺼내놓으며 그 환영이 비웃었다.
     
그 괴물이 스러진 건. 카오루가 낳은 뒤 일주일 후였다. 장마가 말끔히 끝나고 하늘이 구름한 점 없는 평온함을 보여준 날이었다. 햇빛은 날카롭고 뜨거웠다. 산후 조리원에서 하는 일이라곤 카오루를 먹일 젖을 미리 짜서 간호사에게 넘겨주고 때가 되면 밖에서 느릿하게 걷고, 밥을 먹는 일이었다. 그게 다였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머리맡에서 죄책감의 망치로 내려치는 ‘환영’이 더 이상 찾아오지를 않았다. 경찰서에 사직서를 넘겨줄 때, 복잡한 미래에 대한 생각도, 죄책감도, 슬픔도 경찰서에 놓고 것 같았다. ‘카오루’만 생각이 났다. 이제 부터는 그것만 생각하기로 이미 본능적으로 정했는지도 모른다. 마음의 빈틈이 카오루로 채워졌다. 틈이 다시 생기면 환영이 찾아오고 그 뒤로 물렀던 것들이 와르르 쏟아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어.
     
카오루와 밖에서 저녁을 먹었다. 카오루가 좋아하는 화덕피자 집에 가서 피자를 먹었다. 눅진하게 녹은 피자치즈가 입안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카오루는 외식을 꺼려하던 스가와라가 밖에서 먹자는 말에 놀라 정말? 하고 열 번 이상을 물었다. 스가와라는 힘없이, 응. 카오루 뭐 먹고 싶어? 하고 묻자, 카오루는 맨 먼저 크게 외친 건 스위트 섬머 라는 레스토랑의 화덕피자였다. 카오루는 길게 늘어지는 치즈를 바라보며 즐거워했다. 스가와라는 양송이 스프을 스푼으로 휘적거리며 카오루를 바라보았다.
     
"엄마?"
     
카오루는 접시에 반 쯤 베어 문 피자를 내려놓고 스가와라를 응시했다. 스가와라는, 카오루가 잘 먹으니까. 좋네. 라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카오루는 피자와 스가와라를 번갈아 바라보며,
     
"엄마는 피자 안 먹어? 식으면 맛없는데."
     
라고  말한다. 스가와라는 피자 하나를 들어올려 접시에 놓으며 그러게 라고 대답하곤, 나이프로 피자 반조각을 썰어 포크로 쿡 찍어 입에 넣는다. 카오루는 안심이 되었다는 듯이 입안에 피자를 넣고 씹는다. 스가와라는 사실 피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매콤한 마파두부나, 국물이 개운한 우동 같이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입맛이어서 다이치와 데이트 할 때 음식 취향이 맞지 않아 고민이 많았다. 다이치는 자신의 취향을 잠시 뒤로 물려두고 스가와라의 입에 맞는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었다. 늘 다이치 자신은 뒤로 미루고 스가와라에게 맞췄다. 스가와라가 그에게 맞춘 적은 없었다. 다이치는 늘 당연하다는 듯이 스가와라에게 맞췄고 스가와라는 그것에 차츰 익숙해져 ‘다이치’의 취향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었다.
     
다이치가 뭘 맛있게 먹었는지, 무슨 영화를 사실 좋아하는지, 무슨 책을 좋아하는지 어떤 취향도 기억 속에서 도무지 찾아낼 수 없었다. 이다지도 무색무취 일 수 있을까. 다이치는 정말로 무색무취의 ‘무언가’처럼 옅었다. 너무 옅은 인간이었다.
     
스가와라는 식은 양송이 스프를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었다. 멀겋고 싱거웠다. 스가와라는 어제 오후에 카오루의 담임선생님과 나눴던 일방적인 대화를 떠올렸다. 오이카와 토오루라고 했던가.
     
     
에너지가 넘치고 열정적이지만 그 열정도 언젠가 식겠지. 스가와라는 건너편에 한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모습을 흘긋 엿보았다. 생일 케이크가 놓이고 레스토랑 종업원이 촛불이 꽃은뒤 불을 붙인다. 생일축하 노래를 입을 모아 부르고 생일의 주인공인 남자아이는 촛불을 힘껏 끈다.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다. 스가와라는 나른해져서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족, 연인, 친구. 그 세 그룹이 한 자리씩 차지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입맛이 없다. 이 스프도, 피자도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히트 사이클 주기여서 일지도 모른다. 기운이 없고 졸립고 맛이 잘 느껴지지 않으며 기분도 가라앉았다. 약을 챙겨먹어도 히트 사이클의 특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호르몬 억제를 해서 알파를 자극하지 않는 건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약 오늘 챙겨먹었는데.
     
스가와라는 그깟 호르몬 하나 덕분에 약을 챙겨먹어야 하는 자신의 몸이 불편했다. 알파도 약을 챙겨 먹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알파도 러트가 걸리면 불편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오메가에게 달려들거나 정신적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니까. 오메가나 알파나 국가에서 억제제를 먹으라고 직접 권유하고 있었다.
     
"코우시 씨?"
     
스가와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본 시선에 ‘그’가 서서 카오루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인상이 찌푸려졌다. 고작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 코우시 씨라니. 몇 년 지기 친구를 부르는 것처럼 부드럽고 다정하다. 스가와라는 뻣뻣하게 서서 자신의 얼굴을 훑어보는 오이카와가 불쾌해서 고개를 돌렸으나, 카오루는 토오루 센세. 피자 같이 드실래요? 하고 말을 내뱉었다. 스가와라는 순간 카오루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오이카와는 그럼, 여기에 동참해볼까. 하고 카오루 옆에 앉는다. 스가와라는 허. 하고 헛웃음이 한숨과 함께 터졌다. 오이카와는 직원을 불러 메뉴판을 갖다 달라고 덧붙이며 유리컵에 냉수를 따라 마셨다. 그는 유리컵 너머로 심통 난 스가와라를 흘긋 엿보았다. 스가와라는 뭔가 말하고 싶은데 더 말하면 험한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스프를 기계적으로 입에 떠 넣으며 오이카와를 흘겨보았다.
     
카오루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무릎에 시선을 고정하고 얼굴을 붉힌 채로
     
선생님. 피자 맛있어요. 한 조각 드셔보세요.
     
라고 말하자 오이카와는 응, 맛있어 보이네. 하고 피자 한 조각을 집어 베어 물었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뻔뻔하고 여유로운 태도에 화가 끓어올랐다. 저렇게 눈치 없고 예의 없는데다 뻔뻔하다니. 아, 그건가. 오메가가 만만하니까. 어떻게라도 해보려는 베타 중 하난가. 스가와라는 경계를 풀 수 없었다.
     
몇 년 동안 스가와라는 많이 당했다.
     
베타나 알파가 남자 오메가를 호기심으로 한 번 건드리고 수작 거는 일은 흔하다 못해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들은 오메가를 ‘한정판’ 또는 ‘특별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보통의 연인과 다르지 않을까. 동성 오메가랑 사귀면 뭔가 다른 세계가 펼쳐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 하지만 연애를 하다보면 알파든 오메가든 베타든 상관없이 갈등과 애정이 얽히는 연애는 똑같다는 걸 깨닫고 질린다는 식으로 버렸다. 알고 있다. 다이치를 만나기 전에 그랬으니까. 섹스 비디오를 몰래 찍어서 헤어지려고 통보하면 뿌린다고 협박, 심지어 다이치를 만나기 전 애인은 스가와라를 때렸다. 목을 조르고 물건을 던지고 발로 차고. 오메가는 늘 요구하는 게 많고 시끄럽다고 말하면서.
     
스가와라는 더 이상 그런 수작에 넘어갈 생각도, 다이치를 떠나보낸 시점에서 마음의 공간은 이미 꽉 차다 못해 울컥울컥 토할 정도로 복잡했다. 죄책감, 그리움, 앞으로 카오루와 함께 살아 나가야 할 삶에 대한 의무. 스가와라에게 연애는 향도, 색도 날라 가버린 드라이플라워와 마찬가지였다. 모양은 그럴 듯하지만 생명력도 없는.
     
"비프 스테이크 나왔습니다."
     
직원이 오이카와 앞에 식전 빵과 스프 스테이크를 놓고 ‘맛있게 드세요.’ 하고 산뜻하게 말하고 사라진 뒤에 스가와라와 오이카와 사이에 정적이 써늘하게 맴돌았다. 오이카와가 나이프를 들어 스테이크를 썰 때 접시에 나이프가 긁혀 나는 소리와 물을 마시는 소리만이 간간히 정적을 지웠다. 스가와라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다음에. 라는 말을 뱉고 자리를 떠버릴 까 싶었다. 피자 조각은 두 조각 남았고 카오루는 배가 찼는지 잔에 얼음을 빨대로 휘저으며 멀건 콜라를 관찰했다.
     
스가와라는 카오루와 오이카와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카오루 갈까?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카오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가와라는 난처했다. 카오루 반 담임선생과 할 말도 없는데 마주 보고 그가 먹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가 왜 이 자리에 갑자기 끼어들어 비프 스테이크를 시켜 말없이 먹는지 스가와라는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죄송하지만, 시간이 늦어서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오이카와 선생님."
     
오이카와는 스테이크를 써는 동작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난 스가와라를 올려다보며,
     
"다 먹을 때 까지 가지 말아줘요. "
     
라고 말을 내뱉고 다시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죄송한데... 정말 늦.."
     
     
스가와라는 자리에 앉아있는 카오루가 스가와라를 노려보자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스가와라 씨. 낮에 제가 좀 무성의해서 화가 나셨던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학급문제 해결은 최대한 힘쓰도록 해보겠습니다."
     
오이카와는 다시 스테이크를 썰면서 접시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가 갑작스럽게 꺼내는 사죄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고작 그런 말 하려고 동석을 요청한 건가.
     
스가와라는 테이블을 검지 손가락으로 빠르게 톡톡 치며 그 이야기는 이미 낮에 끝난 이야기 아닌가요? 하고 말하고 천정에 달린 프로펠러가 뱅글뱅글 돌아가며 웅웅 울어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이카와는 나이프와 포크를 놓고 말했다.
     
"오늘 좀 외로워서요. 혼자 집에서 밥 먹으면 힘든 날이어서."
     
스가와라는 접시에서 시선을 뗀 오이카와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 저 눈동자 알고 있어.
     
오이카와의 눈동자는 메말라 붙어있다. 그 눈동자 안에 절망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알고 있다. 저 눈빛은 내 모습이니까.
     
"왜요?"
     
"제 약혼녀가 죽은 날이거든요. 오늘."
     




오이카와는 약혼한 여자가 있었다. 가문끼리 강제적으로 맺어진 약혼이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교류가 있던 사이라서 서로에게 불편한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애정은 없었다. 약혼을 하면,  그녀와 자신이  얼마나 고루하고 긴 계약의 나날을 관 속 까지 끌어안아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도 알고 있었다. 당차고 멋진 여성이었다. 판사인 아버지와 변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그녀도 가문이 그린 삶의 지도에 따라 검사가 되었다.
     
오이카와는 약혼을 깨려고 했었다. 그녀 역시도 아버지를 설득해 두 가문 사이의 약속을 물려달라고 애원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따로 있다고 결혼은 각자의 삶에 가로막이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녀의 주장은 뭉개졌다. 약혼식은 진행됐고 그녀가 가장 사랑 하는 사람과 깨졌다.
     
그녀는 분노했다.
     
오이카와 이치로는 교대를 졸업해서 초등학교 교사 하는 토오루가 지렁이로 밖에 보이지 않았는지 지렁이가 용이 되려면 좋은 가문의 계집과 맺어져야 좋다는 말을 불러 세워놓고 주문처럼 외웠다.
     
하찮은 놈.
     
다른 형제들은 검사, 판사 쪽으로 갔으니까. 고작 법대에서 진로를 틀어 교대를 간다고 고집부리는 토오루는 이치로에겐 이미 발에 박힌 가시였다.
     
“어째서 계집들이 하는 초등학교 선생이나 하려고 하는 거냐. 애들 뒤처리나 하는 직업이 뭐가 좋다고. 고등학교 때도 남자 놈이랑 사귀는 것도 눈 감아줬다. 왜 자꾸 내 신경을 하나하나 건드리고 엇나가려고 노력을 하는 거지 토오루?”
     
“아버지랑 안 맞으니까요. 호적에 파시던가. 다 큰 아들 손에 주무르지 못해 혈압 오르시는 것 보다 아버지의 건강부터 챙기시고 오래오래 사셔서 다른 형제들 서포트나 하셔야 효율적 일 텐 데요.”
     
분재가위로 가지를 툭 툭 자르는 동작을 멈췄다.
     
“토오루!!!”

오이카와 이치로의 손에 들린 분재가위가 토오루 머리를 향해 날라 간다. 토오루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가위를 맞는다. 이마에 피가 흐르고 콧등을 타고 입술, 턱 밑까지 흘러 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사용인들의 외마디 비명만이 먹먹하게 방을 메울 뿐이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정면으로 아버지의 눈동자를 꿰뚫듯이 바라본다. 이치로 시선을 돌린 채로 독한 놈. 이라는 말을 내뱉곤  장지문을 열고 쿵쿵 발소리를 내며 나갔다.
     
지겹지 않나.
     
토오루는 순전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본가와 평생 인연을 끊고 살려고 했다.
     
본가 별당에 앉아 수예를 놓거나 정원을 꾸미거나 하며 보낸 어머니는 이미 세월에 때 묻은 인형이다. 아버지는 관심을 잃은 지 오래고 출산의 의무는 끝났다. 별당에서 조용히 죽어갈 것이다. 이것이 오이카와 가문의 결혼이고 오이카와 가문의 아내들의 숙명이다. 인간의 삶은 없다. 의무만 있을 뿐이다.
     
“토오루. 왔구나.”
     
어미의 손은 차갑고 거칠다. 주름이 진 손과 얇아지고 늘어진 피부. 오이카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벌써 오이카와가 이리 자랐구나. 예쁜 막내아들. 안았을 때는 이리 작았는데.  말끝이 바람에 쉽게 스러진다. 어머니의 입술 사이에 흘러나온 문장은 시든 잎처럼 버석거린다. 최근들어 건강이 부쩍 나빠져 주치의를 부르는 횟수가 늘어났다.
     
“토오루는 외가 쪽을 닮아 눈썹도 곱고 턱 선도 날렵하구나.”
     
어머니는 장지문을 열고 정원을 말없이 응시한다. 굳게 닫은 입가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햇빛이 마루에서 방까지 슬금슬금 기어들어온다. 어머니는 뜨개질 하다만 목도리를 들어 올리며 말한다.
     
올 해 겨울은 춥겠구나. 슬슬 준비 하는 게 좋겠어. 토오루 목도리도 올 해 가기 전에 다 짤 수 있으려나..
     
그 해 겨울바람이 별당에 드나들기 전에 어머니는 떠나셨다. 약혼은 어머니 장례 후 두 달 뒤에 치러졌고 말없이 운명을 받아들였다. 결혼 준비로 서로 가문에 드나들며 바쁠 때 즈음, 약혼녀가 죽었다. 꽃 몽우리가 터지는 시기였을 것이다. 결혼준비는 어느 정도 마쳤고 한 달 정도 유예기간이 남았었다.
     
사고였다.
     
가드라인을 박고 차가 추락했다고 한다.  수면제 복용하고 운전했다는 결과와 함께 그녀의 뱃속에 아이가 들어섰었다는 결과가 나오자, 사고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식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자살한 걸까.
     
     
     
토오루는 그녀와 함께 살려고 계약했던 집에 남았다. 이미 사버린 뒤였고 새로 부임한 곳이 이 동네였기 때문에 이곳으로 이사했다. 토오루 2인용 식탁에 앉아 반대편 빈 의자를 발끝으로 건드렸다. 공방에 그녀가 주문제작 부탁했다던 의자와 식탁이었다. 한 2주일 전에 도착했다. 토오루는 그 식탁에 앉아 구운 식빵에 머멀레이드 잼을 바르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입 안이 텁텁했다.
     
죄책감을 왜 오로지 나의 몫인가.
     
토오루는 마음 한 구석이 짓눌렸다. 죄책감의 망령이 토오루의 주위를 맴돌며 토오루를 탓했다. 내 탓이 아니잖아. 라고 망령의 말에 대답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두 가문의 혼사는 파토 났고 토오루는 이상한 소문에 휩싸였다. 그녀에게 전 애인의 아이가 들어선 것이 화가 나서 수면제를 먹였다는 식으로 소문이 오이카와 가문까지 흘러들어왔다. 경찰에서는 토오루가 그 사고사와 관련이 없다는 식으로 결론을 지었지만 가문에 스며든 소문은 이미 토오루의 목을 서서히 죄였다.
     
그에게 마음이 동한 건, 순전 마음의 농간. 어쩌면 자신과 같이 죄책감에 짓눌린 인간에 대한 공감일지도 모른다. 토오루는 스가와라에게 끌리는 마음을 그 한 마디 문장으로 정리하려 해도 신경이 쓰였다. 스가와라 씨를 더 알아서 스가와라 씨의 곁에 머물고 싶다. 이런 마음이 뒤섞여서 마음에 파도가 일었다. 그 감정의 파도가 뒤로 물러났다 앞으로 돌격해오면서 토오루의 정신을 어지럽혔다.
     
미친 거 아냐. 나.
     
토오루는 거울에 엉긴 더운 김을 오른손으로 닦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을 멀건 눈으로 훑었다. 스가와라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토오루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미친 거야. 미친 거라고. 스가와라는 자신을 볼 여유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스가와라가 떠올랐다.

토오루 자신도 이 감정이 어떻게 자신을 추락시킬지 알았다. 어쩌면 스가와라 곁에 머물면서 서로의 상처를 핥아줄 수 있다는 멍청한 감정이 들어섰다. 일방적이다. 타인의 마음을 부서진 뼈를 맞추듯이 쉽게 복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도. 토오루는 멍청하고 일방적인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 감각이 시발점이었다.
     
     


  
잔금 치러주기로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네.
    
스가와라는 사바타 스기코 고객이 치루기로 한 잔금이 이 주 째 입금되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 이대로 돈을 못 받는 건가. 사바타 스기코가 남긴 휴대폰 번호로 연락을 했지만 번호를 바꿨는지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스가와라는 이대로 미수금인가.. 하고 생각하던 참에 배송 부탁 한 주소가 생각났다. 분명히 주소를 남겼었다.
    
스가와라는 주소를 메모지에 옮겨 적고 공방 문을 닫은 뒤에 오픈 표지를 돌려 클로즈로 바꿔 놓았다. 부드러운 바람이다. 공방 주위에 아스팔트에 달라붙은 벚꽃 잎이 즐비하다. 자전거 바퀴가 돌아가는 소리 스가와라 옆을 스친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스가와라는 쪽지에 적힌 주소를 한 참 들여다보다가 공방에 세워 둔 빨간 자전거를 끌고 나와 올라탔다. 공방에서 멀지 않은 오피스텔이었다.
    
오늘 잔금 받아오면서 간단히 장이나 봐올까 스이엔 마트 세일이던데.
    
스가와라는 페달을 느긋하게 밟으며 장 볼 목록을 생각했다. 카오루는 엔노시타 가게에 놀러가서 저녁때나 올 것이 분명했다. 토요일은 확실히 느긋했다. 카오루는 토요일 마다 엔노시타의 집에 놀러갔고 엔노시타도 싫어하지 않은 눈치였다.
    
오피스텔 근처에는 번화가 쪽인데다가 최근에 개발 된 곳이라서 새로 들어선 건물들이 많아 확실히 깔끔하고 정리된 느낌이었다. 스가와라는 10분 거리 밖에 되지 않는 곳인데도 자신이 사는 구역과 정 반대인 모습 이었다. 어떤 말을 꺼내야 트러블이 나지 않고 돈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스가와라는 자전거를 세워놓고 생각했다. 가구 상태 점검이라는 핑계가 적당할까.
    
오피스텔 안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 버튼을 누르고 다시, 그냥 갈까. 집에 까지 찾아와서 대뜸 돈 주세요.라고 하면 예의 없어 보이려나... 하고 생각이 들었으나 미수금이 안 들어오면 이번 생활비가 간당간당 할 것이라는 현실에 마음을 다잡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303호 문 앞에 오자, 눈앞이 캄캄했다. 입이 마르고 온갖 생각이 섞여서 마음속이 시끄러웠다. 스가와라는 벨에 손가락을 대었다가 떼어냈다. 욕까지 먹고 가구도 환불한다고 하지 않을까.. 스가와라는 예전에 그런 일이 한 번 있어 두려움이 앞섰다. 대뜸 가구가 싫어졌다면서 환불 요청을 무려 8개월 뒤에 하는 사람이 있었다.
    
스가와라는 눈을 꽉 감고 벨을 눌렀다.
    
벨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라고 보통 묻고 열지 않나? 하고 생각이 들었지만, 스가와라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고객을 마주하기로 했다. 문이 너머로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아침부터 무슨 일일까요.. 라는 말이 들려왔다. 눈이 반쯤 감긴 채로 얼굴을 내민,
    
오이카와 토오루와 스가와라는 시선이 마주쳤다.

스가와라는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대뜸 나온 게 카오루의 담임이라니. 스가와라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졌다. 잘못 찾아왔나? 하고 구겨진 쪽지를 다시 확인했지만 303호 라고 써져있었다. 사바타 스기코라고 써져있는데 왜 저 사람이 나오는 건가 의뭉스럽고 답답했다.
    
“스가와라 씨가 어떻게?”
    
오이카와는 눈에 붙은 잠이 서늘하게 걷혔다. 스가와라 코우시가 쪽지와 자신을 번갈아 노려보며 시선을 돌렸다. 오이카와는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정리하고 한쪽으로 치우쳐진 티셔츠를 단정하게 정리했다. 스가와라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여기에 사바타 스기코씨 계신가요?”
    
오이카와는 사바타 스기코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심장이 멎었다.
    
“사바타 스기코 씨는 왜 찾으신가요? 스가와라 씨.”
    
“아, 가구를 제 공방에서 맞추시고 돈을 입금 안 하셔서요. 휴대폰도 안 받고 이번 봄에 받아보고 미수금 치러주신다고 했거든요. 연락이 통 없으셔서. 이 주소로 월넛 식탁이랑 의자가 배송 됐을 텐데요. 이상하네요? 여기에 사바타 씨는 없고 왠...”
    
스가와라는 왠.. 이란 말 뒤에 오이카와 토오루 씨라는 말을 되삼켰다. 오이카와의 인상이 레스토랑에서 봤던 낯빛처럼 창백하다.
    
“들어오세요. 잔금 지불 해드릴께요.”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표정도 자못 심각해서 스가와라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이카와는 커피 드릴까요? 아니면 차? 하고 묻더니 부엌으로 향했다. 스가와라는 커피라고 대답하고 자신이 만든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사바타 씨는 동거인인가요?” 라고 스가와라가 물었으나,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고 도자기 드리퍼에 필터를 놓은 뒤, 커피가 좀 진할 수도 있는데 물 좀 섞어서 드릴까요? 하고 말을 건네었다.
    
“그냥 주세요.”
    
커피콩이 그라인더 톱니에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기름진 냄새가 풍겼다.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 스가와라는 왼손으로 턱을 괴고는 오이카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사바타 씨랑 무슨 관계인가. 스가와라는 계속 오이카와 라는 사람과 만나게 되는 상황이 마음에 걸렸다. 그라인더 소리가 멈추고 물소리가 들린다.  커피향이 미지근한 공기에 뒤섞여 따스하게 퍼진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 앞에 컵을 하나를 놓고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얼마정도 지불해야 하나요?”
    
“그것보다 오이카와 씨, 사바타 씨는 어디가고 오이카와 씨가 그걸 지불하려고 애쓰시는지 모르겠네요. 그것도 제가 만든 식탁에서 마주보고 앉아서.. 진짜 웃기지 않아요?”
    
“얼마죠?”
    
“오이카와 씨는 늘 그런 식이죠? 사람을 알려고 하지 않아.”
    
스가와라는 자신도 모르게 비꼬듯이 말이 튀어나왔다. 오이카와는 두 손으로 머그컵을 꽉 감싸고 입술 꽉 앙다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네. 맞아요. 전 사람 배려하는 거 못해요. 죽은 사람이 무슨 식탁이 필요하겠어요?”
    
“네?”
    
“죽었어요. 제 약혼녀가 사바타 스기코입니다. 자, 미수금을 지불하죠.”
    
스가와라는 건조하게 툭 내뱉고 커피를 마시는 오이카와가 이상했다. 습기를 너무나 먹어서 본래 상태도 생각하지 못하는 뒤틀린 나무판자처럼, 죽었어요. 그 사람. 그래서요? 라고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마주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는 오이카와가 가여웠다. 저런 가여운 사람이 없다. 차라리 소리지르며 스가와라 씨가 뭔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지껄 이냐고 악에 받친 말이라도 했다면 덜 했을지도 몰랐다. 그는 너무나 어긋나있다.
    
“25만엔”
    
“온라인 뱅킹으로 지금 입금 할 테니까. 계좌 번호 적어서 주세요.”
    
오이카와가 메모지와 볼펜을 스가와라에게 넘겨주자 스가와라는 메모지에 계좌번호를 적어서 오이카와 앞에 놓은 뒤에 말했다.
    
“커피 잘 마셨네요.”
    
“스가와라 씨, 가구 하나 맞추고 싶은데 지금 이야기 좀 더 할까요.”
    
스가와라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다시 앉으며, 어떤 것을? 하고 물었다.
    
“침대”
    
“침대요?”

“네. 침대는 안 만드시나요? 침대 하나 맞춤제작 맡기고 싶은데요.”
    
스가와라는 얼떨결에 또 주문이 들어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식은 커피를 마저 마시며 스가와라를 응시했다. 스가와라는 머쓱해서 시선을 돌렸지만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져 불쾌했다. 달라붙는 시선이 묘하다.
    
“어느 정도 크기로 하실 건 지. 놓아둘 방이 어떤지 알고 싶은데요.”
    
“스가와라 씨가 원하는 크기로, 원하는 대로 만들어주세요. 목재도. 전부 다.”
    
“그런 주문은 처음이네요. 맞춤제작 이면 원하는 바가 있을 것 아니에요?”
    
“글쎄요. 스가와라 씨가 원하는 대로 만들었으면 좋겠는데요. 궁금해서요. 스가와라 씨가 고객의 취향에 안 맞추고 스가와라 씨만의 생각이 담긴 가구가 어떤지 궁금해져서요. 이 테이블은 너무 사바타의 취향에 충실해서 사실 색깔이 없는 사람인가 싶었거든요. 고객에 충실한 사람인지, 아니면 자신의 색깔도 없는 텅 빈 사람인지. 싶어서요. 그냥 궁금했어요. 이 탁자를 보면서 너무나 고객의 마음을 잘 조각해서 내놓는 사람 같다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스가와라는 칭찬인지 비판인지 모르는 오이카와의 말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물론 자신의 생각하는 바대로 침대를 만들 수는 있다. 오이카와가 그 가구를 마음에 들어 할 지는 미지수다.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지 않다고 환불하지 않을까 싶었다. 가구로 전시회를 할 것도 아니고 완성품을 고객이 선택한 것도 아니라면 오이카와의 마음에 스가와라가 자신의 생각으로 디자인하고 만든 가구가 오이카와에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다. 가구를 맞춤 제작하는 이유가 뭔가. 주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이나 취향에 맞추기 위해서다. 맞춤제작을 원한다. 그런데 당신 맘대로 가구를 만들어라. 라니..
    
이상한 사람이 다 있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거 알아요. 제 멋대로 해주세요. 라고 말 하는 고객이 드물다는 거 알아요. 어떤 가격이 나와도 지불 할테니까. 걱정 하지 마요. 이 식탁도 사바타 답게 만들었다고 할까 디자인은 군더더기 없고 심플하고 나무재질은 단단한 소재.. 사바타 성격 그대로네요. 늘 이 식탁을 보면 끔찍하면서도 아름답다할까. 사바타의 유령이 앉아서 식사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스가와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어 오이카와에게 건내주며 말했다.
    
“마음 바뀌시면 여기로 전화주세요. 오이카와 씨. 당신 같은 고객이 꼭 뒤늦게 이래라 저래라 그러니까 명함 주고 미리 말 하는데요. 당신이랑 끔찍하게 안 맞는 침대가 탄생할지도 모르니까 알아서 하시던가. 가구 이외에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네요. 그럼.”
    
스가와라가 등을 돌리는 순간,
    
“잠깐만요.”
    
라고 다급하게 말을 오이카와는 내뱉었다.
    
“잠깐만요. 하고 또 무슨 이야기를?”
    
“스가와라 씨랑 가까워지고 싶은데. 스가와라 씨는 제가 싫은가요?”
    
“전 고객님이랑 친구하지 않습니다.”
    
“저는 스가와라 씨가 좋거든요. 꽤나”
    
“저는 싫은데요.”
    
“그럼 저 혼자만 좋아하도록 하죠.”
    
“좋아한다는 게 뭔 뜻인가요? 친해지고 싶다는 건가요?”
    
“이것저것.. 스가와라 씨 당신 자체가 좋은데 친해지고 싶은 건 당연하죠.”
    
“찝쩍찝쩍 거리는 게 아주 짜증나요. 어제 레스토랑도 뭐예요? 왜 끼어들어요? 분위기 진짜 못 읽어요? 만만해요? 아, 오메가네. 좀 건들여 볼 까? 꼬셔볼까? 애까지 딸린 오메가가 동정도 가고.. 호기심도 가네.. 네.. 당신의 동정 안 받아도 저 잘 살아요.”
    
오이카와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
    
“역시 스가와라 씨. 막 퍼붓네. 그렇게 봐도 좋아요.”
    
“지금 저랑 입으로 장난해요?”
    
“왜 그렇게 스가와라 씨는 벽부터 치죠? 저는 스가와라 씨를 그렇게 본 적은 없어요. 네, 처음에 동정은 갔어요. 그건 확실히 고백 할께요.”
    
“당신, 처음 볼 때부터 재수 없었어.”
    
“저는 당신을 처음 볼 때부터 좋아졌어요. 근데 알고 보니 만만치 않게 입이 거치네요.”
    
“지금까지도 재수 없네요. 오이카와 씨. 당신이 카오루 반 담임이어서 끔찍해.”
    
“어쨌든 침대 부탁 드려요. 스가와라 코우시씨.”






저녁 어스름이 지상에 가장 낮게 깔릴 때, 토오루는 식탁에 앉아 낮에 코우시의 말과 표정을 떠올렸다. 방안에는 어둠이 사물의 윤곽과 색채를 지워서 어둠 속에 가라앉는 기분 들었다. 푹푹 잠겨 숨도 못 쉴 만큼. 식탁 앞에는 어둠이 앉아 현실과 꿈의 경계를 지운다. 환영인지, 유령인지 모를 사바타 스기코의 형태가 토오루 앞에 마주앉아있다.사바타의 유령이 식탁에 마주 앉아  토오루의 죄책감을 느긋하게 식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바타 씨는 코우시를 어떻게 생각해? 이 탁자 코우시 씨가 만든 거야.”
     
사바타의 유령은 대답이 없다. 표정도 없다. 어둠 속에서 형태도 색채도 뭉그러진 채로 토오루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당신은 불행해서 그 쪽으로 가 버린 거지?”
     
오이카와의 말이 어둠에 써늘하게 식는다.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좀 나을까? 내 감정이 나아질까?”
     
“대답해줘..”
     
오이카와의 자세가 무너진다. 흐느끼는 소리가 정적을 삼킨다. 오이카와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오해를 풀려고 해도 매듭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어디부터 엉켜버린 건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뭐가 문제였어? 스기코?”
     
스기코의 형태가 어둠에 서서히 풀어져 사라진다. 스위치를 켠다. 스기코는 없다. 다시 스위치를 끄면 그녀가 다시 죄책감을 먹으러 올까. 토오루는 몇 번을 스위치를 끄고 키기를 반복했다. 빛이 터지고 스러질 뿐이다. 토오루는 벽걸이 시계를 올려다본다. 저녁 8시. 배가 헛헛했으나, 목 안에 무언가를 넘기고 싶지 않았다.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아서. 삼키면 토 할 것 같아서.
     
토오루 도련님 탓이 아니에요.
     
유모가 주름진 손에서는 기름 냄새가 눅진하게 풍겨왔다. 유모의 마른기침 소리가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우리 도련님이 얼마나 착하시고 올곧으신데. 나는 알아요. 우리 도련님 소싯적에 기저귀 갈고 몸도 씻기는 시절부터 봤는데. 토오루 도련님은 너무 인정이 많아서 자신의 탓을 돌리는 게 이 유모는 마음에 늘 걸렸어요.  유모의 손 피부가 얇고 거칠다. 손은 따뜻해서 토오루는 울컥 터져 나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 다다미 바닥에 상복을 입은 채로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울었다. 그 때가 스기코의 장례식에 다녀 온 저녁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이미 문을 닫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시고, 형제들은 토오루를 경멸하듯이 흘겨보았다. 장례식 이전에 경찰서에서 조사받은 일이 오이카와 가문에 파다하게 퍼진 탓이다.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그 사실은 잘라지고 서에서 조사를 받았다.라는 이야기가 건너건너 전해진 모양이다. 사용인들도 토오루의 눈치만 살피고 서서히 피했다.
     
스기코 장례식에서는 스기코의 아버지 사바타 준이 오이카와의 뺨에 주먹을 날렸다. 아무런 말을 답하지 않았다. 스기코의 어머니는 오이카와의 양복 옷깃을 쥐어 비틀며 스기코의 이름만을 악에 바쳐 부르짖었다.
     
있지, 유모. 나는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야?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도련님은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소문은 금방 식어요.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또 시선을 돌릴 것이에요.
     
유모는 분통하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며, 도련님, 도련님은 잘못이 없어요. 라는 말이 허공에 부서졌다.
     
스가와라도 그랬을까. 오이카와는 지난 몇 개월을 생각하다가 몇 년 동안 소문에 시달린 스가와라는 어땠을까 싶었다. 스가와라는 울타리가 부서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 같았다. 울타리를 넘어서 누군가 오면 스가와라는 다시 울타리를 치고 뒤로 물러서고 또 물러서고.. 그러다가 지금은 스가와라 자신과 카오루가 딛는 최소한의 마지노선 까지 온 것이 아닐까.
     
-카오루 만은 저의 죄 때문에 무너지지 않았으면 해요. 저만 무너져도 돼요.
     
스가와라는 유령이다.
     
아니, 스가와라는 유령처럼 일상을 견디고 있다. 무기징역을 받은 죄수처럼 죄책감의 형벌을 견디고 있다.
     
마치 자신처럼. 헐떡이고 있다. 일상에서.



     
 


카오루가 엔노시타 손을 잡고 돌아왔다. 카오루는 자신의 머리에 씌어 진 머리띠를 손으로 매만졌다. 엔노시타가 사준 것이라. 엔노시타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카오루의 볼에는 별무늬가 반짝인다. 페이스 페인팅인가. 카오루의 손에는 갈색봉투가 들려있다.
     
-엔노시타. 설마.
     
-네. 카오루가 며칠 전부터 가고 싶다고 해서.
     
스가와라는 머리를 긁적이며, 엔노시타에게 매번 신세지네. 라고 말하며 밥은? 하고 덧붙어 물었다. 엔노시타는 먹었어요. 하고 짧게 대답하고 엔노시타의 손을 놓지 않는 카오루를 바라보며, 이제 헤어질 시간이야. 라고 조그맣게 카오루에게 속삭인다. 카오루는 엔노시타의 바지를 왼손으로 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음에 만나는 약속을 하는 거야. 카오루.
     
엔노시타는 새끼손가락을 카오루에게 걸고 웃었다. 카오루는 고개를 끄덕이고 엔노시타에게 한 걸음 물러섰다. 스가와라는 카오루와 엔노시타를 번갈아보며, 즐거웠나봐. 하고 부드럽게 말한다.
     
네. 오랜만에 가보는 놀이공원이라서 나도 신났어요. 카오루도 좋아했고.
     
고마워, 늘.
     
엔노시타는 그럼, 시간이 다 되어서 가봐야겠네요. 하고 짧게 말하고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카오루는 계단을 통통 올라가며, 엄마. 나 먼저 잘게 라고 약간 처진 목소리로 말한다. 스가와라는 응 하고 대답한다. 기계를 스위치를 올리자 칼날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칼날 사이에 판자를 한 번에 슥 집어넣었다. 판자는 둘로 반듯하게 갈라졌다. 그려 둔 가구 도면을 재차 확인했다.
     
침대라..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마지막 표정이 작업 중간 중간에 떠올랐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말들과 행동이 자꾸만 걸렸다. 그게 자꾸 일상 중간 중간에 끼어드니 작업에도, 일상에 잡음이 끼었다. 그 소음이 자신을 온통 먹어 버릴 것 같은 공포감이 가슴에서 흘러내렸다. 사바타 스기코 라는 우연이 맞물려서 그런 것뿐. 스가와라는 그에게 동정심 따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오이카와를 속에서 지우려고 애썼지만, 오이카와의 행동이, 말들이, 표정들이 포자처럼 마음에 급속도로 퍼졌다.
     
저는 스가와라 씨가 좋거든요. 꽤나.
     
스가와라는 못을 망치로 치다가 자신의 손을 내리쳤다. 아. 스가와라는 극심한 고통에 주저앉았다. 검지 손가락에 검은 멍이 퍼지고 손이 부어올랐다. 스가와라는 라이터에 바늘을 달궈 자신의 왼손 검지에 바늘을 찔렀다. 왼손 검지를 꾹꾹 누르면서 검은 피를 쥐어짰다.
     
-아씨.. 진짜 아프잖아..
     
스가와라는 아랫입술을 이로 잘근 씹으며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눌렀다. 눈물이 고이고 입 안에 찌르르한 기운이 퍼졌다. 눈물이 손등에 툭툭 떨어졌다.
     
아이씨.. 진짜.. 존나게 아프잖아.. 더럽게...
     
스가와라는 손등으로 자신의 눈물을 훔쳤다. 왼손 검지는 부풀어 올라 곧 터질 것 같았다. 서러웠다. 왜 서러울까. 스가와라는 욕이 바글바글 입안에서 끓어올랐다. 더운 기운에 귀 끝까지 솟아서 온 몸이 떨렸다. 바닥에 널린 판자조각을 발끝으로 세게 쳤다. 그래도 분이 삭아지지 않아서 일어나 발끝으로 작업대를 힘껏 찼다. 그런데도 분이 풀리지 않아 열이 치솟고 그 열이 뻗쳐서 눈물이 났다.
     
오이카와의 말이 생각 속에 뒤섞여 흐릿하게 퍼진다.
     
저는 당신을 처음 볼 때부터 좋아졌어요.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말에 뒤늦게라도 대답하는 듯이 웃기지마! 라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열기가 짜증날 정도로 몸을 타고 땀과 함께 끈끈하게 붙는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만 생각해도 신경질이 나고 열이 났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처음 볼 때부터 재수가 없었다. 카오루 반의 담임인 것도 유감이었고, 그가 스가와라의 말을 죄송하다라는 말로 일관하는 순간부터 차츰차츰 분함이 끓어올랐다.
     
당신을 좋아해요.
     
스가와라가 현관을 열고 나갈 때 그 앞에서 오이카와가 스가와라에게 던진 말이었다.
     
그것도 봄날의 한 때일지도 모르지만.
     
알잖아요? 당신과 나는 퍽 닮았어요. 소문에서 허덕이면서 죄책감의 밧줄을 칭칭 감아서 자기 목 조르는 방식이 퍽 닮았어요.
     
스가와라는 작업실 스위치를 내렸다. 오늘 작업하기는 글러먹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 마음 가운데서 커다란 파문이 일어나는 감각이 불쾌했다.

오이카와가 했던 말들이 스가와라의 가슴을 갈라 헤집는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아무런 생각도 더 이상 나지 않게 어떤 것이라도 쑤셔 넣고 싶었다.

스가와라는 리모콘을 들고 전원을 키고 부엌으로 힘없이 너털너털 걸어가서 냉장고에서 맥주 여덟 캔을 품에 안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중 하나를 따서 단숨에 마셨다.

그래도 열기가 가시지 않아서 한 캔 더 까서 마셨다. 입 안에서 맥주가 톡톡 혓바늘을 자극한다. 목에서는 취기와 함께 홧기가 뒤섞여 머리가 몽롱해졌다.
     
티비 화면은 수 없는 장면을 토해내며 끔벅였다. 뉴스 앵커가 자못 심각한 얼굴로 소식을 전했다. 누군가 죽었고, 누군가가 살아남았고, 어떤 법이 통과되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일상과 먼 세상의 일들이 빠르게 휙휙 흘러감에 감탄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여자 아나운서가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라는 말을 뱉었다. 최근에 한 지역에서 잇달아 손과 발이 잘려 침대 메트리스에 묶인 채로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끔찍하네.. 하고 스가와라는 그런 미적지근하고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맥주 캔 하나를 더 따서 마셨다. 사건 현장으로 보이는 곳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주민들과 경찰들의 실루엣만 간신히 보였고 주민 인터뷰는 죄다 하나 같이 공포에 질린 것처럼 목소리가 떨렸다.
     
다이치도 무서웠을까..
     
스가와라는 입이 썼다. 다이치도 얼마나 무서웠을까. 스가와라는 부엌에 칼이 떠올랐다. 그게 몸 안으로 몇 번 쑤셔졌고 또 다이치의 머리 부분에 충격이 가해졌다고 했다. 비 오는 날에 기어서 움직이다가 출혈성 쇼크가 일어났다고 한다.
     
교도소에 부엌칼을 품 안에 들고 간 적이 있었다. 전 애인이자 가해자인 겐지로는 면회를 거부했다. 스가와라는 면회를 하겠다고 나섰다면 그 투명한 벽에 칼을 힘껏 박아 버리려고 했다. 소리를 지르면서 사과하는 범인 앞에서 소리라도 지르면서 발악이라도 하고 싶었다.
     
왜 그랬냐고.
     
그 녀석은 그런 분노도 내지 말라는 듯이 면회를 번번이 거절했다. 죄송하다고 겉으로라도 말해야지. 백 번 천 번 아니, 그 몸뚱아리에서 구더기가 파먹을 때까지 말해야지. 스가와라는 맥주 캔을 구겼다. 화가 났다. 너무나 화가 나서 철창을 부수고 그 녀석 심장에 정확히 칼을 꽂고 다이치가 죽었던 것처럼 똑같이 죽여 버리고 싶었다. 꿈에서 백 번, 천 번, 아니 몇 년 간의 꿈에서 그 녀석에게 칼을 꽂았는데도 분함이 가라앉질 않았다. 더 긴 죄책감의 고리가 덜그덕 거리며 휘감았다. 다이치가 스가와라 자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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